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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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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내 ‘절대 자리’와 '상대 자리'_태승철

by 태승철 · 25-09-15 08:01 · 336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내 절대 자리상대 자리’>의 줄거리 :

내 몸이 취직과 승진은 놓쳐도 내 마음의 절대 자리만큼은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 세상에서 백수로 살아도 된다. 다만 내 절대 자리는 지켜내야 한다. 마음이 절대 자리를 지켜내지 못하는 상태. 마음이 지옥으로 흘러 들어가는 시간의 급류에 떠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시간의 흐름과 세상을 탈출하여 하나님을 마주하는 자리로 가야 한다. 오늘 본문은 마음이 절대 자리를 놓친 선민은 정말 이상할 정도로 상대 자리에 목을 매며 치명적인 결과를 자초한다는 사실을 예증하고 있다.

 

 

절대 자리상대 자리

 

(민수기 16:1~50)

 

1. 레위의 증손 고핫의 손자 이스할의 아들 고라와 르우벤 자손 엘리압의 아들 다단과 아비람과 벨렛의 아들 온이 당을 짓고

2. 이스라엘 자손 총회에서 택함을 받은 자 곧 회중 가운데에서 이름 있는 지휘관 이백오십 명과 함께 일어나서 모세를 거스르니라

3.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4. 모세가 듣고 엎드렸다가

5. 고라와 그의 모든 무리에게 말하여 이르되 아침에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속한 자가 누구인지, 거룩한 자가 누구인지 보이시고 그 사람을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오게 하시되 곧 그가 택하신 자를 자기에게 가까이 나아오게 하시리니

6. 이렇게 하라 너 고라와 네 모든 무리는 향로를 가져다가

7. 내일 여호와 앞에서 그 향로에 불을 담고 그 위에 향을 두라 그 때에 여호와께서 택하신 자는 거룩하게 되리라 레위 자손들아 너희가 너무 분수에 지나치느니라

8. 모세가 또 고라에게 이르되 너희 레위 자손들아 들으라

9.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 회중에서 너희를 구별하여 자기에게 가까이 하게 하사 여호와의 성막에서 봉사하게 하시며 회중 앞에 서서 그들을 대신하여 섬기게 하심이 너희에게 작은 일이겠느냐

10. 하나님이 너와 네 모든 형제 레위 자손으로 너와 함께 가까이 오게 하셨거늘 너희가 오히려 제사장의 직분을 구하느냐

11. 이를 위하여 너와 너의 무리가 다 모여서 여호와를 거스르는도다 아론이 어떠한 사람이기에 너희가 그를 원망하느냐

 

 

모세는 고라와 동조한 일당들에게 향로를 가져오라 명합니다. 이로부터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가족은 지진이 일어나서 땅에 삼켜졌고, 나머지 250명의 지휘관은 하나님으로부터 불이 나와서 다 죽게 됩니다. 이에 이스라엘 회중은 모세와 아론을 비난했고 이번에는 전염병이 임해서 1만 명이 넘는 숫자가 죽었습니다. 모세의 지시를 받은 아론이 향로를 들고 죽음의 현장으로 뛰어 들어가고서야 전염병은 멈췄습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절대 자리상대 자리’>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내게는 절대 자리가 있고 상대 자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자리다툼을 하려면 알고 하라는 것입니다. 남의 자리가 부럽고, 다른 사람의 신분이 굉장히 탐스럽고, 내 신분과 내 자리와 내 위치가 마음에 안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리 때문에 나타나는 갈등은 우선 내 자리가 어떤 것인지 알아야 합니다.

 

고라에 동조한 일당들은 도대체 자리 개념이 없습니다. 이들은 선민으로서 자신의 자리에 대한 개념 없이 자리다툼에 끼어들고자 했습니다. 우리는 자리다툼을 하기에 앞서 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도록 허락받은 선민에게는 절대 자리가 있고 상대 자리가 있습니다. 우리가 상대 자리를 절대 자리로 인식한다면 절대 자리를 놓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상대 자리를 절대 자리로 여기게 되면서 엄청나게 치명적인 결과를 자초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계속해서 가나안 땅과의 연관성 안에서 말씀을 보고 있습니다. 광야 생활은 가나안 땅을 정탐한 뒤로 행복 적합도가 제로 상태이기에 도저히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고 판명이 났기 때문입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감이란 행복함 안으로 들어감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이 행복함은 내 마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마주하는 상태를 뜻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행복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만 하나님을 마주하는 상태라는 말이 문자적으로는 이해가 되어도 실제로는 잘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한다고 하는데 행복함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앞서 세 가지 행복의 요소로 절대 만족, 절대 평강, 절대 감사를 말씀드렸습니다. 이러한 세 가지 요소를 누리지 못한다면 부지중에 짓는 죄 때문입니다.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예수님과 연합한 상태로 하나님을 마주함은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었음을 인정하면서도 부지중에 세상에 대해 살아나고, 많은 경우 세상에 대해 죽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의식의 지표층에서는 세상에 대해 죽으려 하지만 의식의 지하층에서는 세상에 대해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마귀가 넣어준 세상에 대한 좋고 나쁨의 판단이 습관적이고 상식적으로 지속되기 때문입니다.

