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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선민 통솔의 나팔 소리>의 줄거리 :
이제 가나안 약속의 땅을 향하여 진군을 시작한 이스라엘 교회에 하나님은 두 개의 은 나팔을 제작하라고 지시하십니다. 200만 명을 통솔하시기 위한 도구입니다. 이제 이 통솔의 나팔 소리 효과가 선민 이스라엘 교회를 가나안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이 통솔하시는 나팔 소리가 귀에 들리십니까? 그래야 진짜 선민이고 참 교회의 교인입니다. 우리의 삶에 통솔의 나팔 소리 효과가 나타나야 합니다. 즉 나팔 소리에 반응함으로써 하나님이 내 삶과 우리의 삶을 통솔하셔야 합니다.
선민 통솔의 나팔 소리
(민수기 10:1~36)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은 나팔 둘을 만들되 두들겨 만들어서 그것으로 회중을 소집하며 진영을 출발하게 할 것이라
3. 나팔 두 개를 불 때에는 온 회중이 회막 문 앞에 모여서 네게로 나아올 것이요
4. 하나만 불 때에는 이스라엘의 천부장 된 지휘관들이 모여서 네게로 나아올 것이며
5. 너희가 그것을 크게 불 때에는 동쪽 진영들이 행진할 것이며
6. 두 번째로 크게 불 때에는 남쪽 진영들이 행진할 것이라 떠나려 할 때에는 를 크게 불 것이며
7. 또 회중을 모을 때에도 나팔을 불 것이나 소리를 크게 내지 말며
8. 그 나팔은 아론의 자손인 제사장들이 불지니 이는 너희 대대에 영원한 율례니라
이제 이스라엘은 시내 산에서 1년을 머문 후 둘째 해 둘째 달 스무날에 가나안을 향해 출발합니다. 본문은 출발하는 당시의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읽은 1~8절에는 은 나팔을 두 개 만들고 행진할 때 제사장들로 하여금 불게 하신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이어지는 9~10절에는 전쟁 때나 경축일에 나팔을 불 것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같은 절기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는 일상에서도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 나팔을 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말씀이 이어지다가 29~32절에는 모세의 처남 호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는 호밥에게 안내자의 역할을 요청합니다. 33절부터는 행렬 맨 앞에는 법궤가 진행하고 200만 이스라엘 백성은 법궤를 따라 진행하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중심으로 ‘선민 통솔의 나팔 소리’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교회인 선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통솔을 받습니다. 신약 성경에서는 이러한 하나님의 통솔이 바로 성령이 교회를 운행하시는 모습으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교회가 하나님의 통솔을 받기 위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인 각자가 하나님의 나팔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신약의 교회는 마가 다락방에 모인 120명의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림하심을 통해 시작되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통솔에 의해서 교회가 시작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교회는 하나님의 통솔이 이루어지면서부터 시작됩니다.
다만 여기서 교회란 예배당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라는 단어를 생각하면 늘 마가 다락방에 120명이 모이던 장면을 떠올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들은 바로 직전에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신 사건을 목격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을 교회와 연관 지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교회가 무엇인지를 오해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의 시작에는 본문에서 언급하는 하나님의 나팔 소리가 들어있습니다.
마가 다락방에서 120명으로 시작된 신약의 교회는 모든 교인이 나팔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통솔을 받음으로써 이루어졌습니다. 사도행전에는 그러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는 사도행전에 기록된 내용의 원형이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통솔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통솔은 모든 교인이 나팔 소리를 듣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행진을 해야 하는 이스라엘을 통솔하시기 위해 두 개의 은 나팔을 만들게 하십니다. 이것에 담긴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행렬의 순서를 생각해 봅니다. 맨 앞에는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진행합니다. 그 뒤에는 유다로 대표되는 동쪽 진영에 진을 쳤던 세 지파가 따릅니다. 이어서 레위인 중 게르손 자손과 므리라 자손이 성막의 휘장과 뼈대를 수레에 싣고 따릅니다. 시계방향으로 이번에는 남쪽 진영의 세 지파가 따릅니다. 이들 뒤에는 레위인 중 고핫 자손이 성막의 기구들을 짊어지고 따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차례대로 서쪽 진영의 세 지파가 따르고, 북쪽 진영의 세 지파가 따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행렬의 순서입니다.
