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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뱀 인간>의 줄거리 :
인간은 인간인데 뱀 인간이다. 모든 인간은 뱀 인간이다. 선민은 뱀 인간 중에서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사람으로 바뀌는 자들이다. 자기의 뱀 인간 됨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싸워서 끝장을 내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복지의 삶을 사는 것 자체는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있는 일이니만큼, 반드시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이 세상을 복지로 사는 삶은 내 일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께 내 삶을 맡기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자신이 당신의 일로서 이루신다. 다만 나는 뱀 인간만 아니면 된다.
뱀 인간
(민수기 33:1~56)
1. 모세와 아론의 인도로 대오를 갖추어 애굽을 떠난 이스라엘 자손들의 노정은 이러하니라
2.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들이 행진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들이 행진한 대로의 노정은 이러하니라
3. 그들이 첫째 달 열다섯째 날에 라암셋을 떠났으니 곧 유월절 다음 날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모든 사람의 목전에서 큰 권능으로 나왔으니
4. 애굽인은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 치신 그 모든 장자를 장사하는 때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신들에게도 벌을 주셨더라
5.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 숙곳에 진을 치고
6. 숙곳을 떠나 광야 끝 에담에 진을 치고
본문에는 1~49절까지 “진을 치고”라는 표현이 41번 반복됩니다. 현재 이스라엘은 출애굽 해서 광야 생활 40년이 지나 요단 동편에 있는 모압 평지에 이르러 진을 쳤습니다. 이 여정 가운데 동서남북으로 41번 진을 쳐서 머물렀던 장소를 반복하여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 특이하게 여겨지는 부분이 40절입니다. “가나안 땅 남방에 살고 있는 가나안 사람 아랏 왕은 이스라엘 자손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더라”라고 했습니다. “진을 치고”라는 말이 41번 반복되는 도중에 아랏 왕을 맞아 전쟁에서 이긴 호르마의 승리가 불쑥 언급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의 50~56절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제비 뽑아 땅을 나눌 텐데, 그 전에 가나안 족속 전부를 몰아내라는 촉구를 하십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뱀 인간>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가나안 일곱 족속이 살고 있는 가나안 땅의 모습이 언급됩니다. 본문 1절부터 쭉 읽어 내려가다 보면 마지막에는 가나안 사람들을 다 몰아내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가나안 땅의 모습은 뱀 인간들이 득실대는 모양으로 상징됩니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를 아실 것입니다. 고대 유물을 찾아 모험하는 영화입니다. 뱀으로 가득한 동굴을 통과하는 장면이 있는데, 뱀 몇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층을 쌓고 있습니다. 주인공 일행은 횃불을 휘두르며 뱀을 물리치며 나아갑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들어가야 할 가나안 땅의 상태가 이와 같습니다. 뱀이 층층이 쌓여서 꿈틀거리는 것처럼, 뱀 인간들이 득실대는 장소입니다. 그리고 뱀 인간은 선민도 예외가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뱀 인간이 주제입니다. 선민이 복지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뱀 인간을 쫓아내야 하고, 뱀 인간 됨을 자기 속에서 발견하면 죽여야 합니다. 53절의 “그 땅의 원주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라는 말씀은 뱀 인간과는 타협하지 말고 쫓아내라는 뜻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본문에는 “진을 치고”라는 표현이 41번 반복됩니다. 그런데 겉으로 보기에 기계적으로 반복되는 것 같은 이러한 표현 속에는 선민을 향한 너무나 간절한 하나님의 바람이 배어있습니다. 출애굽 한 선민은 광야에서 동서남북의 진용을 갖추어서 천막을 41번 쳐야 했습니다. 광야 생활 40년을 염두에 두자면 평균적으로 1년에 한 번씩 이동했던 것입니다. 물론 때로는 몇 년씩 한 장소에 머무를 때도 있었고, 때로는 몇 개월 만에 움직이기도 했습니다만 평균적으로는 1년이 조금 못 되는 기간마다 진을 쳐야 했습니다. 이러한 광야 생활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동서남북으로 천막을 치고 거두기를 반복한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민은 임시로 거주하는 천막에서의 삶을 40년 동안 살았습니다. 광야에서는 마음을 붙이거나 둘 곳이 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언제나 마음을 붙이고 둘 곳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마음을 붙이고 둔 대상의 상태에 따라서 마음은 평안할 수도 있고, 불안할 수도 있고, 요동칠 수도 있고, 굳건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평안하지 못하다면 마음을 붙이고 둔 대상에게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 둔 대상에게 문제가 없다면 몸이 어떠한 상황에 있더라도 마음의 평안은 깨지지 않습니다. 반대로 몸이 있는 곳이 아무리 평안하더라도 마음을 둔 대상에게 문제가 발생하면 마음은 태풍 속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피조물 인간의 특징은 마음을 두는 존재입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마음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도 하고 뱀 인간이 되기도 합니다.
