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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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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 악한 말이 없는 복스러운 삶_태승철

by 태승철 · 25-09-01 06:58 · 393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악한 말이 없는 복스러운 삶>의 줄거리 :

시내산에서 가나안을 향해 출발하자마자 사달이 납니다.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고 이에 대해 하나님은 진영의 한끝을 불사르심으로써 당신의 진노를 드러내신 겁니다. 그러자 모세가 중재에 나서고 하나님은 진노를 누그러뜨리십니다. 백성의 원망과 하나님의 진노와 모세의 중재. 선민에게서 반복되면 안 되는 악순환입니다. 본문은 앞으로 이런 악순환이 악한 말로 인해 수없이 반복될 것임을 예보하는 성격을 띱니다. 그리고 결국 이스라엘은 이 악한 말을 중단하지 못함으로써 선민 됨을 스스로 지워버리는 것으로 끝을 내고야 맙니다.

 

 

악한 말이 없는 복스러운 삶

 

(민수기 11:1~35)

 

1.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2. 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3. 그 곳 이름을 다베라라 불렀으니 이는 여호와의 불이 그들 중에 붙은 까닭이었더라

4.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5.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6.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도다 하니

7.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8.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더라

9. 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에 만나도 함께 내렸더라

10. 백성의 온 종족들이 각기 자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이러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

11.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12. 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어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13. 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이르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14.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15.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악한 말이 없는 복스러운 삶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복지의 삶, 복스러운 삶, 복된 삶은 악한 말이 없어야 가능하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본문에는 다베라라는 지명이 등장합니다. 무엇 때문인지 모르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향해 악한 말로 원망을 합니다. 만나 때문에 불평하는 것은 악한 말로 원망하는 것의 한 예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1~3절까지의 말씀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백성들이 악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진노하셔서 불을 내리십니다. 그러면 모세의 기도가 개입되고 하나님의 진노는 가라앉습니다. 그리고 다시 백성은 악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이러한 악순환은 광야 40년 동안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1~3절의 다베라라는 이름이 지어진 본문의 내용은 광야 생활 동안에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될 것임을 예고하는 성격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되는 이유는 악한 말을 하는 원망 때문입니다. 악한 말로 원망하는 악순환이 끊이지 않고 반복됨으로써 출애굽 하여 가나안 땅으로 행진을 시작한 사람들 중에 20세 이상의 성인에게는 복스러운 삶이 허락되지 않고 다 죽는 일이 빚어지고 맙니다.

광야 생활의 의미는 복된 삶, 다시 말해 복스러운 삶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준비하는 기간입니다. 복스러운 삶은 하나님이 주신다고 해서 다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상태가 그대로 유지되는 한 복스러운 삶은 소화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시지 않는다고 원망할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미 다 주실 준비가 되어 계십니다. 문제는 복을 주셔도 우리가 복스러운 삶을 소화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교회의 40년 광야 생활의 주제는 하나님이 공짜로 주시려고 하는 복스러운 삶을 어떻게 해야 소화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준비하신 복스러운 삶을 소화하려면 하나님이 내미시는 두 가지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선민에게 두 가지를 내미시고, 여기에 올바르게 대처할 수 있으면 복스러운 삶을 허락해 주십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 자신이고, 두 번째는 이 세상에서 진행되는 삶의 조건입니다. 이 두 가지에 올바르게 대처할 수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구상하시고 계획하신 복스러운 삶을 우리에게 아낌없이 마구 주십니다. 마구 주시는 복을 소화할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미신 두 가지 조건인 하나님 자신과 삶의 조건에 올바르게 대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올바른 대처법은 하나님 자신은 가지고, 삶의 조건은 손대지 말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제가 영락 교회에서 부목사로 섬기던 시절의 일입니다. 장로님들이나 집사님들과 식사를 하기 위해 어느 식당을 자주 방문했습니다. 그 식당에서는 새벽에 제주도에서 직송한 갈치 요리를 팔았습니다. 갈치 정식을 시키면 너비가 손바닥만 한 갈치가 한 토막씩 나옵니다. 그리고 고등어조림을 추가로 시킵니다. 식사가 나오면 자기 몫의 갈치는 손대지 않고 일단 가운데 있는 고등어조림을 먹는데, 무 조각 하나가 남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게 먹은 뒤에 갈치를 먹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상황이 바로 이와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가지라고 내미신 하나님 자신에는 손도 대지 않고, 정작 손대지 말고 감사하라고 주신 삶의 조건에는 손을 대서 가지려고 합니다. 이때 감사가 사라지고 삶의 조건에 대해 결핍을 느끼면서 원망과 불평이 나오게 됩니다. 이것이 악순환을 불러일으키는 선민의 악한 말입니다. 하나님이 가지라는 것은 갖지 않고, 손대지 말고 감사하라고 주신 삶의 조건에 대해서는 원망과 불평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시고 모세는 선민과 하나님 사이에서 중재에 나섭니다. 모세를 보시고 하나님이 진노를 누그러뜨리시면 선민은 또 다시 삶의 조건에 대해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면 다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고 다시 모세의 중재로 하나님이 진노를 누그러뜨리시는 악순환이 끊임없이 반복되었습니다. 그 결과 출애굽을 한 성인들 중 아무도 복지에 들어가지 못하는 결말을 맞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신 복스러운 삶을 맛도 못 보고 광야에서 다 죽고 맙니다.

