01books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출장안마,출장마사지,바나나출장안마이미지출장안마출장마사지

현타가 오면 박살나는 유리 믿음_태승철

by 태승철 · 25-11-06 07:26 · 418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현타가 오면 박살나는 유리 믿음>의 줄거리 :

'현타'란 현실 자각 타임의 줄임 말입니다. 혹은 '현실 타격'의 줄임 말로도 사용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세는 생애 마지막 설교에서 이스라엘 선민에게 이 세상적 현실 자각이 타격이 되어서 하나님 믿음이 박살이 났던 가데스바네아의 정탐 사건에 대한 기억을 되살립니다. 이렇게 현타가 오면 하나님 관련 사실들은 마치 환영이나 환각이었던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면 더 이상 실제 삶의 현장에서 내 마음을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 위에 실을 수가 없게 됩니다. 정탐 사건에서 일어났던 현타가 현재도 선민들에게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현타가 오면 박살나는 유리 믿음

 

(신명기 1:1~46)

 

26. 그러나 너희가 올라가기를 원하지 아니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여

27. 장막 중에서 원망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미워하시므로 아모리 족속의 손에 넘겨 멸하시려고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셨도다

28. 우리가 어디로 가랴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를 낙심하게 하여 말하기를 그 백성은 우리보다 장대하며 그 성읍들은 크고 성곽은 하늘에 닿았으며 우리가 또 거기서 아낙 자손을 보았노라 하는도다 하기로

29.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그들을 무서워하지 말라 두려워하지 말라

30. 너희보다 먼저 가시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 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32. 이 일에 너희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믿지 아니하였도다

33.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갈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

 

 

우리가 읽은 26~33절에서는 가데스 바네아의 정탐 사건이 언급됩니다. 하나님께서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인도하셨으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두려움 때문에 가나안 땅으로 진입하기를 포기했습니다. 이러한 본문 말씀 중심으로 <현타가 오면 박살나는 유리 믿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신명기는 모세의 생애 속에서 진행된 설교를 모은 설교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세 편의 설교로 이루어진 신명기는 1장부터 4장까지 첫 번째 설교이고, 5장부터 26장까지 두 번째 설교이고, 27장부터 30장까지 세 번째 설교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31장부터 34장까지는 모세의 최후 행적과 여호수아가 새로운 지도자로 위임을 받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명기가 기록된 때는 바야흐로 출애굽으로부터 40년이 지난 11월입니다. 그리고 가나안 정복을 시작하기 두 달 정도 앞선 때였습니다. 이 시점에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신명기의 설교를 남깁니다. 그리고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채 120세를 일기로 죽음을 맞이합니다.

