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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오감 체험, 하나님 믿음 체험>의 줄거리 :
하나님 오감 체험, 즉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맛보고 냄새를 맡고 손으로 만지는 등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관계하려는 모든 시도에 대하여 하나님은 등을 돌리십니다. 만약 그나마 등을 돌리지 않으신다면 오감으로 하나님을 포착하려 하는 한 그 자리에서 즉사를 당하게 됩니다. 영이시고 빛이신 하나님 관계는 오로지 믿음 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단순히 말이나 관념이나 의식 작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실제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모든 유익을 즉 실질적인 건더기(?)를 사람에게 가져다줍니다.
하나님 오감 체험, 하나님 믿음 체험
(출애굽기 33:17~23)
1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
18.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19.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21. 여호와께서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서라
22.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23.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을 오감으로 체험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볼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오감의 사정거리 안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관계하려고 하는 한 하나님은 등을 돌리십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등을 돌리시는 것은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사람을 보신다면 그 자리에서 즉사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오직 믿음 안에서만 관계하며 체험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본문은 이것을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앞서 모세가 진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회막을 지었던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모세가 회막으로 들어갈 때마다 구름 기둥이 임하며 하나님의 임재는 확인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 하나님을 경외하는 뜨거운 열정을 가진 소수의 사람들은 모세를 따라 회막 근처까지 나아갈 수 있었고, 대부분의 백성은 자기가 머무는 장막 문에 서서 모세가 회막에 들어가는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회막 안에 들어가는 모세 안에 자기의 마음을 두어서 모세가 하나님을 만날 때 자신도 하나님을 만나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모세는 이러한 상황을 반복함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러한 모습을 보이자, 하나님께서는 마음을 돌리시고 가나안 땅으로 친히 가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이로부터 이어지는 본문 17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네가 말하는 이 일도 내가 하리니…”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여기서 ‘이 일’이란 이스라엘과 관계된 모세의 간구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백성이라 하시지 않고 모세의 백성이라 하십니다. 1절에서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백성”이라고 하셨던 바와 같습니다. 모세가 이끌어 출애굽 하였음을 말씀하시며 모세에게 백성을 미루십니다. 이에 모세는 13절에서 “…주의 길을 내게 보이사 내게 주를 알리시고 나로 주의 목전에 은총을 입게 하시며 이 족속을 주의 백성으로 여기소서”라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시고 가나안으로 향하는 여정에 함께해 주시기를 간구합니다.
한편, 이어지는 17절을 보면 “…너는 내 목전에 은총을 입었고 내가 이름으로도 너를 앎이니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모세의 마음이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늘 올라와 있다는 뜻의 말씀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마음으로 모세의 존재감을 느끼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세는 한 가지 요청을 합니다. 18절에 보면 “모세가 이르되 원하건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깜짝 놀랄만한 요청이었고, 굉장한 의미를 담고 있는 구절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했구나’라고 여기며 넘어갈 내용이 아닙니다. 여담이지만 우리는 성경을 무심코 반복하여 읽기보다는 말씀에 담긴 깊은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그냥 읽고 넘어갈 수 있을 만큼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 달라고 했고, 가나안 여정에 함께해 주실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요청에 그렇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모세의 기도가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이름으로도 아시고 모세의 마음이 하늘 보좌 앞까지 와서 머물고 있음을 보셨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존재감을 분명히 느끼고 계셨기에 모세의 요청 또한 들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세는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합니다.
이제까지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영광을 보이셨습니다. 불타지 않는 떨기나무의 사건이 있었으며, 출애굽의 역사를 일으키셨고, 시내산에 강림하실 때 모세가 가까이 갔고 다시 장로들을 데리고 갔고, 십계명과 언약 내용을 듣고 내려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했으며, 다시 산에 올라 40일을 머무르며 십계명을 받고 성막 제작에 관한 지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모세는 이러한 6개월간의 과정을 통해 충분히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모세는 지팡이를 들고 홍해를 가르기도 했고, 반석을 쳐서 물을 내기도 했고, 광야에서 만나가 내리게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놀라운 기적의 삶이 6개월간 진행되었는데도 모세는 아직도 주의 영광을 못 본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심지어 11절을 보면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여호와께서는 모세와 대면하여 말씀하시며…”라고 했습니다. 모세가 회막에 들어갈 때면 하나님께서는 마치 친구를 대하시듯 모세와 대면하시며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을 체험한 모세가 이제 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보여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참 이상합니다.
