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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사소해지면 뜻이 보인다>의 줄거리 :
우리에게 할당되는 가나안 땅을 약속의 복지로 살려면, 언제나 지금 만나는 그 어떤 대상보다 더 먼저 더 크게 하나님을 실감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마음에서 실감하면 그다음으로 이어서 나타나는 일은, 지금 몸으로 마주하는 모든 대상이 정말 작고 사소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연이어 나타나는 일은, 그렇게 작고 사소하게 느껴지는 대상을 향해 갖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도 분명해집니다. 이 뜻이 알려지지 않아서 이루어지지 않고 유산되면, 이제 삶 전체가 피로 물들듯이 더럽혀지며 복지는 상실됩니다.
사소해지면 뜻이 보인다
(민수기 36:1~13)
5.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요셉 자손 지파의 말이 옳도다
6.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대한 여호와의 명령이 이러하니라 이르시되 슬로브핫의 딸들은 마음대로 시집가려니와 오직 그 조상 지파의 종족에게로 만 시집갈지니
7. 그리하면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이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이 다 각기 조상 지파의 기업을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니
8.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 중 그 기업을 이은 딸들은 모두 자기 조상 지파의 종족 되는 사람의 아내가 될 것이라 그리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조상의 기업을 보전하게 되어
9. 그 기업이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게 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 지파가 각각 자기 기업을 지키리라
10. 슬로브핫의 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니라
본문은 민수기의 마지막 장입니다. 본문을 중심으로 <사소해지면 뜻이 보인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실감하면 지금 몸으로 마주하고 있는 세상의 대상들이 사소해지고 그 대상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자면 하나님 실감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소중하게 느끼게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소중하게 느끼면 우리 몸으로 만나는 세상 것 자체가 아닌 세상 것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소중하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있게 하셨습니다. 예를 들어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에서 빛을 소중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소중하게 여기지 못하다면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빛을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보다 눈에 보이는 빛 자체를 실감한다면 우리는 빛에 대해 반응하게 됩니다. 그리고 빛에 대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뜻은 무시됩니다. 본문 말씀은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기본적 원리를 알아야 해석이 됩니다.
본문은 앞서 본 35장 마지막 두 구절의 내용을 예로 들어 구체적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33~34절을 보면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그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함을 받을 수 없느니라 /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 곧 내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는 이스라엘 자손 중에 있음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앞서 등장한 살인에 대한 말씀의 결론입니다. 살인이란 ‘있음’을 ‘없음’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살인에 대한 말씀은 상징적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에서 무엇인가를 있게 하시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선민이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대해 마음으로 저항하고, 거부하고, 싫어하며, 없어지기를 바란다면 그것은 고의적 살인으로 상징되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혹은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하는 바람에 하나님이 있게 하시려는 뜻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스스로 있게 하려는 것만을 염두에 두면서 산다면 이것은 부지중에 범하는 살인으로 상징되는 상황입니다.
말씀드렸듯이 하나님께서는 이 땅을 향하여 이루시려는 뜻과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과 모든 사물을 있게 하신 것처럼, 어떤 상황이나 문제 혹은 그에 대한 해결을 있게 하시고자 하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있게 하시려는 뜻이 우리에 의해서 거부되고 유산될 수 있습니다. 35장 33~34절에서는 이것을 살인으로 인해 흘린 피가 땅을 더럽히는 상황으로 비유하십니다. 오늘도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터전에는 하나님의 있게 하시려는 뜻이 존재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의 뜻을 거부한다면, 하나님의 뜻은 혈관 바깥으로 피가 흐르듯이 유산되고 복지도 상실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피가 땅을 더럽힐 때 가나안 족속들이 살던 시절로 돌아가리라는 말씀을 통해 비유적으로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간다고 해서 복지를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있게 하시려는 뜻은 모든 상황과 대상에 대해 생명처럼 존재하고 있습니다. 피가 생명을 상징하듯이 하나님의 있게 하시려는 뜻은 모든 상황과 대상에 대해 흐르고 있어야 합니다. 그 하나님의 뜻이 바깥으로 새버리고 유산되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약속의 땅은 복지가 될 수 없습니다. 약속의 땅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새버리고 유산된다면, 우리의 삶은 약속의 땅이 될 수 없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 분배된 땅은 단순한 부동산이 아닙니다. 모든 땅은 그 위에서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땅의 의미를 알아야 본문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민수기 27장의 슬로브핫의 딸들이 땅을 요구한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므낫세 지파의 슬로브핫은 아들 없이 딸만 다섯을 둔 채 죽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땅의 분배는 남자의 이름으로 이루어졌기에 슬로브핫의 이름으로 분배된 땅은 이어받을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에 다섯 딸은 모세에게 나와 아버지의 이름으로 분배된 땅을 요구했고,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이들에게도 땅을 분배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문제는 남아있었습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다른 지파로 시집을 간다면 결국 므낫세 지파에 분배된 땅의 일부는 다른 지파에 귀속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이에 므낫세 지파의 수령들은 모세와 지휘관들 앞에 나와 문제를 제기합니다.
