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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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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지루한 삶도 복지로 바꾸는 비법

by 태승철 · 25-10-20 07:06 · 353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지루한 삶도 복지로 바꾸는 비법>의 줄거리 :

우리가 약속의 복지를 사는 일은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가나안 땅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 삶의 모든 현재 상황에 숨겨져 있습니다. 왜냐면 내 삶의 모든 현장을 위해서는, 이루어지면 보시기에 좋을 창조적인 뜻이 이미 하늘에서 준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든 뜻은 현재 상황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약속으로서의 뜻이 이루어지면 나의 일상은 복지의 삶이 됩니다. 이제 이렇게 지루한 모든 일상조차 약속의 복지로 바꾸는 비법이 있어 알려드립니다.

 

 

지루한 삶도 복지로 바꾸는 비법

 

(민수기 31:1~12)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으라 그 후에 네가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라

3. 모세가 백성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와 함께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전쟁에 나갈 사람들을 무장시키고 미디안을 치러 보내어 여호와의 원수를 갚되

4.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게 각 지파에서 천 명씩을 전쟁에 보낼지니라 하매

5. 각 지파에서 천 명씩 이스라엘 백만 명 중에서 만 이천 명을 택하여 무장을 시킨지라

6. 모세가 각 지파에 천 명씩 싸움에 보내되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에게 성소의 기구와 신호 나팔을 들려서 그들과 함께 전쟁에 보내매

7. 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미디안을 쳐서 남자를 다 죽였고

8. 그 죽인 자 외에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였으니 미디안의 왕들은 에위와 레겜과 수르와 후르와 레바이며 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

 

 

본문 말씀 중심으로 <지루한 삶도 복지로 바꾸는 비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이러한 제목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삶 뿐만 아니라 무료할 정도로 아무 일도 없이 루틴이 반복되고 있는 일상도 약속의 땅 복지로 바꾸는 비법이 있다는 뜻입니다. 위기의식이 느껴지는 삶이든, 바쁜 삶이든, 지루한 삶이든 우리에게 주어진 삶 전체를 약속의 땅인 복지로 바꾸는 비법이 있습니다.

 

민수기 31장 전체에는 미디안 정벌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디안 정벌은 모세 생애의 마지막 과업입니다. 미디안 정벌이 끝난 후 모세는 죽고 여호수아가 지도자의 자리에서 본격적으로 가나안 전쟁을 실시해 나가게 됩니다. 사실 미디안은 요단강 동쪽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가나안 정복 전쟁의 대상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바알브올 사건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바알브올이란 브올에 있는 바알이라는 뜻으로써, 이스라엘 남자들은 미디안 여자들의 미인계에 유혹되어 바알 숭배 의식에 참여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만 사천 명이 염병에 죽는 하나님의 징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건 뒤에 미디안을 이스라엘의 원수라 지칭하시고, 모세 또한 미디안을 여호와의 원수라 지칭합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미디안은 사랑하는 선민 이스라엘이 가장 소중한 보물인 하나님 자신을 잃게 만든 원수였습니다. 모세의 입장에서 미디안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가장 소중히 여기시는 선민을 잃게 만든 원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선민이 하나님을 잃게 만든 미디안에 대한 정복 전쟁을 하게 하시고, 또한 이것은 이제부터 시작될 가나안 정복 전쟁의 연습이 되게 하십니다.

이러한 본문의 사건은 어떻게 해야 눈에 보이는 땅을 약속하신 복지의 땅으로 얻을 수 있느냐를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연습시키시듯 미디안과의 전쟁을 통해 터득하게 하십니다. 선민은 미디안과의 전쟁을 통하여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가나안 땅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할 때 어떤 점에 유의해야 하는가를 연습하고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본문에는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비법대로 하면 우리도 이스라엘처럼 약속의 땅을 획득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의 땅은 어디에 있을까요?

우리의 약속의 땅은 현재 내게 주어진 삶의 현장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내 몸이 어디로 가든지 삶의 현장은 진행됩니다. 그 삶의 현장 속에 하나님의 약속의 땅이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나안 땅은 멀지 않습니다. 내 몸이 처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땅을 내 땅으로 획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내가 처한 모든 삶의 현장이 가나안 땅이고, 그 속에 약속의 땅이 숨겨져 있다는 것일까요?