습관적 판단에 의해 마음은 땅으로 내려옵니다. 하나님을 마주하는 나의 절대 자리를 놓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마주하는 절대 자리를 지킬 때 땅에서는 내 몸이 위치하는 자리가 있습니다. 어떤 상황과, 어떤 위치와, 어떤 자리에 있습니다. 이렇게 몸이 위치하는 자리가 상대 자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몸이 처하는 상대 자리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합니다. 마음은 지금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하는 상황을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마주하는 자리가 나의 절대 자리입니다. 이 절대 자리는 가변성이 없습니다. 일시적이지 않습니다. 마음이 하늘에서 하나님을 마주하는 절대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 나타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내 몸이 이 땅에서 어떤 위치나 어떤 자리에 있든 높고 낮음의 느낌이 죽는 것입니다. 귀함과 천함의 분별이 죽고, 내 몸이 어떤 상태에 있든지 상대 자리에 있는 것이 지금 내게는 최적의 자리로 느껴집니다.

내 마음이 예수님 안에 머물 때 하늘에 올라갈 수 있고, 또한 십자가를 계속 보는 중에만 하늘에 올라간 상태는 유지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마주 보는 절대 자리를 지켜내면, 몸이 처한 상대 자리에 대해서는 높고 낮음이 죽는 특징이 나타납니다. 상대 자리는 말 그대로 상대적입니다. 시간이 지나며 아버지의 주권적 뜻을 따라서 계속 변해갈 수 있습니다. 내 몸이 놓인 상황이 변하고, 몸에 주어진 세상 직급이나 위치나 자리나 신분도 계속 변해갈 수 있습니다. 마음이 절대 자리에 머무는 동안 그때그때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몸이 처한 상대 자리는 높음도 아니고 낮음도 아닙니다. 비천하지도 않고 귀하지도 않습니다. 마음에 이러한 분별이 없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본격적으로 본문을 살펴보기에 앞서 기억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부지중에 일어나는 습관적이고 상식적인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은 반드시 십자가로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직장에서 상식적으로 바라는 좋음은 승진이나 월급 인상과 같은 것들입니다. 내 속에서도 그러한 판단이 습관적으로 흐를 수 있습니다. 그러한 판단을 십자가에서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내가 직장에서 하는 일이 순탄해도 좋음이 아니고, 난감해도 나쁨이 아니다. 직장에서도 좋음은 내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마주하는 하나님뿐이시다. 나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에서 죽었기에 모든 직장인들이 원하는 순탄함도 좋음이 아니고 난감함도 나쁨이 아니다. 나에게 좋음은 하나님뿐이다.’라고 여기며 세상적이고 습관적인 판단을 십자가에서 죽여갈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좋다고 판단하는 것들이 진짜 좋음이 아니고, 세상에서 나쁘다고 판단하는 것들이 진짜 나쁨이 아닙니다. 내게 좋음은 하나님뿐이기에 이 땅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좋음도 아니고 나쁨도 아닙니다. 이 고백을 모든 순간에 반복해야만 세상에 대한 진정한 죽음은 일어날 수 있고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은혜와 축복을 다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부지중에 습관적으로 하는 판단을 반드시 죽여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십자가에서 죽은 자이므로 습관적 판단에 의한 좋음은 진짜 좋음이 아니고, 습관적 판단에 의한 나쁨은 진짜 나쁨이 아니다. 내게는 하나님만이 좋음이다.’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 이렇게 부지중에 나타나는 판단을 죽이지 않아서 하나님과 마주 보는 상태가 중단되고 마음이 세상으로 내려온 상태가 굳어진다면 어떨까요?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마음은 땅에 있는 상태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상태에서 어떤 일이 나타나는가를 보여줍니다.