하나님을 갖는 것은 너무나 쉬운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갖는 정도를 보면 사람마다 엄청난 스펙트럼이 만들어집니다. 많이 가진 사람이 있고, 조금 가진 사람도 있고, 전혀 못 가진 사람도 있습니다. 스타인웨이의 최고급 피아노를 선물 받았다면 저는 피아노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기에 아무런 활용도 하지 못합니다. 체르니 30 정도를 치는 아이라면 다소 활용할 수 있을 것이고, 음대를 졸업한 사람이라면 꽤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고,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는 피아니스트라면 완벽하게 활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똑같은 피아노지만 사람마다 활용 정도가 전혀 다를 수 있듯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갖는 것은 너무나 쉽지만 실제로 하나님을 많이 가진 사람은 드뭅니다. 우리의 죄적 체질이 하나님보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들을 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가지라고 주신 하나님은 안 갖겠다고 밀쳐내고, 손대지 말고 감사하라고 하신 삶의 조건은 자꾸만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삶의 조건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너무나 악한 일입니다. 단순히 세상 것이 부족하다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가지라고 주신 하나님은 가지지 않은 채, 손대지 말라고 하신 삶의 조건을 가지려고 하는 태도가 너무나 악한 것입니다.

복스러운 삶을 잘 소화할 수 있기 위한 준비는 하나님이 내미시는 두 가지를 잘 소화함으로써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 자신을 가지기에 열중해야 하고, 두 번째는 삶의 조건에 대해서는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복스러운 삶은 주어집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사이에 비밀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가지기에 성공하면 삶의 조건이 어떻든 무조건 감사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을 가짐이란 하나님 한 분으로 마음의 만족과 기쁨을 끝내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그냥 되는 일이 아닙니다. 피아노를 죽도록 연습해야 실력이 느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고군분투가 필요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하나님 자신을 가지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가지기에는 우리의 죄적 체질이 너무 강력하다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지는 것들을 더 좋아합니다. 이 체질과 싸워 이기기 위한 고군분투가 없다면 하나님을 가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가질 수 없다면 삶의 조건을 가지려 하게 됩니다. 그런데 삶의 조건은 내 마음대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반드시 원망과 불평이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이 원망과 불평의 악한 말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복스러운 삶은 절대로 주어질 수 없습니다.

 

