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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십자가 죽음 잡아먹는 기생충>의 줄거리 :
가나안으로 상징되는 행복은 세상에 대한 십자가 죽음 위에 성립합니다. 세상에 대해 죽어 하나님을 마주함으로써 실현됩니다. 그런데 이런 행복도 상실될 수 있습니다. 부지중 죄를 지으면 행복은 중단됩니다. 부지중 죄를 짓는 이유는 부지중에 세상에 대한 죽음이 멈추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대한 나의 죽음을 무효화 시키는 지독한 기생충이 있습니다. 습관적이고 자동적으로 하는 좋음에 대한 판단입니다. 이 습관적인 판단으로 인해 부지중에 생기는 좋음에 대한 기대가 멈추지 않으면서 세상에 대한 십자가 죽음을 무효화시켜 버리고 부지중 죄가 나타납니다.
십자가 죽음 잡아먹는 기생충
(민수기 15:22~41)
24. 회중이 부지중에 범죄하였거든 온 회중은 수송아지 한 마리를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로 드리고 규례대로 소제와 전제를 드리고 숫염소 한 마리를 속죄제로 드릴 것이라
27. 만일 한 사람이 부지중에 범죄하면 일 년 된 암염소로 속죄제를 드릴 것이요
30. 본토인이든지 타국인이든지 고의로 무엇을 범하면 누구나 여호와를 비방하는 자니 그의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31. 그런 사람은 여호와의 말씀을 멸시하고 그의 명령을 파괴하였은즉 그의 죄악이 자기에게로 돌아가서 온전히 끊어지리라
본문에는 부지중에 짓는 죄를 어떻게 속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 안식일에 관한 말씀, 옷단 귀에 청색 술을 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술이란 옷단에 달리는 실뭉치입니다. 문자적으로 반복되는 내용이 많기 때문에 중요한 요지만 읽었습니다. 이러한 본문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 때를 예상하시며 주시는 말씀입니다. 24절에서는 회중이 부지중에 짓는 죄를 언급하셨다면, 27절에서는 개인이 부지중에 짓는 죄를 말씀하십니다. 30~31절에서는 본토인이든 타국인이든 똑같은 율례를 적용할 것을 말씀하시며 다만 부지중에 범한 죄가 아니라 고의로 죄를 지을 때는 끊어내라 말씀하십니다. 32절 이후에는 안식일에 나무하는 자를 모세와 아론과 온 회중 앞에 끌어왔고 모세가 어떻게 처치할지를 하나님께 묻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범하면 반드시 죽이라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옷단 귀에 청색 술을 달아서, 옷을 입고 다니는 동안 볼 수 있게 하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이러한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 죽음 잡아먹는 기생충’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우리 속에는 우리가 모르게 기생충이 있을 수 있듯이 영적으로도 기생충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 영적 기생충의 특징은 십자가 죽음을 무효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라는 고백을 하고 예수님의 죽음과 나의 죽음을 동일시합니다. 이것 이외에 더 잘 죽는 방법은 없습니다. 동일시함으로써 내가 죽은 자라는 걸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동일시의 고백이 약하고 무력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똑같은 동일시의 고백을 해도 사도 바울 같은 분들은 마음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무척 강력하게 살아나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안에 십자가 죽음을 잡아먹는 기생충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근본 취지는 그 기생충을 잡으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꾸만 십자가 죽음을 무효화시키고 아무리 동일시의 고백을 해도 잘 죽어지지 않는다면 기생충 때문이기에 그 기생충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반드시 죽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본문에는 부지중에 짓는 죄에 대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여기에 십자가 죽음을 잡아먹는 기생충이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단서가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살펴봄으로써 무엇이 실제 삶에서 십자가의 주님과 함께하는 죽음이 안 되게 하고, 또 잘 죽었다가도 다시 살아나게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비유적으로 기생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을 살펴보기에 앞서 질문을 한번 해봅니다. 여러분은 천국의 삶과 천국 1일생활권의 삶의 차이를 아십니까? 한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천국의 삶이란 우리 몸이 죽은 다음에 우리의 마음이 잠자고 있다가 예수님의 재림 때 깨어나서 신령한 몸을 입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지금 눈에 보이는 육체의 몸이 아니라 신령한 몸을 입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것이 천국의 삶입니다. 