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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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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끼며 사는 사람 대하는 태도_태승철

by 태승철 · 25-10-23 07:37 · 344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부대끼며 사는 사람 대하는 태도>의 줄거리 :

실감 싸움에서 이겨서 하나님의 있음을 강력한 존재감으로 실감하는 상태가 되었으면 이제는 사람과 더불어 사는 중에 복지를 살아야 한다. 이처럼 사람들과 부대끼는 실제 삶의 현장에서 복지의 삶을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내 지정의언행을 장갑으로 끼시는 일이다. 이럴 때 하나님의 뜻을 가장 강력하게 방해하는 요소들도 사람들이고, 또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이유도 사람들이다. 그래서 복지를 사는 선민은 특별한 사회적 인식, 즉 사람을 보는 특별한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부대끼며 사는 사람 대하는 태도

 

(민수기 31:13~54)

 

13.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의 지도자들이 다 진영 밖에 나가서 영접하다가

14. 모세가 군대의 지휘관 곧 싸움에서 돌아온 천부장들과 백부장들에게 노하니라

15.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자들을 다 살려두었느냐

16.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따라 이스라엘 자손을 브올의 사건에서 여호와 앞에 범죄하게 하여 여호와의 회중 가운데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17. 그러므로 아이들 중에서 남자는 다 죽이고 남자와 동침하여 사내를 아는 여자도 다 죽이고

18. 남자와 동침하지 아니하여 사내를 알지 못하는 여자들은 다 너희를 위하여 살려둘 것이니라

 

 

이스라엘 군인들은 미디안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전리품으로 미디안 여자들을 데리고 왔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노하며 발람의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모압 왕 발락은 술사 발람의 꾀를 따라 미인계를 써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으로부터 등지게 했습니다. 이때 모압 사람들과 더불어 미디안 여자들이 참여했고, 이들은 이스라엘 남자들을 바알 숭배 의식에 끌어들였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로 이스라엘에 염병이 임해 이만 사천 명이 죽었습니다. 모세는 이 사건을 언급하며 전리품으로 여자들을 데려온 것을 비난하면서, 남자와 동침하지 않은 여자를 제외한 모든 여자를 죽일 것을 명령합니다. 오늘날과 다르게 당시의 여성은 소유물로 취급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19~24절에는 전쟁터에서 시체를 접촉한 이들에게 정결 의식을 시행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25~54절까지는 전쟁에서 획득한 전리품을 온 이스라엘 회중에게 분배하는 과정이 길게 이야기됩니다. 이러한 내용을 중심으로 <부대끼며 사는 사람 대하는 태도>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복지는 우리 삶의 현장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미디안과의 전쟁은 앞으로 가나안 땅을 약속의 복지로 획득하기 위한 전쟁 연습이었습니다.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주어진 삶의 현장에서 약속의 복지를 획득하는 과정을 미디안과의 전쟁을 통해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삶에서 약속의 복지를 획득하는 첫 번째 조건은 실감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 있음을 느끼는 존재감은 눈에 보이는 어떤 대상이나 사건에 대한 실감보다 더 강력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우리는 삶의 현장에 숨겨진 약속의 복지를 획득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지난 시간에 나팔 소리를 통해 전쟁터에서 하나님을 실감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실감함이 충만한 상태에서 삶으로 나가면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은 하나님께 밀착하여 하나님의 있음을 강력한 존재감으로 실감하면서 무장합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이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갈 때 제일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장갑이 되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의 다섯 가지 요소가 하나님 뜻의 손에 끼워진 장갑이 되어야 합니다. 생각합니다. 감정이 움직입니다. 의지를 발동합니다. 말하고 행동합니다. 이 다섯 가지 요소는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는 수단이자 과정이 됩니다. 그래야 우리는 약속의 복지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허허벌판에 나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과 포로로 잡아 온 여자들을 죽이고 시체를 만졌으니 정결 의식을 행하라는 내용에는 어떤 연관성이 있을까요? 본문은 하나님의 뜻이 나를 장갑으로 끼시는 일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어때야 하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 내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실감한다면 하나님의 뜻은 나를 장갑으로 끼십니다. 그런데 내가 부대끼며 사는 사람들이 이러한 상태를 방해하는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전쟁에서 이기고 많은 전리품을 얻고 여자들도 데려왔습니다. 이에 모세는 화를 내며 여자들까지 다 죽일 것을 명령합니다. 다만 모세는 아무 이유 없이 미디안 여자들을 죽일 것을 명령한 것이 아닙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는 모압 왕 발락과 술사 발람으로 일해 벌어진 바알브올 사건에 미디안 여자들도 참여했음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미디안 여자들이 이스라엘 남자들을 바알 숭배에 끌어들이는 직접적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장정 중 만 이천 명을 뽑아 나가 싸우게 하셨습니다. 이들은 칼과 창을 들고 미디안 군대를 몰살시켰습니다. 성인 남자가 몰살당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여인들과 아이들뿐입니다. 이들은 칼과 창으로 무장하지 않았기에 위협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당시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는 전쟁에서 이긴 쪽은 남은 자들을 전리품으로 삼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 군인들은 미디안의 여자들을 전리품으로 데려왔는데 이에 모세는 진노합니다.