당시 결혼법을 보면 다른 지파 사람과 결혼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슬로브핫의 딸들의 경우처럼 가문에 남자가 없어서 여자가 소유권을 받았을 때, 그 여자가 다른 지파 남자와 결혼을 한다면 결과적으로 땅의 소유권이 다른 지파로 넘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땅이 위치적으로는 므낫세 지파 안에 있으나 소유권은 다른 지파로 넘어가는 상황이 벌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섯 명의 딸들이 각기 땅을 분배받았으니, 이들이 전부 다른 지파로 시집을 간다면 상황은 더욱 복잡해질 수 있었습니다. 이에 모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딸이 땅을 분배받을 경우에는 절대로 다른 지파로 시집가지 말고, 같은 지파 안에서 남편을 구하라는 규정을 만들어 주십니다. 이에 슬로브핫의 딸들은 이 규정을 따라 므낫세 지파 내에서 결혼 상대를 찾았고, 사촌에 해당하는 작은 아버지의 아들들과 결혼하여 므낫세 지파의 땅은 보존됩니다.
이러한 내용은 36장까지 이어지는 민수기의 마지막 결론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시시하게 느껴집니다. 특별한 영적 교훈이 보이는 내용은 아니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여기에는 선민을 향한 하나님의 중요한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 살인이란 있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마음으로 거부함을 상징합니다. 그럴 때 있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유산되고, 피가 땅을 더럽히듯이 복지의 삶은 중단됩니다. 본문은 이러한 말씀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시기 위해 제시된 예입니다. 여기에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모든 땅에는 있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있음을 기억하라는 의도가 있습니다. 이것을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슬로브핫의 딸들의 이야기를 거꾸로 접근해 봅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모세에 의해 다른 지파로 시집가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이들은 이 규정에 순종하여 므낫세 지파 내에서 시집을 갔습니다. 이것이 본문에 기록된 사건의 진행 과정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오해해서는 안 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들은 금지 규정이 만들어진 다음에 남편을 얻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이 어떻게 결혼할지에 대해서는 아무 계획도 없으셨다가 문제가 터지니 갑자기 새로운 규정을 만드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므낫세 지파의 남자와 결혼하는 것이야말로 애초에 하나님이 정하신 뜻과 계획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슬로브핫의 딸들이 결혼을 하면 아이를 낳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뒤늦게 슬로브핫의 딸들을 므낫세 지파 안에서만 결혼하도록 정하신 것이라면, 이들에게서 태어날 아이들도 하나님의 계획에는 없었다는 결론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슬로브핫의 딸들에 대한 문제가 터지자 부랴부랴 새로운 규정을 내리시며 ‘이들이 므낫세 지파의 남자들과 결혼을 하는구나. 이제 첫째가 낳은 아이는 이렇게 하고, 둘째가 낳은 아이는 이렇게 하자.’라고 하시며 아이들의 인생을 정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1장 4절에서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라고 했습니다. 창세 전에 우리를 예정하셨는데 하물며 우리보다 3,500년 전에 태어난 슬로브핫의 딸들이 낳을 아이들에 대해서는 예정하지 않고 계셨다고 이해하는 것은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심지어 이들은 어쨌든 선민의 이름 아래에서 태어날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정확한 이해는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만약 슬로브핫의 딸들이 땅을 분배받은 상태에서 다른 지파 남자들에게 시집갔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창세 전에 미리 계획하시고 뜻하신 모든 내용들이 다 유산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슬로브핫의 딸들을 통해 계획하신 자녀들 전체를 죽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자녀들을 세상에 있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다 좌절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곧 복지가 더러워지는 상황입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하나님이 있게 하시려는 뜻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뜻대로 다른 지파에 가서 결혼을 하는 등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복지 자체가 속으로부터 곪고 더러워지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복지는 단순한 부동산의 개념이 아닙니다. 누구에게 어떤 부분의 땅이 할당되었든지 중요한 것은 소유권이 아니었습니다. 복지라는 땅에는 하나님이 있게 하시려는 뜻과 계획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는 땅이 약속의 땅이고 복지입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갖고 계신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복지가 아닙니다. 가나안을 약속의 땅이라 부른 이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해 주신 땅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약속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같은 선민의 조상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250만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뜻과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이것도 다 약속입니다. 