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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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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속 살인의 성립_태승철

by 태승철 · 25-11-01 08:16 · 385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내 마음속 살인의 성립>의 줄거리 :

가나안 땅을 분배하게 될 때, 자기 분깃이 없는 레위인을 위해서 전국 각지에서 48개 성을 구별하여 레위인이 머물도록 하라고 지시하십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6개의 성읍을 구별하여 도피성으로 정하라고 하셨습니다. 도피성은 의도가 없이 부지중에 살인하게 된 사람들을 피해자 측 사람들의 보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제정하십니다. 레위인이 중앙의 성막이나 성전을 떠나, 전국 각지로 흩어지게 하신 이유는 무엇이며, 본문에서 말씀하시는 살인이란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요?

 

 

내 마음속 살인의 성립

 

(민수기 35:1~34)

 

6. 너희가 레위인에게 줄 성읍은 살인자들이 피하게 할 도피성으로 여섯 성읍이요 그 외에 사십이 성읍이라

7. 너희가 레위인에게 모두 사십팔 성읍을 주고 그 초장도 함께 주되

8. 너희가 이스라엘 자손의 소유에서 레위인에게 너희가 성읍을 줄 때에 많이 받은 자에게서는 많이 떼어서 주고 적게 받은 자에게서는 적게 떼어 줄 것이라 각기 받은 기업을 따라서 그 성읍들을 레위인에게 줄지니라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0.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11.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부지중에 살인한 자가 그리로 피하게 하라

12. 이는 너희가 복수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13. 너희가 줄 성읍 중에 여섯을 도피성이 되게 하되

14. 세 성읍은 요단 이쪽에 두고 세 성읍은 가나안 땅에 두어 도피성이 되게 하라

15.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거류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부지중에 살인한 모든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

 

 

본문에는 땅을 분배했을 때 레위인이 전국에 걸쳐서 머물 수 있도록 성읍과 성읍에 붙어있는 들을 할당하라는 말씀과 도피성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 말씀 중심으로 <내 마음속 살인의 성립>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내 마음속에서 살인이 성립하는 경우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있는 자로서 모든 것을 있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살인이란 이러하신 하나님에 의한 사람의 있음없음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레위인에게 전국에서 48개 성읍을 할당하라고 하신 말씀과 살인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습니다. 레위인에게는 48개 성읍이 할당되지만 이것은 레위인의 기업이 아니라 사용할 수만 있습니다. 레위인에게 돌아가는 십일조에는 가축이 포함되어 있고 그것들을 관리할 초장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위해 48개 성읍을 할당하고 그중에서 6개 성읍은 도피성으로 정하게 하십니다. 다시 말해 본문에서 말씀하신 48개 성읍이란 레위인의 기업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이들이 먹고 살기 위한 용도로만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궁금증이 하나 생깁니다. 신명기 1213~14절을 보면 너는 삼가서 네게 보이는 아무 곳에서나 번제를 드리지 말고 / 오직 너희의 한 지파 중에 여호와께서 택하실 그 곳에서 번제를 드리고 또 내가 네게 명령하는 모든 것을 거기서 행할지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번제뿐만 아니라 모든 제사는 중앙 성소에서만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레위인에게 할당된 48개 성읍은 중앙 성소 주변에 위치한 곳이 아닌, 전국으로 흩어져 사는 열두 지파의 땅에서 할당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본래 레위인을 구분하신 이유는 성막과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지어질 성전에서 일하기 위함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성전은 한 곳인데 그렇다면 전국에 흩어진 레위인은 무슨 일을 했을까요? 신명기에는 그 내용이 언급되지 않지만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그 대답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레위인은 성전에서 봉사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구분하신 지파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레위인은 성전이 없는 전국 각 지역으로 흩어져서 살게 됩니다. 성전이 없는 곳에서 살아야 하는 것은 레위인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각 지파는 전국으로 흩어져 성전과 떨어져 살아야 합니다. 그 대신 이스라엘의 모든 남자들은 일 년에 세 번 유월절, 오순절(초실절, 맥추절), 초막절(장막절)에 의무적으로 성전을 방문해야 했습니다. 성전을 위해 구분된 레위인이 전국에 흩어져야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전 없는 곳에서 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전이 있는 곳과 똑같은 효과를 내기 위하여 레위인을 흩으신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오늘 중앙 성소에서 상번제가 드려지면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 또한 상번제에 참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산다고 해서 상번제에 참여할 수 없다면 이것은 제사장들만을 위함일 것입니다. 상번제의 의미는 하나님이 어린양을 특별히 맛있어 하셔서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제사는 신이신 하나님께 뇌물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희생 제물의 죽음을 제사를 드리는 자와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레위인의 필요성이 생깁니다. 전국에 흩어진 레위인은 성전이 없는 장소에서도 성전이 있는 것과 똑같은 효과를 내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침 7시에 말씀으로 드리는 오늘의 번제를 드립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도 아침 7시와 저녁 7시에도 상번제를 드릴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레위인은 아침 7시가 되면 동네의 이스라엘 백성을 다 깨웁니다. 그리고 중앙 성전에서 어린양 상번제가 드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리며, 모든 사람이 마음으로 상번제에 참여하기를 촉구합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들을 더 먼저 더 크게 실감하는 나의 죄악 된 상태를 어린양과 함께 죽임으로써, 삶의 현장에 나갈 때 하나님을 더 먼저 더 크게 실감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서 하루를 시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레위인을 전국에 흩으신 이유를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레위인은 성전을 위해 삽니다. 이는 곧 성전이 없는 곳에서도 성전의 효과를 낼 수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성전의 효과란 결국 제사에 달려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중앙 성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만 레위인은 제사의 의미를 일깨워 주고 제사에 참여하도록 독려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위해 레위인을 전국에 흩으신 것입니다. 레위인은 전국에서 지금 성소에서 상번제가 진행되고 있으니 제사에 참여하라!’를 외치며 중앙 성소를 나르는 것입니다. 또 제사의 의미를 묻는 자들이 있으면 오늘 너희가 삶의 현장에서 살아갈 때 눈에 무엇이 보이든, 귀에 어떤 내용이 들리든, 손으로 무엇을 만지든 그것은 하나님보다 우선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으로 만질 수 없지만 더 먼저 더 크게 실감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것을 일깨워 줍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실감이 빗나가지 않게 하려고 레위인을 흩으셨습니다.