지금 여러분이 처해있는 상황을 봅니다. 그 상황은 눈에 보이는 대로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상황은 하나님께서 창조적으로 보시기에 좋게 이루시려는 뜻을 약속으로 담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것을 깨닫지 못한 채, 삶의 상황을 눈에 보이는 대로만 평가하고 판단하고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눈에 어떻게 보이든지 주어진 상황은 가나안 땅과 같습니다. 이제부터 이 가나안 땅을 약속의 복지로 바꾸어 획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삶의 현장 속에는 하나님께서 뜻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 뜻은 지금 상황에서 이루어지면 보시기에 좋은 것들입니다. 그렇기에 현재 삶의 상황은 이루어지면 보시기에 좋은 하나님의 뜻이 약속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상황을 뿌리치려 하거나 거부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상황을 원해서도 안 됩니다. 지금 상황에서 약속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모든 삶의 현장을 가나안 땅에서 약속의 복지로 바꾸어 사는 삶이 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결국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은 예수님 안에 내 마음이 들어가서 예수님 안에 갇히는 상태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치 감옥에라도 갇히듯이 내가 예수님의 안에 갇혀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믿음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은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뜻을 약속으로 붙잡고 계십니다. 쉽게 말해 네가 있는 상황에서 나는 이룰 것이 있다.’라고 여기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약속은 내가 생겨 먹은 대로 죄와 저주의 상태를 유지하는 동안에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죄와 저주에 찌든 상태는 극복되어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음으로써 연합하고, 내 마음이 예수님 안에 들어가야만 합니다. 다시 말해, 마음이 예수님 안에 갇히는 것과 같은 상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은 예수님 안에 갇히는 상황이 어떤 의미를 가지며, 이로부터 내 삶의 처지가 어떻게 약속의 복지로 바뀔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십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고 죄와 저주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마음에서 그리스도의 할례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할례란 십자가를 통해 마음에서 몸을 끊는 것입니다. 내 마음은 십자가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갇혀야 합니다. 갇힌다는 표현이 부정적으로 느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더 좋은 표현도 있겠습니다만 실감나게 말씀드리자면 예수님은 내 마음의 감옥이 되어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 죗값을 치르려면 내가 예수님이라는 감옥에 갇히는 죄수가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모든 삶의 현장에서 내 마음이 죄수처럼 예수님 안에 갇히면, 본래 삶의 현장에서 이루고자 하신 하나님 뜻의 약속들은 이루어집니다. 쉽게 말해 복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마음이 예수님 안에 갇히는 상황이 어떻게 표현되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미디안 전쟁에 나갈 군사를 발탁하게 하십니다. 4~5절을 보면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게 각 지파에서 천 명씩을 전쟁에 보낼지니라 하매 / 각 지파에서 천 명씩 이스라엘 백만 명 중에서 만 이천 명을 택하여 무장을 시킨지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2차 인구조사의 결과 드러난 이스라엘에서 싸울 수 있는 장정의 숫자는 백만 명이 아닌 육십만 명이었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정확한 숫자를 계산하라는 뜻이 아니라 백만이라는 큰 수와 만 이천이라는 작은 수를 대비하고 계신 것입니다.

실제로 전쟁에 나갈 수 있는 군사의 숫자는 많지만 하나님께서는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너무 작다고 의심될 정도의 숫자만을 동원하게 하십니다. 이를 통해 가나안 전쟁을 해나갈 때 마음가짐이 어때야 하는지를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너희들이 전쟁에 이겨서 가나안을 약속의 땅으로 살게 되는 것은 군사력의 강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가나안을 약속의 땅으로 주려는 것은 오로지 나의 강력한 의지로 이루어지는 일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도의 말씀은 우리에게도 주시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우리의 현재 삶의 상황이 세상 사람들 기준에는 열악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상황은 지금의 현장을 복지의 땅으로 바꾸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적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하고, 쉬지 않는 기도를 하는 복지의 삶이 가능한 이유는 내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몸이 아파 괴로울 수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 괴로울 수 있습니다. 자녀가 말을 안 들어서 괴로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기쁨과 기도와 감사가 넘치는 가나안 복지의 삶으로 바뀌는 것은 나의 역량이나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복지의 삶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라는 말씀대로 우리 삶에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상황이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어떤 상황이냐를 평가할 필요가 없습니다. 현재 상황이 힘들고 어렵더라도 지금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올라타서, 그 의지에 따라 현재 상황을 약속의 복지로 바꾸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좋은 뜻을 약속으로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삶은 복지가 됩니다.