본문에서 “진을 치고”라는 표현이 반복되는 것은 이러한 사람의 본성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사람은 언제나 마음을 무엇인가에 두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사람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광야는 아무리 찾아도 마음 둘 곳이 없습니다. 마음을 두어야 하는데 땅에는 마음 둘 곳이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출애굽과 광야 생활의 기적들을 통해 당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이제 선민이 마음 붙일 대상은 하나님뿐입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선민을 광야로 끌고 나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이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는 동안 이 땅에 마음을 붙이고 살아가는 뱀 인간의 체질을 극복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마음을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께만 두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그래서 가나안 정복을 시작하기 전에 40년 동안 41곳에서 천막을 치고 살았던 과거를 회상하게 하십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뱀 인간으로 살아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선민은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도 광야에서 동서남북으로 진용을 갖추어 41번이나 천막을 치고 거두었던 것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천막의 삶은 마음을 땅에 붙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살기를 바라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마음 둘 곳을 땅에서 찾는 뱀 인간으로 살지 말고, 마음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두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라.’는 것이 본문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바람입니다.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둘 때, 이 땅의 삶은 하나님이 사십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맡기는 개념이 아닙니다. 원래 이 땅의 삶은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이 이루시기에 내가 맡기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는 삶을 붙잡는 경향이 너무나 강합니다. 그렇기에 삶을 붙잡고 있는 상황을 전제로 하여 맡긴다는 표현을 쓸 때도 있습니다만, 실제로 이 세상의 삶은 애초에 내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광야 생활에서 일어난 갈등의 근본적 이유도 이와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과 이스라엘이 바라는 것이 너무나 달랐기에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생활 중에도 계속해서 뱀 인간의 특징을 드러냈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이 세상의 상황을 더 강력하게 실감하며 땅에 마음 둘 곳을 바랐습니다. 반면 하나님께서는 선민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마음 둘 곳으로 정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하나님과 선민 사이에는 끊임없이 갈등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물리적인 실감보다 영적인 실감이 더 강력하기를 원하셨지만,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물리적인 실감을 영적인 실감보다 강력하게 가지면서 하나님께 불만을 토로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가나안 땅으로 진격해 들어가기 직전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진을 치고”라는 이야기를 모세를 통해 41번 반복하게 하십니다. 이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이 땅에서는 마음 둘 곳이 없다는 그 의식을 유지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뱀 인간으로 돌아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선민의 삶은 뱀이 득실대는 소굴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뱀 인간의 특징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시기 위해 40절에서 아랏 왕의 이야기를 불쑥 언급하십니다. 광야 생활 40년 동안 수많은 사건이 있었지만, 모든 사건을 다 제쳐놓고 별로 유명하지도 않은 아랏 왕에 대한 말씀을 꺼내신 것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습니다.
