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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죄악의 다섯 계명에 대해 죄짓기>의 줄거리 :
시체와 접촉하여 부정하게 된 자를 정결하게 하기 위한 정결용 잿물을 만드는 방법과 실제 그 물을 사용하여 정결하게 하는 절차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부정함은 곧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짐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반드시 제거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정결하게 한다는 단어의 의미가 특별합니다. 히브리어에서 죄를 짓는다는 말을 나타내는 단어와 같은 단어를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정결하게 함이란, 부정하게 만든 죄에 대해서 죄를 짓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부정하여 하나님과 연결이 끊긴 상태에서 철통같이 지키는 오계명을 알아보고 그 계명에 대해 죄짓는 일을 시행하여야 합니다.
죄악의 다섯 계명에 대해 죄짓기
(민수기 19:1~22)
1. 여호와께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여호와께서 명령하시는 법의 율례를 이제 이르노니 이스라엘 자손에게 일러서 온전하여 흠이 없고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네게로 끌어오게 하고
3. 너는 그것을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줄 것이요 그는 그것을 진영 밖으로 끌어내어서 자기 목전에서 잡게 할 것이며
4. 제사장 엘르아살은 손가락에 그 피를 찍고 그 피를 회막 앞을 향하여 일곱 번 뿌리고
5. 그 암소를 자기 목전에서 불사르게 하되 그 가죽과 고기와 피와 똥을 불사르게 하고
6. 동시에 제사장은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 실을 가져다가 암송아지를 사르는 불 가운데에 던질 것이며
7. 제사장은 자기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은 후에 진영에 들어갈 것이라 그는 저녁까지 부정하리라
11.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12. 그는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잿물로 자신을 정결하게 할 것이라 그리하면 정하려니와 셋째 날과 일곱째 날에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면 그냥 부정하니
13.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은 정결하게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하게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대로 있음이니라
본문은 시체를 접촉하여 부정하게 된 자의 정결법에 대한 규례를 말씀해 주시면서 정결용 잿물을 제작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이러한 본문은 별 재미없게 느껴지는 부분이지만 상징적이고 깊은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제작된 정결용 잿물의 의미가 11~13절에서 언급됩니다. 이러한 말씀 중심으로 <죄악의 다섯 계명에 대해 죄짓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죄에 대해서 죄를 짓는다는 것인데 이것은 말장난이 아닙니다. 12절부터 ‘정결하게 하는 것’이라는 표현이 반복됩니다. 정결하게 하는 것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이트하타’는 신약에서 죄를 가리키는 헬라어 ‘하마르티아’와 마찬가지로 벗어남, 과녁에서 빗나감의 의미를 갖는 히브리어 동사 ‘하타’를 어원으로 합니다. 다시 말해, 죄에 대해서 죄를 짓는 것이 정결하게 되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17~18절을 보면 “그 부정한 자를 위하여 죄를 깨끗하게 하려고 불사른 재를 가져다가 흐르는 물과 함께 그릇에 담고 / 정결한 자가 우슬초를 가져다가 그 물을 찍어 장막과 그 모든 기구와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뿌리고 또 뼈나 죽임을 당한 자나 시체나 무덤을 만진 자에게 뿌리되”라고 말씀하십니다. 몸을 깨끗하게 하려면 물로 씻어야 할 것입니다. 재를 섞은 물로 씻는다면 오히려 더러워질 것입니다. 다만 앞서 말씀드린 대로 죄의 상태에서 볼 때 더러워지는 것이 정결함이라는 의미를 염두에 두자면 이해가 됩니다. 비유적으로 죄에 대해서 죄를 지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결용 잿물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쳐주시는데 아직 멍에 메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를 진영 바깥으로 끌고 나와서 죽이라 하십니다. 그리고 제사장 엘르아살은 손가락에 그 피를 찍고 회막이 있는 방향으로 일곱 번을 뿌립니다. 이것은 부정하게 된 자와 죽은 암송아지를 동일시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 이 암송아지가 부정하게 된 자입니다.’라고 알려드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암송아지를 태우는데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을 같이 태웠습니다. 이와 유사한 과정이 레위기 14장에서 나병 걸린 사람을 정결하게 할 때도 언급된 바 있습니다. 살아있는 비둘기와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을 같이 묶어서 흐르는 물에 적셔서, 나병 환자에게 그 물을 뿌리면서 정하다 외치게 하셨음을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태운 붉은 암송아지와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의 재를 모아서 시체를 접촉하여 부정하게 된 자를 정결하게 하는 용도로 썼습니다.