 

3절을 보면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라고 했습니다. 고라와 그를 따르는 일당이 모세와 아론을 향해 이러한 이야기를 하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고라의 결정적인 문제는 모세가 지금 하나님을 마주 보고 있는 상태임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고라는 하나님과 마주 보는 상태를 한 번도 경험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절대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했을 때 모세에게 주어진 상대 자리가 이스라엘 회중을 인도하는 위치였습니다. 고라에게는 이것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절대 자리를 놓치고 있기 때문에 모세가 하나님 앞에서 절대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자리다툼을 하려면 먼저 내 자리가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하는데 고라는 자기 자리를 알지 못했습니다. 모세는 이를 악물고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의 절대 자리를 지켰습니다. 백성의 지도자라는 위치는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서 가변적으로 바뀔 수 있고 일시적으로 주어지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고라는 이 상대 자리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모세의 몸이 처한 자리가 굉장히 크고, 높고, 귀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기에 찾아와서 너만 높으냐?’라고 시비를 걸었던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 앞에서 나의 절대 자리를 지키면 몸이 처한 상대 자리에 대해서는 좋음도 나쁨도 느끼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절대 자리를 지킨다면 백수라도 그 자리가 지금 최적의 자리라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대통령이든, 택배원이든, 공무원이든 백수든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자리에 있든지 좋고 나쁨에 대해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마주 보는 절대 자리를 지켜낼 수만 있다면 몸이 처한 상대 자리는 지금 내게 최적이라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문제는 부지중에 세상 좋음과 나쁨을 습관적으로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세상에 대한 죽음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하는 절대 자리를 놓치게 됩니다. 이러한 본문 말씀에는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부지중에 짓는 죄와 연결되는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부지중에 세상적이고 습관적으로 판단할 때 세상에 대한 죽음은 종식됩니다. 마음이 세상에 대해 되살아납니다. 이럴 때 나타나는 현상이 고라와 같습니다. 지금 내 몸에 주어져 있는 자리가 불만스럽고 한심해 보이고 별 볼 일 없어 보입니다. 내게 그러한 마음이 있다면 그 이유는 절대 자리를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기도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몸이 처한 자리가 불편하고 마땅치 않은 것을 계기로 기도를 시작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내 절대 자리를 찾아가는 것이어야 합니다. 절대 자리를 찾아 들어가면 지금 내 몸이 처해 있는 상황과 자리가 최적의 상태임을 알게 됩니다. 분명히 세상 습관적 판단을 통해 볼 때는 나쁨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나쁨으로 느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의한 구체적인 의도는 몰라도 내가 지금 처한 상황에 대해서 개선이나 변화를 요구할 수 없다. 이것이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최선이다.’라는 확신이 생깁니다. 이것이 절대 자리를 지킬 때 나타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라에게도 합당한 상대 자리를 주셨습니다. 고라는 레위인으로서 성막의 모든 기구를 관장하여 관리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까이 오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상대 자리를 주셨는데도 고라는 상대 자리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발생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어느 날 동창에게 전화가 왔는데 대기업의 이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나는 오십 대에 퇴직해서 백수입니다. 전화를 받고 나니 내가 너무 한심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절대 자리를 놓쳐서 생긴 증상입니다. 절대 자리만 지키면 대기업 간부가 된 동창과 만나도 주눅 들지 않습니다. 오히려 ! 나는 백수라서 놀고 있는데, 너는 어떻게 이 나이에도 간부 자리를 유지하고 있냐!’라는 순수한 칭찬이 가볍고 쉽게 나옵니다. 내 마음에 조금의 열등감도 생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절대 자리를 지킴이란 지금 하나님을 마주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행복하면 이상하게도 이 세상의 모든 높은 자들을 마음 놓고 칭찬해 줄 수 있습니다. 그들 앞에서 마음 놓고 예의를 갖출 수 있습니다. 반대로 몸이 처한 자리가 낮고 천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사람에 대해서는 진심으로 귀중하고 소중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의 몸이 위치한 자리가 천하든 귀하든, 높든 낮든 내 마음에서는 그 사람 하나하나가 너무 소중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절대 자리를 지킬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반대로 절대 자리를 지키지 못하면 부지중에 판단을 하게 되고 마음은 땅으로 내려옵니다. 부지중에 돈이 많으면 좋고 돈이 없으면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의식에서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습관적으로 흘러갑니다. 그렇기에 돈 많은 사람의 위치는 훌륭해 보입니다. 재벌들이 막대한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유는 사람들이 그들을 대단하게 여기며 권력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단칸방에 사는 사람들은 사람 취급도 하지 않습니다. 살아있으니까 사람이라고 부르지만 실제로 존귀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절대 자리를 지킬 때는 전혀 다른 모습이 나타납니다. 재력가를 한 명의 소중하고 귀중한 인간으로서 대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돈 한 푼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재력가와 똑같은 소중함과 귀중함으로 대하게 됩니다.