우리가 부대끼며 사는 사람들 중에는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미디안 여자로 상징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미디안 여자로 상징되는 이유는 내가 하나님의 뜻이 끼시는 장갑이 되는 일을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미디안 족속은 바알을 숭배했습니다. 미디안 여자들도 칼과 창을 들지는 않았지만 바알을 숭배하였습니다. 이들이 섬기던 바알은 풍요와 다산의 신입니다. 쉽게 말해 부자 되고 번영하겠다는 소원을 들어주는 신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군인들은 무방비 상태로 바알을 숭배하는 여자들을 전리품으로 데려왔습니다. 이것이 모세가 진노한 원인입니다.

우리의 삶에는 가족으로부터 시작해서 친구를 비롯하여 적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친근한 존재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나의 마음을 무방비 상태로 만드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들 중 대부분은 바알 숭배자들과 똑같은 마음가짐을 갖고 있습니다. 부자 되고 싶어 하고 번영하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소원이 기본적인 체질이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한 가정 내에서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남편은 십자가 복음을 들으면서 어떻게 하든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마음을 하나님께 보내려 합니다. 그런데 아내는 십자가 생활화에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부부관계이기에 남편은 아내에 대해서는 마음이 무방비 상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무방비 상태의 마음으로 아내를 받아들이자 세상에서 부자 되는 것이 좋고, 번영하는 것이 좋다는 가치관이 그대로 파고듭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큰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렇게 세상의 가치관이 파고든 상태에서는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은 절대로 나를 장갑으로 끼실 수 없습니다.

이들은 내가 한 번도 적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나와 대화하고 함께 살아가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과 함께하는 동안 세상의 가치관이 내게 파고듭니다. 나도 그 흐름을 따라 뜻을 결정하고 생각하고 의지를 발동하며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우리가 부대끼며 사는 사람들 중에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땅에 남아있기에 세상에서 부자 되고 번영하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인간이라면 예외 없이 갖는 소원과 가치관입니다.