한편, 천국 일일생활권의 삶이란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마음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을 마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주할 때 일어나는 일은 행복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이고, 유일한 주권자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는 상태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 이상의 다른 행복의 조건은 필요치 않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얻게 되는 모든 은혜는 천국 일일생활권의 삶의 의미가 뜻하는 바대로 세상에 대한 죽음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마음은 세상에 대한 죽음을 이루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구원의 은혜와 모든 좋은 것들은 다 세상에 대한 죽음 위에서만 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렇게 세상에 대한 죽음을 바탕으로 하는 행복함이 곧 가나안으로 상징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감이란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세상에 대한 죽음을 이룸으로써 마음이 하나님을 마주하는 행복함을 누리며 유지해 나가는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가나안의 행복함에 적합하지 않았던 출애굽 1세대 성인들은 다 죽었습니다. 이들이 적합하지 않았던 이유는 세상에 대한 죽음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앞서 세상에 대한 죽음을 네 가지 측면에서 생각했습니다. 소제는 곡식을 가루로 만들어서 제사를 드리는 방식입니다. 가루로 만든다는 것은 곧 과거 현재 미래로 흐르는 시간을 내가 뭉치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시간을 뭉치지 않으려면 나는 지금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아버지를 마주해야만 합니다. 모든 지금에 하나님께로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포도주나 독주를 부어서 드리는 전제는 세상의 좋음에 대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소제가 세상의 시간에 대한 죽음이라면 전제는 세상 좋음에 대한 죽음이라서 오직 하나님을 마주하고 하나님의 좋음에만 취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는 상태는 유지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땅으로 내려가서는 안 됩니다. 그 방법이 들어 올려서 드리는 제사 방식인 거제를 통해 제시되었습니다. 거제는 세상 성취에 대한 죽음입니다. 들어 올려서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내가 땅에서 수확한 모든 것들이 나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내가 무엇을 이룬다는 성취에 대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본토인과 거류민에 대해 똑같이 법을 적용하라고 하셨습니다. 불편부당함을 없애라는 뜻의 말씀입니다. 이는 곧 세상 소속에 대한 마음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우리에게는 육체를 기반으로 하는 여러 가지 소속이 있습니다. 그 모든 육체를 기반한 소속에 대해서 마음이 죽고 오직 천국 소속감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소제, 전제, 거제, 불편부당함으로 상징되는 네 가지 측면이 세상에 대한 죽음의 내용들입니다. 이 죽음에 대한 내용들이 바탕이 되어야만 행복함이 이루어질 수 있고, 예수님을 통해 주어지는 모든 은혜와 덕과 선물과 좋음이 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에 대한 죽음이 바탕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행복 적합도를 위한 기준을 제시하신 뒤에 본문의 말씀을 주십니다. 이렇게 행복 적합도를 맞춰서 가나안을 살다가도, 에덴을 상실한 아담처럼 나도 가나안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상실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 부지중에 죄를 짓는 것입니다. 부지중에 죄를 짓는 것은 가나안을 상실하는 것이고 가나안으로 상징되는 행복함이 없어졌음을 의미합니다. 말씀드렸듯이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을 마주해야만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 외에 행복이라고 느끼는 것은 전부 마귀에게 속은 것입니다. 내가 지금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하나님을 마주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마주하지 않는 증거는 부지중에 죄를 짓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으면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죄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는 크게 율법과 계명 등을 말씀하시지만 십자가 복음 시대에는 보다 근본적인 의미에서 죄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은 지금도 실시간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 말과 행동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뜻과는 무관하게 나온다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자면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지중에 죄를 짓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우리가 어떻게 실시간으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에 의해 이루어지는 뜻을 따라 말하고 행동할 수 있겠는가?’라고 여길 수 있습니다. 이것을 ‘이상향 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나와는 관계없는 이상적 조건이라고 판단하는 병에 걸려버린 상황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실시간으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돈 10억을 벌겠다는 꿈을 갖고 실제로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많은 노력을 하며 삽니다. 이에 비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삶이 훨씬 쉽습니다.