레위인과 일반 선민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봅니다. 레위인과 일반 선민은 모두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더 크게 실감해야 합니다. 이것은 선민 전체의 은퇴 없는 평생 직업입니다. 일반 선민은 삶의 현장에서 이런저런 일을 하는 중에 하나님을 실감하기 위한 전쟁을 해야 합니다. 다만 레위인은 성전을 위해서 일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하나님을 실감합니다. 성전에 하나님의 이름이 있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나님이 하늘에 계십니다. 레위인은 다른 일을 하지 않는 대신 하나님을 먼저 실감하면서, 선민들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크게 실감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일반 선민이 하나님을 크게 실감하며 삶의 현장으로 나가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이런저런 일을 하는 자들이라면, 레위인은 먼저 하나님을 크게 실감한 상태에서 선민이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실감하는 것만을 자기 일로 삼습니다.

 

한편 본문에는 살인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도피성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레위인에게 48개의 성읍을 사용할 권리를 허락하시며, 그중에서 요단강 동편에 3개 성읍과 요단강 서편에 3개 성읍을 구분하여 도피성으로 정하십니다. 도피성은 부지중에 사람을 죽인 자가 피할 수 있는 장소입니다. 그대로 두었다가는 죽은 사람의 가족이나 친척 등의 연고자들이 보복을 행하여 그 사람을 죽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처럼 행정이나 치안이 확립된 시대가 아니었기에 보복 살인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고의가 아닌 부지중에 살인이 일어났을 때 가해자가 재판이 이루어지기 전에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도피성 제도를 마련하신 것입니다.