본문에서 모세가 미디안 여자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것은 이러한 소원과 가치관이 살아있는 사람이라면 마음에서 죽여야 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가르쳐줍니다. 아무리 부대끼며 가까이 살고 있더라도 마음에서는 받아들이지 말고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절대로 마음에 들이고 용납해서는 안 됩니다. 그 대상은 배우자나 자녀 혹은 부모일 수 있습니다. 그 대상이 누구든지 부대끼며 사는 사람 중에서 여전히 이 세상에서 부자 되고 번영하는 것이 최고라는 가치관을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받아들이지 말고 마음에서 반드시 죽여야만 합니다. 그래야 내가 복지를 살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이 나를 장갑으로 끼실 수 있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들이 칼과 창을 들고 나를 죽이려는 원수가 아니라는 점에 있습니다. 이들은 우리가 부대끼며 사는 사람들이기에 마음이 무방비 상태가 되기 쉽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진짜로 나에게서 하나님의 뜻을 빼앗는 원수가 될 수 있습니다. 내게 제일 소중한 것은 하나님이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선민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을 빼앗긴다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한편 19~24절에는 정결 의식이 언급됩니다. 모세는 전쟁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시체와 접촉을 했기에 정결 의식을 치를 것을 명령합니다. 이전에 말씀드린 대로 시체는 하나님의 뜻이 끊어진 대상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시체를 접촉했기에 정결 의식을 치르라는 명령과 우리의 삶에는 어떠한 연관성이 있을까요? 나와 부대끼며 사는 사람들 중에는 다양한 부류가 존재합니다. 꼭 미디안 여인으로 상징되는 풍요와 다산의 가치관을 가진 부류가 아니더라도 기본적으로 세상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과는 무관하게 자기의 계획과 뜻을 실행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을 등졌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 승천하여 하늘로 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가지고 싶어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사는 모든 사람들은 아무리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봐야 전부 시체놀이를 하는 셈입니다.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충만하게 가져서 하나님을 마주하는 상태가 유지되지 않는 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은 예수님 안에 갇혀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하나님을 실시간으로 마주할 수도 없고, 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할 하나님의 뜻이 알려질 수도 없습니다. 그 결과 시체놀이를 하듯 하나님 뜻에 없는 일들을 하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대끼며 사는 사람들 중에는 시체놀이를 하는 자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없는 일을 스스로 뜻하고 계획하여 움직이며 사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도 가나안 땅을 약속의 복지로 획득해 나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하나님 뜻이 나를 장갑으로 끼셔야 합니다. 정결 의식에 대한 언급은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에 대한 답을 주십니다. 쉽게 말해 절대로 시체놀이에 말려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셉의 예를 생각해 봅니다. 요셉은 애굽 사람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렸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보디발은 시체놀이를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하나님의 주권적 뜻으로 보디발의 집안 살림을 통째로 맡게 됩니다. 이때 보디발은 요셉이 하는 일에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참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요셉은 시체놀이를 하는 보디발을 삶에서 제외한 셈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뜻에는 보디발의 경우와는 다르게 삶의 현장에서 시체놀이를 하는 사람을 제외하지 않으시는 경우도 있습니다. 내가 회사에서 과장인데 상사들은 하나님을 전혀 모릅니다. 부장님도, 전무님도, 사장님도 시체놀이를 하는 사람인 셈입니다. 가정에서도 이러한 상황은 벌어질 수 있습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시체놀이를 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이 갖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내든 남편이든 하나님의 존재감으로 충만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등지고 지금 자기 뜻으로 사는 사람이고 시체놀이를 하는 것과 다름 없습니다. 그들과 부대끼며 살더라도 내 마음은 그들에게 말려들어서는 안 됩니다.

시체놀이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계획에 없는 것을 뜻하고 계획하여 움직이는 것일 뿐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옷 장사를 해서 돈을 벌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옷 장사가 하나님 뜻에 없는 일이라면 시체놀이를 하는 것입니다. 돈을 벌든지 못 벌든지 결국 하나님께서는 옷 장사를 못하도록 강력하게 주권으로 통제하실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뜻하고 계획하는 바 중에서 이루어지는 것보다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더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뜻하고 계획했으면 이루어지는 일이 더 많을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통제하시기 때문입니다. 계획하고 뜻하고 움직이는 것은 자기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이 실제로 바라는 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자기 몫이 아닙니다. 성공의 비법을 가르치는 책들이 수없이 나오지만 다 거짓말입니다. 성공하는 사람들의 무슨 습관이라든지, 돈 많이 버는 방법이라든지, 재테크 방법, 건강하게 사는 방법들은 다 거짓말입니다. 그것은 다 시체를 만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 뜻에 없는 일을 스스로 뜻하고 계획하고 움직일 뿐입니다. 정결 의식이 언급된 것에는 이것을 깨달으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시체놀이를 하는 자들에게 쉽게 마음을 열고 이들의 대화에 말려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뜻과 계획을 대화를 통해 받아들이거나 긍정하면 시체놀이에 말려드는 것이고 마음은 더러워지고 하나님과 끊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갇혀야만 합니다. 이는 곧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자가 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시체놀이를 하는 사람과 부대끼며 사는 동안에도 무방비 상태로 마음을 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가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어떤 기업에 취직을 했는데 사장님이 시체놀이를 하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사장님 뿐만 아니라 직장 동료들도 전부 시체놀이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도 시체놀이를 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같은 직장에서 어울리며 일하고 있을지라도 내 마음은 예수님 안에 갇힌 상태에서 시체놀이를 하는 사람들과 단절되어야 합니다.