본문에는 만나만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 대한 이스라엘 백성의 원망과 불평이 나옵니다. 다만 이것은 다베라 사건의 한 예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 생활 동안 끊임없이 원망과 불평의 악한 말을 쏟아낼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시고 모세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중재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거두시고 이스라엘 백성은 또 다시 악한 말을 쏟아내기 시작합니다. 다베라 사건은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될 것이라는 예고입니다. 그 악순환의 원인이 되는 악한 말의 예를 만나에 대한 원망과 불평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나의 문제를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너무나 탐욕스러워서 불평했다고 이해합니다. 물론 실제로 그렇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열 가지 재앙과 홍해의 기적을 보고 출애굽을 했습니다. 그런데 고작 1년 남짓한 기간이 지났을 뿐인데 이들은 하나님이 만나만 주신다고 불평과 원망을 쏟아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만나만 주시는 열악한 조건을 의도적으로 내미셨습니다. 아무리 먹거리가 열악하더라도 하나님을 가져서 마음이 만족하고 기쁠 수 있다면 반드시 감사가 나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삶이 열악하더라도 감사한다면 하나님을 가졌다는 증거입니다. 이것이 증명되면 복스러운 삶을 주실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이러한 믿음을 증명하기를 바라시며 열악한 삶의 조건으로 몰아치셨던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 속에는 건강 문제, 재정 문제, 자녀 문제, 인간관계의 문제를 비롯한 다양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문제들을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잘 이겨나갈 수 있기 위하여 애를 쓰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최근 강릉의 가뭄 상황을 보면 이스라엘의 상황을 다소나마 이해하게 됩니다. 어제부로 강릉이 재난지역으로 선포되었습니다. 67년 평생에 처음 겪는 가뭄을 맞이하면서 생활용수 자체가 완전히 끊어질 수도 있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낯섦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내 죽음으로 받아들여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는 십자가 생활화를 자연재해에 대해서는 적용해 본 적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개인적 문제에 십자가를 적용하는 것과는 분위기가 굉장히 다름을 알게 됩니다. 그렇기에 요새는 십자가 생활화에서 가뭄에 대한 싸움이 굉장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 백성을 탐욕스럽다고 비난하지만, 처지를 바꿔 생각해 보면 쉽게 비난할 상황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 한 가지를 떠올려 보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한 달 동안 그것만 먹으라고 지시하신다면 아침, 점심, 저녁으로 90끼니를 먹어야 합니다. 그 음식이 최고급 한우일지라도 맛있게 느껴질까요? 일주일도 못 가서 한우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생리적 현상입니다. 뒤에서 보겠지만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도 고기 타령을 하자 하나님께서는 메추라기를 지면 위 두 규빗 정도나 쌓일 정도로 주십니다. 1미터 정도의 엄청난 양을 34km 진영 사면에 쌓아 두셨습니다. 그야말로 코에서 고기 냄새가 지겹게 느껴질 정도로 한 달 동안 먹게 하셨던 것입니다. 이로부터 하나님께서 인간의 생리적 특징을 모르셨기에 만나만 먹도록 강요하셨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만 주시는 하나님께 원망한 것은 특별히 우리보다 더 탐욕스러웠기 때문은 아닙니다. 최고급 한우일지라도 일주일 내내 먹으라고 하신다면 나중에는 제발 한우 좀 먹지 않게 해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신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완전히 가진 상태는 아니더라도, 하나님을 갖는 것이 무엇인지를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기를 바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만나만 먹는 상황에서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 같은 것들을 생각합니다. 이럴 때 원망하고 불평하기에 앞서 내가 하나님으로 온전히 마음의 만족과 기쁨을 해결했다면 지금처럼 다른 것들을 먹고 싶어 했을까?’라고 자문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갖도록 지음 받은 인격적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있음을 존재감으로 갖고, 하나님의 좋음을 만족감으로 가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가졌다는 증거는 삶의 조건이 어떠하든지 손대지 않고 감사로 나타납니다. 원망과 불평 대신 감사가 나올 수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을 갖지 못한 단계에서 선민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스스로에게 묻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어떤 물건을 사고 싶습니다. 어디를 가고 싶습니다. 어떤 취미 생활에 빠져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가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기뻐하는 상태가 되었다면 이러한 바람을 가질까? 이 물건을 갖고 싶은 생각이 들까? 이것이 부족하다고 다른 것을 먹고 싶은 마음이 생길까?’라고 자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적어도 당신 자신을 가지라고 내미신 하나님을 실제로 가짐으로써 만족과 기쁨을 끝내야 한다는 기준을 옳다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선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스러운 삶의 조건을 구비하시고, 선민으로 하여금 복스러운 삶을 소화할 수 있는 자가 되게 하시고자 만나만 주십니다. 만나만 먹는 일은 괴롭고 지겹기까지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민은 이렇게 간구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 저는 지식으로나마 알고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을 갖고,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으로 기뻐할 수 있었다면 만나만 먹는 이 상황을 감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직 하나님을 온전히 갖지 못하는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저의 죄악 됨과 지긋지긋한 죄의 체질을 불쌍히 여겨주셔서, 죄의 체질을 이기고 하나님을 가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선민의 불평과 원망은 나 자신의 죄적 체질을 향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죄의 체질에 먹혀있었습니다. 죄의 체질이 이끄는 대로 삶의 조건에 손을 댑니다. 가지라는 하나님을 제쳐둔 채 삶의 조건이 부족하다고 원망하고 불평합니다.