1장부터 4장까지 기록된 첫 번째 설교의 내용은 주로 회상입니다. 회상의 기간을 보면 가데스 바네아의 정탐 사건 이후 광야 38년을 지난 후 현재의 모압 평지에 이른 과정까지입니다. 그중에서도 1장은 주로 가데스 바네아의 정탐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한편, 두 번째 설교인 5장부터 26장까지는 앞서 언급했던 율법과 계명을 다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해석하여 들려주는 내용입니다. 세 번째 설교인 27장부터 30장까지는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전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설교가 마쳐진 후 31장부터 34장까지는 모세의 최후 행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읽지 않은 본문 2절에서는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한 때가 언급되고, 3절에서는 현재 모압 평지에 머무는 시점이 언급됩니다. 2절과 3절 사이에는 38년이라는 기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까지는 시내산이라고도 하는 호렙산에서 출발하여 11일이 걸렸습니다. 이스라엘은 주전 1446115일에 출애굽을 했고, 두 달 만에 시내산이라고도 불리는 호렙산에 도착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거의 1년을 머물며 율법을 받았고 성막을 제작했습니다. 이후 호렙산에서 출발하여 11일 만에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합니다. 가데스 바네아는 호렙산에서 264킬로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11일 만에 도착했다는 것으로부터 이스라엘이 하루에 24킬로미터씩 이동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의 최남단 브엘세바로부터 8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입니다. 이스라엘의 이동속도였던 하루 24킬로미터를 염두에 두자면 사나흘이면 갈 길이었고 늦어도 닷새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조금만 더 행진하면 가나안 땅에 이르러 진입 전쟁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데스 바네아에서 보인 불신앙 탓에 이들의 가나안 진입 전쟁은 38년 뒤로 미뤄졌습니다. 본문 2~3절은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38년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편, 우리가 읽은 26~33절에서 모세는 당시의 상황을 재현하며 이스라엘의 불신앙과 하나님의 의도를 설명합니다. 어차피 가나안 땅을 정복하는 전쟁을 할 것이었으면 불신앙을 보이지 말아야 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끌어안듯 출애굽을 이루셨고 광야를 지나 가데스 바네아까지 인도하셨습니다. 가나안 진입 전쟁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끌어안고 이끄실 예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열 명의 정탐꾼은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이 이미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고, 네피림의 후손인 아낙 자손 거인들이 있음에 겁을 먹었습니다. 이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은 절망했고 모세와 하나님께 불평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38년이 지나 이스라엘은 다시 가나안 진입을 시도하는 위치에 와 있습니다. 모세는 이러한 상황을 언급하며 어차피 전쟁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끌어안고 하실 일이며, 38년 세월을 잃어버리게 되었음을 언급하며 다시는 이러한 불신앙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이 잃어버린 것은 단지 38년이 아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출애굽 1세대가 다 죽었고, 결국 가나안에 진입하려는 시점에 남은 자는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었습니다. 출애굽 1세대의 60만 장정 중 두 사람만이 가나안에 들어갈 자격을 얻은 것입니다. 이러한 일이 발생한 모든 이유를 속된 말로 표현해 보자면 현타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조어인 현타는 현실 자각 타임의 줄임말이라고 합니다. 내가 처한 상황을 깊이 실감하면서 지금까지 가졌던 생각이나 확신이나 기대가 너무 비현실적이고 헛된 망상에 불과했음을 깨달았을 때 갖는 느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상황 자체는 바뀐 것이 아닌데, 이제까지는 어떤 기대나 확신을 통해 상황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계기로 이러한 관점이 깨지면 그러한 기대나 확신이 비현실적이고 헛된 망상이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깊은 수렁에 빠지듯이 삶에 대해 절망하며 무기력해집니다. 또 현타는 현실 타격의 줄임말로도 쓰입니다. 현실을 새삼스럽게 실감하면서 심리적 타격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지금 상황을 느끼면서 이제까지 갖고 있던 생각과 확신과 기대 따위가 너무 부질없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이룰 수 없는 비현실적인 목표라 여겨지고 망상으로 느껴지며 좌절감과 무기력증에 빠집니다.

이러한 현타는 세상 삶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현타도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영적 사실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 사실들을 자각할 때 그동안 내가 이 세상에 취해 살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동안 나에게 있었던 확신과 기대는 세상에 취했기 때문에 가지게 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사건으로 영적 현타를 느꼈습니다. 이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던 조상들의 하나님이었습니다. 말로만 들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 여호와 하나님께서 엄연히 살아서 역사하신다는 사실을 직접 느끼게 되었습니다. 영적인 현실을 자각하게 된 것입니다.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장 큰 대상은 초강대국 애굽이었습니다. 또한 그 애굽의 일인자인 바로 왕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으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란 420년 전 조상들의 하나님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출애굽 사건을 일으키십니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지금도 엄연히 살아계시면서 창조주이자 주권자로서 당신의 뜻을 펼쳐 나가시는 분이심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진짜 현실이라는 영적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자각한 하나님은 애굽과 홍해와 광야보다 더 크시고 더 우선적인 현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열 가지 재앙으로 이루어진 출애굽과 홍해가 갈라지는 기적과 광야에서의 삶을 통해 영적인 현타를 느낍니다. 이렇게 대단하신 하나님을 이제까지 모르고 살았으며, 엄연히 살아계신 하나님을 조금도 현실로 느끼지 못했음이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입니다. 새삼스럽게 하나님을 현실로 느끼자 그동안 세상에 대해 가졌던 생각, 상식, 확신, 기대는 다 부질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영적인 현실 자각 타임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약 12개월 정도가 흐르며 이스라엘은 가데스 바네아에 이르렀습니다. 출애굽 후에 비로소 자각하게 된 하나님은 가나안을 약속의 땅으로 제시하셨고, 이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날만을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가나안 땅과는 80킬로미터를 남겨두었을 뿐입니다.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에 대한 정탐을 시도합니다. 차라리 그냥 진격해 들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조심스럽고 두려운 마음으로 가나안 땅에 대해 미리 알고자 정탐을 시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정탐의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열두 명의 정탐꾼 중 열 명은 다시 현타를 느낍니다. 이번 현타는 세상적 현실 자각 타임이었습니다. 세상적 현실이 이들의 마음을 강타한 것입니다.