보디발이 요셉에게 집안일을 전부 맡기기 전에도 요셉은 하나님의 뜻만을 따라서 움직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시체놀이를 하는 사장님을 대하기에 앞서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하기를 원하시는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보디발이 요셉을 좋게 여겼듯이 이러한 나를 사장님은 좋아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싫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이 어떻게 작용하느냐에 달린 일입니다. 바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로도 시체놀이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은 바로 앞에서도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만을 했습니다. 시체놀이를 하는 사람에 말려들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의 생각, 그들의 소원, 그들의 바람, 그들의 시각은 내가 고려할 일이 아닙니다.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나를 좋게 볼까? 어떻게 하면 나를 안 좋게 볼까?’ 이런 것을 따져서는 안 됩니다. 그래야만 복지를 획득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이 나를 장갑으로 끼실 수 있습니다.

 

25~54절에서는 전리품 분배에 대한 말씀이 길게 이어집니다. 이 부분이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분배를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이기고 많은 전리품을 획득했습니다. 여자와 아이를 포함하여 미디안 족속의 모든 소유를 가져왔으니 그 양은 엄청났을 것입니다. 모세는 그것을 절반으로 잘라서 전쟁에 나간 만 이천 명에게 할당하고, 나머지 절반은 이스라엘 회중에게 할당합니다. 군인들은 할당 받은 전리품에서 오백 분의 일을 떼어 제사장에게 돌리고, 이스라엘 회중들 또한 받은 것 중에서 십 분의 일을 레위인에게 돌렸습니다.

250만 명을 헤아리는 이스라엘 백성 중 직접적으로 전쟁에 나갔던 것은 만 이천 명입니다. 그런데 전리품은 온 이스라엘 회중에게 분배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납달리 지파에 속한 이름 없는 가정에 양 몇 마리가 배당이 되었다고 해보겠습니다. 이제 집안의 온 식구들은 모여서 양을 잡아 식사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서 중요한 개념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쟁을 이끄셔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이스라엘이 만 이천 명으로 적을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은 전쟁이 시작되기 이전에 이미 분배의 계획을 갖고 계셨습니다. 이날 납달리 지파의 이름 없는 한 가정의 10살 짜리 막내딸이 양고기를 먹었다면 그것은 단순히 이스라엘이 전쟁에 이겼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디안 사람들이 갖고 있던 양이 그 집에 분배가 되고, 10살 짜리 막내가 양고기 중에서도 다리의 윗부분을 먹을 것을 예상하시고 계획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합니다. 이스라엘이 승리해야 되는 이유 속에는 납달리 지파의 10살짜리 막내딸에 대한 계획까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아이가 이스라엘이 패배한 상황 속에 놓이면 안 된다는 하나님의 개별적 뜻이 만 이천 명이 이룬 승리 속에 한 부분으로 들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승리는 단순히 만 이천 명의 행동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직접적으로 나가 싸운 것은 만 이천 명이었지만, 이 승리의 이유 속에는 250만 이스라엘 각자에 대한 하나님의 개별적 뜻이 다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만 이천 명이 움직여서 이루어진 전쟁의 승리는 만 이천 명만을 위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250만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이루어 낸 것이었습니다. 회중 전체에게 전리품을 분배한 것에는 바로 이러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말씀이 우리 삶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 두 자녀를 둔 가정에서 아빠가 열심히 돈을 벌어서 십 년 만에 집을 샀습니다. 새로 이사한 집에서 가족들이 식사를 하며 아빠의 수고를 칭찬합니다. 한 사람당 하나씩 놓던 계란프라이를 아빠에게는 수고했다며 세 개씩 얹어줍니다. 아빠는 마치 왕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집을 사게 하신 하나님의 주권적 계획에서 아빠의 비중이 가장 큰 것 같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하나님의 뜻의 비중은 전혀 다를 수 있습니다. 이 가정에 새 집을 주신 하나님의 뜻에는 직접적으로 일을 해서 돈을 번 아빠보다도, 아무 일도 하지 않은 5살 꼬마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더 무거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꼬마가 이 집에서 살아야 하기에 아빠를 통해 집을 사게 하신 것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빠가 새 집을 사기 위해 돈을 모으게 하신 행동 속에는 엄마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두 자녀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 그중에서도 5살 짜리 막내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까지 다 담겨 있습니다. 아빠가 돈을 잘 벌었기 때문에 아내와 두 자녀가 새 집에 살게 된 것이 아니라 가족구성원 각자에 대해 하나님이 갖고 계신 뜻과 계획 때문에 아빠가 집을 사게 된 것입니다.

