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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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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대화하려는 시도의 반신앙성_태승철

by 태승철 · 25-09-08 07:52 · 341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대화하려는 시도의 반신앙성>의 줄거리 :

본문은 사람끼리의 대화와 소통이 완벽히 단절되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본문의 메시지는 사람끼리의 대화 단절이 지극히 정상적인 상황이니, 모든 선민 각자는 오직 하나님하고만 대화하라는 것입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쉬지 말고 하나님과 대화하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로서의 이 대화가 쉬지 않고 이루어지려면 대화란 아주 근본적 차원에서 보자면 하나님과 개별 인간 사이에서만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대화하려는 시도의 반신앙성

 

(민수기 14:1~45)

 

1.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백성이 밤새도록 통곡하였더라

2.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으면 좋았을 것을

3.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쓰러지게 하려 하는가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4.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지휘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5.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

6.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

7.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10. 온 회중이 그들을 돌로 치려 하는데 그 때에 여호와의 영광이 회막에서 이스라엘 모든 자손에게 나타나시니라

 

 

본문은 가데스 바네아에서 가나안을 정탐한 이후의 사건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본문 중심으로 대화하려는 시도의 반신앙성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대화하려는 시도는 신앙에 반대되는 마음가짐으로부터 나온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읽은 본문은 대화와 소통이 완벽하게 단절되는 상황을 보여줍니다. 여기에는 사람끼리의 대화 단절은 지극히 정상적인 상황이니 모든 선민 각자는 오직 하나님과만 대화해야 한다는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은 쉬지 말고 하나님과 대화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차원에서 말하자면 대화는 하나님과 개별 인간 사이에서만 가능합니다. 쉬지 않는 기도란 말 그대로 의식이 깨어있는 동안에는 가정이든 직장이든 시장이든 어디서든지 계속 하나님과 대화한다는 뜻입니다. 쉬지 않고 기도함의 대전제는 삶의 현장에서 언제나 이 세상에 있는 대상들보다 하나님을 더 강하게 실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실감의 비결이 무엇일까요?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과 함께 천국에 올라가서 머무는 시간이 길어야 합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하나님을 마주하여 교제하고 계십니다. 마음이 천국에 올라가면 이 교제에 참여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은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하늘로 올라갑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을 품으시고 하늘로 올라가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시고, 하나님의 모든 생각을 아시고, 하나님을 좋아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십니다. 그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예수님이 하나님께 취하시는 태도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실감할 수 있는 유일한 비결입니다. 마음이 하늘에 오래 머물러야 하나님과 만남의 시간이 길어지고 하나님을 실감할 수 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렇다면 대화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한다면 성도의 교제는 어떻게 이루어질까요? 성도는 하나님과 쉬지 않고 대화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성도는 하나님과의 대화로써의 기도가 진행되는 중에 다른 사람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쉬지 않고 하나님과 대화하는 상태이기에 마주하는 상대방과 대화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는 대화가 아닌 전달입니다. 쉬지 않고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대화의 내용물을 마주한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삶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붙잡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천국 체류 상태를 지속할 때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이 사람에게 무엇을 전달해야 될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교제가 이루어질까요? 하나님과 각 성도가 개별적으로 쉬지 않고 기도하는 동안에 하나님은 그러한 성도들을 만나게 하십니다. 예를 들어 A라는 성도에게 B라는 성도에게 전달할 내용을 주셔서 수용하게 하시고, 또한 B라는 성도에게도 A라는 성도에게 전달할 내용을 주셔서 수용하게 하십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성도의 교제는 이루어집니다.

한편, 성도가 아닌 사람을 만날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쉬지 않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유지하는 것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강하게 실감한다는 대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먼저 실감하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내 의식을 뗄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성도가 아닌 사람에 대해서도 하나님과의 쉬지 않는 대화를 통해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담긴 것들을 전달하는 것으로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성도가 아니기에 그들은 내가 전달하는 말을 받아들일 수 있는 수용성의 확률은 크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일 수 있습니다. 꼭 복음과 신앙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지라도 마찬가집니다. 나는 삶에 관한 이야기를 할지라도 전달하는 자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을 보면 가나안 정탐 사건의 결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대로 여호수아와 갈렙은 답답해서 미쳐버릴 것 같은 심정으로 옷을 찢고 절규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들의 절규를 듣고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서 돌을 들어 쳐 죽이려고 합니다. 이처럼 본문은 같은 선민인데 완전한 단절이 일어나는 상황을 보여주십니다.

