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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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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종교인, 제사 생활인 차이_태승철

by 태승철 · 25-10-16 17:33 · 33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제사 종교인, 제사 생활인 차이>의 줄거리 :

각종 절기 제사에 대한 규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월절의 무교절과 칠칠절, 그리고 나팔절, 대속죄일, 장막절 등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약의 제사를 바라보는 일에서 종교인의 관점과 십자가 생활인의 관점이 너무나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제사를 종교의 관점으로 보면 축제가 됩니다. 그러나 제사를 십자가 생활인의 관점에서 보자면 가장 영적인 경계심을 강화하기 위한 몸부림이 됩니다. 이 둘의 관점 차이를 각종 제사를 통해서 한 번 살펴봅니다.

 

 

제사 종교인, 제사 생활인 차이

 

(민수기 28:16 ~ 29:40)

 

16. 첫째 달 열넷째 날은 여호와를 위하여 지킬 유월절이며

17. 또 그 달 열다섯째 날부터는 명절이니 이레 동안 무교병을 먹을 것이며

17. 그 첫날에는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며

19. 수송아지 두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된 숫양 일곱 마리를 다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께 화제를 드려 번제가 되게 할 것이며

 

26.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이며

27. 수송아지 두 마리와 숫양 한 마리와 일 년 된 숫양 일곱 마리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

 

 

오늘은 두 장에 걸쳐서 제사에 관한 내용을 보겠습니다. 유월절에 대한 내용으로부터 절기 제사 전체에 대한 내용을 볼 것입니다. 16~25절까지는 유월절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26~31절에는 칠칠절에 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칠칠절은 유월절 이후 50번 째 날입니다. 오순절이라고도 하고 봄에 보리를 거두는 첫 번째 수확 기간이기 때문에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29장으로 넘어와 1~4절에서는 나팔절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팔절은 종교력에 따라서는 일곱째 달의 첫째 날이지만, 히브리 월력을 따지자면 정월 초하루입니다. 이어서 7~11절에는 종교력으로 710일의 대속죄일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대제사장이 일 년에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서 속죄의 과정을 집례합니다. 한편 12절 이후로는 장막절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장막절은 초막절이라고도 하고 수장절이라고도 합니다. 모든 곡식을 다 추수하여 곳간에 넣는 절기입니다. 장막절 제사는 무려 8일 동안 진행됩니다. 특이한 점은 일곱째 날까지는 매일 어린양을 14마리씩 번제로 드리는데, 수송아지는 첫째 날은 13마리, 둘째 날은 12마리, 셋째 날은 11마리와 같은 식으로 해서 일곱째 날에 7마리를 드립니다. 그리고 마지막 여덟째 날에는 한 마리만을 드립니다. 수송아지는 71마리를 드리고, 매일 어린양 14마리씩을 드렸으니 엄청난 양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2940절까지 이어집니다.

이러한 내용 중심으로 제사 종교인, 제사 생활인 차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말씀드렸듯이 모든 제사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단번에 이루어졌습니다. 제사 생활인이란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고, 제사 종교인이란 기독교 종교인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종교인과 십자가 생활인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 종교인과 하나님 생활인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단순한 종교의 신으로 믿는 사람이 있고, 하나님을 생활 속에서 믿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한 예수님과 관련해서 예수 종교인과 예수 생활인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생활 속에서 믿는 사람들과 예수님을 종교적 구세주로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종교인과 생활인이 구약에 제시되고 있는 제사를 바라보는 관점이 극명하게 차이가 납니다. 우리는 제사 종교인과 제사 생활인이라는 표현을 통해 어떤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이것은 기독교 종교인이라고 말할 수 있는 특정 집단을 향한 비판이 아닙니다. 제가 이번 주 월요일, 화요일에 겪은 특별한 경험을 말씀드려 보고자 합니다. 본문의 내용과 일치되는 부분이 있는 경험입니다. 월요일, 화요일 이틀간 저를 골똘하게 생각하게 하는 주제가 있었습니다.