가나안을 둘러본 열 명의 정탐꾼의 마음에서는 출애굽을 경험하며 느꼈던 하나님에 대한 현실 감각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다, 하나님이 주권자다, 하나님이 바로 왕보다 더 크시다, 하나님이 초강대국 애굽보다 더 크시다, 하나님이 홍해보다 더 크시다는 모든 경험들이 비현실이자 망상처럼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한낱 기억 속에 머무는 봄날 아지랑이같이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세상적 현타에 의해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유리처럼 산산조각이 나버렸습니다.

모세는 생애 마지막 순간에 목숨보다 아끼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입을 열어 설교를 남깁니다. 이때 처음으로 언급한 것이 바로 가데스 바네아의 정탐 사건입니다. 이 사건에는 세상적 현타를 조심하라는 교훈이 담겨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적 현타에 의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38년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적 현타에 의해 하나님에 대한 이스라엘의 믿음은 유리 믿음이었음이 증명됩니다. 이로써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38년이 날아가 버렸고, 출애굽 1세대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여 약속의 복지를 상실하는 결과가 빚어졌습니다. 모세는 이것을 첫 번째 설교로 꺼낸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삶의 현실은 내 마음에 강력한 타격을 가해옵니다. 현실에 대한 자각이 내 마음을 압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현실로 붙잡아야 할 마음의 힘이 쭉 빠집니다. 하나님이 실제라는 느낌 자체가 없어지면서 하나님은 이름만 남게 됩니다. 심지어 실제성이 없는 환영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내 마음에서 하나님의 있음, 하나님의 좋음, 하나님의 창조주 되심,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에 대한 실제성이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저에게 좋은 의미에서 엄청난 사기 캐릭터라고 말씀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세상적 현실 자각을 하는 사람들의 기준에서 보자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세상적 현실 감각을 기준으로 볼 때, 지금 십자가 복음 방송을 통하여 나누고 있는 이야기들은 무척 비현실적으로 들릴 수 있습니다. 망상과 환상에 지나지 않는 이야기로 여겨질 것입니다.

때때로 제가 여러분에게 저한테 속고 있는 건 아닌지 정신 차려서 따져보시라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굳이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그만치 영적 현실 감각과 무관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예 하나님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들은 고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기독교 종교인들도 십자가 복음 방송의 설교를 너무 비현실적이라고 여깁니다. 이들에게 저는 안 좋은 의미에서 사기 캐릭터일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 방송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따라 보좌 우편에 이르러야 한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내 마음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마주 보며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삼위일체에 참여하여 사위일체가 되어야 하고, 내 마음이 천국 일일생활권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러한 모든 이야기가 세상적 현실 자각의 기준에서는 비현실적이고 망상에 불과한 헛소리로 여겨질 것이며, 실제 구속력이 전혀 없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다 거짓말 아니냐? 다 비현실적인 이야기 아니냐? 거짓말은 아니더라도 실제로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망상적이지 않은가?’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본문을 통해 바로 이러한 세상적 현실 자각을 경계해야 함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기도를 함에 있어서도 이 점을 주의해야 한다고 여러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출발점을 삼아야 합니다. 어떤 문제를 당해서 기도를 할 때 세상적 현실을 자각하고, 세상적 현실 자각에 쫓기면서 기도를 한다면 그것은 복음이 제시하는 참믿음이 아닙니다. 현실 자각에 쫓기는 기도란 인간이 만들어 낸 종교의 믿음일 뿐입니다. 입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그 하나님은 종교의 신일 뿐이기에, 실제 예수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과의 만남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기도는 세상적 현실 자각에 쫓겨서는 안 됩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을 믿었으므로 내게 주어지는 영적 현실 자각을 출발점으로 삼아야 합니다. 나는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삼위 하나님과 사위일체를 이루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예수님 안에 마음이 머물고 있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마음이 천국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 현실 자각의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몸으로 만나는 것만을 현실 자각으로 느낀다면, 마음이 느껴야 하는 영적 현실 자각으로서의 믿음은 유리가 깨지듯이 산산조각 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세상적 현실 자각에 쫓겨서 기도하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그것은 신앙생활이 아닌 종교 생활입니다.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싸워서 세상적 현실 자각을 죽여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이스라엘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세상적 현실 자각으로 인해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38년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당사자인 출애굽 1세대는 아예 가나안 복지를 갖지 못했습니다. 세상적 현실 자각에 압도되고 쫓긴 결과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벌어질 수 있는 일입니다. 세상적 현실 자각에 쫓기느라 위기감을 느껴서 불철주야 기도합니다. 새벽 기도도 빠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종교 생활을 열심히 해도 이미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적 현실 자각에 쫓겨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로 세상적 현실 자각을 죽이고 영적 현실 자각을 회복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엄연히 살아계시며 나의 아버지이십니다. 예수님은 죽고 부활 승천하셔서 하늘에 계심으로써 내 마음이 천국을 일일생활권으로 살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 안에 내 마음이 머물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더불어 사위일체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내 마음은 하늘에 머물면서 영적 사실들을 자각하기를 지속해 나가야 합니다. 그럴 때 본문에서 모세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내 몸을 안으시고 당신의 계획대로 내 삶을 이끌어가시는 일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 땅의 삶이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끌어안고 사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현실 자각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내 모든 주체적인 역량을 다 하나님 자신에게만 쏟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몸으로 사는 삶은 본문에 나온 대로 아버지가 아들을 안듯이, 하나님께서 나를 안아서 당신의 계획대로 이끌어가십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삶은 우리가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자각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십자가로 세상적 현실 자각을 죽이고 영적 현실 자각을 살려내는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 생활화이기에 우리는 열심히 십자가를 생활화하고 있는 중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살아갈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지느냐에 대한 이야기를 지금까지 계속해 왔습니다. 그것이 절대 평강, 절대 만족, 절대 감사입니다. 절대 만족 속에는 절대 기쁨이 들어있습니다.