그렇다면 이 약속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아브라함의 경우는 약속이 이루어질 이 세상의 상황을 마음에 두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약속은 유지되고 지켜질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마음에서 지켜냈던 것은 약속하신 땅이 아닌 영광의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가 기록된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라고 했던 바와 같습니다. 이로부터 아브라함의 생애 전체는 마음에서 하나님이 일등 하시는 것에 집중되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 실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이해하고 있습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더 먼저 더 크게 실감하는 것이야말로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내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서 일등 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몸으로 무엇을 만나든지 그것보다 하나님을 더 먼저 더 크게 실감하여 하나님이 일등 하심을 지켜냈기에 약속이 유지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들은 약속의 순간들입니다. 매 순간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있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우리가 마음에서 영광의 하나님을 지켜낼 때 땅에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을 제일 먼저 제일 크게 실감합니다. 그럴 때 이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이루시려는 계획과 뜻이 약속으로 지켜지면서 이루어집니다. 본문은 바로 이 점을 슬로브핫의 딸들을 통해 보여주고 계십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다른 지파로 시집가면 안 되는 이유는 단순히 땅 때문이 아닙니다. 므낫세 지파에 분배된 땅이란 슬로브핫의 딸들을 포함한 므낫세 지파의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슬로브핫의 딸들이 이 점을 아랑곳하지 않고 다른 지파로 시집을 간다면, 애초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선민의 계보에 대한 계획들은 다 유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곧 땅이 더럽혀지는 상황입니다. 가나안 땅이 더는 약속의 복지가 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이스라엘 각지에서 일어나게 된다면 복지의 개념은 뿌리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도의 본문 말씀은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할당된 가나안 땅의 경계는 우리 몸 자체이고, 우리 몸으로 만나는 사람들이고,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중에 만나는 각종 상황들입니다. 그 상황들에는 순조롭지 않은 난관도 있을 수 있고 순조로운 형통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여건이 전부 우리에게 제시된 가나안 땅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무엇인가를 있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담고 있는 약속의 땅인 것입니다. 민수기의 마지막 장은 이 약속을 놓치지 말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있게 하시려는 뜻과 계획의 약속을 유산시키지 말라는 것입니다.
35장 33절을 보면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그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함을 받을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 뒤에는 슬로브핫의 딸들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뜻을 놓친다면 복지는 더러워지고, 하나님의 뜻은 유산되고 약속의 땅이 될 수가 없다.’라는 것을 마지막으로 말씀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첫 번째로 내게 분배된 가나안 땅은 내 몸입니다. 외모나 타고난 건강 상태를 비롯하여 모든 면에서 내 의도가 들어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분배해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어떤 외모를 분배 받았든 중요한 것은 내 몸이 약속의 땅이라는 것입니다. 내 몸이라고 하는 땅 위에는 하나님이 있게 하시려는 뜻과 계획이 약속으로 담겨있습니다. 몸이 가나안 땅을 사는 방식은 슬로브핫의 딸들과 같아야 합니다. 슬로브핫의 딸들이 다른 지파로 시집가지 않음으로써, 이들이 받은 땅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러한 모습을 보일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내 몸이 병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도 엄연히 계십니다. 그렇다면 병든 내 몸을 먼저 실감해야 할까요? 하나님을 먼저 실감해야 할까요?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병든 몸을 먼저 실감하는 빗나감의 체질의 나를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여기는 것입니다. ‘주님! 저는 병든 몸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은 자입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병든 몸이 사실이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도 사실입니다. 문제는 실감의 순서입니다. 굳이 하나님을 빗나가서 병든 몸을 먼저 실감하는 것은 빗나가는 죄의 체질 때문입니다. 이러한 빗나감의 죄의 체질을 십자가에서 죽은 자로 여김으로써 막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먼저 실감합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집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냥 되는 일이 아닙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과 같은 싸움입니다.