이제까지 모세는 하나님을 마음으로 보았습니다. 마음으로 본다는 것은 마음의 구조와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다른 대상의 있음을 존재감으로 느끼는 작용이 일어납니다. 사람은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반드시 다른 대상의 존재감을 느낌으로서만 자기 존재의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또 사람의 마음은 비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좋다고 여기는 대상을 끌어당겨서 채워지고 만족하고자 합니다. 이러한 마음의 구조를 염두에 둘 때 마음으로 하나님을 본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눈에 보이는 대상들의 존재감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의 존재감이 크고 우선적임을 의미합니다. 또 눈에 보이는 대상들의 좋음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좋음만을 열망함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팔복을 말씀하시며 여섯 번째 복으로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던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보는 상태란 하나님만이 유일한 있음이라는 의식이 항상 켜져 있고, 하나님만이 유일한 좋음으로 여기며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상태입니다.
이제까지 모세는 이렇게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과 관계해 왔습니다. 아브라함이 영광의 하나님을 보았던 것도 이처럼 마음으로 하나님과 관계함이었습니다. 마음의 존재감에서 하나님이 일등을 하시고, 좋음에서도 하나님이 일등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모세는 왜 굳이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간구했던 것일까요? 모세는 하나님을 육체의 눈으로도 보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가 왜 이러한 간구를 했는지에 대한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체성을 의심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시고, 미리 생각하여 이끄심을 믿지 못했기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과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에 앞서 5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라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한 순간이라도 너희 가운데에 이르면 너희를 진멸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었던 것과 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이들을 다 죽일 수밖에 없기에 함께하실 수 없다는 뜻입니다.
한편, 모세는 이러한 말씀을 듣고 두려움을 느낍니다. 지금은 3,000명이 죽어 나가는 것을 보며 경각심이 고조된 상태였습니다. 백성은 모세가 회막에 드나드는 것을 보며 하나님께 마음을 보내기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목이 뻣뻣하게 곧은 자들이었고, 모세는 이들이 언제 돌변하여 하나님께 등을 돌릴지 모른다는 염려가 되었습니다. 언젠가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하심보다 공의로움이 우선되는 상황을 만들어 낼 것이라 보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심은 이스라엘의 진멸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신다면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지 않으신다는 뜻이기에 큰일입니다. 그렇기에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당신의 백성으로 삼아주시고 가나안 여정에 함께하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간구를 들어주시기를 약속하셨습니다. 다만 이제는 하나님과 함께하시는 상황에서 이스라엘이 올바른 길을 갈 수 있을지를 걱정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이제 모세는 백성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가 아니라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나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만 있다면 이스라엘이 다시는 금송아지를 만드는 것과 같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으리라 여겼던 것입니다.
모세가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라고 간구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모세는 6개월 동안 마음으로 하나님을 보았고 하나님과 소통했습니다. 그러나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을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간구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을 하여 6개월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습니다. 이들이 태어나서 자라며 본 것은 이방의 종교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방 종교의 신들은 모두 눈으로 볼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이방 종교가 가진 큰 강점이었습니다. 모세가 느끼기에 이스라엘 교회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을 신으로 모셔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핸디캡이었습니다. 그렇기에 모세는 하나님께서 이방 종교의 신들처럼 당신의 모습을 뚜렷하게 보여주시기만 한다면 이러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고 여겼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무리 목이 곧고 뻣뻣할지라도 하나님을 직접 눈으로 본다면 하나님을 등지고 금송아지를 만드는 것과 같은 그릇된 행동을 하지 않으리라 여겼던 것입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2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육체의 눈으로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일뿐더러, 설령 가능할지라도 하나님을 본다면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것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이유는 죄와 연관이 있습니다.
우리의 영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은 존재감을 느끼고, 채워져야 하고, 주체적 에너지를 발생시킵니다. 쉽게 말해 무엇인가 있음을 느끼고 그것으로 채워지고자 추구하기 위해서 주체성을 발동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에너지의 발생지가 우리의 영인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마음이 육체에 달라붙을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보는 대상들이 있습니다. 마음이 육체와 달라붙으면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하는 대상들의 존재감을 느끼고자 하고, 채워지고자 하고, 주체성이 발동합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본래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육체에 붙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빗나감이 발생합니다. 있음을 느끼는 존재감이 빗나갑니다. 채워지기 위한 소망이 빗나갑니다. 추구하기 위한 주체성이 빗나갑니다. 사람의 주체성은 땅이 아닌 하늘을 향해 쏟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마음이 육체와 붙을 때 땅을 향해 주체성을 쏟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악의 상태는 마음이 육체에 달라붙고, 마음이 육체에 종속된 상태입니다. 마음이 육체에 붙어서 존재감과 소망과 주체성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의 마음이 육체에 붙어버리면 이러한 마음의 작용을 하나님에게까지 연장하게 됩니다.