강릉에서 이틀 동안 제가 목사 안수를 받은 장로교 통합측 교단의 강원도 노회가 있었습니다. 지방별로 노회가 있고 전국을 총괄하는 총회가 있는 식입니다. 이 기간에 저는 집사람과 함께 십자가 생활화를 하시는 사모님들을 만났습니다. 오후에 만나서 십자가 생활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저녁 식사를 같이 하면서 시간을 이어갔습니다. 보통 오전 중에 만남을 갖고 점심을 먹고 헤어지는데, 이날은 저녁을 같이 하게 됐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목사님들이 강릉에 있는 통합측 교단의 노회를 마치시고 저녁 때 그곳에서 식사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모님들도 자유로운 시간이 있으셨기에 오후 늦게 만나서 이야기를 나눴고 식사도 하게 되었습니다. 저와 집사람과 사모님 다섯 분을 포함하여 일곱 명이 모인 셈입니다.

다섯 사모님의 목사님들이 노회에 참석하셨는데, 그분들이 다 저의 동기거나 후배인 목사님들입니다. 노회를 하고 있기 때문에 강원도에서 목회를 하시는 장로회 신학대학 출신 통합측 목사님들은 다 모인 셈입니다만 정작 저는 강릉에 살면서도 노회에 참여하신 목사님들과는 별개로 사모님들과 모여서 십자가 생활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노회에서는 목사님들이 각종 업무를 다루시며 표결하는 과정을 하고 계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제 마음속에 속된 말로 현타라 부르는 현실 자각 타임이 왔습니다. 노회는 기독교 종교 조직의 근간입니다. 그런데 저는 노회에 참여하지 않고 사모님들과 대화를 하며 내가 정말로 기독교 종교 바깥으로 나와 있구나.’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다른 목사님들이 노회라는 종교 조직 안에서 업무를 보고 계시는데, 저는 바깥에서 사모님들과 십자가 생활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지역마다 다닐 때 부인들에게 십자가 복음을 전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떠올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안수를 받은 장로교 통합측 교단의 규정이 생각났습니다. 통합측 교단의 규정은 목사 안수를 받은 사람이 통합측 교단이 인정하는 교회나 학교 같은 기관 등에서 사역하지 않은 채 3년이 지나면 목사직에서 자동 면직이 됩니다. 저는 십자가 복음 전파를 쉰 적이 없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십자가 복음을 전해왔습니다. 그런데 교단에서 인정하는 기관에서 사역하지 않은지 벌써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났습니다. 진즉에 저는 통합측 교단 규정에 따르면 목사가 아닌지가 20년이 된 셈입니다.

교단에서 인정하는 기관에서 일하면 그것이 노회를 통해서 총회로 보고가 됩니다. 그런데 저는 교단에서 인정하는 기관에서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유튜브를 통해서 방송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3년이 지났을 때 교단에서 자동으로 면직 처리되었다는 통보가 왔던 것은 아닙니다. 물론 제가 그러한 규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목사라는 호칭을 거두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성도님들이 저를 부를 호칭이 마땅하지 않았기에 목사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방치하는 상태로 지금까지 왔습니다. 흔히 대화할 때 예의를 갖춰서 상대방을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강릉에서 노회가 열리고 강원도 목사님들이 다 모였는데 저는 사모님들과 십자가 생활화를 나누고 있다 보니, 내가 실제로 사회 규정상 목사가 아니라는 자각이 뼛속까지 들게 되었습니다.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는데 그것을 의식하면 할수록 제 속에 남아있던 종교의 묵은 때가 벗겨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장로교 통합측에서 유아세례를 받고 자라서 목사가 되어 목회까지 했으니 묵은 때가 있을 만도 합니다. 그러나 제가 목사가 아님을 실감하니 종교의 묵은 때가 말끔히 없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던 것입니다. 이제 목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할 때가 왔고, 기독교 종교 조직에서 외인이라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수용할 때가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문제는 호칭입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편하게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이전까지는 성도님들이 저에게 목사님이라고 부르지만, 굳이 아니라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묵인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저와 만나거나 통화하시거나 할 때는 목사로 부르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은 그저 저에게서 일어난 일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니라 본문과 연관하여 종교에서 벗어나는 과정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이 저를 뭐라고 불러야 할까요? 십자가 복음 전도자나 십자가 복음 설교자라고 불러야 할까요? 그건 제가 하는 일이 맞습니다. 다만 사회적으로 어떤 조직에 속했다면 부르기 쉬울 텐데, 저는 현재 세상에서 사람이 만든 조직에 속해있지 않습니다. 혼자서 맨땅에 헤딩하듯이 살고 있을 뿐입니다. 맨땅에 헤딩하듯이 십자가 복음을 전하는 저를 부를 수 있는 객관적으로 타당한 단 하나의 호칭은 30년 전에 받은 박사 호칭뿐입니다.