도피성에는 아무나 들어올 수 없으므로 살아남아 재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때 두 명 이상의 증인을 통해 고의성이 확증되면 공개적으로 사형에 처합니다. 그런데 증인의 이야기를 듣고 상황을 전체적으로 살펴보아 고의성이 보이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도피성에서 살 수 있습니다. 감옥에 갇히듯이 도피성에서 살아야 하는데, 이것은 의도치 않게 살인이 벌어진 시점의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계속됩니다. 대제사장은 종신직이기에 이 기간은 상당히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대제사장이 죽지 않았는데 도피성 밖으로 나왔다가 피해자의 연고자들에 의해 보복을 당한다면 보복한 자들에게는 살인죄를 묻지 않습니다. 죽어 마땅하다고 인정한 것입니다. 그렇기에 의도치 않게 살인을 저지른 사람은 대제사장이 죽는 시간까지 도피성에 남아 있어야만 합니다. 이러한 말씀의 강조점은 도피성에 들어온 자들의 삶이 대제사장의 목숨과 묶여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살인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레위인을 전국에 흩으시며 선민의 제사 참여를 돕게 하십니다. 하나님보다 세상에서 보이고 들리는 것들을 먼저 실감하는 것을 날마다 상번제 어린양과 함께 죽도록 그 의미를 해설하고 독려합니다. 이제 선민은 하나님을 실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섬세하신 조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증상이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부작용을 살인으로 상징합니다.

살인은 사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과 가장 무관하게 여겨지는 일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중에서 천 명 중에 한 사람이 살인을 할까요? 아니면 만 명 중에 한 사람이 살인을 할까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사람들도 살인은 가장 극단적인 범죄입니다. 대한민국에서 하루에 살인 사건이 20건 일어난다고 치더라도 5500만 명의 국민 중에 20건은 그렇게 많은 숫자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살인과 무관한 사람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는 말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여기서 살인은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떠올려 봅니다. 마태복음 521~22절을 보면 옛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본문도 마음에서의 살인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마음에서의 살인은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할 때 발생합니다.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지금 주어진 상황이나 문제 등을 하나님보다 더 먼저 더 크게 실감할 때 나타나는 부작용이 마음에서의 살인이라는 것입니다.

 

살인의 의미를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시체를 만지는 것과 비교해 봅니다. 우리가 평생을 살아도 장의사가 아니라면 시체를 만질 일은 거의 없습니다. 시체와 가까이 접근하는 것도 가족이 죽을 때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시체에 접촉하면 부정해진다는 이야기가 계속 반복됩니다. 여기에도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시체란 하나님의 뜻이 더 이상 없는 대상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끊어진 대상이 시체입니다. 그러므로 시체에 접촉함이란 하나님의 뜻에 없는 일을 내 마음대로 하여 부정함이 발생하는 상황을 상징합니다. 살인도 이와 같은 상징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살인이란 있음없음으로 바꾸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있게 하시려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있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에 맞서서 막거나 방해하는 것이 살인입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하나님의 좋음과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어떤 것보다 더 먼저 더 크게 실감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할 때 하나님의 있게 하심의 뜻을 거역하는 살인은 자행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실감하면 당연히 하나님이 세상에 있게 하시려는 그 뜻을 받아들이고 그 뜻에 맞추어서 행동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하면 하나님이 있게 하시려는 뜻에 저항하고 거역하는 마음의 움직임이 발생합니다. 이 저항과 거역이 의도적인 살인으로 상징됩니다.

의도적 살인과 시체에 접촉함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시체에 접촉함이란 하나님의 뜻에 없는 일을 내 뜻으로 있게 하는 상태입니다. 한편, 살인은 하나님의 뜻이 있는데 그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고 하나님의 뜻을 끊는 상태입니다. 있음을 없음으로 바꾼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도적인 살인은 실제로 우리 삶에서 어떤 식으로 나타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직장에 나가면 상사가 있습니다. 나는 상사인 부장님이 싫고, 이 사람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내 마음에 들거나 안 드는 것은 주관적인 문제고 객관적으로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부장님은 있게 된 사람입니다. 지금 하나님의 있게 하시려는 뜻에 따라서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나는 하나님의 뜻이 있게 하신 부장님에 대해 주관적인 판단 근거를 들어서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부장의 있음이 싫어서 원망이 생기고 거부 반응이 생긴다면 의도적 살인의 상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일이기에 애초에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적용이 되지 않습니다. 적용한들 본인이 깨닫지 못하기에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주요 주권자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이는 곧 내 눈앞에 있는 사람 혹은 내 삶에 주어져 있는 상황이나 문제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도 하나님이 주관하시기에 내 삶에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반드시 존재합니다. 사람이든 상황이든 문제든 그것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있게 하신 것인데, 나는 마음속에서 거부 반응을 일으키고 없으면 좋겠다고 저항을 합니다. 이것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살인으로 상징되는 증상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나 상황이나 문제보다 하나님을 더 크게 더 먼저 실감하지 못함이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인자를 사형에 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없음으로 취급하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마음에서 일어나는 영적인 의미에서의 살인으로 사람을 사형에 처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알고 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거부하는 것이 마음에서 일어나는 살인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를 사형에 처한다는 것이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한 가정에서 남편은 하나님을 실감하며 사는데 아내는 고의로 하나님의 있게 하시는 뜻에 저항합니다. 남편을 싫어하고 주어진 상황이나 문제가 없어지면 좋겠다고 바란다면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있게 하시려는 뜻에 저항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뜻에 대한 살인을 자행하게 된 셈입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살인자를 사형에 처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서 아내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뜻을 품지 않으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이제부터 하나님을 실감하는 남편을 향해서만 직접적이고, 창조적이고, 주도적으로 뜻을 가지십니다. 남편이 하나님이 뜻을 이루어 갈 때 아내는 그 뜻의 곁다리로 종속적으로 딸려 오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내를 죽은 자로 취급하시며 직접적으로 뜻을 두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온 세상은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에 의해서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세상에서 모든 일은 하나님에 의해 나타나고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을 알면서도 끊임없이 저항하고 거부하고 원망한다면 마음속에서 하나님에 의한 있음없음으로 바꾸는 살인을 자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을 사형에 처하시듯 죽은 자로 취급하시고, 하나님을 실감하는 자들을 향하신 뜻에 종속되게 하십니다.