이스라엘의 행렬에는 항상 법궤가 앞섰습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이스라엘 교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다시 말해, 법궤가 앞서는 것은 교회인 이스라엘을 복된 땅으로 이끄시고 이들에게 복된 삶을 허락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삶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복된 삶을 사는 것을 내 일로 생각하고, 내가 어떤 일을 해나갈 때 하나님이 도우시리라 생각하지만, 이것은 완전한 오해입니다. 우리가 복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교인과 교회는 복된 삶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을 온전히 이루시기 위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인들이 하나님의 통솔을 받고 질서와 조화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는 선민을 가나안 땅으로 이끄시는 과업을 온전히 수행하실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선민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입니다. 중요한 것은 선민인 교인들이 통솔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솔을 받을 수 없다면 가나안 땅에도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하나님께서는 통솔을 위한 은 나팔 두 개를 만들게 하십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나팔 소리가 어떠한 방식으로 교인 200만 명 이스라엘 교인을 통솔하시고, 마가 다락방의 120명 제자들을 통솔하시는 바탕을 만들어 내는 것일까요?
선민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생활하는 동안에 매일 아침 만나를 먹었습니다. 이들은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주울 때마다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아주 선명하고 또렷했습니다. 그런데 만나를 먹은 후에 하루의 일과를 해나가다 보면 이런저런 관심들이 중첩되어 다가오면서 하나님은 의식에서 뿌옇게 됩니다. 이윽고 의식에서 하나님이 완전히 사라져서 까맣게 잊히는 상황까지 벌어질 수 있습니다. 물론 사람마다 믿음의 크기가 다르고, 주어진 환경이 다르고, 닥친 문제의 성질이 다르기에 각자의 상황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저런 과제들이 중첩됨에 따라 의식에서 하나님이 뿌옇게 의식되거나 아예 까맣게 잊히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러한 상태에서 살다가 두 개의 은 나팔 소리가 날카롭게 광야의 적막을 깨고 울려 퍼질 때 하나님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이 나팔 소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둔 성막에서 울려 퍼지고 있음을 알기에, 나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의식에서 세상에 대한 관심의 막이 찢어집니다. 나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뿌옇게 가려지고 까맣게 잊혔던 하나님이 선명하게 다시 확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200만 명의 의식 속에서 하나님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상태야말로 하나님이 이스라엘 교회를 통솔하실 수 있는 조건입니다.
이러한 통솔의 모습을 예로 들어봅니다. 고등학교 각 반에는 담임 선생님이 있습니다. 조회 시간이나 종례 시간에 담임 선생님은 40~50명 아이들을 통솔해서 지시 사항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스마트폰을 보기도 하고, 장난을 치기도 하고, 공부를 하기도 하며, 서로 떠들기도 합니다. 완전히 주의가 분산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이때 선생님이 칠판을 두드리면서 ‘주목!’이라고 외칩니다. 그러면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선생님께 집중됩니다. 아이들의 의식에는 오직 선생님만이 들어오고, 의식의 무대에서 선생님이 가장 또렷하고 선명하게 보이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선생님의 지시 사항이 아이들에게 들어가면서 통솔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하든지 복되게 하시려는 목표를 갖고 통솔하십니다. 그 통솔의 기본 전제는 통솔을 받는 각 교인의 의식에서 하나님이 가장 선명한 대상이 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대의 나팔 소리는 무엇일까요? 말씀드렸듯이 민수기는 이스라엘 교회의 광야 생활에 대한 기록입니다. 한편 신약 교회의 경우는 어떨까요? 신약 교회는 마가 다락방의 120명 제자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마가 다락방에 모인 제자들에게 나팔 소리는 무엇이었을까요? 이들은 세상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이들의 관심사는 오직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과 유일한 좋음뿐이었습니다. 마가 다락방에 모인 120명 제자들의 의식의 무대 위에서 하나님만이 선명하고 또렷하게 보이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특별한 상황입니다. 당시 지구의 인구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예를 들어 3억 명이었다고 해보겠습니다. 그렇다면 3억 명 중에 오직 120명의 의식에서만 하나님이 또렷이 보였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통솔은 성령 강림을 통해 시작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 120명에게 무엇이 나팔 소리의 효과를 내어서 세상 모든 관심의 막이 찢어지고, 의식의 무대에서 하나님만 선명하게 되었던 것일까요?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우편에 앉으심이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은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옷 입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서 보좌 우편까지 도달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르는 동안 의식에서는 하나님만 대상이 됩니다. 하나님만 의식에서 선명하게 보이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기록된 은 나팔의 효과가 나타나는 상태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일어나야 하는 일입니다. 나팔 소리의 효과란 의식에서 하나님만 선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이러한 효과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내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야만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직면하여 하나님만이 유일한 대상이 됩니다. 내 의식에서 하나님이 가장 또렷하고 선명한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하나님의 통솔을 받는 교회가 시작됩니다.