시편 37편 4절을 보면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라고 말씀하셨고, 마태복음 12장 35절을 보면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행위는 마음의 상태에 종속한다는 뜻의 말씀입니다. 이러한 말씀대로 내 말과 행동은 마음의 상태에 종속합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말씀처럼 내 마음이 하나님을 마주 봄으로써 행복함이 유지되는 동안에는 생각 감정 의지가 발동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 뜻에서 어긋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을 마주하는 시간을 늘려감이 선을 쌓는 것입니다. 선하신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시기에 하나님을 마주 보는 시간을 늘려가는 것이 선을 쌓음이 됩니다. 그럴 때 내게서 나오는 것은 다 선한 말과 선한 행동이 되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부지중에 짓는 죄가 의미하는 바도 알 수 있습니다. 내 마음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조건이 주어졌다는 것이고, 그렇게 마음의 조건이 바뀐 이유는 하나님을 마주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마주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곧 세상에 대한 죽음이 없어졌음을 의미합니다. 하늘에 올라갔던 마음이 다시 세상으로 내려온 것이고, 세상에 대해서 살아있음이 다시 복귀된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살아 있기에 하늘에서 하나님을 마주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마주하지 못하기에 나타나는 모든 말과 행동이 하늘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뜻을 벗어나는 죄를 짓게 됩니다.
이처럼 부지중에 죄를 짓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벗어났음을 인지하지 못하기에 발생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마주하는 상태를 벗어났음을 모르기에,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났음도 모릅니다. 결국 내가 세상에 대해서 살아있다는 걸 모르는 것이 문제입니다. 부지중에 살아 있게 된 것입니다. 가나안으로 상징되는 행복, 은혜, 구원, 축복을 비롯한 모든 것은 세상에 대한 죽음이 유지될 때만 실제로 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얻는 모든 은혜가 십자가 죽음을 기초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한 죽음이 유지되어야만 마음이 하늘로 올라갈 수도 있고, 하나님을 마주할 수도 있고, 행복할 수도 있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다 하나님 뜻에 부합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지중에 내게서 세상에 대한 십자가 죽음을 먹어버린 기생충이 무엇일까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안에 있던 기생충이 십자가 죽음을 무효화시킨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죽음이 먹혔다는 것은 세상에 대한 살아있음이 회복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에 대한 살아있음이 회복되면 하나님과 마주할 수 없기에 이제는 불행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도 다 죄가 됩니다. 문제는 내가 왜 세상에 대해 살아 있게 됐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부지중에 세상에 대해 살아 있게 되었기에 그 상태로 그냥 살아갑니다. 혹시 ‘이래서는 안 된다.’라고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고백하는데도 잘 안 죽어집니다. 십자가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동일시가 일어나는 상황에서 기생충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에서 작동하는 기생충이란 습관적이고 상식적이어서 자동적으로 판단하게 됩니다. 우리는 사는 동안 습관적으로 판단을 해왔습니다. 판단이란 좋음과 나쁨에 대한 구분입니다. 살면서 이것은 좋고 저것은 나쁘다고 판단하는 것이 습관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로부터 부지중에 습관적으로 판단이 나오고, 세상의 좋음에 대한 기대감이 저절로 생깁니다.
습관적인 판단을 따라 이것이 좋다 저것이 좋다는 기대를 하고 흘러가도록 내버려 둡니다. 이것이 부지중에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의식의 차원에서 아무리 십자가를 붙잡고 예수님과 함께 죽으려고 해도 쉽지 않습니다. 의식의 지하층에서 좋음을 결정하고 좋음을 기대하는 습관적 판단이 지하수처럼 흐르고 있기 때문에, 의식의 지표층에서 아무리 십자가에서 죽으려고 해도 잘 죽어지지 않습니다. 잠시 죽었더라도 때와 상황에 따라 부지중에 습관적인 판단이 또 자동적으로 일어납니다.