저는 요새 가뭄을 통해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이전보다 더 실감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자연재해에서 오는 압박감은 개인적 문제가 주는 압박감과는 분위기가 다릅니다. 일상의 문제들 앞에서 십자가를 생활화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느낌을 갖게 됩니다. 기후학자들은 올해가 가장 시원한 여름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십자가를 적용하는 것은 낯설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기후 문제나 자연재해는 이제까지 하던 십자가 적용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의 조건을 열악한 방향으로 끌고 가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나님 가지기에 박차를 가하도록 조이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 가지기는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피아니스트가 되기까지 끝없는 노력이 요구되는 것과 같습니다. 본래 하나님 가지기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주셨기 때문에 제일 쉬운 일입니다. 돈 버는 일보다 쉽고, 건강을 유지하는 일보다 쉽고, 자녀를 형통하게 하는 일보다 쉽습니다. 세상에서 하나님 가지기보다 쉬운 일은 없습니다. 문제는 죄의 체질입니다. 죄의 체질이 원동력이 되어 돈 버는 일에 애쓰게 하고, 건강을 유지하는 일에 애쓰게 하고, 자녀를 형통하게 하는 일에 애쓰게 합니다. 이 죄의 체질로 인해서 하나님 가지기는 제일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내 속에 있는 죄의 체질과 싸움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알아야 합니다. 삶의 조건이 어려워질 때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삶의 조건을 내미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어려운 삶의 조건만 내미신 것이 아니라 당신을 함께 내미셨습니다. 하나님과 삶의 조건이라는 두 가지를 내미신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서 알맞게 대처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지려고 애를 쓰고, 삶에 조건은 감사할 수 있어야 됩니다. 삶의 조건에 대한 감사는 하나님을 어느 정도로 갖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이것이 신비하게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열악한 삶의 조건이 주어졌다면 그것에 대응하지 말고, 내게 주어지고 있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갖는 일에 총력을 기울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가지기 위해서는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삶의 조건에 대해 죽고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갔다면 다시 땅으로 내려와서는 안 됩니다. 열악한 삶의 조건이 진행되는 중에도 마음이 하늘에 머무는 시간이 지속되어야 하나님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마음이 천국에 머무는 시간은 지속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아예 하나님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 곁에 머물며 하나님을 가지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붙잡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죽음이자 세상 탈출의 출구로써 나의 마음을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게 만듭니다. 그리고 하늘에 올라간 후에도 십자가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죽음이기에 마음을 다시 세상으로 내려오지 않게 만드는 장벽이 되어줍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십자가를 바라보는 동안 마음은 하늘에 머물 수 있게 됩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하늘에 올라가고 하늘에 머무는 시간을 늘려가며 하나님을 갖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가지면 가질수록 나타나는 일이 삶의 조건에 대해서는 좋고 나쁨을 판단하지 않고 무조건 감사로 대할 수 있게 됩니다. 삶의 조건이 세상 기준으로 열악하든지 풍족하든지 상관없습니다. 무조건 감사할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하늘에서 아버지 가지기가 원활하게 진행되면,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도 당신이 계획하신 복스러운 삶을 아무 유보 없이 우리에게 허락하실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백성의 온 종족들이 각기 자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이러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는 소리를 듣고 화를 냅니다. 그런데 모세의 화는 하나님을 향한 화도 아니고 백성들을 향한 화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혼자 책임을 져야 한다는 모세의 호소를 들으시고 칠십인 장로를 택하여 영을 부어주십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이 만나만 먹게 된 상황에 대해 불평하며 울고 있는 모습이 인간으로서 이해가 되었습니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처럼 하나님을 직면하여 하나님만을 갖는 것이 선민의 사명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을 가지게 하시려고 열악한 삶의 조건을 자꾸 제시하시는데 백성은 하나님을 가지려는 생각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 영적인 거리감을 어떻게 좁힐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선민임에도 하나님만을 가져야 하고 삶에 조건에 대해서는 감사해야 한다는 깨달음조차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꾸 삶의 조건을 열악하게 하시면서 나를 가짐으로써 감사를 보이라.’라고 몰아가고 계십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의도에 발맞추어 갈 수 없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형편을 보면서 내가 무슨 힘으로 이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끌어 갈 수 있겠는가?’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모세의 호소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칠십인 장로를 세우게 하십니다.

