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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목표가 섰으면 이젠 실전이다>의 줄거리 :
하나님이 가나안 땅의 동서남북 경계를 구체적으로 정하여 주십니다. 이제 가나안 정복 전쟁을 시작하여 도달하여야 할 목표를 제시하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가나안 정복 전쟁은 이미 하나님의 뜻과 계획안에서 승리로 결정된 전쟁입니다. 그 전쟁의 실제 수행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선민을 사용하셔서 이루어 가십니다. 다만 이렇게 하나님이 전적으로 전쟁을 수행하시려면, 선민도 반드시 하나님과 호흡을 맞추어야만 합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해야 하는 가나안 정복 전쟁의 실제 내막을 알아봅니다.
목표가 섰으면 이젠 실전이다
(민수기 34:1~29)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때에 그 땅은 너희의 기업이 되리니 곧 가나안 사방 지경이라
3. 너희 남쪽은 에돔 곁에 접근한 신 광야니 너희의 남쪽 경계는 동쪽으로 염해 끝에서 시작하여
4. 돌아서 아그랍빔 언덕 남쪽에 이르고 신을 지나 가데스바네아 남쪽에 이르고 또 하살아달을 지나 아스몬에 이르고
5. 아스몬에서 돌아서 애굽 시내를 지나 바다까지 이르느니라
6. 서쪽 경계는 대해가 경계가 되나니 이는 너희의 서쪽 경계니라
7. 북쪽 경계는 이러하니 대해에서부터 호르산까지 그어라
8. 호르산에서 그어 하맛 어귀에 이르러 스닷에 이르고
9. 그 경계가 또 시브론을 지나 하살에난에 이르나니 이는 너희의 북쪽 경계니라
10. 너희의 동쪽 경계는 하살에난에서 그어 스밤에 이르고
11. 그 경계가 또 스밤에서 리블라로 내려가서 아인 동쪽에 이르고 또 내려가서 긴네렛 동쪽 해변에 이르고
12. 그 경계가 또 요단으로 내려가서 염해에 이르나니 너희 땅의 사방 경계가 이러하니라
본문의 전반부는 가나안 땅의 동서남북 경계를 말씀해 주십니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각 지파의 대표가 땅을 분배받을 사람의 명단을 말씀해 주십니다. 우리는 전반부에 해당하는 부분 중에 동서남북 경계를 말씀하시는 1~12절을 함께 읽었습니다. 이러한 내용 중심으로 <목표가 섰으면 이젠 실전이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하나님은 남쪽, 서쪽, 북쪽, 동쪽 순으로 정복 전쟁을 통해 차지하게 될 가나안 땅의 경계를 말씀하십니다. 그 전체 경계를 그려놓고 보면 남북으로 약 260킬로미터 정도이고 동서로는 80킬로미터 정도가 됩니다. 이것은 칭기즈칸이나 알렉산더 혹은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이 이룬 정복의 크기에 비하면 새 발의 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 속 선민의 가나안 정복 전쟁이 담고 있는 의미는 얼마나 큰 땅을 차지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오고 오는 세대를 거쳐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모든 선민이 자기의 삶을 어떻게 복지로 바꾸느냐의 이야기를 담기 위한 것입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이 일어난 뒤로 3,000년 이상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선민들은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어떻게 해야 내 삶을 약속의 복지로 바꾸어 살 수 있겠는가?’라는 진리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본문은 바야흐로 정복 전쟁이 실제로 개시될 시점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동서남북의 경계를 정해주심으로써 전쟁을 통해 정복해 들어가야 할 경계선을 책정하십니다. 이로부터 전쟁의 구체적인 목표가 설정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하늘에서 선민이 살 복지를 정해놓으셨습니다. 동서남북 경계선까지 정복하기 위해 언제 어디에서 누구와 전쟁을 치러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계획하여 정해놓으셨습니다. 어떤 지파가 어떤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정해놓으셨습니다. 여기서 특이한 부분은 지파별로 대표자의 이름을 언급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쟁이 끝난 후에 말씀하셨어도 충분해 보입니다. 행여나 전쟁 중에 죽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대표자의 이름을 미리 공표하십니다. 이는 곧 언급하신 인물들 중에 한 사람도 전쟁 중에 죽지 않게 하시겠다는 계획이 있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이토록 세세하게 앞으로 이스라엘에 일어날 일을 정해놓으셨다면, 굳이 정복 전쟁을 할 것도 없이 그냥 가나안 땅을 주실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실제로 출애굽 때 이스라엘은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으로 애굽을 떠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초강대국 애굽을 열 가지 재앙으로 초토화하셨고 홍해를 가르시고 이스라엘을 인도해 내셨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상황을 지켜보았을 뿐입니다. 따라서 이번에도 열 가지 재앙 같은 능력으로 가나안 족속들을 물리치시고 홍해를 가르셨듯이 요단강을 가르신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을 건너면 될 것입니다. 외국에 나갈 때 출입국 절차가 있는 것처럼 출애굽을 했으니 입가나안을 하면 그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가나안 정복 전쟁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을 통해 하나님이 선민에게 요구하시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은 젊은이들이 소개팅을 하듯 하나님이 선민에게 당신을 소개하신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전대미문의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시는 기적을 통해 당신을 이스라엘 선민에게 소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초강대국 애굽보다 크시고, 그 애굽의 바로 왕보다 크시고, 심지어 홍해보다도 더 크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하나님은 무한한 우주를 창조하셨습니다. 무한한 우주에 비하면 초강대국 애굽이나 바로나 홍해조차도 티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굳이 티끌과 같은 애굽과 바로를 망하게 하시고 홍해를 가르셨습니다. 여기에는 선민이라면 하나님의 존재감을 이러한 대상들보다는 크게 실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요구가 담겨있었습니다. 무한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실감하는 것은 바라지도 않으니, 다만 눈으로 보는 대로 하나님은 초강대국 애굽보다 크시고, 애굽의 바로 왕보다 크시고, 홍해보다 크시다는 사실 정도는 실감하라는 것입니다. 출애굽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담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소개팅이었습니다.