부지중에 짓는 죄는 결국 부지중에 습관적 판단이 형성되면서 나타난 결과입니다. 세상에 대한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은 습관이기에 부지중에 생깁니다. 일단 생긴 판단은 좋음에 대한 기대를 흐르게 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을 죽여야 하는데, 습관적이고 자동적으로 일어나기에 부지중이라는 말대로 의식하지 못합니다. 의식의 지표층에서는 십자가를 붙잡고자 합니다. 그런데 의식의 지하층에서는 세상에 대한 판단을 따라서 좋음을 기대하는 마음이 흘러가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의식의 지표층에서 행하는 십자가 죽음의 효과가 없게 됩니다. 마음이 계속해서 세상에 대해 다시 살아나고 맙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이제 강릉의 가뭄이 본격적으로 실생활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67년 평생에 처음 겪는 상황입니다. 시간제로 물을 보내는데 그 양이 너무 적습니다. 아래층에서 집 안에 있는 모든 수도꼭지를 다 열어놓고 물을 받으면 제가 사는 12층까지는 물이 올라오지 않습니다. 어제는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찔끔찔끔 나오는 물로 겨우 샤워를 할 수가 있었습니다. 생리적 문제는 더 심합니다. 화장실을 처리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십자가 생활화는 지속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물이 급해도 돌에 맞아 죽는 것보다 급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생활화를 하려고 의식의 층에서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 비가 내려서 오봉댐이 가득 차는 것이 좋음이 아닙니다. 비가 안 내려서 불편한 상황이 지속되는 것도 나쁨이 아닙니다. 저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진짜 좋음은 하나님을 마주하여 마음이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저에게 진짜 나쁨은 하나님을 마주할 수 없어 마음에서 하나님 가뭄이 일어나는 것입니다.’라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면 실제로 의식이 기도한 대로 십자가 복음의 내용을 따라 머물면서 이 어려움을 넘어갑니다.
그런데 깜짝 놀랐습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이루어지는 의식의 지표층 밑에서는 나도 모르게 세상에 대한 바람이 생깁니다. 비가 내렸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물처럼 흐르고 있습니다. 나는 분명히 의식적으로 십자가를 붙잡고 죽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죽음이 가뭄이라는 독특한 상황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비가 내리는 것도 좋음이 아니고 비가 내리지 않는 것도 나쁨이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내 마음은 이 세상에 대해 죽고 하늘로 올라가서 아버지로 충만하면 된다고 여깁니다. 마음에서 아버지가 가뭄인 것이 문제이지 아버지만 충만하면 아무런 걱정이 없다는 생각을 적용하며 십자가 생활화를 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의식의 지표층에서 열심히 십자가를 붙잡고 주어진 상황과 싸우며 마음을 지키려고 하는 중에도 부지중에 이미 의식의 지하층에서는 ‘비가 좀 와야 될 텐데’라는 기대가 흐르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또 다른 예로 건강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주는 말씀은 ‘너는 몸으로 사는 이 세상에 대해 죽었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곧 몸이 건강한 것이 좋음이 아니고, 병든 것이 나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몸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건강하면 잘된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병들면 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동안 습관적으로 해온 ‘건강이 좋다’라는 판단이 있습니다. 습관적이고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판단입니다. 건강이 좋다는 습관적 판단이 의식의 지하층에서 형성되고 좋음에 대한 기대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건강과 관련해서는 습관적인 판단에 따른 좋음에 대한 기대가 흐르고 있기에, 내 의식의 지표층에서 아무리 십자가를 통해 죽으려고 해도 건강에 대한 기대가 자꾸 살아납니다. 십자가에서 죽는다고 하는데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하는 상황이 이루어지지 않고 행복함도 생기지 않습니다. 이 습관적 판단이 우리에게 존재하는 기생충입니다.