이러한 절대 평강, 절대 만족, 절대 감사의 대표적인 예가 예수님께서 풍랑 만난 배에서 주무신 사건입니다. 또 스데반 집사님은 성령이 충만하여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평강을 잃지 않으므로 얼굴이 천사와 같이 빛났습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 헤롯 대왕에 의해 참수형을 선고받고도, 천사가 옆구리를 발로 차서 몸이 걷는 중에도 잠이 안 깰 정도로 깊은 잠에 빠졌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모두 예수님이 풍랑 속에서 잠을 주무시던 사건의 재현이었고, 영적 현실 자각이 분명했기에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사도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에서 겪은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는 복음을 전하다 잡혀서 죽기 직전까지 매 맞고 지하 감옥에 던져져서 차꼬에 채워졌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두들겨 맞아서 몸에 피가 철철 흐르는데도 기도하고 찬송하며 감사했습니다. 그러던 중 지진이 일어나 감옥 문이 열리고 매인 것이 다 풀렸는데도 도망치지 않았고, 오히려 죄인들을 놓쳤다며 자결하려는 간수를 전도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만약 사도 바울과 실라가 세상적 현실 자각에 사로잡혔다면 어땠을까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이냐? 우리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 것은 우리의 유익이나 영화를 위해서 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보니 다 헛된 일 같다. 죽기 전까지 두들겨 맞고 차꼬에 채워져서 깜깜한 지하 감옥에 갇혀있지 않느냐?’라고 말하며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천국에 대한 모든 사실들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세상적 현실 자각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기도하며 영적인 현실 자각을 더욱 공고히 합니다. 기도함으로써 환영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는 하나님 관련 사실들을 압도적인 현실감으로 살려냅니다. 두들겨 맞고 차꼬에 채워져 지하 감옥에 갇힌 세상적 현실 자각을 죽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관련된 영적 현실 자각을 키우면서 하나님께 찬양을 올리자 하나님은 이들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자칫 환영 같은 비현실이나 망상으로 여길 수 있었던 그 하나님께서 감옥에 지진을 일으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지진을 통해 세상적 현실 자각과 영적 현실 자각의 싸움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주십니다. 세상적 현실 자각이 커지면 영적 현실은 한낱 개념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립니다. 실제 삶 속에서 아무런 구속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비현실이자 환영으로 여겨지게 됩니다. 아무런 실체가 없는 바람처럼 여겨지는 것입니다. 영적 사실에 대한 자각이 죽어버리면, 세상적 현실에 대한 자각이 살아납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가 어떤 기도를 드렸을지는 분명합니다. 이들은 예수님 십자가를 붙잡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럼으로써 세상적 현실 자각을 죽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현실 자각을 압도적으로 키웠습니다. 그러자 몸은 감옥에 갇혀있어도 마음은 영화로운 삼위일체 하나님 사이에 끼어서 사위일체를 이루고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마음이 천국에 있는 것이 느껴지니까 저절로 찬양이 나옵니다. 그러자 현실이고 실제인 하나님께서는 지진을 통해 이들의 믿음에 화답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했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보고 절망했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이미 국가 체제를 완비했으며, 아낙 자손들은 거인 족속이었습니다. 이들 앞에서 이스라엘은 메뚜기 같아 보였습니다. 이것이 세상적 현실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정탐하고도 여호수아와 갈렙은 가나안 족속을 밥이라고 표현하며 진격할 것을 주장했습니다.