제가 박사 학위를 받고도 30년 동안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스스로를 박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잊어버리다시피 하고 살았을 뿐입니다. 이제 30년 만에 조직신학 박사라는 호칭을 다시 꺼내봅니다. 제가 머물렀던 독일이나 미국이나 캐나다에서는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을 박사라고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한국적 분위기에서는 제가 박사임에도 박사 칭호를 자처하는 것은 잘난 척하는 것 같다는 인식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도 변해서 이제는 박사가 발에 채는 때입니다. 저는 30년 전에 독일 괴팅겐 대학의 신학부에서 조직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이 박사 학위는 제가 죽을 때까지 무슨 일을 하든 하지 않든 저를 떠나지 않는 호칭입니다. 저는 이제 목회를 하지 않고, 교단에서 인정하는 기관에서 사역도 하지 않기에 신학박사일 뿐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며 종교가 가지고 있는 모든 기관으로부터 저는 이방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그 상황을 객관적으로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저는 통합측 교단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지만 교단 규정에 따르면 그것은 진즉에 끝났습니다. 이제는 목사가 아니라 한 사람의 살아있는 십자가 생활인으로서 신학박사의 호칭을 가지고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때까지 활동하고자 합니다. 십자가 생활인이자 제사 생활인이자 신학박사로서 복음을 전하다 죽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예배당을 다니거나 다니지 않는 문제는 알아서 기도하시는 가운데 결정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종교인이 가지는 특성을 그대로 우리 속에 남겨 두면 안 됩니다. 예를 들어 제사에 대해 종교인들은 내가 이 땅에서 하나님께 무엇을 받느냐?’라는 관점으로 바라봅니다. 다시 말해, 종교인들에게 제사는 땅에서 하나님 덕분에 얻게 된 것에 대한 감사 축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을 제사 종교인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현재 관점에서는 기독교 종교인들이 그러합니다. 이와 대비되는 자들이 제사 생활인들이고 십자가 생활인들입니다.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자들은 구약의 제사를 마음이 땅에 머무는 바람에 하늘의 하나님을 놓치게 되는 위기 상황에서 드려야 할 일로 생각합니다. 기본적으로 제사란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는 몸부림인 것입니다.

이것은 제사에만 적용되는 기준이 아닙니다. 유월절에는 따로 제사를 드리지는 않았습니다. 어린양의 고기를 먹었고, 다음날부터 이어지는 무교절에는 무교절 음식을 먹었습니다. 이러한 유월절을 바라볼 때 종교인의 태도는 내가 이 땅에서 무엇을 받았느냐?’라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출애굽을 기념하기에 해방과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십자가 생활인이자 제사 생활인들은 유월절을 이제부터 나는 하나님을 가져야 한다. 하나님 부자가 되어야 한다.’라는 과제를 부여받은 것으로 여깁니다.