40절을 보면 “가나안 땅 남방에 살고 있는 가나안 사람 아랏 왕은 이스라엘 자손이 온다는 소식을 들었더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 뒤에 다시 진을 쳤다는 이야기가 반복됩니다. 아랏 왕의 사건을 기억해 봅니다. 아랏 왕이 이스라엘 사람 몇을 잡아간 사건을 계기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구하여 전쟁을 치렀고 승리했습니다. 아랏이라는 성읍은 나중에 땅을 분배할 때에 유다 지파의 남쪽 경계선에 위치하는 곳입니다. 따라서 아랏 왕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것은 이스라엘이 이미 가나안 경내로 진입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시점에서 이스라엘은 전쟁을 이어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기세를 몰아서 마음 편하게 정착할 땅을 얻을 수 있으리라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에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이스라엘을 굳이 남쪽으로 이끕니다. 그리고 다시 요단강 동편으로 갔다가 북쪽으로 올라가 모압 평지에 이르는 우회로를 진행합니다. 이스라엘은 아랏에서 호르마의 승리를 얻었는데도 진격하지 않고 우회로를 선택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극단적으로 불평불만을 쏟아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셔서 불뱀을 보내셨고, 모세가 장대에 놋뱀을 매달아 들었을 때 그것을 본 사람만 불뱀의 독에서 놓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예표 됩니다. 놋뱀이 장대에 매달렸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불뱀에 물린 사람이 놋뱀을 바라보았던 것처럼 우리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 1절에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말했습니다. 놋뱀을 바라보듯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봄이란 곧 뱀 인간인 나의 죽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동일시의 믿음입니다.
놋뱀은 살아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따라서 놋뱀과 나를 동일시함이란 죽은 놋뱀이 곧 나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곧 나다. 결국 나는 뱀 인간으로서 죽은 것이다.’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뱀 인간은 마음 둘 곳을 이 땅에서 찾는 자들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사람은 마음을 땅에 두지 않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뱀 인간 됨을 죽여야만 합니다. 마음이 땅에 있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세의 놋뱀이 등장하는 아랏 왕과의 전쟁 이야기가 불쑥 언급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41번이나 반복되는 “진을 치고”라는 표현 각각에는 하나님의 간절한 바람이 들어있습니다. ‘제발 마음을 땅에 붙이지 마라. 너희의 삶은 천막을 치고 사는 것과 같아야 한다. 지금 너희 집이 있느냐? 그 집은 자가든 전세든 천막이다. 월세라면 더 잘되었다. 어차피 천막을 치고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뱀 인간 됨이 끊어지지 않는 것일까요? 왜 이렇게 마음을 하늘에 두지 않고 땅에 두는 것일까요? 하늘에 계신 하나님보다 땅에 있는 것들이 더 보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보물로 실감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21절에서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보물로 여긴다면 마음을 하늘에 둘 것입니다. 반대로 마음이 자꾸 땅에 머무르고 있다면 그 이유는 땅에 있는 것을 보물로 실감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보물로 실감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뱀 인간으로 살던 시절에 좋아했던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기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과 연합하여 산다면 만에 하나라도 마음을 땅에 붙일 수 없습니다. 땅에 있는 것들이 모두 배설물로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에 십자가 생활화가 너무나 절실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뱀 인간으로서 사는 가정을 봅니다. 가족구성원들이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않는다면 모두 뱀 인간들입니다. 가정 자체가 인디아나 존스에 나오는 동굴 같은 뱀들이 꿈틀대는 소굴입니다. 마음이 땅에 붙어 있기에 뱀입니다. 자녀가 아무리 귀해도 뱀 인간입니다. 배우자가 뱀 인간입니다. 이것은 가정 밖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판이 뱀 소굴이고, 사회가 뱀 소굴입니다. 우리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면 그 이유는 하나님이 보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에게도 이러한 체질이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것은 세상에 대해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내가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다고 고백할 때 우리의 마음은 땅에서 들립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따라 하늘로 올라갑니다. 예수님 안에 억지로라도 머물러 있어야만 마음은 땅에서 떠날 수 있고 하나님을 마주 볼 수 있습니다. 이 억지스러움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세상 것에 강하게 중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중독을 끊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예수님 안에 갇히는 억지스러움이 필요합니다. 예수님 안에 갇혀서 억지로 땅으로부터 떠난 상태에서 하나님을 마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이합니다. 그래야만 조금씩이라도 하나님의 맛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커피 본연의 맛을 깨달아 가는 과정과도 닮았습니다. 저는 참 답답하게도 커피 자체를 즐기는 데 오랜 세월이 걸렸습니다. 커피믹스, 바닐라라테, 캐러멜마키아토처럼 달콤한 커피를 마시는 버릇이 있었기에 순수한 커피를 마시면 담배에 찌든 니코틴 맛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버릇을 들이면서 비로소 커피가 향기롭고 좋게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순수한 커피를 즐길 수 있게 되기까지 몇 년이 걸렸는지 모릅니다.