빗나감의 죄의 체질과 싸우다시피 십자가를 붙잡고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 아버지를 상대자로 부릅니다. 병든 몸이 상대가 아닐 정도로 하나님의 실감을 키우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공적인 승리를 통해서 병든 몸이 사소하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제 내가 소중하고 크게 실감하는 하나님으로부터, 사소하게 느껴지는 병든 몸 사이에 뜻이 주어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제 내 마음에는 병든 몸이 어떻게 되느냐 마느냐는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병 때문에 죽을지, 병이 나아서 건강해질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죽든지 살든지 사소하게 느껴지는 병든 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온 몸이 찢기시고, 머리에는 가시면류관을 쓰시고, 사지가 못 박히시고, 허리를 창에 찔리실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몸을 신경 쓰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시며 기도를 마치셨습니다. 몸보다 하나님의 뜻을 소중하게 여기셨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병든 몸이 죽든 살든 그것은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죽었음을 고백하며 마음이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할 때, 하나님의 뜻의 내용이 어떠하든 그것이 이루어지면 된다는 생각이 내 안에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쉽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 말에 진정성이 있으려면 뜻이 임하기를 바라는 그 대상이 사소하게 느껴져야만 합니다. 내가 십자가를 붙잡고 싸움으로써 그것이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하나님을 크게 실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좋고 소중하게 여겨지고, 십자가에서 죽은 대상은 사소하게 여겨집니다. 이제 귀하게 여겨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 자체입니다. 그럴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는 말도 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세상 것을 크게 실감하는 중에 이러한 기도를 드리는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이러한 기도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니까 아무렴 좋게 해주시지 나쁘게 해주시겠어?’라는 확률적 바람일 뿐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말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우리는 내 몸이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하나님을 크게 실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 있어야만 가능한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서 이길 때 정말로 병든 몸이 어떻게 되든지 상관이 없게 됩니다. 소중한 것은 병든 몸이 아니라 몸을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하여 약속의 복지가 지켜집니다. 그럴 수 없다면 살인이 상징하는 바대로 내 몸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유산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삶에서 하나님의 뜻이 유산되고 살인으로 상징되는 일들이 자꾸 벌어지는 이유는 하나님보다 몸으로 만나는 대상을 더 먼저 실감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실감하면 먼저 반응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대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끊어집니다.
두 번째로 내게 분배된 가나안 땅은 내 몸으로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약속의 복지를 살지 못합니다. 약속의 복지가 아닌 이전에 가나안 족속들이 살고 있던 더럽혀진 땅을 계속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드는 사람, 안 드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람을 먼저 실감해서 마음에 드는 사람에게는 좋게 반응하고, 마음에 안 드는 사람에게는 나쁘게 반응합니다. 그러는 동안 그에게 갖고 계신 하나님의 뜻은 유산됩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이라는 가나안 땅에서 이루어져야 될 하나님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아예 아랑곳하지 않고 다 끊어내면서 유산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사람과 관계를 할 때 땅을 더럽히고 삶을 더럽힙니다. 이러한 삶은 젖과 꿀이 흐르는 은혜의 복지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를 들어 마음에 안 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대상은 배우자일 수도 있고 직장 상사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배우자나 직장 상사가 내게 어떻게 하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나는 먼저 배우자나 직장 상사가 마음에서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예수님 안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 지금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마주해서 내 마음에는 하나님을 크게 실감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을 가장 크게 실감한다면 서슬이 퍼런 직장 상사조차도 사소하게 여겨집니다. 나를 늘 속상하게 하고 마음에 맞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배우자도 사소하게 여겨집니다. 그러면 이제 배우자나 직장 상사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떤 뜻을 갖고 계시는지가 중요해집니다.
직장 상사가 설령 나를 자르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의한 일이라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직장 상사가 못 돼먹어서 나를 잘랐다고 분해하며 반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실감하는 사람은 못된 직장 상사가 나에게 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아멘’ 하고 감사할 뿐입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직장 상사가 실감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실감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사소해져야 직장 상사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 소중하게 여겨지려면 내 마음은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크게 실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 번째로 내게 분배된 가나안 땅은 몸에 주어지는 상황들입니다. 그것은 난관과 문제와 불통의 상황일 수도 있고, 순조로움과 형통의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순조롭고 형통한 상황이라고 마냥 좋아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 담긴 가나안 땅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순조롭고 형통한 상황이 좋아서 마음으로 끌어안고 그 상황을 실감한다면 살인이 일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이 있게 하시려는 뜻과 계획은 유산되어서 복지는 끊어지게 됩니다.