본문을 보면 무교절, 칠칠절, 나팔절, 대속죄일, 장막절 같은 절기에 이루어지는 제사가 언급됩니다. 이러한 모든 절기의 제사는 번제와 속죄제가 기본입니다. 그중에서도 번제가 월등하게 많습니다. 번제의 의미를 생각하면 축제의 분위기에서 맞이할 수 있는 사건이 아닙니다. 번제는 마음이 땅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빗나간 것을 문제시합니다. 땅에 있는 대상에 밀착하여 좋아하고 존재감을 느끼는 상태가 되어버린 마음을 죽이는 사건이 번제입니다. 앞서 읽었듯이 장막절에는 그러한 번제가 엄청난 규모로 이루어졌습니다. 수송아지가 13마리, 12마리, 11마리 같은 식으로 드려졌고, 매일 어린양을 14마리씩 드렸습니다. 나를 죽이는 번제가 이처럼 대규모로 이루어지는 절기가 축제일 수 없습니다. 이미 상번제가 아침저녁으로 드려지고 있는데, 여기에 더해 수송아지를 13마리를 죽이고, 다음 날은 12마리를 죽이고, 또 다음날은 11마리를 죽이며 번제를 드립니다. 종교인들의 눈에는 이것이 축제로 보일 뿐이지만 실질적인 의미는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칠칠절도 마찬가지입니다. 칠칠절은 오순절 혹은 맥추절이라고도 합니다. 이때는 일 년 중 첫 번째 수확의 시기입니다. 주석을 보면 칠칠절 제사를 감사의 축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제사의 의미를 염두에 두자면 이러한 해석은 완전히 잘못되었습니다. 번제란 하나님을 빗나가서 다른 대상에 밀착한 내 마음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한 죽음의 제사를 드리는 절기가 축제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종교인들의 관점에서는 수확이 우선입니다. 하나님이 첫 번째 수확을 얻게 해 주셨기에 감사의 축제를 벌인다고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저도 목사로서 종교에 속해있을 때 그렇게 생각하고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말씀드렸듯이 번제는 나의 마음이 하나님을 빗나감을 문제시합니다.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볼 때 칠칠절에 드려지는 번제 또한 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칠칠절은 오순절이라고도 불립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오순절은 성령 강림이 일어나 교회가 시작된 날이기도 합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이 세상을 떠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첫 수확이 이루어지는 칠칠절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라이벌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시기입니다.

유월절과 무교절은 그동안 머물고 있었던 세상에서 탈출하여 하나님께로 가고자 하는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붙잡으려고 해도 살다 보면 하나님의 라이벌들이 등장합니다. 그것들은 자꾸 하나님 말고 나를 붙잡아라.’라고 유혹합니다. 그 라이벌의 대표가 첫 번째 수확입니다. 내가 흘린 땀과 수고에 의해서 맺어진 첫 번째 결실은 가장 강력하게 보람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제사 종교인과 제사 생활인의 차이가 발생합니다.

모든 제사의 완성인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자들이 보는 것은 이 첫 번째 수확에 내 마음이 끌려 하나님을 빗나간다.’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노력하고 수고하여 얻은 첫 결실이란 내 마음을 잡아끄는 강력한 하나님의 라이벌이 등장입니다. 그래서 내 마음을 죽이는 번제를 드리고, 이미 빗나간 상태에서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저질러진 범죄에 대해 죽는 속죄제를 드렸던 것입니다. 첫 수확을 거두고 나니 마음이 너무나 좋습니다. 첫 수확에 마음이 닿아서 취해버립니다. 그런데 종교인들은 이것을 감사의 축제로 여깁니다. ‘하나님 덕분에 이 세상에서 내가 이 땅의 것들을 얻게 되었으므로 감사의 축제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사는 하나님 자신을 겨냥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만들어진 결실을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을 이끌어가시는 주권 자체를 겨냥하고 하나님 자신을 겨냥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 자신을 겨냥하는데 첫 수확이 마음을 강렬하게 잡아끕니다. 그렇기에 제사로 내 마음을 죽이는 것이 칠칠절의 본래 의미입니다.