불과 커피 한 잔을 제대로 즐기는 데도 몇 년의 시간이 걸렸는데, 세상 것에 중독된 우리가 하나님 맛을 알아가는 과정이 기계적으로 그냥 이루어질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 복음 방송에서 하나님으로 마음이 배부를 수 있다는 말씀을 전하니 처음에는 다들 좋아하십니다. 그런데 말씀을 들은 지 1년, 2년, 3년이 지나도 하나님으로 배가 부르는 경험을 못하게 되자 말씀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내게 됩니다. 으레 하는 소리로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마음의 배가 부르지 못하는 이유는 명백합니다. 세상 것에 중독된 뱀 인간의 기질이 유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 맛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 맛을 모르기에 하나님으로 배부를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세상맛에 중독된 상태에서 제일 미운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세상에 대한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믿었으니 모든 것이 저절로 다 이루어지고 형통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마귀에게 정복당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은혜는 저절로 주어집니다. 하나님 자신까지도 최고로 좋은 은혜가 다 공짜로 주어지는 것이 맞습니다. 다만 그렇게 주어진 모든 은혜를 저절로 맛있게 즐길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인간이되 뱀 인간이라 마음을 땅에 두고자 합니다. 그러나 본래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이란 마음을 땅에 두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마음을 두는 존재가 진짜 인간입니다.
그런데 뱀인 사탄이 끼어들어서 모든 사람을 뱀 인간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인간은 인간이되 뱀 인간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내 체질이 뱀 인간의 체질이기에 하나님이 아닌 땅의 것들이 맛있게 느껴집니다. 내 마음의 입맛이 세상에 중독되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요한계시록을 보면 일곱 교회에 “싸워서 이기는 자가 되라”는 말씀이 똑같이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을 반복하신 예수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속에 있는 뱀 인간의 체질과 싸워서 이겨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기만 하면 구원으로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이 다 저절로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그냥 되는 일이라면 요한계시록에서 싸워서 이기라고 말씀하실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싸움에서 지면 구원도 없기에 이기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냥 인간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뱀 인간입니다. 그렇기에 뱀 인간의 체질과 싸워서 이길 수 있어야만 합니다.
본문 마지막 부분을 보면 가나안 족속을 완전히 물리치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출애굽도 하나님이 이루셨고, 광야 생활도 하나님에 의해 공짜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가나안 전쟁도 하나님이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굳이 가나안 족속을 완전히 물리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이 오늘날을 사는 우리에게는 어떤 의미를 갖고 있을까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가나안 족속들이 여기저기 남아있는 중에 사는 모습이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뱀 인간들의 가치관이 공유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도 가나안 족속들을 완전히 멸절시키지 않고 남겨둔 채 사는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이는 곧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뱀 인간들의 가치관과 그 가치관으로 만들어진 언어 체계를 갖고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 좋아하고, 건강 좋아하고, 승진 좋아하고, 명품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교인들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똑같이 돈 좋아하고, 건강 좋아하고, 승진 좋아하고, 명품을 좋아합니다. 이러한 모습에 대해 하나님께서 하실 일이 5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가나안 족속으로 상징되는 뱀 인간에게 하실 일을 선민에게 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민이 뱀 인간과 동일시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앞서 우리는 장대에 달린 놋뱀을 바라본 사건을 통해 동일시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생명이 없는 놋뱀을 바라봄이란 곧 죽은 뱀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을 바라봄이란 땅에서 들려 죽은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뱀 인간과의 동일시도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뱀 인간과 같은 것을 좋아하는 가치관을 가질 때 동일시는 이루어집니다. 돈 좋아하고, 건강 좋아하고, 승진 좋아하고, 명품 좋아하고, 출세를 좋아합니다. 그 똑같은 가치관을 가짐으로써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뱀 인간과 자기를 동일시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우리의 삶은 어떨까요? 명목상으로는 기독교 종교 안에 있고, 예배당 조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예수님과 자기를 동일시하여 마음을 하늘에 두고 사는 하나님의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예배당에 출석은 하지만 마음으로는 세상에 사는 뱀 인간들과 같은 가치관을 공유하고 있습니까? 뱀 인간들과 같은 가치관을 가졌다면 뱀 인간과의 동일시가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척 무서운 일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54절을 보면 가나안 땅을 제비 뽑아 분배한다는 말씀이 다시 언급됩니다. 땅을 제비뽑기로 분배한다는 것은 땅에 대해 사람의 의도와 의지와 뜻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땅에 대한 불평과 원망을 없애기 위해 필요한 것은 주어진 상황의 개선이 아닙니다. 아무리 개선해도 불평과 원망은 끝이 없습니다. 뱀 인간에게 진정한 평강과 만족과 기쁨은 없습니다. 하나님 크기로 비어 있는 마음을 채우기 위하여 끊임없이 몸부림치지만 결국 뱀 인간들의 운명은 영원하고 무한한 공허함으로 끝나고 맙니다. 이것이 뱀 인간의 특징입니다.