본문의 해석은 대동소이하게 이스라엘의 불신앙에 초점이 맞춰집니다. 그런데 오늘은 시각을 조금 바꿔보기로 하겠습니다. 선민 사이에 완벽한 단절이 주제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와 갈렙과 이스라엘의 단절은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실감하는 자와 세상을 실감하는 자 사이에서는 대화하는 것이 비정상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화를 시도하는 것 자체가 반신앙적인 일입니다. 대화가 잘 풀리면 오히려 더 문제입니다.

하나님과 대화하지 않는 사람들끼리 대화가 잘 풀린 대표적 경우가 바벨탑 사건입니다. 하나님을 실감하지 않은 채 세상을 실감하면서 발생하는 이해관계가 서로 맞아떨어지는 동안에 인간은 대화하면서 야합합니다. 이러한 대화를 통한 일치는 결코 지속될 수 없습니다. 지금 지구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나라와 나라, 계층과 계층, 정당과 정당, 남과 북, 동과 서,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형제와 형제, 경영진과 노동자 사이에 진정한 의미의 대화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잠시 이해관계가 부합할 때 대화가 이루어지는 듯하지만 반드시 깨집니다. 세상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대화와 타협과 일치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67살이 되도록 계속 들어왔던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대화와 통합입니다. 이러한 구호는 특히 정치권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철들고 뉴스 보기를 시작하면서부터 많은 정권이 바뀌었지만 대화와 통합을 이야기하지 않았던 정권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도는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끊임없이 대화와 통합을 주창합니다. 이러한 태도 자체가 반신앙적입니다. 애초에 인간 사이에서 대화는 안 됩니다. 그것을 하려니 될 리가 없습니다. 본래 대화란 피조물인 인간과 창조주 하나님 사이에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인간끼리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는 나의 모든 세포까지 주장하시는 하나님이 제일 가까이 계십니다. 그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한 채 마주 보는 사람을 실감하면서 하나님과의 대화를 중단하고 사람과 대화하려는 것은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제일 가까이 계시기에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사람과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대화를 통해서 나타난 것을 전달하는 과정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돈을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돈은 비인격체이기에 대화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일방적으로 늘 돈을 생각할 뿐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배우자를 마주하든, 자녀를 마주하든, 형제를 마주하든 돈과의 관계를 우선시하는 중에 나타나는 이해관계에 대한 판단으로 대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돈과의 대화가 끊어지지 않는 중에 사람을 마주하는 것처럼, 하나님을 최우선적 존재로 실감한다면 하나님과 대화가 끊어지지 않는 중에 사람을 마주하게 됩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에게 대화는 돈과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의 만남은 돈과의 관계에서 나온 내용을 전달함으로 이루어집니다. 물론 돈은 비인격체이기에 대화는 이루어질 수 없고 일방적인 독백이 될 것입니다. 어쨌든 돈과의 관계에서 나타난 것을 전달한다는 점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이러한 이해를 통해 본문을 보면 단절의 이유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실감하는 자들이었으나 이스라엘은 세상을 실감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으나 실감의 대상은 달랐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과 계속 대화하는 중이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실제 삶의 상황에서 완전히 축출되다시피 한 상태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의식에서는 삶의 현장에 하나님이 있을 필요가 없다고 여겨지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여태까지 모세를 통해서 구름 기둥으로 인도를 받았지만 이제는 사람을 하나 세워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주도권을 하나님으로부터 빼앗아 오고자 했던 것입니다.