세상은 육체의 오감으로 접할 수 있는 대상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코로 냄새 맡고, 입으로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이 육체에 붙을 때 오감으로 접하는 세상에 사로잡혀 죄악의 덩어리로 살게 됩니다. 이때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다면 죄악의 상태로 사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그 상태를 하나님께까지 연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즉사해야 마땅한 상황입니다.
육체의 오감의 체험을 근거로 삼아 신앙을 세우려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은사를 강조한다든지, 성령의 향기를 느낀다든지, 예수님이 못 박히신 것과 같은 신체 부위에 뜨거움을 느낀다든지, 꿈을 꾼다든지, 환상을 본다든지, 기적을 일으킨다든지, 치유를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오감이라는 체험 영역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세우려는 모든 자들에 대해 하나님은 등을 돌리십니다. 하나님께서 등을 돌리시기에 망정이지 이 상태에서 관계의 정립을 기대하며 바라보고 계셨다면 다 즉사시키셔야 마땅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먼저 마음으로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마음으로 하나님과 연합한 상태가 유지될 때 오감으로 체험할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날 수는 있습니다. 마음이 먼저 하나님께 달라붙은 상태에서 꿈과 환상이 보일 수 있고 예언을 할 수 있습니다. 은사가 주어질 수 있고, 코에서 성령의 향기를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신체 부위에 예수 그리스도가 못 박히신 것과 같은 뜨거움을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들은 먼저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달라붙은 뒤에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문제는 마음이 먼저 하나님께 달라붙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먼저 하나님을 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마음이 육체에 붙어있는 죄악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육체의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체험을 하나님께 요구하며 하나님과 관계하고자 합니다. 이것은 더럽고 추악한 죄악의 상태로 하나님께 돌진하려는 모습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결코 용납하실 수 없습니다. 더러움의 덩어리를 당신 앞에 돌진하고 있기에 칼로 쳐서 죽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에 육체와 마음이 붙어버린 더러움을 두고 보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 않은 상태에서 예언, 꿈, 환상, 방언, 각종 은사를 주장하고 요구합니다. 신비한 현상들을 육체의 오감으로 느끼려고 하면서 하나님께 돌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더럽고 추악한 죄의 덩어리를 쳐 죽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더럽고 추악한 상태를 그대로 하나님께 닿게 내버려두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어떻게 관계할 수 있을까요? 이와 관련하여 이방 종교의 신들과 하나님의 근본적 차이를 생각해 봅니다. 모든 이방 종교의 신들은 눈으로 보면서 관계합니다. 그러나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을 뿐이지 실제로 유익으로 주어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19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풀어보자면 ‘모세야, 나는 네가 염려하듯이 다른 종교의 신들처럼 육체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눈뿐만 아니라 육체의 오감으로는 나를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눈으로 볼 수 있는 그 어떤 신들에게서도 실제로 너에게 유익이 될 수 있는 선한 것은 단 하나도 나오는 것이 없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으나 관념이나 개념이나 말뿐인 존재가 아니다. 나는 실제로 너희에게 유익이 되는 모든 것들을 네 앞에 지나가게 하겠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모든 선한 것들’이란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 해온 하나님 관련 사실들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있음’이시고, 유일한 ‘좋음’이시며, 이 세상을 향한 유일한 ‘주체성’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나를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시고, 사랑하고 계시고, 나에 대한 모든 것을 다 생각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들을 우리에게 제시하셨습니다. 이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나에게 실제로 유익이 될 수 있는 사실들입니다. 마치 회전초밥에서 벨트 위에 음식들이 돌아갈 때 먹고 싶은 것을 골라 먹으면 되는 것처럼, 때에 따라서 요구되고 필요한 것들이 있을 때 하나님이 제시하신 선한 것들 중에서 네 것으로 만들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관계하는 방법입니다.