돈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서고금과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돈이 있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많은 게 좋다는 습관적인 판단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자들은 돈이 없는 상황에서 십자가를 붙잡고 싸웁니다. ‘돈이 있는 것도 좋음이 아니고 돈이 없는 것도 나쁨이 아니다. 돈을 벌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벌자.’라고 생각하며 의식의 지표층에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식의 지하층에서 습관적으로 판단이 일어납니다. ‘그래도 돈이 있는 게 좋지.’라는 판단에 의해 마음에서는 돈에 대한 기대가 흐름을 유지하게 됩니다.
이처럼 부지중에 습관적으로 의식의 지하층에서 자동으로 일어나는 판단이 기생충입니다. 우리는 좋음에 대한 기대가 살아 움직이고 있는 상황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지중에 일어나고 있는 이 상황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우리 마음은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죽음이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부지중에 짓는 죄에 대한 말씀이 반복됩니다. 이러한 말씀은 앞에서도 여러 차례 반복된 바 있습니다. 이 부지중에 짓는 죄를 통해서 우리가 세상에 대한 죽음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부지중에 죄를 짓는 조건이란 마음이 하나님을 마주하지 않는 것입니다. 행복하지 않다면 마음이 세상에 대해서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결국은 에덴을 빼앗기고 가나안을 빼앗기는 것과 같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을 상실한 결정적 이유는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입니다. 스스로 판단하기 시작하면서 에덴을 빼앗긴 것입니다. 선민이 가나안을 빼앗긴 이유도 세상에 대해 살아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좋음과 나쁨을 판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도 이제까지 습관적으로 판단했고, 내 주변에 모든 사람도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특히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서 그렇습니다. ‘건강하면 좋다. 돈이 많으면 좋다. 승진하는 게 좋다.’라는 판단이 습관적으로 발생합니다.
그런데 십자가 생활화는 승진을 좋음으로 여기지 않고, 승진에서 탈락했다고 나쁨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 좋음이고 이로부터 행복이 나옵니다. 그 행복한 마음으로 승진을 하든 못 하든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말과 행동을 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된 삶입니다. 문제는 의식으로 십자가 생활화를 해도 자꾸 내 의식의 저변에서 부지중에 판단을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한 좋음을 결정하고 기대합니다. 그렇기에 의식에서는 십자가에서 죽는다고 하는데도, 마음이 끊임없이 세상으로 살아서 회귀합니다. 세상에 대한 살아있음이 회복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기생충을 문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의식의 지하층에서 습관적으로 세상에 대한 좋음을 판단하고 기대의 흐름을 만들어 내는 성향이 기생충입니다.
다행인 것은 하나님께서 부지중에 짓는 죄에 대해 속죄의 길을 열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우리의 속죄는 십자가 죽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부지중에 일어나는 현상을 인지해서 십자가 죽음으로 뚫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안식일 규정이 갑자기 언급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을 결국 죽이라 하십니다.
안식이란 의도적으로 죽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일곱 번째 날을 정해놓고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의도적으로 세상에 대한 죽음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리고 옷단에 청색 술을 달라고 하시며 39절에서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옷단의 술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살아야 할 것을 기억하며, 마음이 육체의 정욕대로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안식과 옷단의 술은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안식일만 이야기하면 우리는 6일 동안 일하고 7일째 쉰다고 생각합니다. 옷단의 술은 7일째에 의도적으로 죽음을 이루어서 안식 상태를 이루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옷을 입듯이 세상에 대한 죽음의 상태를 모든 삶의 현장으로 갖고 나가라는 뜻입니다. 그렇게 해서 세상에 대한 죽음을 유지하라는 것인데, 문제는 세상에 대해 잘 죽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죽지 않은 결과는 부지중에 짓는 죄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부지중에 짓는 죄가 나타났다면 마음이 세상에 대해 죽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서 죽지 않았다는 것은 다시 말해 하나님을 마주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행복함으로 상징되는 가나안을 빼앗길 수밖에 없습니다. 