순조롭고 형통한 상황은 좋아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죽어야 할 상황입니다. ‘순조로움의 상황도 있고 하나님도 계신 데, 나는 지금 하나님보다 순조로움의 상황을 실감했구나. 이러한 나는 십자가에서 죽어 마땅하다.’라고 여기며 십자가를 붙잡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 하늘로 올라갑니다. 사람들은 나의 순조로운 상황을 축하하지만, 나는 그것이 사소하게 느껴집니다. 나는 하나님을 크게 실감하기에 머리로는 이해해도 마음으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게 무슨 축하할 일인가? 하나님을 실감하고 있는 이 상태를 축하해야지, 순조로운 이 삶의 상황이 축하받을 일인가?’라고 느껴질 것입니다. 그러면 그 순조로움과 형통의 상황에 대해서 하나님이 갖고 계신 약속으로서의 계획과 뜻이 분명해지고 알려지고 이루어집니다. 혹은 내가 이룰 수 있게 됩니다.
불통과 난관의 상황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불통과 난관의 상황이 있지만 하나님도 계십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어느 쪽을 실감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를 이론적으로나마 생각해 봅니다. 우주보다 크신 분이 내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당신 자신을 내게 주셨습니다. 그러한 하나님과 불통의 상황 중에서 왜 불통의 상황을 먼저 실감할까요? 왜 난관과 문제를 먼저 실감할까요? 왜 어려움을 먼저 실감할까요? 하나님을 안 믿기 때문입니다.
불통의 상황을 먼저 실감하는 것은 빗나가게 하는 죄의 체질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는 죄의 체질을 가진 나는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한다.’라고 여기며 십자가를 붙잡을 때 죽은 자의 자아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마음이 예수님 안에서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크게 봅니다. 그러면 불통의 상황은 사소하게 느껴지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소중하게 여겨집니다. 불통이 형통으로 바뀌든, 불통이 더 큰 불통으로 이어지든 그것은 내가 중요하게 여길 바가 아닙니다. 내게 소중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참담한 죽음을 앞두시고도 아버지의 뜻을 중요하게 여기셨던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괴로움이 몸의 고통 때문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만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처한 저주 속으로 들어가시는 것을 괴로워하셨습니다. 단지 2박 3일 동안 아버지와 떨어져 계신 것을 그토록 괴로워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괴로움의 이유를 몸의 고통 때문이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으면서도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과 보좌 우편에 계신 예수님을 보며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의 죄가 용서받기를 구했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당한 고통이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보다 못할지라도 사람이 견딜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 고통이 문제가 아닌 이유는 스데반 집사님의 마음이 하나님과 붙어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실감하였기에 몸의 고통이 와도 문제가 사소하게 여겨졌던 것입니다.
우리 또한 몸과 관련된 상황들을 그렇게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당장 예수님이나 스데반 집사님처럼 참담한 육체의 고통의 상황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싸워가야만 합니다. 예수님과 스데반 집사님이 당한 그 극한의 상황을 사소하게 여겼던 수준까지 조금씩이라도 나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한 번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다만 조금씩이라도 나아감으로써 언제 어디서든지 약속의 땅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내 몸은 가나안 땅입니다. 몸이 있어 만나는 사람도 가나안 땅입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살면서 만나는 순조롭거나 어려운 상황들도 가나안 땅입니다. 민수기의 마지막에서 하나님이 던져주시는 메시지는 이 모든 가나안 땅들이 약속의 땅이 되려면 하나님을 실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며 가나안 땅 자체를 실감해서 빗나가는 나를 죽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실감하고, 가나안 땅으로 비유되는 일들을 사소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소해져야 그것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소중하게 여겨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이 인격적으로 소중하게 느껴져야 약속의 땅은 이어져 나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말씀을 민수기 마지막 장을 통해 해주고 계십니다. 예수님 십자가를 붙잡고 몸과 몸이 있어 만나게 되는 사람과 상황들이 사소해지면, 그 모든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그 뜻이 이루어져야 우리는 약속의 복지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 이것이 민수기의 결론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토록 끊임없이 반복하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약속이 이루어지는 복지를 살도록 원하시는 아버지의 간절함을 민수기 전체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이 간절한 아버지의 마음을 이제부터 조금도 소홀히 여기지 않기 위하여,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더욱더 철저히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이 세상 모든 것이 사소해지고, 하나님을 크게 실감함으로 그 소중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뜻들이 내 몸의 어떤 상황에서라도 다 이루어지는 약속의 땅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