13절을 보면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은 정결하게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하게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대로 있음이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시체를 접촉하여 부정하게 됨이란 하나님과 끊김을 말합니다. 하나님과 끊길 수밖에 없는 시체를 만져 부정하게 된 사람에게 정결용 잿물로 씻게 했습니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은 이미 언급한 바 있습니다. 말씀을 전하는 입장에서는 반복되는 내용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체를 접촉하여 부정하게 됨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 봅니다.
시체는 하나님으로부터 끊김을 비유하는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창조주이시며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이끄시는 주권자이십니다. 시체는 창조주의 있게 하시려는 뜻으로부터 끊어졌고, 주권자의 있음을 이끄시려는 뜻으로부터 끊어진 대상입니다. 창조주의 뜻과 주권자의 뜻에서 끊어졌기에 시체를 위해서는 창조주가 있게 하시려는 뜻도 없고 주권자가 이끄시려는 뜻도 없습니다.
시체를 접촉한다는 것을 요즘 우리의 삶으로 가져와서 이해 한다면 하나님의 뜻이 없는 것을 내가 계획하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있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끊겼기에 시체와 같습니다. 내가 계획하고 생각하는 것이 시체를 만지는 것과 같은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퇴직금을 가지고 사업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업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있게 하시려는 뜻이 없다면 사업을 계획하는 것은 시체를 주무르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은 내 삶을 오른쪽으로 이끄시려고 하는데 나는 왼쪽으로 가려 합니다. 그렇다면 주권자의 뜻이 끊긴 채로 삶은 이끌려지게 됩니다. 그러한 삶은 시체를 만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서는 이러한 끊김의 부정함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부정함을 정결하게 하는 재료로써 붉은 암송아지와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을 말씀하십니다. 암송아지가 불에 타 죽는 것은 부정하게 된 사람의 존재가 죽는 것입니다.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을 함께 태우는 것은 하나님의 세 가지 속성에서 끊어졌음이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암송아지를 죽여서 태우는 것은 하나님의 존재에서 내 존재가 끊긴 상태를 문제시합니다. 시체를 만진다는 것은 나의 있음이 하나님의 있음으로부터 끊긴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을 태우는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끊긴 상태를 문제시하시는 것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은 하나님의 세 가지 속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주권자 되심과 사랑하심입니다. 그렇다면 시체를 만지는 것이 어떤 이유에서 하나님의 세 가지 속성으로부터의 끊김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뜻은 전능하심과 주권자 되심과 사랑하심으로 이 땅에서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과 끊긴다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부터 끊김이고,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으로부터 끊김이고, 하나님의 사랑하심으로부터의 끊김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모든 뜻은 전능하심과 주권자 되심과 사랑하심이 작동하며 이루어지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붉은 암송아지와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을 같이 태운다는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존재의 특성은 있음과 좋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끊김이란 하나님의 있음에서부터 끊김이고 하나님의 좋음으로부터 끊김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으로부터 끊긴다는 것은 내 마음에서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존재감이 하나도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론의 지팡이에 움이 돋고 순이 나고 꽃이 피어서 살구 열매가 열린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것은 선민의 시대적 전환을 의미합니다. 모세의 지팡이는 기적의 지팡이였으나 아론의 지팡이는 연결의 지팡이입니다. 기적의 지팡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미 소개되었습니다. 그리고 연결의 지팡이는 이제 선민의 삶이 소개된 하나님과 연결되는 신앙생활의 국면에 들어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소개되었습니다. 우리는 연결의 시대를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기적을 통해 소개한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면 연결이 끊어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연결은 존재의 연결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이 내게 연결되는 방식은 내가 하나님의 있음에 대해 존재감을 갖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이 내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열 가지 재앙을 통해 선민에게 당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선민은 ‘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라고 반응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그러하신 하나님의 있음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또 홍해가 갈라질 때의 느낌을 하나님의 있음 자체에 대해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최근 미국과의 관세 협상으로 국내외가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란 홍해가 갈라질 때 놀랐던 것처럼 하나님이 내 곁에 계심에 대해 존재감을 갖는 것입니다. 아침에 의식이 깰 때마다 깜짝 놀라면서 ‘하나님이 있다!’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가 주목하는 아무리 큰일이 있더라도 무한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로서 내 옆에 있다는 이 사실보다 더 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에 깜짝 놀랄 수 있어야 합니다.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봤을 때의 그 느낌을 그대로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연결입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좋음에 대해서도 연결될 수 있어야 합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이 있으시다! 하나님이 좋음이시다! 이렇게 큰 좋음이 있을 수가 있는가? 이렇게 무한한 좋음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좋으심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을까요? 내가 하나님으로 인해서 좋음을 느끼고 만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존재감에 대한 느낌이 없고 하나님으로 인한 만족감이 없다면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입니다. 하나님과 끊어진 증거는 세상일과 사람들을 크게 느낌으로 나타납니다. 인간관계가 잘 풀려야 만족할 것 같습니다. 세상일이 잘 풀려야 기쁠 것 같습니다. 그러한 생각이 든다면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열 가지 재앙을 내리셨으며, 홍해를 가르셨고,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오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기적을 보았을 때의 놀람을 이제는 하나님 자신에 대해서 적용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기적에 놀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있음을 보고 하나님의 좋음을 보고 깜짝깜짝 놀라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홍해가 갈라지듯이 순간마다 하나님 자신이 굉장하다는 것을 느끼기를 원하셔서 기적을 행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우리도 홍해가 갈라지는 것을 똑같이 경험한 셈입니다.