그런데 가데스 바네아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기대를 등졌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의 사건은 표면적으로는 가나안 땅에 대한 정탐이었지만, 내막을 보자면 선민들이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스스로 정탐한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열 명의 정탐꾼은 가나안 땅의 거주민들과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면서 자기들이 메뚜기 같다고 여겼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을 굉장히 크게 실감하면서 자기들은 작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들의 정탐 보고에 하나님은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애초에 가나안 땅을 주시기로 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지만 열 명의 정탐꾼은 하나님의 있음 자체를 인정조차 하지 않는 모습을 보였던 것입니다.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하나님을 떠올리고 가나안 족속과 하나님의 크기를 비교했습니다. 하나님의 크기가 월등하다는 사실을 실감하면서 그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기 때문에 가나안 족속들은 우리의 밥에 불과하다는 보고를 했습니다.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보시기에 좋은 계획과 뜻을 갖고 계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제시된 일종의 약속입니다. 하늘에서 하나님이 갖고 계신 계획과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약속의 복지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세세한 모든 부분이 이루어지려면, 나도 한 가지 약속을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열 가지 재앙을 내리시고, 홍해를 가르심을 통해 당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이는 곧 우리가 삶에서 만나는 어떠한 사건이나 대상보다도 하나님을 더 크게 실감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나를 향해 갖고 계신 계획과 뜻의 복지는 실제가 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은 동서남북의 경계를 정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정복해 들어갈 동서남북의 경계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은 남쪽, 서쪽, 북쪽, 동쪽 순으로 경계를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꼭 순서대로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먼저 내 몸 자체에 대한 것을 남쪽 경계라 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북쪽 경계는 내 몸이 있기 때문에 만나고 관계하는 사람들입니다. 가족으로부터 시작하여 친척, 이웃, 친구, 라이벌, 원수, 업무상 관계자를 비롯한 다양한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 동쪽과 서쪽 경계가 남았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문제와 일과 사건과 변수 등입니다. 이것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면 순조롭고 평탄한 일들과 어려움과 난관으로 느껴지는 일들입니다. 순조롭고 평탄한 일을 동쪽 경계로 본다면, 어렵고 난관으로 주어지는 일은 서쪽 경계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경계 안에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는 약속의 땅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 정탐 때처럼 우리가 만나는 모든 대상들보다 하나님을 더 크게 실감해야 합니다. 이것이 약속의 땅을 사는 삶의 대전제입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보다 하나님을 크게 실감할 때, 그 대상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집니다.
우선 내 몸이 한 경계를 이룬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 번째로 몸이 이루는 남쪽 경계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남쪽 경계까지를 정복해 들어간다는 것은 내 몸을 향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다 이루어지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내 몸과 관련된 일에는 외모, 건강 상태, 나이에 따른 변화가 있습니다. 또 목숨 보존과 관련된 일, 이런저런 재미를 추구하는 일과 같은 다양한 일들이 포함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내 몸은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가나안 땅의 한 경계를 이루고 있는 상태입니다. 이 경계가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이루어지는 약속의 땅이 되기 위해서는 내 몸보다 하나님을 더 크게 실감해야 합니다.