 

나팔절도 마찬가지입니다. 나팔절은 종교력으로 71일로써 히브리 월력으로는 11일인 정월 초하루입니다. 이날은 하루 종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나팔을 반복해서 붑니다. 일반적으로는 국가적으로 기쁜 일이 발생했을 때, 위험한 일이 발생했을 때, 혹은 새로운 사실을 알릴 때 나팔을 불었습니다. 나팔 소리가 들리는 상황을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관심을 집중해야 하는 때입니다. 나팔 소리가 들리면 사람들은 당장 신경 쓰고 관심을 가졌던 일들을 중단하고 집중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나팔절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교인들은 나팔절에 대해 정월 초하루에 나팔 소리를 들으면서 한해 소원을 하나님 앞에 아뢴다.’라는 식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완전히 틀렸습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나팔절은 한 해가 시작되는 때입니다. 당연히 올해는 어떻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갖기 마련입니다. 종교인의 소원이란 결국 땅에서 일어날 일들에 대한 바람입니다. 그러나 나팔 소리는 관심하던 것을 멈추고 집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나팔 소리에 마음이 붙잡히듯이 1년 내내 하나님을 기억하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소원을 가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나팔절에도 번제를 드렸습니다. 나팔 소리가 들리듯 하나님이 명확하게 계시는데도 나는 자꾸 하나님을 잊어버립니다. 이러한 체질은 1년 동안 끊임없이 작동할 것입니다. 이러한 체질을 번제로 죽이면서 하나님께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하나님을 잊지 않게 해 주시옵소서.’라는 소원을 아뢰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장막절을 봅니다. 장막절은 초막절 수장절이라고도 불립니다. 장막절은 8일 동안 진행되는데 일주일 동안 집 앞에 장막을 치고 거하다가 8일째에 마감합니다. 수장절(收藏節)이라는 표현이 의미하는 대로 이때는 일 년 농사를 전부 수확하여 곡식을 곳간에 저장하는 가장 풍요로운 시기입니다. 우리의 추석 연휴와도 같은 시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추석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덕담을 하듯이, 3000년 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장막절 기간이 가장 풍요로운 기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풍요로운 기간에 첫째 날은 수송아지 13마리, 14마리를 번제로 드립니다. 둘째 날은 수송아지 12마리, 14마리를 드립니다. 이런 식의 대규모 번제가 일주일을 이어집니다. 말씀드렸듯이 번제는 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가장 풍요로운 시기면 일주일 동안이나 장막을 치고 불편하게 살 것이 아니라 풍요로움에 근거한 희망을 품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보다 더 아름다운 이층집의 조감도라도 그려야 할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불편한 장막으로 나옵니다. 장막으로 나오는 것은 광야 40년 생활을 기억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가장 풍요로운 시기에 굳이 장막을 치며 가장 어렵고 빈곤하고 열악했던 때를 기억하며 일주일을 보냅니다.

이러한 장막절은 축제나 감사의 기간이 아닙니다. 오히려 경계심을 곧추세우는 기간입니다. 가장 풍요로운 시기이기에 모든 사람의 기분이 고양될 수밖에 없습니다. 땅에서의 풍요로움으로 인해서 고양된 마음에 수송아지 13마리와 어린양 14마리를 죽이면서 찬물을 끼얹습니다. 장막을 치고 하루 종일 나와서 지내고, 번제를 보며 풍요로움에 끌리는 내 마음의 죽음을 고백합니다. 상번제 어린양이 아침저녁으로 죽는 것 이외에도 수송아지 13마리를 죽이면서 전 이스라엘이 다 동참해서 나는 죽습니다.’를 반복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필요한 마음가짐입니다. 보너스를 받으면 흐뭇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저 흐뭇해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를 더 열심히 붙잡고 나는 보너스에 대해서 죽은 자입니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여유로워짐에 대해 죽은 자입니다.’를 다른 날에 비해 몇 곱절로 반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 생활인이 보여야 하는 보너스에 대한 태도입니다. 그런데 종교인들은 신이라는 존재를 통해 이 땅에서 내가 무엇을 얻을 것인가에 관심을 갖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것들에 대해 마음이 널브러져 있습니다. 그냥 거룻줄이 풀린 쪽배처럼 망망대해로 흘러갑니다. 이 세상에서 많은 것을 얻게 되었다면 평소의 번제와는 다르게 수송아지 13마리를 더 드리는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결실이 많아서 한껏 고양된 마음에 찬물을 끼얹어야 합니다. 이것이 생활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연결을 끊지 않고 이어가려는 제사 생활인들, 십자가 생활인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는 종교에 속한 자들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 속한 자들입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옷 입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종교인이 아니라 하나님 생활인입니다. 하나님이라는 개념을 붙잡고 있으면서 믿는다고 하는 자들이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라는 개념은 알지만 실제로는 눈에 보이는 대상의 존재감이 항상 하나님의 존재감을 물리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존재감이 경시되고 멸시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 이름의 개념을 붙잡고 있으니까 믿는 자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종교인의 모습입니다. 하나님 생활인은 지금 내 눈앞에 보이는 사건과 사물과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강한 존재감으로 느끼고 실감하는 것을 문제 삼는 자들입니다.