시체와 접촉했다는 것은 이러한 상태가 끊어졌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이렇게 하나님 존재와 끊긴 상태를 붉은 암송아지와 동일시하여 불로 태워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백향목과 우슬초와 홍색실은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과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가리킵니다. 시체와 접촉함이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세 가지 속성에서 끊어졌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끊겨서 내가 시체가 되었고,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끊겨서 내가 하는 모든 일은 시체를 만지는 놀이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물속에 풍덩 빠져서 노는 것이 물놀이듯이, 온통 시체 속에 들어가 헤엄을 치고 시체로 샤워를 하는 듯한 삶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끊긴 삶의 모습이 바로 그렇습니다. 시체에는 하나님의 뜻이 없습니다. 창조주로서의 뜻도 없고, 주권자로서의 뜻도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이 없는 상황을 내가 있게 하면서 이끌어가려고 합니다. 이것은 시체에 풍덩 빠져 헤엄을 치고 있고, 시체 썩은 물로 샤워를 하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그대로 놔둘 수 없기에 하나님께서는 정결법을 말씀하십니다.
22절에 보면 “부정한 자가 만진 것은 무엇이든지 부정할 것이며 그것을 만지는 자도 저녁까지 부정하리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부정해진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짐을 의미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끊긴 상태에서 자녀에게 손을 대면 자녀도 부정해집니다. 내가 하나님과 끊긴 상태에서 배우자에게 손을 대면 배우자도 부정해집니다. 배우자가 아무리 못되고 신앙이 없더라도 내가 부정하지 않으면 배우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내려올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부정하게 됨으로써 배우자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내려오지 못하고 다 끊어진다는 것입니다.
재정 상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정 상태가 열악하더라도 그것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으면 열악한 재정 상태에 대해서 갖고 계신 하나님의 뜻이 내려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내가 부정해져서 열악한 재정 상태를 만지기에 그 재정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끊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끊어놓고 잘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란 하나님과의 연결입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정결을 말씀하십니다. 부정함이 끊김이기에 부정함의 반대되는 정결함이란 곧 연결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정결하게 함’으로 번역된 부분을 보면 ‘이트하타’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히브리어 ‘하타’는 헬라어 하마르티아(ἁμαρτία)와 마찬가지로 과녁에서 벗어남, 빗나감, 범죄 함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하타’에서 ‘이트하타’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정결하게 함이 왜 범죄 함과 연결되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끊어진 상태의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부정한 상태에서 마귀가 준 계명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정결하게 되기 위해서는 죄에 대해 죄를 지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마귀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죄를 짓는 것이 정결함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에는 마귀의 5계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마귀의 5계명을 어겨야 부정함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생각해 보자면 조직 폭력배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조직 폭력배의 규율을 어겨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부모님의 기대를 등지고 조직 폭력배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깨달음이 있어서 조직에서 벗어나 부모님께 돌아오고자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곧 조직에 대한 배반 행위입니다. 악함에 대한 배반 행위가 곧 올바름인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가 마귀에게 속한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마귀를 배반함으로써만 하나님께 돌아올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마귀에게 죄를 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죄를 의미하는 똑같은 단어가 정결함을 의미하는 표현에서도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반드시 어겨야 할 마귀의 5계명이란 무엇일까요? 굳이 이것을 다섯으로 정리할 수 있는 이유는 앞서 살펴보았던 하나님과의 연결 요소와 반대되는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붉은 암송아지가 상징하는 존재와의 끊김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에 대한 끊김입니다. 그리고 백향목, 우슬초, 홍색실은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주권자 되심과 사랑하심이라는 세 가지 속성으로부터 끊김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있음, 하나님의 좋음, 하나님의 전능하심,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 하나님의 사랑하심이라는 다섯 가지 요소에 대해서 마귀는 5계명을 설정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마귀의 5계명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십계명은 지키기가 너무 힘든데 마귀의 5계명은 어기는 것이 힘듭니다. 앞서 우리는 십계명을 문자대로 이해하는 단계를 넘어서 살인 계열, 간음 계열, 거짓말 계열 등의 계열별로 살펴보았습니다. 이 계열별로 볼 때 주님의 말씀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산상수훈에서 말씀하신 바대로 살인하지 않았더라도 형제를 향하여 쓸모없는 놈이라고만 해도 살인죄가 성립을 하고, 마음으로 음욕만 품어도 간음죄가 성립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는 너무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귀의 5계명은 안 지키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 지구를 보면 마귀를 대장으로 하는 조직 폭력배의 세상입니다. 조직에 들어간 사람들이 큰 형님이 지시하는 사항을 목숨을 걸고 지키는 것과 같습니다.