이것은 나 개인의 정복 전쟁에서 주어진 몫입니다. 이 몫을 담당하기 위해서는 먼저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하나님 관련 사실들과 내 몸과 내 몸 관련 사실들을 나란히 앞에 놓습니다. 그리고 이론적으로 크기를 비교해 봅니다. 하나님의 크기와 내 몸 크기를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크기는 내 몸에 비할 수 없이 엄청나게 크십니다. 하나님 크기에 비하면 내 몸의 크기는 티끌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론이 그렇게 분명하게 의식되었다면 이제부터 전쟁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 전쟁은 실감의 전쟁입니다. 이론상으로는 하나님이 무한히 크시고 내 몸은 티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전쟁을 개시할 때의 상황은 마음에서 내 몸이 엄청나게 크게 실감이 됩니다. 하나님은 전혀 실감이 안 될 정도로 내 몸을 크게 실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종교인들은 내 몸을 크게 실감하는 가운데 개념상의 하나님을 불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불러들일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내 몸을 창조하셨고, 지금도 숨을 쉬게 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크기와 내 몸의 크기를 비교해 보면 이론적으로라도 먼저 하나님을 크게 실감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종교인의 경우 하나님을 전혀 실감하지 않습니다. 내 몸에 대한 실감으로 마음을 가득 채운 채 하나님의 이름만을 부릅니다. 이것이 종교인의 특징입니다.
그렇기에 싸움의 필요성이 생깁니다. 내 몸에 대한 생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나의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 비해 건강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주름이 생기고 기미가 생기는 것이 억울하게 느껴집니다. 마음이 몸을 실감하느라 무한한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크기를 완전히 잊어버린 상태입니다. 이 상태에 대해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몸은 하나님 크기에 비하여 사소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내 몸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사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하나님을 크게 실감하기 위한 전쟁을 해나가는 것입니다.
전쟁의 방법은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내 몸을 하나님보다 크게 실감하는 나를 끊임없이 죽은 자로 확인하는 것입니다. 확인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합니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만 번이고 매일 확인해 나갑니다. 그럼으로써 마음은 주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하여 하나님의 실감을 키워 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십자가에서 죽었음을 고백하고 예수님 안에 들어가야만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수님이 지금도 하나님을 마주하고 계시면서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가득 차시고 하나님으로 인한 만족감으로 가득 차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야만 예수님이 하나님을 실감하시는 크기대로 하나님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이 예수님 안에서 하늘까지 올라갔다면 쉬지 않는 기도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전쟁을 수행하는 실제적인 방법입니다. 한쪽 경계를 이루고 있는 내 몸이 더 크게 실감이 됩니다. 그럴 때 몸을 실감하는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하늘에 계시는 예수님이 아버지를 실감하심이 나의 실감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정리해 봅니다. 우리는 먼저 내 몸의 크기와 하나님의 크기를 이론적으로 비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경계가 의미하는 바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크기가 월등함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그 하나님의 크기를 실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몸을 크게 느끼는 내가 십자가에서 죽고 내 마음은 예수님 안에서 하늘로 올라갑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보시며 실감하심의 부스러기라도 내게 임하기를 바라는 기도를 끊임없이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실감하시는 크기가 한꺼번에 임하면 좋겠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물론 오순절 성령 강림 때처럼 핵폭탄이 터지듯 하나님의 실감이 강하게 임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핵의 힘이 한 번에 터지면 폭탄이 되지만, 핵의 힘이 유지되면서 서서히 발현되면 핵발전소가 됩니다. 중요한 것은 날마다 끊임없이 티끌이라도 모으는 심정으로 하나님의 실감을 모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하나님을 실감하시는 것처럼 내 몸보다 더 크게 하나님을 실감하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 예수님의 실감을 티끌로 모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내 몸보다 하나님이 더 크게 실감이 되면 내 몸에 대한 일이 약속의 땅이 됩니다. 내 몸이 살든지 죽든지, 젊든지 늙었든지, 예쁘든지 밉든지, 건강하든지 아프든지, 오래 살든지 요절하든지 이 모든 것이 하나님 크기에 비하면 너무나 사소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그럴 때 내 몸을 향해 하나님이 갖고 계시는 모든 뜻과 계획은 약속으로 이루어져 가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 크기 때문에 반드시 내 몸이 사소하게 느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약속인 뜻과 계획들이 이루어져 가면서 복지는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내 몸이 있기 때문에 만나고 관계하는 사람들을 북쪽 경계로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이때 이론적으로 하나님의 크기와 내가 만나는 가족이든, 사장님이든, 부하 직원이든 크기를 비교해 봅니다.