 

친구 목사님 부부가 강릉에 오셨을 때의 일입니다. 이분은 미국 프린스턴에서 같이 공부했던 분입니다. 이후에 저는 캐나다 밴쿠버로 갔고, 이분은 캐나다 몬트리올에서 목회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경제적으로 많은 고생을 하셨습니다. 아들이 토론토에서 대학을 다니며 회계를 공부했는데 학비가 매우 비쌌습니다. 그런데 부모님의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한 채 온갖 아르바이트를 다 하면서 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이후 아들이 회계사로 취업을 하고 치과 의사인 여자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여자 친구에 의해 다시 치의학 공부를 하게 되었고, 여자 친구의 아버지가 대출까지 받아 가며 돈을 빌려주어서 호주에서 치과 의사로 개업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목사인 아버지와의 갈등은 여전했습니다. 아버지는 그건 다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진 것이다.’라고 말하는데 아들이 보기에는 아버지가 너무 뻔뻔해 보입니다. 여자 친구의 아버지는 대출까지 받아 가며 지원을 해줬는데, 정작 아버지는 아무것도 안 하고 어떻게 그런 뻔뻔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자면 하나님의 뜻대로 다 이루어졌다.’라는 말만 하면 되는 것이냐고 따지는 아들의 마음도 이해가 됩니다.

다만 우리는 여기서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도움을 못 준 아버지가 미안하단 말 한 마디도 못한 상황이 전부일까요? 아니면 하나님께서 아들에 대해 갖고 계신 본래의 계획을 염두에 둔다면 다르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하고 여자 친구를 만나서 그 집안이 아들을 돕게 한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라서 일부러 아버지를 가난하게 하셨다고 생각해 볼 수는 없을까요? 반대로 아버지가 돈이 많아서 아들을 마음껏 지원해 줬다면 여자 친구를 만날 수 있었을까요? 진로를 바꿔 치과 의사가 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이 아들에 대한 계획이 있으셨기 때문에 일부러 아버지를 경제적으로 어렵게 하셨을 수도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부대끼는 사람들 사이에는 하나님의 뜻이 얽혀 있습니다. 단순히 아버지가 돈이 없어서 아들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부를 해야 했는지, 아니면 아들을 치과 의사의 길로 이끄시기 위해 아버지에게 돈이 없는 상황으로 이끄셨는지는 하나님의 속을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복지를 사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삶이란 한강에 돌을 던지면 퐁당 빠지듯이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부대끼며 사는 사람들과의 관계에는 하나님의 뜻이 얽혀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는 내 인생을 산다,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는 복지를 살 수 없습니다. 그러한 단편적인 생각으로는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까지 포함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내 안으로 들어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뜻 안에는 내가 지금 부대끼며 살고 있는 사람들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 말 한마디, 내 행동 하나에는 나와 관계된 모든 사람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일정 부분 지분이 있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고 내 말과 행동이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나 혼자 잘 살면 된다. 내 발등의 불도 못 끄고, 내 코가 석 자인데 무슨 남을 신경 쓰느냐?’라는 태도로는 복지를 살 수 없습니다.