마귀의 5계명 중 제1계명은 하나님의 있음으로부터 끊어진 상태에서 주는 계명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있음의 존재감을 느낄 때 평강을 얻습니다. 반대로 하나님과 끊어지면 하나님의 있음에 근거 된 평강도 사라집니다. 이렇게 끊어진 상태에서 세상에서 안정된 토대를 구축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서 이것을 어기는 자가 없습니다. 안정된 토대는 죽어도 이루어지지 않는데도 어떻게든 안정된 토대를 이루려 합니다.
한때 아메리칸드림이라는 말 자체가 아름답게 느껴지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에 아메리칸드림이라는 말은 더는 언급되지도 않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3,500억 달러의 투자를 요구하지만 속내를 보면 그냥 달라는 것에 가까워 보입니다. 실질 수익의 90%를 가져가겠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이기에 미국 내에서도 동요가 끊이지 않고, 트럼프 대통령은 군대를 동원해서 안정을 시킨다는 등 난리가 났습니다. 유럽도 마찬가지입니다. 안정적인 선진국의 대명사로 불리던 프랑스가 국가 부도 위기라고 하고 독일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귀의 계명을 어기지 않습니다. 모두가 이 세상 삶에서 안정된 토대를 향한 그 열렬한 갈망을 위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 절대로 안정될 수 없는데도 안정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제2계명은 세상 삶에서 만족과 기쁨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좋음과 끊어진 상태에서 마귀가 계명을 줍니다. ‘하나님 좋음은 필요 없다. 세상 삶에서 만족과 기쁨을 추구하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세상에서 이것을 어기는 자가 없습니다. 마음에 불평거리나 원망거리가 있으면 무조건 그것을 해결하려고 합니다. 그 불평거리와 원망거리를 만족거리와 기쁨거리로 바꾸며 살아갑니다. 모든 사람이 이 마귀의 계명을 다 지키며 살아갑니다.
마귀의 제3계명은 세상 삶을 내 능력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연결된다면 하나님이 이끌어가시고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하나님과의 연결을 끊고 내 능력으로 살 것을 요구합니다. 심지어 이것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에게서도 쉽게 발견되는 문제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기도한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종교를 끌어들이는 것도 내 능력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존재로부터 끊어진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에서 끊어진 상태입니다.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런데도 이미 하나님과 끊어진 것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만을 구합니다. 이것은 종교를 만들고 종교를 이용하는 인간의 능력입니다.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을 동원하는 인간의 능력을 발동시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마귀는 ‘세상 삶을 내 능력으로 살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끊어진 자들은 반드시 이 계명을 지키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연결될 때 삶은 하나님이 전적으로 책임지십니다. 하나님께는 내가 죽는 순간까지 계획하신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은 홍해가 갈라지는 것 같은 기적으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보시면서 내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보시기에 좋도록 계획하신 바를 이루심에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은 동원됩니다. 물론 나를 둘러싼 풍파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건강에 문제가 생기고, 가족에게 문제가 생기고, 삶에 문제가 생기고, 재정적인 문제가 닥칠 수 있습니다. 강릉처럼 심각한 가뭄이 닥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향해서 하나님이 갖고 계신 그 원래의 계획은 반드시 이루어져 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과 연결되었을 때 나타나는 효과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내 능력으로 살고 삶을 지켜 나가라 말합니다.