여러분이 지금 어떠한 상황에 있더라도 그것을 거부할 필요가 없는 것은 그 현장 속에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늘에서 뜻하신 약속을 품고 있으시기에 그 약속을 이루심으로 약속의 땅이 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의지가 표현되도록 올라타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눈에 보이는 상황을 복지로 바꾸어 주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에 올라탈 수 있을까요? 이와 관련하여 본문을 보면 재미있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만 이천 명이 미디안을 정벌하기 위해 이제 출정을 합니다. 이때 모세는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에게 성소의 기구와 나팔을 들고 함께 전쟁에 나가도록 합니다. 비느하스 또한 성인으로써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 모든 전쟁에는 나팔이 동원되었습니다. 따라서 전쟁에 참여하는 군인들 중에서 나팔수를 발탁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경우는 군인들 중에서 나팔수를 발탁한 것이 아니라 제사장이 전쟁에 참여하여 나팔을 불었습니다. 전쟁에 칼과 창과 방패를 들고 참여하는 군인들은 싸움의 전문가입니다. 그러나 제사장은 이들과 같은 싸움의 전문가가 아닌 하나님 관계하기의 전문가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관계하기의 전문가인 제사장 비느하스가 전쟁터에서 부는 나팔은 일반적인 전쟁에서 부는 나팔과는 의미가 달랐습니다. 이 나팔은 전쟁에 이기기 위한 사기 진작의 용도가 아니고, 전술적 용도를 위한 것도 아닙니다. 이 점이 참 재미있습니다. 제사장이 전쟁터에서 부는 나팔은 하나님 관계하기를 위한 나팔 소리입니다.

하나님 관계하기에 전문가인 제사장은 평소에는 제사를 드림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을 돕습니다. 그런데 전쟁터에서는 제사 대신에 나팔 소리를 통해 전쟁터에 나간 군인들이 하나님과 관계하기를 도왔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항상 지속되어야만 합니다.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하다가, 전쟁에 나가서는 이제 상을 받듯이 하나님이 이기게 해주시면 되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평소에는 제사로 하나님 관계하기를 돕던 제사장이 전쟁 때에는 성소의 기구와 나팔을 들고 나가서 붑니다. 제사장은 마치 강요하듯이 군인들이 전쟁터에서도 하나님과 관계하기를 도왔던 것입니다.

전쟁터에서는 칼과 창을 들고 나를 향해 달려드는 적이 첫 번째 관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선민이라면 전쟁터에서조차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시해야 했습니다. 내 마음에서 적군보다 하나님이 더 가까이 계심을 실감할 수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실감하지 않으면 하나님 관계는 불가능합니다. 이것을 일깨우고자 제사장은 나팔을 불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개념으로만 알고, 교리로만 이해하고, 하나님에 관한 모든 가르침에 동의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관계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는 실제 생활에서 지속되어야 합니다. 내 눈앞에 살아 움직이는 대상들이 있고 사건들이 터지고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이나 사건의 존재감보다도 하나님을 실감함으로써 믿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 예가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다 풍랑을 만난 사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풍랑보다 하나님의 있음을 더 먼저 실감하고 계셨기에 편안하게 주무셨습니다. 풍랑이 일고 있었지만 하나님이 그 자리에 계심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풍랑은 살갗에 닿고 있지만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살갗보다도 내게 더 가까이 계십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과 다르게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풍랑만을 실감하며 살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실감하면 풍랑 속에서도 예수님처럼 하나님께 반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하면 제자들처럼 눈에 보이는 풍랑에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로부터 나팔 소리가 필요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전쟁이 시작되면 적군이 달려오고 나도 그들을 향해 달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뒤에서 비느하스가 나팔을 붑니다. 선민의 군인들은 적군만 실감하다가 나팔 소리를 듣고는 하나님을 떠올립니다. ‘! 지금 내 눈앞에서 달려오고 있는 적보다 내 마음 더 가까이에 하나님이 계신다.’라고 깨달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전쟁터는 숨도 못 쉴 정도의 급박한 상황이 벌어지는 곳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하나님께 양해를 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주 잊어버리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잠깐 바쁜 일을 처리하고 다시 하나님을 기억하면 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십니다. 그러한 마음가짐으로는 삶이 복지로 바뀔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이 약속의 복지로 바뀌기 위해서는 전쟁 중에도 하나님을 잊을 수 없음을 가르쳐주십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 삶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는 우리 삶의 모든 현장을 가나안 땅에서 약속의 복지로 바꾸려 하십니다. 이때 제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실감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제사장은 마치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요하듯이 나팔을 불었습니다. 가나안 땅이 약속의 복지가 되려면 약속을 품고 계시는 하나님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역사하고 계시니, 내가 실감하든 하지 않든 하나님은 있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모든 삶의 현장에서도 주권적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믿지 않는 사람의 삶의 현장에도 계십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그곳에 계신 하나님을 실감하느냐 못하느냐에서 비롯됩니다.