날마다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십자가 복음 방송은 나팔입니다. 십자가 복음 방송을 통해 나오는 나팔 소리는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입니다. 이 나팔 소리를 듣고 받아들일 때 내 마음은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내 의식에서 하나님이 가장 또렷해지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나팔 소리 효과가 나타나는 단체가 교회입니다.
예를 들어 골프 동호회가 있습니다. 적어도 골프 동호회에 모인 사람들의 의식에서는 골프에 관한 내용이 가장 활발합니다. 바둑 동호회에 모인 사람들의 의식에서는 바둑에 관한 내용이 활발하고, 낚시 동호회는 낚시에 관한 내용이 활발합니다. 이것은 취미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기업이라는 단체의 목적은 성과와 흑자이기에 기업에 소속된 직원들은 성과와 흑자를 의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모든 단체에는 의식에서 가장 또렷한 대상이 있고 목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떨까요? 앞서 말씀드렸듯이 교회란 예배당 건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몸으로 함께 모여 있지 않더라도 교회라는 단체에 소속될 수 있습니다. 특히 요즘은 인터넷을 통해 연결되기에 교회를 이루기에는 더욱 유리한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을 통해 항상 연결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회란 의식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가장 또렷하고 선명한 상태를 유지하는 자들입니다.
한편, 본문을 보면 나팔 소리가 들려야 하는 상황이 다양하게 언급됩니다. 절기에 성막에 모일 때뿐만 아니라 전쟁을 시작하려고 할 때나 경축일에도 나팔을 불어야 합니다. 여기서 경축일이란 성막 봉헌식이나 에스더서에 나오는 부림절 같은 날들을 가리킵니다. 부림절이란 유대 민족이 에스더를 통해 하만의 계략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하만을 죽인 사건을 기리는 날입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광복절 같은 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축일에도 나팔을 불게 하시고, 또한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을 비롯한 각종 절기에도 나팔을 불게 하십니다. 또한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일상에서도 나팔을 불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특이한 표현이 등장하는데 9절을 보면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크게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의 대적에게서 구원하시리라”라고 했습니다. 전쟁에서 선민만 나팔을 불었던 것은 아닙니다. 으레 사기를 진작하고 승리의 결의를 다지기 위해 나팔을 불고 북을 쳤습니다. 다만 선민에게 있어서 전쟁 때 나팔을 부는 것은 특별한 의미와 효과가 있습니다. 싸움터에 나가는 군인들의 마음은 대적들에 대한 적개심이나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때 나팔 소리가 들립니다. 이 나팔 소리는 보통 전쟁에서처럼 사기 진작을 위한 용도가 아닙니다. 쉽게 말해 ‘이제부터 가자! 적군을 물리치자!’라는 선동을 위한 용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군사들의 마음이 적군에 대한 적개심과 두려움이 가득 차 있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습니다. 이들의 의식의 무대에서는 대적들에 의해 하나님이 밀려난 상태입니다. 나팔 소리를 통해 각자 의식의 무대에 하나님을 주인공으로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 전쟁터에서조차 의식에서 하나님이 제일 또렷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 통솔의 나팔 소리의 효과였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수많은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그러나 법궤가 맨 앞에서 행진하는 모습이 의미하는 대로 전쟁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민을 복된 삶으로 이끌어가시려는 계획을 수행하실 때, 선민은 그 계획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통솔이 이루어지고 참여의 과정 중에 전쟁도 해야 합니다. 다만 전쟁은 하나님의 일이기에 선민은 전쟁에 나아갈 때 하나님의 통솔을 받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통솔을 어떻게 받느냐는 것입니다. 전쟁터에서조차 내가 의식해야 할 일은 적군의 막강함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나팔을 불게 하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은 교인 전체가 참여하는 전쟁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교인 각자가 자기 삶에서 치르는 일상의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교인 각자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상징되는 복된 삶으로 들어가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매일매일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된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이란 의식에서 하나님을 또렷이 바라보는 것뿐입니다. 가장 선명한 대상으로 하나님을 마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오셔서 내 삶을 통솔해 나가십니다. 우리의 삶에는 다양한 만남과 문제 혹은 변수가 많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통솔해 나가신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약속을 담고 있습니다.