이렇게 살아계신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의 삼위일체 하나님을 실감하기를 실제 생활 속에서 하기를 원하는 신앙생활인, 십자가 생활인, 제사 생활인은 구약의 제사를 축제의 관점으로 보지 않습니다. 내 마음을 죽이는 번제를 오늘은 13마리, 내일은 12마리, 모레는 11마리를 바치는 날이 축제일 수 없습니다. 처음에 제일 강력하게 마음에 찬물을 끼얹고, 이후로도 강력하게 찬물을 끼얹기를 반복해 갑니다. 마지막 날조차도 수송아지 7마리를 바치며 강력하게 찬물을 끼얹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이 풍요로움에 취할까 얼마나 조바심을 내시며 노심초사하고 계시는지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이 풍요로움에 마음을 뺏길까 노심초사하시는데, 땅에서는 이것을 축제로 여긴다면 완전히 종교인의 마음가짐입니다. 종교인들은 하나님 덕분에 땅에서 많은 것을 수확했고 곳간에 많이 저장했으니까 이제 축제로 드리겠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풍요롭게 해 주셨으니 수송아지 13마리쯤은 드려야 되지 않겠느냐고 생각합니다. 너무 감사하니까 처음에는 13마리, 다음 날에는 12마리 해서 70마리쯤 드리자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은 70마리 수송아지가 아닙니다. 선민이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 풍요로움으로 향하려는 마음을 70번 죽이는 것을 바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것을 거두게 하셨음에 정말로 감사하다면 마음은 곳간이 아닌 하나님께 닿아야 할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께 감사하려면 주신 곡식을 마음에서 내쳐야만 합니다. 결국 이것이 안 되었기에 선민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통일왕국을 이루어 놓고도 풍요와 다산을 관장한다는 바알 신에게 먹혀버리고 맙니다. 이것이 종교인의 심성입니다.

저는 종교인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를 목사라고 부르지 마시길 바랍니다. 여러분들끼리 만나도 이제 태 목사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태 박사라고 부르시면 될 것입니다. 박사라고 부르는 것이 꺼려질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 허락하시는 가운데 주어진 박사 학위입니다. 이 시점부터 여러분이 저를 박사라고 부르라고 주신 겁니다. 저를 위해 주신 박사 학위가 아니라 종교를 씻어내라는 의미에서 주셨습니다.

본문의 핵심은 제사 종교인이 아니라 제사 생활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독교 종교인이 아니라 십자가 생활인입니다. 하나님 종교인이 아니라 하나님 생활인이고, 예수 종교인이 아니라 예수 생활인입니다. 아무쪼록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천국을 실제 생활에서 늘 연결하여 사는 신앙 생활인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마음의 울타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또한 우리 마음의 처소는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아버지와 하나가 되어계신 천국입니다. 이것을 단 한 시도 생활 현장에서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