미디안과의 전쟁이 일어난 이유는 이스라엘 남자들이 미디안의 미인계에 넘어가서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잃어버렸고 하나님을 실감에서 놓쳤습니다. 미디안 여인들과 어울려 바알 숭배에 참여하는 동안 하나님보다 미디안 여인을 더 실감하고 바알을 더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 실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과 관련된 교리를 알고, 동의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실제로 눈앞에 보이는 사람과 사건과 사물들보다 마음에서 내 피부보다도 더 가까이 계시는 창조주 하나님을 실감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하면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습니다.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한다면 권사든 장로든 목사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은 처지입니다. 단지 교리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이해하고 동의하고 있을 뿐입니다. 실감이 없다면 하나님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기에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약속의 땅인 복지도 불가능합니다.

 

삶의 현장이 복지로 변하려면 복지의 뜻을 약속으로 붙잡고 계신 하나님을 내가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지는 방법은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갖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존재감은 눈앞에서 나를 향해 칼을 들고 달려드는 적보다도 더 커야만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삶의 현장은 복지가 될 수 없습니다. 전쟁터는 인간이 하나님의 있음을 잊어버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조건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기가 어려운 가장 극한의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전쟁터에서 제사장이 나팔을 불게 하심으로써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에게도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실감할 것을 가르쳐주십니다. 삶에서 어떤 급박한 상황이 벌어질지라도 하나님 있음을 실감하기를 멈춰도 괜찮을 상황은 없다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는 극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실감했습니다. 그렇기에 하늘이 열리고 보좌에 하나님이 계시고 우편에 예수님이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서 돌로 치는 자들보다도 천국과 하나님과 예수님이 더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실감했던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는 상황 속에서도 약속의 복지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의지는 이처럼 강력합니다. 우리 또한 돌에 맞아 죽는 상황 속에서도 약속의 복지를 허락하시려는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를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강력한 의지에 올라탈 수 있는 비결은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강력한 의지로 가나안 땅을 약속의 복지로 제시하셨듯이 우리의 삶을 약속의 복지로 바꾸어 가실 것입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과 끊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있음을 실감하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만질 수 있는 어떤 대상보다도 더 먼저 실감하고 더 강하게 실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삶을 복지로 살기 위해서는 이것 하나만 할 수 있으면 됩니다. 그래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 안에 갇혀야 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전쟁터에 나갔는데 주님을 믿고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그러면 마음은 예수님 안에 갇힙니다. 예수님의 부활 승천의 길을 통하여 하나님을 실감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면 전쟁터에서도 복지는 이루어집니다. 내 몸이 어디 있든지 문제가 안 됩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을 첫 번째 존재로 붙잡을 때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말과 행동의 다섯 요소는 하나님의 장갑이 됩니다. 하나님이 하늘에서 약속으로 품고 계셨던 뜻이 나의 지정의 언행을 장갑으로 끼시고 활동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실감할 때 일어나는 일입니다.

내 몸에 어떤 상황이 주어지더라도 눈에 보이는 어떤 대상보다 하나님을 먼저 강하게 실감합니다. 내 마음에는 하나님만 있으면 됩니다. 내 마음에 하나님이 있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하나님의 있음을 실감함으로써 영이신 하나님이 내 마음에 있게 되십니다. 그렇게만 하면 하늘에서 하나님이 약속으로 품고 계셨던 뜻이 나의 지정의 언행을 장갑을 끼심으로써 이 땅에서 복지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전쟁은 이스라엘이 미디안과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백만이라는 큰 수와 만 이천이라는 작은 수를 대비하시며 선민이 복지를 얻는 것은 숫자와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가나안 땅을 약속의 복지로 바꾸는 것은 이스라엘의 숫자가 아닌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입니다. ‘너희의 노력과 너희의 능력과 너희의 역량을 가지고 가나안 땅을 복지로 바꿔 사는 것이 아니다. 나의 강력한 의지가 너희를 향해 발동될 수 있는 조건만 이루어라.’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그 조건이란 내 마음에 하나님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실감하면 됩니다. 이 실감이야말로 선민이 싸워야 할 전쟁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전쟁은 적과 싸우는 전쟁이 아닌 하나님 실감 전쟁입니다. 무력 전쟁이 아니라 실감 전쟁입니다. 무력 전쟁은 하나님이 내 지정의 언행을 장갑으로 끼시고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지정의 언행을 하나님의 약속인 뜻이 끼실 수 있도록 마음에서 하나님을 실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실감 전쟁에서 이기면 무력 전쟁은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우리 삶에는 다양한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배우자나 자녀가 이런저런 말과 행동으로 여러분의 마음을 어지럽힐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전쟁이 벌어진 것입니다. 내가 지금 배우자나 자녀를 마주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의지는 강력합니다. 가나안 땅을 약속의 복지로 바꾸시듯이 내가 마주 보고 있는 대상을 복지로 만드시고자 하십니다. 다만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눈앞에 있는 대상이 배우자든 자녀든 건강 문제든 돈 문제든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을 더 강하게 먼저 실감하라는 것뿐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나의 지정의 언행을 장갑처럼 끼시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뜻들을 이루어 가십니다.