오히려 남을 신경 쓰지 않기에 삶은 더 어려워지고 복지를 살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에 올라타기는 더 어려워집니다. 우리는 말하고 행동하려고 할 때마다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배우자로부터 시작하여 나와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나와 관계되어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시체놀이를 하고, 풍요와 다산에 찌든 사람들일지라도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존재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그러한 사람들에게 말려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 모두를 보고 계시고, 계산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은 내가 하는 말과 행동에 몫이 있고, 분깃이 있고, 지분이 있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이 점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을 때 나와 하나님의 관계는 늘어지지 않고 팽팽하게 유지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묶여서 하나님의 뜻대로만 움직이는 토대가 됩니다. 이것이 잘 드러나는 말씀이 주기도문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부분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본문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우리의 삶이란 나만 잘 살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자 한다면, 내 말에는 그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담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이 내 멋대로 내뱉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무척 어려울 것 같고 힘들 것 같지만 실상은 반대입니다. 이것이 자연스러울 정도로 내 의식 속에서 활발해지면 훨씬 편해집니다. ‘나만 잘 살면 된다, 나를 생각하기도 버겁고 힘들어 죽겠다.’라고 생각하며 살 때보다 훨씬 하나님과의 관계가 팽팽해 집니다. 하나님의 뜻이 나를 붙들고 받쳐주기 때문에 내 뜻과 계획과 소원과 바람을 가지고 살 때보다 훨씬 더 쉽습니다. 탱탱하게 탄력을 받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나가서 싸운 것은 만 이천 명이지만 전리품은 250만 이스라엘 전체에 분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모든 가문에 분배돼야 될 몫은 물론이고, 250만 명 모두의 입으로 들어갈 양고기까지도 계산되어 있었습니다. 납달리 지파의 이름 없는 집안의 10살짜리 막내딸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살기 위해서는 만 이천 명이 승리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본문 48절 이후를 보면 만 이천 명이 개인적으로 습득한 금은보화에 대해 죄의식을 느끼면서 제사장 앞으로 가지고 나오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49~50절을 보면 모세에게 말하되 당신의 종들이 이끈 군인을 계수한즉 우리 중 한 사람도 축나지 아니하였기로 / 우리 각 사람이 받은 바 금 패물 곧 발목 고리, 손목 고리, 인장 반지, 귀고리, 목걸이들을 여호와께 헌금으로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죄하려고 가져왔나이다라고 했습니다.

이 전쟁에서 한 사람도 다치거나 죽지 않은 것은 사람이 한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하신 일인데, 멋대로 보화를 취할 수는 없다고 여겨 그것들을 가지고 나왔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내가 전쟁에 나가 싸웠지만 그 결과를 내가 다 가져도 되는 것이 아니구나. 내가 싸워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이 전쟁에 나가 싸운 우리의 행동 속에 담겨 있었다.’라고 깨달았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개인적으로 획득한 금은보화를 제사장 앞에 다 내놓았습니다.

우리의 말 하나 행동 하나는 나만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부대끼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적용하려는 뜻과 계획이 일정 부분 들어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말하고 행동하려고 할 때마다 주의 기도를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나와 부대끼는 사람들의 모든 관계에 아버지의 주권적 뜻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제가 생각하고 감정과 의지가 움직이고 말하고 행동할 때마다 하늘에서 이루신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아버지의 뜻이 아닌 것을 말하고 행동하는 악에서 구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뜻이 나를 장갑으로 끼시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고 아무것도 행동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이 나를 장갑으로 끼실 때는 막힘없이 말하고 거침없이 행동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그럴 수 없다면 시체놀이를 하며 미디안 여자들처럼 풍요와 다산을 좇는 잘못한 상태로 살게 될 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우리 마음은 죽을힘을 다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 안에 갇힐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 안에 갇혀야 하나님을 실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 부대끼는 사람들에 말려드는 것이 아니라, 부대끼는 사람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위하여 하루하루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부대끼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풍요와 다산의 가치관, 그리고 시체놀이에 말려들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모든 자들을 위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뜻이 포함된 계획만을 수행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하여 오늘도 무조건 절대적으로 반드시 예수님 안에 우리 마음이 머물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