 

고라는 부지중에 습관적인 판단을 통해서 대중 앞에 홀로 서는 자가 높은 자라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높은 게 좋은 것이라는 세상의 판단을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이로부터 두 가지 일이 벌어집니다. 먼저 하나님을 마주하는 절대 자리를 놓쳐버립니다. 그리고 절대 자리를 지켰을 때 주어지는 상대 자리를 놓쳐버립니다. 다 놓쳐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앞서 이야기되었던 내용에 이어서 부지중에 세상 기준을 따라 의식의 지하층에서 일어나는 판단이 굳어진 상태를 문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직시하고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그 판단을 깨지 않았을 때 어떠한 결과가 나타나는지 고라를 통해 보여주십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절대 자리를 놓치게 됩니다. 그 결과 행복의 세 가지 요소인 절대 만족, 절대 평강, 절대 감사를 잃습니다. 또한 이 땅에서 몸이 처한 상대 자리를 충실하게 이행할 수도 없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서 백수를 예로 들었는데 백수가 무엇에 충실할 수 있다는 것입니까?’라고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백수 상태에서 절대 자리를 지켜낸다면 쓰레기 봉지를 버리는 것조차 하나님이 시키시는 일임을 알게 됩니다. 마루 한 번 닦는 것도 재벌가 회장님이나 대통령이 임무를 수행할 때와 똑같은 의식으로 할 수 있게 됩니다. 백수는 할 일이 없고 대통령은 귀한 직무가 있다는 생각은 세상이 만들어 놓은 자리에 대한 인식입니다. ‘내게는 맡겨진 자리가 없으니까 나는 할 일이 없다.’라고 여길 수 없습니다. 할 일은 죽을 때까지 없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돈 버는 직업이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하나님 앞에서 절대 자리를 지키면 나는 평생 몸이 처한 상대 자리에서 내가 할 일을 찾아서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백수더라도 마음이 절대 자리에 있으면 세상의 높고 낮음, 천함과 귀함의 기준을 따라서 좋다고 여겨지는 자리나 신분과 위치를 절대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마주하는 상태가 지속될 때 얻는 행복의 특징은 몸이 처한 현재 상태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마주하는 천국 행복함에 들어간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복음은 민주적입니다. 민주의 가치는 한 사람 한 사람 존재의 존엄함에 차이가 없습니다. 대통령 존재의 가치나 9급 공무원의 존재의 가치나 같다는 것입니다. 복음은 그러한 의미에서 자유와 민주라고 하는 말의 근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민주라는 말이 민의주의를 의미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의미를 따져보면 그 근간에는 사람의 존엄과 평등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진정한 의미가 복음에서 발견됩니다. 마음의 절대 자리를 지키지 못한다면 고라와 같은 일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 모세는 어떤 이유에서 향로를 가지고 오라 했을까요? 향로의 향불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상징합니다. 고라와 일당들은 모세와 아론에게 왜 스스로를 회중 위에 높이느냐고 따지며 자리다툼을 하였습니다. 상대 자리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보았던 것입니다. 모세는 이들의 의도를 정확하게 알아보았습니다. ‘고라와 동조하는 일당들이 지금 하나님을 마주하는 절대 자리를 잃어버렸다.’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주함이란 목석과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두 인격체의 만남입니다. 인격체 간 마주함의 특징은 대화입니다. 기도를 상징하는 향불을 꺼뜨리지 않는 것은 쉬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대화가 이루어져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과의 실시간 연결입니다. 실시간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하나님을 마주 보면서,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향로를 가져오라고 한 것은 너희가 지금 살아계신 하나님과 실시간으로 대화하고 있었다면 절대로 내게 와서 이러한 행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 셈입니다. 모세에게 지도자라는 위치는 몸이 처한 상대 자리였을 뿐입니다. 고라가 처한 성막에서 일하는 위치도 상대 자리이고, 르우벤 자손인 군대의 지휘관들도 상대 자리였습니다. 그러한 상대 자리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했다는 것은 이미 마음이 하늘에서 하나님을 마주하는 상태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것이고 하나님과 대화가 중단됐다는 것입니다.

향불은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대화인 기도를 상징합니다. 이러한 향불을 담은 향로를 가지고 오라고 한 것은 누가 하나님과 실시간으로 대화함으로써 절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자인지를 보자는 의미가 있습니다. 절대 자리를 지켰다면 몸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상대 자리에서 최적의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결국 땅이 그 입을 열어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의 가족과 재물까지도 삼켜버리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들을 따르던 250명 지휘관은 하나님의 불이 나와 죽여버립니다.