 

믿음은 실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실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까지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실감을 완전히 제외하고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있음에 대해 존재감을 느끼고 실감하는 일은 나와는 상관없다고 여겼습니다. 그저 교리로 하나님에 대한 개념에 동의하고,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받아들이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시고, 전지전능하시다고 하니 그러려니 하며 아멘!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작 창조주이자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삶에서 실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24시간 지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적 다스림도 24시간 지속되고 있습니다. 내 머리털 하나가 요만큼 박혀 있고 떨어져 나간 것까지도 하나님의 주권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내 몸의 오장육부와 세포 하나까지도 하나님의 주권적 창조적 손에 의하여 다스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이것을 개념으로만 알고 있지 실감하지 못합니다.

창조주이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내 세포 하나까지 24시간 조정하고 계시고, 그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어주신다고 합니다. 내 생애에 이것보다 더 큰 사건은 있을 수 없습니다. 내 몸에 병이 났다고 해서 창조주이자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건보다 더 크고 중요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는 내 삶을 보시기에 좋은 약속이 이루어지는 복지로 만드시려는 강력한 의지를 품고 계십니다. 이 상황보다 더 큰 사건이 따로 있다고 저를 설득하실 수 있다면 전 재산이라도 다 드리겠습니다. 창조주이자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내 몸보다도 더 가까이 계시고, 그 아버지의 있음 보다 더 큰 사건이 없다는 사실은 너무나 확고합니다. 이보다 더 큰 사건은 없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있음을 내가 실감하는 것보다 더 급박한 사건도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실감하게 하는 사건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우리 마음은 예수님 안에 갇힙니다. 죄인으로 살던 우리이기 때문에 죗값을 치르기 위해서는 마치 감옥에 갇히듯 예수님 안에 갇혀야만 합니다. 마치 감옥에서 종신형을 살듯이 예수님 안에서 사는 자들인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 갇혀버렸기 때문에 세상과 단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나는 부활 승천으로 열린 길을 따라 하나님을 실감할 수 있을 뿐이지 세상을 실감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자체가 세상 실감이 죽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고백합니다. 고백대로 세상에 대해 죽은 자라면 세상을 실감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바로 이것을 비느하스가 나팔을 들고 전쟁터에 나가게 하신 것으로 가르쳐주십니다. 제사장은 싸움의 전문가가 아닌 하나님 관계하기의 전문가입니다. 이러한 제사장이었던 비느하스가 전쟁터에서 나팔을 불며 선민인 군인들이 적군보다도 하나님을 먼저 실감하며 하나님 관계하는 걸 돕습니다. 본문은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 실감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을 실감한 결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은 둘째 문제입니다. 첫 번째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풍랑 만난 배의 사건을 통해 잘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실감하셨고 풍랑 속에서도 깊은 잠을 주무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느끼시던 평강이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실감하면 그 자체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아무쪼록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마치 종신형을 사는 죄수처럼 마음이 예수님 안에 갇히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에서 어떤 극한 상황 속에서라도 나팔에 대한 언급처럼, 풍랑 속의 예수님처럼, 스데반 집사님처럼, 사도 베드로처럼, 사도 바울처럼 하나님을 먼저 실감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음이 부풀어 오릅니다. 복지는 하나님에 의해 계획되었고, 하나님이 이루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있음을 실감함 자체에 꿈을 갖고, 비전을 갖고, 바람과 소원을 집중합니다. 주님 안에 갇혀서 세상에 대해 진짜로 죽게 하셔서 세상에 대한 실감이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직 주님의 부활 승천을 따라 올라가 하나님만을 실감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