그런데 이 뱀 인간의 가치관은 전염성을 갖고 있습니다. 모두가 건강이 최고라고 합니다. 건강, 건강, 노래를 합니다. TV를 틀어도 건강에 관한 프로그램들이 끝없이 나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사를 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큰 병원이 가까이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역세권이 아니라 병원권을 따지는 시대입니다. 뱀 인간의 가치관과 언어 체계에 사람들의 마음이 정복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가나안 족속을 남기지 말라는 당부에는 세상에서 꿈틀거리고 득실대는 뱀 인간들이 갖고 있는 가치관과 언어 체계와 싸우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땅의 것들을 좋다고 여기는 뱀 인간의 기질이 내 안에 조금도 남아있지 않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 기질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그것은 암세포처럼 비대해져서 내 마음을 정복할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생활화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써 땅에서 들리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 승천을 따라 반드시 하늘로 올라가서 억지로라도 이 땅을 잊어버리고 땅을 등집니다. 왜냐하면 땅은 원래부터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비 뽑아 땅을 나누게 하시고, 광야에서 천막을 치고 살게 하신 의미가 이와 같습니다. 이 땅은 내가 마음으로 관여할 바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억지로라도 마음이 하늘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땅으로 내려오려고 할 때도 십자가를 붙잡고 내려오지 않고, 행여나 마음이 땅으로 떨어졌으면 다시 십자가를 붙잡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억지로라도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어야 그 시간이 늘어나면서 점점 하나님의 맛을 알고, 하나님을 보물로 실감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보물로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십자가 생활화가 힘든 이유는 뱀 인간의 기질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기본적으로 뱀 인간입니다. 뱀 인간인 상태에서 단순히 예수님을 주로 고백했기에 모든 은혜를 즐길 수 있도록 내 것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배부름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여전히 세상 것이 맛있는데 하나님으로 배부를 수는 없습니다. 저한테 오셔서 ‘하나님으로 배부르지 않아요.’라고 말씀하시지만, 뱀 인간 상태이기에 하나님으로 배부르지 않는 것이 정상입니다. 뱀 인간의 입맛에 대해 십자가를 붙잡고 이를 악물고 싸울 생각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히 분별해야 합니다. 모든 은혜는 공짜로 주어집니다. 그러나 공짜로 주어지는 은혜는 저절로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절로 하나님의 맛을 즐기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저절로 배불러지는 것이 아닙니다. 본문에서는 “진을 치고”라는 말씀이 41번 반복되는 가운데 불뱀 사건을 언급하시고 가나안 족속을 멸절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내 속에 있는 뱀 인간의 기질과 죽을동살동 싸우라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가정도 뱀의 소굴이고 직장도 뱀의 소굴입니다. 어디를 봐도 뱀 인간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저희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최고의 은혜인 주님의 십자가를 놓치지 않게 하시고, 주님과 연합하여 하늘로 올라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이 하늘에 계시니 억지로라도 보좌 우편에 머물면서 조금씩이라도 하나님의 맛을 알아갈 수 있도록 은혜 내려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