에덴을 빼앗긴 것이 판단 때문이었듯이, 가나안을 빼앗기는 이유도 판단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의식 작용을 하고 있고 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잘 안되는 이유를 본문을 통해 지적해주십니다. ‘내 아들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너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동일시의 고백은 잘하는 일이다. 다만 이제는 부지중에 짓는 죄에 주목하라. 너의 의식에서 의도치 않은 죄가 나타났다면 그 이유는 판단 때문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동일시하는 고백 이외에 더 잘 죽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다만 동일시의 고백을 하면서도 부지중에 죄가 나타났다면 가나안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곧 에덴 상실의 이유와 마찬가지로 세상에 대한 좋음과 나쁨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붙들고 의식적으로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고백합니다. 세상에 대한 바람을 의식적으로 극복하여 좋고 나쁨에 대한 판단을 없애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 안되는 이유는 의식의 지하층에 습관적 판단이라는 기생충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부지중에 이미 세상 좋음에 대한 판단을 한 것입니다. 이 점을 주목하여 의식의 지층을 뚫고 들어가서 습관적으로 판단하여 좋음에 대한 기대가 만들어지게 하는 그 기생충을 잡아 죽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습관적 판단이라는 기생충을 잡아 죽일 방법은 십자가뿐입니다. ‘나는 십자가를 붙잡고 눈에 보이는 현상에 대해 의식적으로 죽고 있다. 그런데 여전히 나는 습관적이고 자동적으로 좋음에 대한 판단을 하고 그 좋음을 기대하고 있다.’라는 것을 인식했다면 습관적 판단이라는 영역까지 십자가 생활화를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하는 분들의 간증에서도 이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예를 들어 ‘목사님, 제가 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 붙잡고 돈이 있어도 좋음이 아니고 없어도 나쁨이 아니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을 마주해야 된다. 하나님만이 내게 좋음이다. 돈 벌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벌자. 그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돈까지 주셨습니다.’라고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기서 마지막에 ‘돈까지 주셨습니다.’라는 부분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전히 돈은 있는 게 좋다는 습관적 판단이 작동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결국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더니 하나님이 세상에 대해서 이렇게 해 주시더라.’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십자가 생활화가 최고인 것처럼 말하고 있지만 이것은 십자가 생활화가 아닙니다.
부지중에 내 속에서 발생하는 기생충을 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십자가 죽음이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 죽음이 제대로 이루어졌다면 간증의 내용은 달라질 것입니다. ‘목사님, 제가 돈이 없는 상황을 계기로 하나님을 훨씬 더 많이 번 것 같습니다. 돈이 없는 상황 때문에 하나님 부자 된 것 같습니다. 돈이 없는 상황이 제게는 하나님 부자가 되는 로또였습니다.’라는 고백이 나올 것입니다. 우리에게서도 진심으로 이러한 고백이 나와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세상 사람들에 대한 시선도 바뀝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 많이 벌었다는 사람을 축하하며 복을 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돈이 좋다는 습관적 판단을 죽이고 하나님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들이 불쌍해 보일 것입니다. ‘돈은 복이 아니다. 돈은 그저 하나님의 주권적인 쓰임에 의해 결정되어 있는 일이다. 나를 통해서 흘려보내시려고 두신 것뿐이다.’라고 여길 것입니다.
앞서 네 가지 행복 적합도를 다루며 들어 올리는 제사 방식인 거제가 이 땅에서의 성취에 대한 죽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시간에 대한 죽음, 이 세상에 취하는 좋음에 대한 죽음, 이 세상의 성취에 대한 죽음, 육체를 기반으로 하는 편과 당을 짓는 것에 대한 죽음, 이러한 죽음들이 온전히 이루어져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마주 하여 가나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습관적인 판단은 이 죽음을 허물어뜨리는 기생충입니다. 이것을 알고 의식의 지하층에서 일어나는 습관적 세상 좋음에 대한 판단을 죽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부지중에 짓는 죄에 대하여 안식일을 지키고 옷단에 청색 술을 달라고 말씀하신 것이 본문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의식의 지하층에서 일어나는 습관적인 판단을 죽이는 것을 목표로 정하고 인지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 죽음을 의식의 지표층에 적용할 뿐만 아니라 의식의 지하층까지 적용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부지중에 십자가 죽음을 무효화시키고 잡아먹는 기생충이 자동으로 일어나는 습관적 판단을 철저하게 뿌리 뽑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