칠십인 장로가 하는 일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사실을 가르쳐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삶의 열악한 조건을 제공하시는 이유는 복스러운 삶을 소화할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이다. 복스러운 삶을 감당할 능력을 키우는 방법은 하나님이 내미시는 두 가지 중에서 삶의 조건을 가지려 하지 말고 하나님 자신을 가져야 한다.’라는 사실을 가르치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칠십인 장로는 이 사실을 200만 명에게 퍼트리고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이제까지는 모세 한 사람이 이것을 외쳤습니다. 이제는 각 지파의 대표로 뽑힌 칠십인 장로가 집안의 가장들을 모아서 이야기하고, 가장들은 다시 식구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그렇게 하여 200만 명 모두에게 복스러운 삶을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하고자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내미신 두 가지 중에서 삶의 조건은 마음으로 손대지 말고, 오직 하나님 자신만을 가지는 데 총력을 기울이라. 감사가 나올 때까지 하나님을 가지라.’라는 사실을 가르치기 위해 칠십 명의 장로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한편, 본문 마지막을 보면 메추라기를 주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33~34절을 보면 고기가 아직 이 사이에 있어 씹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백성에게 대하여 진노하사 심히 큰 재앙으로 치셨으므로 / 그 곳 이름을 기브롯 핫다아와라 불렀으니 욕심을 낸 백성을 거기 장사함이었더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기브롯 핫다아와는 탐욕의 무덤이라는 뜻입니다.

창조주요 주권자이신 우리의 아버지께서 가지라고 내미신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삶의 조건은 하나님이 가지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삶의 조건은 좋다, 나쁘다, 넘친다, 모자란다를 따질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갖게 되면 삶의 조건에 대해서는 반드시 감사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이 감사를 하지 못한 채 악한 탐욕의 말을 쏟아냅니다. 가지라는 하나님을 갖지 않고, 갖지 말라는 삶의 조건을 가지려 하는 것이 탐욕입니다. 삶의 조건을 가지려고 하다 보면 악한 원망의 말이 튀어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삶의 조건에 대해 감사가 나오지 않는다면, 하나님이 가지라고 주신 것이 아닌 것을 가지려는 탐욕을 부리는 중에 악한 원망의 말을 쏟아내는 상태입니다. 이 세상의 삶의 조건은 내가 가질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만 가져야 합니다. 포기하는 이유는 내 죄의 체질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갖지 못하도록 틀어막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이 죄의 체질을 죽여야 합니다. 마음이 땅으로 내려올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로 올라갑니다. 또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간 상태에서도 십자가를 바라봄으로써 땅으로 내려오는 것을 막습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붙잡고 마음이 하늘에 머무는 체공시간을 늘려감으로써 하나님을 가지는 일에 총력을 기울여야만 합니다.

삶의 조건이 불평스럽고, 원망스럽고, 모자람이 느껴질수록 우리의 마음은 십자가를 붙잡고 하늘에 올라가 머물며 하나님 가지기에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반드시 지금 상황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감사로 대응할 수 있는 자리까지 매 순간, 매일매일, 모든 사건과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 가지기를 이루어 내야만 합니다. 이것을 이루지 못한다면 탐욕의 무덤이 기다릴 뿐입니다. 탐욕으로 정복된 선민의 종착역은 죽음입니다. 몸은 살아있어도 선민 됨이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본문 4절을 보면 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라고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인종들에 의해서 자극되는 것처럼,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 의해 자극될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삶의 조건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러나 그것에 물들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하나님 가지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삶의 조건에 대해서는 무조건 감사가 나올 때까지 하나님 가지기를 하면 됩니다. 아무쪼록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복스러운 삶을 하나님이 아무 걱정 없이 우리 모두에게 마음껏 내려보내실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의 죄의 체질 때문에 유보되고 있는 복스러운 삶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복스러운 삶이 마음껏 내려올 수 있을 만큼 하나님을 가지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아깝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 보이는 세상 것을 좋아하는 죄와 저주의 장아찌들입니다. 불쌍히 여기셔서 땅으로 떨어졌으면 땅에서도 십자가를 보게 하시고, 예수님 따라 하늘로 올라갔으면 올라가서도 십자가를 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하나님 가지기가 실제로 효능을 발휘할 수 있는 삶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