열 명의 정탐꾼은 세상을 실감하는 상태였습니다. 이들은 당연히 하나님을 배제한 상태에서 상황을 봅니다.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고, 국가 체제를 완비하고 있는 가나안 족속들의 상황을 봅니다. 이것을 뚫고 들어가서 머무를 자리가 없다고 판단합니다. 세상을 실감하기에 이것은 절대적인 확신이었습니다. 이러한 생각에 그릇됨이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합니다. 반면, 하나님을 실감하는 여호수아와 갈렙의 관점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고 출애굽의 역사를 일으키시고 홍해의 기적까지 보여주셨음을 기억합니다. 그러므로 아낙 자손의 거인뿐만 아니라 국가 체제를 완비한 가나안 족속들조차도 문제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9절을 보면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가나안에 진입하는 것을 식은 밥을 물에 말아서 먹는 것처럼 여겼습니다. 하나님을 실감하기에 이것은 그릇됨이 없는 절대적인 확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실감하는 자도 그릇됨 없는 확신을 갖고 있고, 세상을 실감하는 자도 그릇됨 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단절의 이유입니다. 두 확신이 대극점에 서서 대치합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는 대화, 양보, 타협, 화합, 일치는 애초에 불가능합니다. 이로부터 사람끼리 대화를 시도하는 것이 반신앙적 시도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대화는 결국 상대방을 의식하고 실감해야만 성립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실감하는 자가 세상을 실감하는 자에게 대화를 시도한다면 하나님 실감은 즉시 멈춰지고 상대방을 실감하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실감하며 쉬지 않고 기도함을 통해 하나님과 대화해야만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과는 대화하려고 시도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에 대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대화가 아닌 전달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을 실감하는 자와 세상을 실감하는 자 사이에서는 대화가 불가능함을 가르쳐줍니다. 대화를 시도한다면 그것은 바벨탑 사건을 재현하려는 의도일 뿐입니다. 그러한 목적이 아니라면 내 마음에서 가장 가까운 하나님을 제쳐두고 사람과 대화하려는 시도를 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끼리의 대화는 결국 하나님을 실감의 대상에서 완전히 제외하려는 시도입니다. 세상을 실감하고 상대방을 실감하는 상태로 빠져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반신앙적 행위입니다.

사람과 대화해서는 안 됩니다. 대화는 하나님과 하는 것입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중에 주어지는 내용을 전달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사람이 내가 전달하는 내용을 받아들이느냐 안 받아들이느냐는 내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대화 속에서 주어지는 내용을 이스라엘에 전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여호수아와 갈렙을 거부했듯이 예수님을 거부합니다. 예수님이 전달하시는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받은 내용을 수용하지 않고 결국은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예가 다수 등장합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하나님과의 대화 속에서 주어지는 내용을 이스라엘에 설교의 형태로 전달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내용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데반 집사님을 돌로 쳐 죽입니다.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이 죽은 이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세상을 실감하는 자들을 향해 대화를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의 대화 속에서 주어지는 내용들을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이들을 죽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일입니다. 실감하는 대상이 다르기에 단절은 당연합니다. 그러므로 사람과 대화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이처럼 본문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내가 세상에 대해 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세상에 대한 죽음의 한 측면을 우리에게 대화와 소통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본문을 보면 세 가지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첫 번째는 세상을 실감하고 삶에 대해서 주도권을 쥔 이스라엘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지만 하나님을 실감하지는 않았습니다. 실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을 박탈합니다. 쉽게 말해 더 이상 내 삶에 대해서 하나님은 주도적인 입장에 서지 마십시오. 우리가 더 이상 하나님의 이끌림을 받았다가는 망할 겁니다.’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은 남겨두되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박제시켜 버립니다. 짐승을 박제할 때 속에 있는 모든 내장을 다 긁어내듯이 하나님의 이름 속에서 삶의 현장에서의 살아계심을 긁어냅니다. 그리고 개념과 이론과 교리상으로만 하나님의 이름을 남겨둡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의 상태입니다. 그래서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신다는 그 실제 상황을 거부합니다. ‘이제 하나님은 실제 삶의 현장에서 당신의 뜻대로 주도권을 가지고 나를 인도하시면 안 됩니다.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내 삶에서 일어나야 될 일을 내가 결정하겠습니다.’라고 말한 셈입니다. 지금 강릉은 심각한 가뭄 상태입니다. 제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빨리 비가 오면 좋겠다고 바란다면 어떨까요? 비가 와야 한다는 것을 스스로 결정하는 주도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만을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실감하면서 땅에 엎드린 모세와 아론입니다. 5절을 보면 모세와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 앞에서 엎드린지라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에게서 완전히 박탈하고 주도권을 쟁취하며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장에서 모세와 아론은 엎드렸습니다. 여기서 엎드린다는 것은 사지를 쭉 뻗고 배를 땅바닥에 붙인 모습으로써 이것은 완전한 항복을 표현하는 방식입니다. 200만 이스라엘은 열 명의 정탐꾼의 말을 듣고 하나님으로부터 삶의 현장의 주도권을 박탈합니다. 이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의 주도권을 박탈하는 것은 우리의 가정과 직장을 비롯한 각종 삶의 현장에서도 나타날 수 있는 일입니다. 스스로 주도권을 쥐려는 상황에서 모세와 아론은 아무 반론도 하지 않고 땅에 엎드립니다. ‘하나님! 저는 200만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주도권을 박탈하는 이 현장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하나님의 주도권을 인정합니다. 내 삶의 모든 영역 위로 하나님의 주도권을 인정하고 수용합니다.’라는 심정으로 엎드렸던 것입니다.