마귀의 제4계명은 삶을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과 연결이 된다면 내가 삶을 책임지지 않습니다. 이처럼 주권자 되심과 끊어진 상태에서 마귀가 요구하는 것은 세상 삶을 내가 책임지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심정적으로 완전히 책임이 없는 일에 대해서는 불평, 불만, 원망, 걱정, 두려움, 근심을 하지 않습니다. 본래 세상 삶이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이 책임지시는 일입니다. 그런데 주권자 되심으로부터 끊어지고 나서 주어지는 마귀의 계명은 내 삶은 내가 책임지라는 요구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너무나 잘 지킵니다. 내가 책임을 진다고 생각하기에 걱정과 근심이 많고 두려움이 많고 불평과 불만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이 마귀의 제4계명을 어기는 사람이 없습니다.
제1계명은 세상에서 안정된 토대를 구축하라는 것입니다. 제2계명은 세상에서 만족과 기쁨을 추구하라는 것입니다. 제3계명은 세상을 내 능력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마귀의 계명이기에 안 지켜야 하는 계명인데 너무나 잘 지킵니다. 특히 제4계명이 그렇습니다. 마귀는 이 세상의 삶을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으로부터 끊어진 상태에서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전부 내가 삶을 책임지려 합니다. 그리고 걱정하고 근심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 뜻대로 살다가 감옥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내가 책임지지 않아야 합니다. 마귀의 제4계명을 어기고 내가 책임지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마귀의 제5계명은 삶에 대해서 내가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이 사랑하실 대상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세상은 이미 하나님 사랑으로 포화 상태입니다. 독생자를 주시는 것 이상의 사랑은 없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나에게 세상의 삶을 사랑하라 말합니다. 그럴 때 세상의 포화 상태로 차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제일 좋은 걸 주시려는 것입니다. 내가 세상에 살다 죽을 때까지 천수 만수를 내다보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책임지시는 주권자 되심은 동원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랑을 통해 하시려는 일은 세상 삶이 끝날 때까지 최고로 좋은 하나님 자신을 완전히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기에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실 때 내게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완전히, 온전히, 충분히, 넉넉하게 가지려면 평생 어떻게 이끄셔야 될 것인가를 다 예견하시고 전지전능으로 이끌어가십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사랑과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면, 하나님께서는 내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하여 내 삶을 이끌어가십니다. 그런데 반대로 내가 나를 사랑해 버린다면 내가 생각하기에 내게 좋은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삶을 내가 사랑하라는 것이 마귀의 제5계명입니다. 세상에는 이것을 안 지키는 사람이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는 이유는 마귀의 오계명을 지키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죄에 대하여 죄를 짓기 위해서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세상에서 안정을 구축하려는 마귀의 제1계명이 깨집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세상의 상황을 좋음과 만족으로 바꾸려고 하는 마귀의 제2계명이 깨집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내 능력으로 내 삶을 살려고 하는 마귀의 제3계명이 깨집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세상 삶을 내가 책임지겠다고 하는 마귀의 제4계명이 깨집니다. 마지막으로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으면 내 삶을 사랑해서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판단하고 추구하는 제5계명이 깨집니다.
붉은 암송아지의 죽음이 상징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없다면 마귀의 오계명은 지키지 않을 방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마귀의 오계명은 지키면서, 하나님의 십계명은 다 어깁니다. 십자가에서 죽고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야만 하나님의 십계명은 지켜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서만 마귀의 오계명을 안 지킬 수 있습니다. 마귀가 준 오계명 중에 하나라도 지킨다면 구원은 불가능합니다. 구원이란 결국 마귀의 오계명으로부터 벗어남이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과 연관하여 말씀드리자면 구원이란 마귀의 오계명에 대하여 완벽하게 죄를 짓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상태란 마귀의 오계명을 다 어기는 것입니다.
나를 돌아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귀의 오계명 중에 어느 한 계명이라도 지키고 있다면 구원은 없습니다. 정결용 잿물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우리의 정결을 위한 잿물이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고 예수님이 흘리신 피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만 마귀의 오계명을 동시에 절단할 수 있습니다. 마귀의 오계명을 어기고, 마귀의 오계명에 대하여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이트하타’는 똑같은 벗어남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마귀에게로 올 때도 벗어남이고, 마귀의 권세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도 벗어남입니다. 우리는 지금 마귀의 오계명을 지키는 사슬에 매여 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만이 마귀의 오계명을 범하게 합니다. 마귀에 대해서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붙잡고 마귀에 대해서 철저하게 배신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마귀의 오계명에 등을 돌리고 죄를 짓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주님의 십자가를 한 시도 놓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세상에서 지키는 마귀의 오계명을 어기게 하시고, 그리하여 진짜 구원, 진짜 정결함, 진짜 연결의 삶을 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