이어서 19절에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선한 것들을 우리가 때에 따라 필요한 대로 얼마든지 먹을 수 있도록 조건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은 전혀 핸디캡이 되지 않습니다. 신을 믿는다면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실제 유익이 있어야 합니다. 이방 신들은 아무리 눈에 보여도 실제 유익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치 회전초밥이 지나가듯이 실제 유익이 되는 하나님 관련 사실들을 계속해서 제시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다시 19절을 봅니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나가게 하시는 모든 선한 것이란 하나님 관련 사실들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 관련 사실들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우리는 오감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을 때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체가 어디에 있는지 염려하거나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유익할 수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은 하나님께서 회전초밥처럼 지나가게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긍휼히 여기시고 은혜를 베푸시는 자들을 위해서 제공하신 조건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보내시는 은혜와 긍휼히 여기심의 총화(總和)입니다. 하나님이 제공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기만 하면 오감으로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내 앞으로 회전초밥처럼 지나가는 수없이 많은 하나님 관련 사실들을, 때에 따라서 실제 유익이 되게끔 먹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있으면 하나님과 관련된 사실들은 회전초밥처럼 내 앞에서 늘 돌아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마음의 평안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유일한 있음, 하나님의 살아계심이라는 사실을 먹으면 됩니다.
예수님을 옷 입는 것은 은혜와 긍휼에 의해 주어집니다. 우리 마음이 예수님을 옷 입고 이 세상을 떠나서 하늘로 올라가면 하나님이 눈에 보이고 안 보이고는 문제가 아닙니다. 실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내용이 있기 때문입니다. 비유적으로 말해 건더기가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이방 종교와의 차이점입니다. 이방 종교의 신은 눈으로 확실히 볼 수 있는 형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주어지는 건더기가 없습니다. 이러한 실질적 차이가 있기에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사실은 문제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육체의 눈으로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마음이 육체에 붙은 상태가 저주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이 저주받음으로부터 빗나감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저주받음과 빗나감의 죄악 된 상태로 하나님과 관계하려 하고 돌진한다면 단두대가 내려와서 목이 잘리는 것처럼 즉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섬기는 것과 같은 범죄가 다시 일어날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눈으로 본다면 그러한 범죄가 일어나지 않으리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미 하나님 관련 사실들을 제시해 주셨고,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보아야만 범죄 하지 않으리라는 모세의 생각은 불필요했고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육체의 오감을 작동하여 하나님을 포착하여 관계하려는 것은 신비주의입니다. 오감의 사정거리 안에서 하나님을 느끼려고 하는 것은 결국 믿음을 제거하는 것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즉사를 당해 마땅한 모습입니다. 죄악의 상태를 유지한 채로 하나님께 돌진하려 하는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21~2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마치 한 인간이라도 되신 듯이 모세에게 등을 드러내 보여주시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2~23절에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마음으로 충분히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천지를 지으신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얼굴이나 등을 보이신다는 것은 참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우리가 천지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도 없거니와 등을 볼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의인화해서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지나가신다는 것은 실제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주에서 티끌 같은 지구 위를 지나가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미국으로 가려면 비행기를 타고 가듯이 지나가신다는 것도 아닙니다. 무한한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티끌 같은 지구에 나타나셔서 모세 앞에서 지나가시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온 세상이 하나님 안에 있는데 하나님이 지나가실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 개인을 그만큼 중시하신다는 것을 의인화하여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육체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고 싶다면 하나님의 얼굴이 아닌 등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많은 주석들이 목사님들이 오해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영광의 실체 중에 일부분이라도 보았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모세 또한 죄인이기에 거룩한 하나님의 얼굴을 보았다면 죽을 수밖에 없기에 등을 보여주심으로써 영광의 일부라도 체험하게 하셨다고 여깁니다. 앞서 마음과 육체가 붙어있는 것이 저주받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마음이 육체에 의존하는 상태에서는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 하나님과 관계하게 됩니다. 이것은 죄악의 덩어리를 하나님께 들이미는 것과 다름없기에 죽어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해를 전제로 하여 모세가 등을 본 것을 그나마 하나님의 영광의 일부분이라도 본 것이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화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쉽게 말해 ‘모세야, 너희 백성들이 마음과 육체가 붙어있는 저주받은 상태에서 늘 빗나감의 죄악을 저지르고 있다. 