세 번째는 여호수아와 갈렙입니다. 이들의 태도가 놀라움을 느끼게 합니다. 모세와 아론이 보여주는 태도는 우리가 이제까지 봐온 익숙한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주도권을 온전히 인정해 드리고 하나님의 이끌림을 받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모세가 계속 보여왔던 모습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끊임없이 대화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론과 함께 엎드린 이 모습도 하나님께 전달받은 내용을 이스라엘에 전달하는 것뿐입니다. 이처럼 모세는 전달자입니다. 하나님과 쉼 없이 대화하는 자임과 동시에 이스라엘 앞에서는 하나님과 대화에서 주어지는 내용을 전달하는 자입니다. 모세는 출애굽 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하나님과의 대화에서 주어진 내용을 전했지만 이스라엘 중에서 이러한 모세의 전달을 받아들인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 단 둘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20세 이상의 60만 명 장정 중에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모세가 쉬지 않고 하나님과 대화한 내용을 전달할 때 수용하고 받아들였습니다. 6절을 보면 그 땅을 정탐한 자 중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자기들의 옷을 찢고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모세에게 전달받은 내용을 수용함으로써 하나님을 실감했습니다. 하나님을 실감하자 가나안 족속이라고 하는 존재의 의미는 먹이였습니다. 찬물에 말아 먹어버리면 그뿐인 찬밥이었습니다. 이들에게 가나안이 먹이라는 것은 너무나 확연하고도 분명한 사실이었습니다. 이들의 확신은 하나님을 실감하지 않고 세상을 실감하는 이스라엘이 보인 잘못된 확신과 부딪힙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확신은 철옹성 같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스라엘의 잘못된 확신 앞에서 좌절하고 절망하며 부르짖습니다.

본문이 여호수아와 갈렙의 태도를 통해 보여주시는 것은 단절입니다.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단절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당연한 단절을 대화로 극복하려 하는 것은 오히려 반신앙적 시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는 대화할 수 없습니다. 죽은 자가 사람을 만나는 방식은 전달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향하여만 살아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쉬지 않고 이루어지는 대화의 내용을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 뿐입니다. 본문이 보여주는 당연한 단절을 넘어서서 사람을 설득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닙니다. 나의 생각이 상대방에게 수용되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그 결과 화해와 조화와 타협의 부드러운 분위기를 추구하거나 사람끼리 좋은 관계가 되기를 원할 수 없습니다.

가족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실감하지만 가족이 세상을 실감한다면 그 관계에는 단절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단절을 드러낼 필요는 없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단절을 드러낸 것은 사람 사이에서 단절의 당연함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절규하고 호소하며 단절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보며 쉬지 않고 대화하는 가운데 주어지는 내용을 전달할 수 있으면 됩니다. 모세와 아론이 엎드려져서 전달하는 자로서의 입장을 보여준 것처럼 얼핏 냉담하다시피 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평강 가운데 전달하라는 것입니다. 이후의 상황을 보면 모세도 사람이기에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분노에 사로잡히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다만 본문은 모세와 아론의 엎드러짐을 통해 하나님이 사람에게 바라시는 본래의 모습을 그림을 그리듯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단절은 이상한 일이 아닌 당연한 일입니다. 단절을 대화로 극복하려 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반신앙적인 것입니다. 대화로 극복하려 할 때 하나님 실감을 멈추게 되고 상대방을 실감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전달자일 뿐 대화하는 자가 아닙니다. 우리의 대화는 하나님만을 향해야 합니다. 이 세상을 향해서는 전달자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과 여호수아와 갈렙은 서로 영원히 만날 수 없는 두 갈래 운명의 길로 접어듭니다. 이들은 앞으로도 광야에서 38년간을 함께하기는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전혀 다른 운명의 길을 가게 됩니다. 이렇게 갈라진 운명의 길을 가는 사람들 사이에는 이미 결정되었기에 대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필요한 것은 대화가 아닌 전달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요구되는 바입니다.