여호수아 갈렙은 영적 현실 자각을 통해 가나안 땅을 하나님의 뜻대로 그림 그려질 평면 백지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열 명의 정탐꾼과 이스라엘 백성은 세상적 현실 자각에 사로잡혔고 가나안을 마치 3D 입체 영상처럼 생동감 있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을 평면 백지가 아닌 온갖 대상으로 가득 찬 3D 입체 영상처럼 보았기에 사방이 다 막힌 것처럼 절망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적 현실 자각에 사로잡혀 살다 보면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기에 나의 무기력함에 지배되고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적 현실이란 약속의 복지를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정과 뜻 앞에서는 평면의 백지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입체적으로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동으로 가려고 해도 막힌 것 같고 서로 가려고 해도 막힌 것 같습니다. 좁은 틈으로 빠져나가려다 미어터지게 생겼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돈이 없을 수 있습니다. 건강이 안 좋을 수 있습니다. 배우자가 마음에 안 들 수 있습니다. 자식이 말썽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무력함을 느끼고 있다면 마음이 세상적 현실 자각에 사로잡힌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 아버지를 마주하며, 성령과 더불어 사위일체를 이루어 천국을 일일생활권으로 살아야 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이 놓여 있는 진짜 현실입니다.

마음이 세상적 현실 자각에 사로잡힌다면 하나님에 대한 사실은 다 잊어버리게 됩니다. 눈에 보이고 몸으로 만나는 상황들만을 현실로 여깁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현실이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그려져 나갈 2차원의 평면 백지일 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영적 현실 자각을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십자가 복음 방송은 날마다 세상적 현실 자각에 타격을 가합니다.

여러분이 살면서 세상적 현실을 입체적으로 느낄 때 현타가 옵니다. 삶이 무기력해지고, 절망하게 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십자가 복음 방송은 입체적으로 느껴지는 현실들에 타격을 가해서 평면으로 만들고 백지로 만들어 버립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놓여야 할 영적 현실을 강력하게 눈앞에 드러내 주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렇기에 세상적 관점에서는 사기 캐릭터라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사기는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마귀가 사기를 쳐서 세상적 현실 자각에 우리 마음이 사로잡히게 하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세상적 현실을 입체적으로 느끼라고 유혹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길을 내시는 분입니다. 있는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강 위에, 바다 위에, 광야에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십니다. 설악산이나 로키산맥 같이 거대한 장애물이 막고 있어도 하나님의 뜻 앞에서는 평면인 백지에 불과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평면을 입체적으로 느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적 현실 자각입니다. 이러한 세상적 현실 자각은 십자가로 죽여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가 현실이고, 부활 승천이 현실이며, 보좌 우편에 계신 것이 현실입니다. 그 예수님 안에 마음이 머물며 하나님을 마주하면서 성령을 통해 사위일체를 이루는 상황이 우리의 영적 현실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자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이든지 삶은 평면인 백지가 되고, 나를 향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복지가 될 것입니다.

모세는 생애 마지막 설교에서 가데스 바네아의 가나안 정탐 사건을 언급합니다. 세상적 현실 자각이 영적 현실 자각을 깨부순 이야기임을 기억할 것이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예수님 십자가를 내 심장 옆에 박아두고 의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럴 수 없다면 세상적 현실 자각이 내 마음을 뚫고 들어와 하나님 현실에 대한 믿음을 유리 조각처럼 부술 것입니다. 아무쪼록 십자가가 내 의식에서 떠나지 않게 해주심으로, 이 세상 현실은 3D가 아니라 백지 평면으로 만들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