십자가 복음을 듣는 분이 500명 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분들이 날마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실감하며 하나님 있음의 뜻을 감사로 받아들이며 삽니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국민 전체가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에 종속되는 일까지도 벌어집니다. 이것은 대통령일지라도 예외가 아닙니다. 대통령이 하나님을 실감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대통령 직에서 아무리 대단한 일을 하고 큰 업적을 남기더라도, 하나님을 실감하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뜻을 받아들이며 사는 우리의 삶에 종속되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해 A라는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대통령이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는 B라는 독자적인 뜻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와 관련하여 A`라는 뜻이 주어질 뿐입니다. 하나님의 독자적인 뜻이 주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가장 먼저 크게 실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있게 하시려는 뜻에 전혀 저항감이 없는 마음속에서 살인이 일어나지 않아야만 합니다. 이로부터 나에게만 해당하는 하나님의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뜻이 얼마든지 주어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하는 자들을 죽은 자로 여기시며 하나님의 자발적이고 창조적인 뜻이 주어지는 자들에게 종속되게 하실 것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A라면, 하나님의 뜻이 주어지지 않는 자들에게는 A1, A2, A3와 같이 별개의 뜻이 아닌 종속된 존재로서의 뜻이 주어집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실감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뜻의 곁다리가 될 뿐이지, 하나님이 직접적으로 뜻을 주시지 않습니다. 이것이 고의로 살인을 저지른 자를 사형시키라는 말씀에 담긴 의미입니다. 고의적인 살인이란 하나님에 의해 있게 된 사람이나 문제나 상황을 내가 거부하고 싫어하고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고의가 없는 부지중에 행하는 살인은 우리 삶에서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 삶에 대한 분명한 뜻을 갖고 계십니다. 누군가와의 만남을 있게 하시려 하고, 어떤 사건을 마주하게 하시려 하고, 내 몸의 건강에 대해 하시려는 일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지난 시간에 동서남북 경계를 정하신 것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삶에서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한다면 동서남북 경계는 허물어지게 됩니다. 동서남북 경계가 허물어질 때 나타나는 가장 대표적인 증상이 고의적 살인입니다. 내 몸이든 사람이든 상황이든 삶에 주어진 모든 일은 동서남북 경계에 포함됩니다. 이 동서남북 경계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고의적 살인은 이러한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고의가 없는 부지중에 저지른 살인은 어떠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있게 하시려는 분명한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뜻을 잊어버리고 내가 무엇인가를 스스로 있게 하려는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있게 하시려는 뜻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의도적 살인이 하나님의 뜻을 싫어하거나 원망하거나 거부하는 것이라면, 부지중에 일어난 살인이란 의도치 않게 하나님이 있게 하시려는 뜻을 막고 내가 있게 하려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자녀에 대해 있게 하시려는 뜻을 갖고 계십니다. 그런데 내가 자녀에게 이런저런 일을 지시하며 개입하는 동안 하나님이 있게 하시려고 했던 뜻이 막힙니다. 그렇다면 부지중에 일어난 살인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흩어져 사는 레위인이 가르쳐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레위인은 모든 선민이 오직 하나님을 실감할 수 있도록 중앙 성소의 효과를 나르는 자들입니다. 성소에서 하는 일은 결국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제사는 마음의 실감이 하나님을 빗나간 상태를 문제시합니다. 그러한 자신을 깨달아 죽고 다시 태어나서 하나님을 더 크게 더 먼저 실감하는 자들로 만들어 줍니다. 이것이 제사의 효과이고, 레위인은 바로 이것을 일깨워 주는 자들입니다.