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크기와 비교하자면 티끌 같은 지구에서도 80억 인구 중 한 명에 지나지 않는 사람의 크기란 사소한 것입니다. 이론으로 그 크기를 알았다면 이제 실감의 싸움을 해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론상으로는 티끌에 지나지 않는 사람인데 실질적으로는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크게 실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실감의 빗나감이 죄악입니다. 하나님은 엄연히 살아계시고, 내 숨통을 쥐고 계시며, 내 세포를 주장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정작 그 하나님을 실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하나님이 붙잡고 계시는 티끌 같은 사람을 더 크게 실감하기에 빗나간 죄악입니다. 이론상 하나님이 분명히 더 크심에도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장님을 내가 더 크게 실감하고 부하 직원을 더 크게 실감합니다. 사람에 대한 실감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실감보다 더 큰 나는 십자가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예수님이 지금도 하나님을 실감하시는 크기의 부스러기라도 얻기 위해 기도합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를 실감하시는 그 크기 중에 극히 작은 부분이라도 저에게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이 티끌처럼 여겨지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티끌로 여기는 것은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로부터 사랑이 가능해집니다.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크기에 비하자면 일개 사람의 크기란 티끌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크기를 실감하며 사람을 티끌로 실감할 때 그 사람에 대하여 갖고 계신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나를 통해서 다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크기를 실감하느라 사람을 티끌처럼 여길 수 없다면 하나님의 뜻대로 사람을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자녀를 하나님보다 크게 실감합니다. 배우자를 하나님보다 크게 실감합니다. 그렇다면 별의별 수단을 다 쓰더라도 그들을 향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사랑과 계획과 뜻은 나를 통해서는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너무 크게 실감하느라 나에게 소중했던 자녀, 배우자, 부모, 형제자매, 친구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너무 작게 여겨집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그들을 향해 갖고 계신 약속으로서의 뜻과 계획은 나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크게 실감하는 사람이 있다면 실감이 빗나간 것입니다. 그러한 나를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여야 합니다. 그리고 내 마음은 예수님 안에서 하늘로 올라갑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실감하시는 부스러기라도 내게 주어지기를 바라며 기도하기를 쉬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람 앞에서 어느 정도로 하나님을 실감하셨는지는 다양한 사건을 통해 제시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 사회의 최고 의결기관인 산헤드린 공회의 의장인 대제사장을 티끌처럼 여기셨습니다. 또한 당신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던 빌라도 총독도 티끌처럼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할 가룟 유다에 대해서도 티끌처럼 여기셨습니다. 예수님께는 하나님에 대한 실감만이 중요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원하시는 계획이 사람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습니다. 사람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방식으로 구원의 역사는 이루어져 나갔습니다.
세 번째로 일어나면 좋지 않을 일들, 불편하고 피하고 싶은 일들, 어려움과 난관과 변수로 여겨지는 일들을 서쪽 경계로 생각해 봅니다. 이러한 일들이 약속의 땅의 한 경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경계선 끝까지 정복하여 약속의 땅 복지로 바꿔야 합니다. 이것 또한 이론적 비교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우리 삶에서 일어나고 있는 원치 않는 일들과 하나님의 크기를 이론적으로 비교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내가 지금 아무리 큰일을 당하고 있더라도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이 사소한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건강이 안 좋고, 경제 사정이 어렵습니다. 이러한 상황과 하나님의 크기를 비교해 봅니다. 지금 나는 문제를 당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내게 주셨습니다. 내게 발생한 문제와 하나님의 크기는 비교할 수조차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존심을 걸고서라도 당면한 문제나 난관을 붙잡고 해결하겠다고 씨름해서는 안 됩니다. 해결보다 우선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실감의 전쟁입니다. 그 문제나 난관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약속으로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크기를 실감하여 문제나 난관이 사소한 일로 여겨져야 합니다.