땅이 그 입을 벌리고 삼켜버렸다는 것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마주 볼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는 절대 자리도 없고, 절대 자리를 지켰을 때 하나님의 주권적 뜻대로 몸에 주어지는 상대 자리도 없다는 뜻입니다. 절대 자리를 지키지 못해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상대 자리에서 자기의 삶을 살지 못하는 모든 사람은 시간의 흐름에 휩쓸립니다. 과거 현재 미래로 흐르는 시간의 격류 속에 휩쓸리다 지옥문으로 흘러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땅이 그 입을 벌려 삼켰다는 것은 이제 설 자리가 없다는 뜻입니다.

 

어제 강릉에 80밀리 정도의 비가 내렸습니다. 60일 만에 비다운 비가 내렸습니다. 뉴스마다 물이 골짜기를 따라 오봉저수지 안으로 들어오는 장면을 보여주었습니다. 불과 3% 정도 저수율을 회복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삶이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 보는 절대 자리를 지킬 때만 이 땅에서 몸은 상대 자리에 충실하여 하나님의 주권적 뜻을 이루어 갈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마음이 하늘에 매달려 있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의 격류 속에 빨려 들어가지 않습니다.

반면 세상이라는 수평면상에서 흐르는 시간은 다 지옥문으로 들어갑니다. 모든 개인의 시간이 지옥문으로 연결되어 있는 셈입니다. 절대 자리를 놓치고 상대 자리인 것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면서 사는 사람의 마음은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의 격류 속에 빠져서 반드시 지옥으로 갑니다. 지금 저에게 주어진 시간의 흐름도 지옥으로 향하여 흘러 들어가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어진 인생의 시간도 다 지옥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야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하늘로 뻗게 하시면서, 향불이 올라가듯이 우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 보는 절대 자리를 지키게 해주셨습니다.

십자가를 보면서 내가 세상에 대해 죽은 자임을 고백할 때 마음은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의식의 지하층에서 흐르고 있는 습관적 판단을 죽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절대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내 마음의 절대 자리만 지키면 몸이 처한 상대 자리가 어떠하든 아무런 불평도 생기지 않습니다. 이것을 하지 못한다면 땅이 그 입을 벌려 삼켜버리듯이 어디에도 설 자리는 없어지고 맙니다. 시간의 격류 속에 휩쓸려서 지옥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고라를 따르던 250명은 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불에 의해 죽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으되 마음이 하나님께로 올라오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마주하지 않고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는 자들이었습니다. 모세가 향로를 들고 오게 한 것에는 이것을 강조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절대 자리를 지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몸이 처한 상대 자리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었습니다. 입으로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불로 죽여버리십니다.

불은 하나님의 진노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진노하신 이유는 이들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올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마주 볼 수 있는 자리에 절대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고, 몸이 처한 상대적인 자리에 절대적인 의미를 부여하며 자리다툼을 벌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불로 죽이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다만 삶의 어떤 문제가 강하게 주어지면 우리는 그러한 문제를 마음으로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 문제를 계기로 삼아 기도하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 기도의 목표는 문제 해결이 아닙니다. 내 절대 자리를 회복하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가 있어야 될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이 있어야 할 곳은 문제가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내 마음은 하나님과 마주하는 절대 자리로 가야 합니다. 절대 자리로 가면 몸에 주어진 문제는 진짜 문제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참 신비한 일입니다. 절대 자리만 지켜내서 하나님을 마주 보면 지금 몸이 처한 상황은 문제가 아니게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행할지를 하나님이 가르쳐 주십니다. 천둥이 치듯이 이렇게 행하거라라는 분명한 음성으로 가르쳐주시지 않더라도 이것이 하나님 뜻이구나.’라는 확신을 갖고 깨닫게 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절대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의 과제는 절대 자리를 지키는 것입니다. 절대 자리를 지키면 상대 자리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도 충실하게 깨닫고 결실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이를 악물고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부활과 승천을 따라 마음은 아버지께로 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내 몸이 처한 자리는 상대 자리입니다. 계속해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상대 자리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좋음도 아니고 나쁨도 아니다. 하나님만이 좋음이다. 왜냐하면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기 때문이다.’라고 고백하며 부지중에 일어나는 습관을 죽임으로써 절대 자리를 지켜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떡하든지 절대 자리만 지켜내게 해주시옵소서. 몸이 처한 자리에 불평, 불만, 원망, 결핍을 느끼는 이 상태가 이미 절대 자리를 놓친 것임을 깨닫고 절대 자리로 회복하여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그러기 위해서 오늘도 우리 주님 십자가만 의지합니다. 저희 무능과 저희 죄악을 보시며 체질이 그러한 것임을 아시고 저희를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