고의가 없이 부지중에 살인을 저지른 자는 대제사장이 죽을 때까지 도피성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 사람의 생애가 대제사장과 묶이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그야말로 하나님만을 대상으로 삼는 직업을 가졌습니다. 성전에서 봉사하는 자들 중에는 제사장도 있고 레위인도 있지만 그중에서도 대제사장은 가장 강력하게 집중하여 하나님만을 붙잡고 사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은 우리 마음이 입어야 할 옷이 되셨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못 박혀 연합해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부지중에 살인을 하게 된 이유는 결국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했기에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뜻대로 산 결과가 부지중에 살인으로 상징된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있음을 가장 크게 실감하는 자입니다. 지금도 대제사장은 성소에서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하나님만을 집중합니다. 부지중에 살인을 저지른 자가 대제사장이 죽기 전까지는 도피성에서 나갈 수 없다는 것은 이제 삶이 대제사장과 묶여 있다는 생각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러한 의식을 갖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땅을 탈출하고, 하늘에서도 십자가를 바라보며 마음이 땅으로 내려오지 않게 합니다. 대제사장이신 예수님께 묶여야만 하나님을 실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에서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과 묶이지 않아도 하나님을 기억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기억하는 하나님은 종교적인 개념상의 하나님일 뿐입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닌 종교적 사상입니다. 실제 살아계신 창조요 주권자인 하나님을 내 마음이 만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과 묶일 때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각에도 하나님 우편에 계시면서 하나님을 가장 온전히 실감하고 계시며, 하나님의 좋음으로 가장 온전히 만족하고 계십니다. 그 예수님께 내 마음이 묶여야만 하나님을 실감할 수 있고, 하나님을 실감해야만 이 땅에서 있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말과 행동을 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요셉은 자기를 모함한 보디발의 아내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의 배신에 대해 불평하지 않으셨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도 가룟 유다도 다 하나님이 있게 하신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들에 대해 불평하고 불만을 갖고 원망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고의적 살인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고의적 살인을 저지르지 않으려면 보디발의 아내나 가룟 유다보다 하나님을 훨씬 더 크게 실감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뜻을 싫어하고 원망하게 됩니다. 싫어하고 원망하는 고의적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을지라도 부지중에 살인을 저지르듯이 내가 의욕을 가지고 무엇인가 내 뜻을 따라 있게 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고의적 살인이든 부지중에 살인이든 원인은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실감하는 사람은 세상을 향하여 의욕을 부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좋은 대상이 없고 하나님보다 더 만족하게 하는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마음에서 가장 크게 느껴지는 대상에게 집중하여 존재감을 느끼기 마련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을 대면하여 하나님을 가장 크게 느낀다면 이 세상에서 아무런 의욕도 부릴 수 없습니다. 스스로 세상에서 무엇을 있게 하겠다는 뜻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님과 묶여야만 합니다. 예수님과 묶여서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써 마음의 실감이 빗나감을 죽입니다. 그래야만 고의적 살인이든 부지중에 살인이든 일어나지 않습니다.

 

시체가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것처럼 살인도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살인이 상징하는 내용이란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할 때 나타나는 가장 대표적인 증상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이시고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지 있게 하십니다. 그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부응하고 내 말과 행동이 일치하기 위해서는 레위인의 도움을 받고 대제사장과 묶여서 하나님을 실감하는 일에 소홀함이 없어야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본업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어떤 대상보다도 하나님을 더 먼저 더 크게 실감하는 것임을 잊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님과 십자가에서 꽁꽁 묶이게 해 주심으로써, 절대로 고의적이든 부지중에든 우리 마음속에 살인이 성립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