암에 걸렸다면 건강에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하신 하나님이 당신을 내게 주셨다는 사실도 존재합니다. 이 두 사건의 크기를 비교해 봅니다. 내 영혼이 암에 걸린 것도 아니고 내 몸이 암에 걸려 죽게 생겼을 뿐입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이 당신을 내게 주셨다는 사건에 비하자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크기를 실감하면 실감할수록 삶에서 발생하는 안 좋게 여겨지는 사건들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됩니다. 암에 걸려서 죽게 되었든, 돈이 없어 망하게 되었든, 이 모든 사건들은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의 크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 이론을 마음에 붙잡고 하나님의 크기를 크게 실감함으로써 문제들이 티끌처럼 작게 여겨질 때까지 전쟁의 기도를 해나갑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7장 7절에서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 말씀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이 지금도 하늘에서 아버지를 마주하여 하나님을 실감하시는 그 크기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령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성령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내 마음에 실감하게 해주십니다. 하나님을 실감하게 해달라는 간구에는 성령에 대한 간구가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을 실감하듯이 성령은 내 눈이 되어 주시고, 내 귀가 되어 주시고, 내 감각이 되어 주십니다. 성령은 영이신 하나님을 만지듯이 보듯이 우리 마음이 실감하게 해주십니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충만하신 가운데 하나님을 있는 크기 그대로 실감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실감의 부스러기라도 가지고자 간구해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가 예수님과 같은 크기로 일어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비록 작은 부스러기 같더라도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실감을 모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더라도 예수님이 풍랑 속에서 주무신 것처럼 사소하게 여길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생활을 하다 보면 공중에 나는 먼지들이 머리카락에 붙기도 하고 얼굴과 손에 묻기도 합니다. 그러나 달라붙는 먼지를 일일이 의식하며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가 죽네 사네 하는 세상의 모든 문제들의 실상이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 크기에 비하자면 문제는 우리 얼굴에 붙은 먼지 하나와 같습니다. 먼지 하나를 크게 실감하느라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를 실감하지 못한다면 얼마나 큰 손해인지 모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고 이 실감 전쟁을 해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네 번째로 삶에서 발생하는 순탄함과 평탄함을 동쪽 경계로 생각해 봅니다. 서쪽 경계에서 살펴본 대로 삶에는 난관과 변수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문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어나면 좋고 반가운 순탄함도 있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순탄한 상황을 내가 마음으로 좋아하고 실감하면 그 순탄한 상황에 이어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약속으로서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크게 실감함으로써 문제나 난관과 어려움은 싫어할 필요조차 없는 티끌로 여겨야 하는 것처럼 순탄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각종 일들도 티끌로 여겨야 합니다. 그것들을 좋아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하나님을 크게 실감함으로써 티끌처럼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순조롭고 평탄한 삶의 조건을 향해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약속으로 이루어지는 복지는 가능합니다. 삶의 난관이나 문제가 티끌처럼 여겨져야 한다면, 순조로운 일이나 승승장구하는 상황도 모두 티끌처럼 여겨져야 합니다.
앞서 몸에 대한 경계에 대해 살펴보며 영원하신 하나님을 실감한다면 육체의 죽음조차도 너무 사소한 일로 여겨질 수 있음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는 상황에서도 하늘이 열리면서 하나님을 실감했고 예수님을 실감했습니다. 그 실감이 너무 크다 보니 자기 몸이 죽는 것은 일로 취급하지도 않았습니다. 죽음이 의식 속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히려 돌로 치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서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영이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크게 실감한다면 죽음조차 얼굴에 먼지가 붙는 것처럼 사소하게 여기게 됩니다. 순조롭게 잘되는 일도 얼굴에 붙는 먼지이고, 난관과 문제도 얼굴에 붙는 먼지입니다. 먼지 하나가 얼굴에 붙었다고 호들갑을 떠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크게 실감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와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호들갑을 떠는 일들을 먼지 알갱이처럼 취급합니다. 이것을 위해 싸울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땅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 이제 실전만 남은 상황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에도 적용해야 합니다. 아무쪼록 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 붙잡고 하나님을 실감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론적으로 하나님보다 더 큰 대상이 있다면 그것을 실감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하나님보다 더 큰 대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보다 더 큰 대상이 없다는 표현으로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크기에 비하면 티끌에 지나지 않는 것들입니다.
이러한 티끌을 하나님보다 더 크게 실감하는 죄악 된 나를 십자가에서 죽이기를 끊임없이 반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올라가 예수님이 하나님을 실감하시는 양의 부스러기만큼이라도 끊임없이 구하고, 찾고, 두드림으로써 모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기필코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내 몸의 죽음보다, 어떤 사람보다, 아무리 큰 문제보다, 아무리 잘 된 상황보다 더 크게 실감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네 가지 경계를 이루는 모든 대상들을 티끌처럼 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약속하신 땅의 경계를 가르쳐 주셨사오니 이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하나님보다 다른 대상을 더 크게 실감하는 나를 죽이기를 수백, 수천, 수만 번이라도 반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오직 예수님의 하나님 실감을 받아 이 세상 모든 것들이 내가 실감하는 하나님 앞에서 티끌이 될 때까지 싸우고 싸우고 또 싸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