우리는 몸으로 만나는 사람들을 향하여 전달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멸망으로 운명지어진 길을 가던 사람 중에도 전달받은 것을 수용하는 자가 있다면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입니다. 그 외의 사람들이 내가 전달하는 내용을 듣고 반발하고 분노에 차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 분노를 가라앉히려고 할 필요도 없고 설득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럴 때 나도 하나님 실감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과의 대화를 중단하게 됩니다.

인간관계는 우리가 대화의 노력을 통해 유지해 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냉담해야 합니다. 냉담한 평정을 유지해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향해서만 뜨거워야 합니다. 그럴 때 부부관계로부터 시작하여 모든 인간관계는 하나님이 붙잡습니다. 우리가 유지하는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이 떼놓으신다면 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장정 60만 명 중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으로부터 599998명을 떼어내십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명만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20세 이상의 모든 남녀는 광야에서 다 죽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와 갈렙은 붙이시고 이스라엘의 20세 이상 성인을 다 떼어놓으십니다. 인간관계는 우리의 힘으로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십자가 죽음의 큰 측면 중 하나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은 자는 대화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함께 들어간 사람으로서 하나님과만 대화합니다. 인간관계에서는 대화하는 자가 아닌 전달하는 자입니다.

한편 본문 마지막을 보면 특이한 사건이 발생합니다. 40절을 보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산꼭대기로 올라가며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우리가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곳으로 올라가리니 우리가 범죄하였음이니이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가데스 바네아 사건에 대한 상과 벌을 말씀하십니다. 모세는 이것을 백성에게 전했고 벌 받기를 두려워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스스로 올라가 가나안 사람들과 싸우고자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하나님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저 우리가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했던 것이 잘못된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이제 가나안 땅으로 진격해서 들어가면 하나님이 자신들에게도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상을 주시리라 여겼습니다. 모세는 이에 대해 41~42절에서 모세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제 여호와의 명령을 범하느냐 이 일이 형통하지 못하리라 /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의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라고 말하며 백성들을 제지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올라가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나안 족속들을 먹이로 여겼듯이,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들을 찬물에 밥 말아서 먹는 것처럼 여길 정도로 하나님을 크게 실감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또 다시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하나님을 실감하기 위해 하나님과 친해지는 시간을 가지려고 하기는커녕 당장 올라가 싸우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우리에게서도 쉽게 발견되는 잘못입니다. 지금 일이 안 됩니다. 세상일이 답답합니다. 막혔다고 느껴집니다. 형통하지 않습니다. 원하는 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괴롭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그 일로 진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이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질 수 있도록 하나님을 실감해야 합니다. 하나님 실감이 커져서 세상일들을 티끌로 만들라는 것이 우리의 싸움이고 하나님의 요구입니다.

하나님 실감이 큰 사람들은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생겨도 사람과 대화하려 하지 않습니다. 전달할 내용이 있을 만큼 하나님과 대화하려 합니다. 하나님과 대화하려면 하나님에 대한 실감이 커져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실감이 커지려면 그리스도 연쇄 과정 안에 들어가 하늘로 올라가서 체류하는 시간이 길어져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고 계시고, 하나님을 아시고, 하나님을 좋아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지금도 진행 중인 예수님의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대로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마음이 하늘에 머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렇듯 예수님 덕분에 천국 체류 시간을 늘림으로써 하나님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쉬지 않고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대화의 내용을 세상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들은 대화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단절을 전제합니다. 오직 전달할 뿐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을 삶의 현장 어디에서도 잊지 않게 해주시옵소서. 그러므로 쉬지 않고 기도하라는 말씀대로 하나님과 쉬지 않고 대화하는 자가 되게 하시고, 세상을 향해서는 오직 전달자로서만 살아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