경축일, 각종 절기, 번제나 화목제를 드리는 등의 일상에서도 나팔을 불라는 말씀에는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은 너의 일이 아니다. 법궤가 맨 앞에 나가서 진행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내 일이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몸으로 이루어지는 삶을 당신의 일로 생각하여 진행해 나가실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통솔을 받으면 됩니다. 통솔의 조건은 하나님을 의식에서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자, 여기 주목!’이라고 하는 것처럼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나팔 소리를 통해 하나님께 주목합니다. 그리고 의식에서 하나님을 선명한 상태로 유지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내 몸으로부터 시작해서 몸과 관련된 사람 관계, 일 관계, 물건 관계, 사건 관계, 문제 관계를 비롯한 모든 것을 통솔해 나가신다고 약속해 주십니다.
십자가 복음은 세상에 대해서 죽으라는 외침이고 요청입니다. ‘내 아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은 사건은 네가 죽은 것이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내 몸은 여전히 살아있는데 무엇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일까요? 내 마음이 세상에 대해서 죽은 것입니다. 복음은 말 그대로 복된 소리입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으라는 외침은 세상에 대한 모든 관심이 찢어지고, 없어지고, 멸절됨으로써 내 의식에서 하나님이 가장 선명하게 보여야 한다는 뜻의 나팔 소리입니다. 우리에게는 십자가 사건이 나팔 소리입니다. 우리의 의식에서 하나님이 가장 선명한 대상으로 보여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복음을 날마다 전하고 듣고 또 동서남북으로 모여서 그 십자가 복음을 나누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몸으로 사는 동안에 우리 의식에서는 하나님의 선명함이 사라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또렷함이 사라지는 이 상황과 싸워 이기기 위해 십자가를 생활화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전쟁입니다. 의식의 무대에서 하나님은 가장 선명하고 또렷한 대상이 되시도록 지켜내는 것이 우리의 전쟁이자 과제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우리가 이러한 전쟁과 과제를 수행할 수 있게 하는 나팔 소리입니다.
날카로운 나팔 소리가 광야에 울려 퍼질 때는 무슨 일을 하다가도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습니다. 깜짝 놀라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십자가 나팔 소리를 통해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식할 수 있습니다. 우리 의식에서 하나님이 가장 선명하고 또렷한 대상이 되는 상태를 유지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개인적인 삶으로부터 시작하여 나와 연관된 모든 요소들을 다 통솔해 나가실 것입니다.
교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떨어져 있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지구를 내려다보시면서 하나님의 통솔의 나팔 소리인 십자가 복음을 듣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삶에 대한 관심으로 하나님이 뿌옇게 되는 상태를 막으십니다. 의식에서 하나님을 가장 또렷하고 선명한 대상으로 보기 위한 전쟁을 치르는 사람들 전체가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 전체를 하나님의 아들들의 집단이자 선민의 집단인 교회로 보시면서 이끌어 가십니다. 물론 우리가 시시각각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면서도 그 인도하심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를 알 수 없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목표를 갖고 계십니다.
요즘 제가 있는 강릉의 상황을 보면 날씨가 더워도 너무 덥습니다. 가뭄이 워낙 오래 지속되다 보니 가을이 올지, 강릉에 비를 풍족하게 내리시는 날이 올지 의심이 들 정도입니다. 지금 상태로는 비가 올 것 같지 않습니다. 바로 대관령 서쪽에는 수십 밀리 수백 밀리의 비가 오는 상황에서도 이곳에는 고작 0.1밀리, 2밀리의 비가 왔을 뿐입니다. 상황이 어찌나 심각한지 행정안전부 장관이 와서 대책 회의를 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가 다락방의 120명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하늘에 앉으심을 목격한 자들입니다. 이들의 의식에서는 세상의 모든 관심을 물리치고 하나님이 가장 또렷하고 선명한 대상이 되신 상태였습니다. 이 120명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통솔을 받아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교회가 시작되는 장소를 왜 하필이면 사막과 광야로 둘러싸인 중동 땅으로 선택하신 것일까요? 민수기의 내용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선민은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가나안 땅으로 통솔을 받고 인도함을 받습니다. 그 현장이 광야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교회를 광야에서 시작하신 걸까요? 지금 강릉의 가뭄과 연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한 곳에 모여 있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상황이 특이한 것은 아닙니다. 선민 이스라엘은 무려 200만 명이 진을 쳤습니다. 천막을 치면 자기 지파의 일가친척이나 알고 지내지 먼 곳에 진을 친 사람들과 빈번한 교류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모여 있지만 모여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그렇기에 한자리에 모이는 것 자체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과 무관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복된 삶을 이끌어 가실 것이라는 걸 믿습니다. 그리고 내 마음에서 하나님이 가장 선명하신 대상이 되도록 유지하며 힘쓰고 싸웁니다. 이것 이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 속에서 분명히 기억함으로써 부활 승천을 따라 보좌 우편에서 하나님을 마주합니다. 그리고 의식에서 하나님이 가장 또렷하고 선명한 상태를 유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 전체를 교회로 보시며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어디로 향하는지는 알 수 없을지라도 그 인도하심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개인의 삶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 모세를 통해 은 나팔 두 개를 만들라 하시고, 제사장들에게 성막에서 나팔을 불게 하심으로써 200만 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하나님의 통솔이 가능한 여건을 만드신 것입니다.