이 빗나감의 죄악 속에서 나를 포착하여 관계하려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 주겠다. 나를 한 사람의 인간으로 치자. 나를 육체의 눈으로 보면서 관계하겠다는 것은 내가 너희에게 등을 돌릴 수밖에 없게 하는 것이고, 나와의 관계가 끊어지기로 작정했다는 것을 뜻한다.’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육체의 눈으로 하나님을 확인하려는 것은 믿음을 제거하겠다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다시 말해 육체의 오감으로 확인될 수 있는 관계를 원함이란 믿음을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포착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란 육체와 붙어있는 마음을 잘라내서 온전히 하나님께만 드리는 것입니다. 사도신경은 라틴어로 크레도(credo)입니다. 크레도는 ‘나는 믿는다’라는 뜻으로써 심장을 뜻하는 코르(cor)와 준다는 뜻의 도(do)의 합성어입니다. 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뜻입니다. 크레도가 의미하는 대로 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는 마음이 육체와 붙어있는 저주받은 상태는 죽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골로새서 2장 11절에서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라고 하였던 바와 같습니다. 마음에서 육체를 잘라내야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존재감을 느끼고 좋음으로 채워지고자 합니다. 마음이 육체에 붙어있는 저주받은 상태에서는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하는 대상을 향해 존재감을 느끼고 좋음으로 채워지고자 합니다. 이러한 추악하고 더러운 죄악 된 상태에서는 하나님과 관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관계가 불가능함을 분명히 제시하고 계십니다. 육체의 오감으로 느껴지는 신비한 체험에 근거하여 하나님과 관계하려는 모든 자는 생명책에서 지우시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등을 볼 것이라는 표현에 담긴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안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로 하나님의 얼굴을 보려는 것이 문제입니다. 저주받고 죄악 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보려 한다면 하나님께 죽임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방법은 육체와 마음이 유착되어 있는 상태를 십자가 칼로 잘라내는 것입니다. 할례를 해서 마음을 육체에서 갈라내야 합니다. 육체와 관련된 어떤 것도 마음에 담겨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면 하나님의 모든 선한 좋은 것들이 회전초밥처럼 돌고 있습니다. 마음 채움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좋음을 집어 들면 되고, 존재감과 평강이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있음을 집어 들면 됩니다. 그리고 내게는 하나님의 이름 하나만이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의식하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나님께로 가기 위하여 내 마음을 온전히 하늘을 향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조건을 은혜와 긍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예수님입니다. 그렇기에 원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결국 사람은 눈에 보이는 것을 좋아해도 마음이 채워져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이방 신들은 마음 채움을 제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자비로 예수 그리스도를 제시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랑과 은혜로 제시하신 조건인 예수 그리스도를 붙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하늘로 올라가면 마음에 평강이 실제로 임합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마음의 채움이 실체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더는 핸디캡이 되지 않습니다.
19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가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나는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풀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못 박으심으로써 하나님을 향할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셨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선한 모든 것을 먹고 마시고 가질 수 있는 조건을 만드신 것입니다.
본문은 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 또한 모세처럼 하나님을 눈으로 보기를 바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눈으로 보고 싶다고 바라는 것 자체가 저주받아서 마음이 육체에 붙은 증거입니다. 육체의 오감으로 포착하는 대상들에 대해 마음의 기능이 작동하는 빗나감의 죄악의 상태를 하나님께 들이밀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는 단두대로 목을 자르듯이 당신께 돌진하는 사람들을 죽이실 수밖에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취하실 수 있는 방법은 함께하시지 않고 등을 돌리시는 것뿐입니다. 그 악함을 보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 악함을 모르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등을 돌린다는 것은 관계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향하심을 중단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신비주의적 경향을 띠고 육체의 오감의 사정거리 안에서 하나님을 포착하려고 하는 자들이 아직도 살아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들에 대해 등을 돌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그나마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오감으로 체험하려 하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고 멸망을 자초하는 것입니다. 믿음 체험만이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복지를 허락하시는 길이며 영원한 생명을 보장해 주시는 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육체의 눈으로 나무를 보고 구름을 보고 사람을 보듯 하나님을 보고 싶어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때마다 등을 돌리시고 함께하지 않으심으로써 우리의 목숨이 지탱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이제 베푸신 은혜와 긍휼의 총화인 예수님을 붙잡고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전부 드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을 옷 입고 하늘로 올라가 회전초밥처럼 내 앞을 지나가는 모든 선한 것들인 하나님 관련 사실들을 때를 따라 내 것으로 먹고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