한편 29절 이하를 보면 호밥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호밥은 미디안 사람 르우엘의 아들로서 모세의 처남입니다. 31절을 보면 “모세가 이르되 청하건대 우리를 떠나지 마소서 당신은 우리가 광야에서 어떻게 진 칠지를 아나니 우리의 눈이 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모세는 처남에게 안내자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소 이상함을 느끼게 됩니다. 구름 기둥이 인도하는 상황에서 모세는 왜 처남의 도움이 필요했을까요?
주석을 보면 하나님의 인도를 받더라도 우리는 전문가를 동원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식으로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런 뜻에서 처남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구름 기둥으로 인도하실 뿐만 아니라 그 복잡한 성막의 구조도 다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율법을 다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길을 알려주시지 않아서 모세가 처남에게 안내를 부탁했던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처한 상황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구름 기둥이 멈추면 200만이 넘는 이스라엘이 동서남북으로 진을 쳐야 했습니다. 그 진영의 기준은 성막인데 성막을 세워야 하는 장소는 험난한 광야입니다. 지형이 복잡할 수 있고, 모래바람이 불 수도 있습니다. 이때 광야 출신이었던 모세의 처남 호밥의 경험이 도움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모세는 구름 기둥이 설 때마다 성막을 어디다 칠 것인지 호밥에게 조언을 구했던 것입니다.
다만 이것 또한 모세의 자의적 행동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호밥을 성막 칠 자리를 지정해 줄 안내자로 세우라고 모세에게 명령하신 것입니다. 어떤 이유에서 이러한 명령을 하신 것일까요? 200만 이스라엘이 나팔 소리를 듣고 질서와 조화를 이루어 진행하는 모습은 모세의 지도력을 칭송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민인 교회는 그 누구도 지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지도자로 세운 모세는 하나님의 통솔이 구체적으로 실현되기 위한 통로이자 수단입니다. 모세는 지도자가 아니며 통솔자도 아닙니다.
저는 이러한 사실을 무척 실감합니다. 저는 말씀만 전하지 여러분들을 만나서 목회 방침을 말씀드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흩어져 있기에 조직도 아닙니다. 저는 일종의 나팔수로서 십자가 복음의 소리를 내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의 통솔자는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 복음을 생활하는 사람들 전체를 하나님의 선민인 교회로 붙잡으시면서 통솔해 나가십니다. 호밥의 등장은 모세가 통솔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해 주시는 의도가 있습니다.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껴진다면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고 계시되, 그 사랑 속에는 전능하심과 주권자 되심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내 마음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계십니다. 내게 가장 가까운 곳에서 살아계시고,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고 계십니다. 내가 할 일이란 의식에서 하나님을 선명하게 붙잡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나를 위해 사랑으로 계획하신 일들을 이끌어 가실 것이고, 나와 내 주변과 십자가 복음을 붙잡고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 전체를 통솔해 나가실 것입니다. 오늘도 이러한 하나님의 통솔의 대열에서 단 한 시간이라도, 단 일 분이라도 누락 되면 안 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자는 이야기는 세상에 대한 관심의 막을 찢고 우리 의식에서 하나님을 가장 또렷하게 보자는 요청입니다. 이것을 기억함으로써 하나님 통솔의 나팔 소리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오늘 하루도 내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고, 나의 의식에서 하나님을 첫 번째 대상으로 또렷하게 붙잡는 상황이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의 나의 전쟁은 가정에 있든지, 직장에 있든지, 시장에 있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무슨 문제를 앞두든지, 하나님만을 의식에서 선명한 대상으로 붙잡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통솔의 나팔 소리인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한시도 잃지 않고,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