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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중보 능력은 내 존재감에 비례한다>의 줄거리 :
이스라엘 선민의 교회가 금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하나님 여호와라고 부른 죄악에 대해서 하나님은 진멸하실 것을 선언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결정에 대하여 모세는 두 번 중보의 간구를 드리고 하나님은 일단 이번 사건에서는 진노를 누그러뜨리십니다. 한 사람의 중보의 힘이 참으로 엄청납니다. 250만으로 이루어진 한 민족을 진멸 당할 위기에서 살려냅니다.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중보란 무엇일까요? 어떤 자의 중보를 하나님은 이렇게까지 받아들이시고 당신의 결정을 바꾸기까지 하실까요?
중보 능력은 내 존재감에 비례한다
(출애굽기 32:7~14, 30~35)
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내려가라 네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네 백성이 부패하였도다
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10.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
11. 모세가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어찌하여 그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주의 백성에게 진노하시나이까
12.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분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
13. 주의 종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그들을 위하여 주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희의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허락한 이 온 땅을 너희의 자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14.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진노하셨고 모세는 이스라엘을 위한 두 번의 중보 기도를 드립니다. 이러한 중보 기도의 내용을 본문으로 삼아 ‘중보 기도와 내 존재감의 관계’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말씀드린 대로 모세는 두 번의 중보 기도를 드립니다. 첫 번째 중보 기도는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 하나님을 대면할 때 이루어졌습니다. 이때 산 아래에 남은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출애굽을 인도하신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그 앞에서 먹고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며 경배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극에 달한 타락 상황에 대해 말씀하셨고 이를 듣고 모세는 중보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중보 기도는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이스라엘의 타락상을 직접 목격하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이해한 후에 이루어졌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진노를 표현하기 위하여 여호와 하나님 편에 선 사람들을 모아서 칼을 쥐여 주고 주동자들을 처단하게끔 합니다. 이들은 진영 이 끝에서 저 끝까지를 왕래하며 가족이든 친구든 이웃이든 주동자들을 죽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3,000명가량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이러한 일이 있고 나서 모세는 32절에서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라는 중보 기도를 합니다. 이 구절은 중보 기도의 전형이 되는 유명한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금송아지에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고 그 앞에서 먹고 마시며 노래하고 춤추며 경배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모습은 너무나 악합니다. 이때는 출애굽을 한지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입니다. 9~10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 대해 “…내가 이 백성을 보니 목이 뻣뻣한 백성이로다 / 그런즉 내가 하는 대로 두라 내가 그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진멸하고 너를 큰 나라가 되게 하리라”라고 모세에게 선언하십니다. 목이 뻣뻣함이란 고집스러움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맥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여 목이 뻣뻣함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보다 깊은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이들이 마음 채움을 위한 흡입력의 방향을 절대로 바꾸지 않았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을 덧붙임이 아닌 세상을 등짐입니다. 예를 들어 이제까지 이 세상 것을 마음속에 담은 채로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마음에는 몸과 관련된 가족, 돈, 승진, 건강과 같은 세상 것들이 담겨 있습니다. 이러한 상태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덧붙이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또한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을 찾아낼 수 없으며 만들어 낼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믿음은 하나님이 당신을 드러내심으로써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을 기준으로 세상의 대척점에 당신을 세워두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세상을 등지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는 채움을 위한 흡입력이 있습니다. 있음의 존재감을 느끼고자 하기에 세상을 등지고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늘로 이어지는 출입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만드셨고, 이 세상과 십자가 사이에 우리 마음을 두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려면 세상을 등져야만 합니다. 이는 곧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반대로 내가 세상을 살려면 십자가 예수님을 등져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세상을 등지고도 살 수 있는 이유는 세상은 하나님이 당신의 계획에 맞추어 사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믿음은 세상을 향해 살던 상태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덧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바라보던 세상에 대해 목을 돌리듯 마음의 흡입력의 방향을 돌리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향해야만 하나님께로 갈 수 있기에 십자가는 곧 세상에 대한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선민이라는 사람들이 믿음을 보이지 않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세상의 대척점에 당신을 드러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세상을 향하여 흡입력을 고정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자 금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의 이름을 붙입니다. 이들이 정말로 하나님을 믿고자 했다면 마음의 흡입력의 방향을 돌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은 세상 것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여전히 세상 것을 좋아하고 세상 것을 빨아들이면서도 믿을 수 있는 하나님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금송아지가 상징하는 바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이스라엘을 목이 뻣뻣한 백성이라 말씀하시면서 진멸하실 것을 말씀하십니다. 32절을 보면 이에 대한 모세의 중보 기도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33절을 보면 모세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대답이 기록되어 있는데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범죄하면 내가 내 책에서 그를 지워 버리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생명책에 대한 언급이 등장합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목이 뻣뻣함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하나님께 얼굴을 향하기 위해서는 목이 부드러워야 하는데 목돌림이 부드럽지 않다는 것입니다. 목이 부드러웠던 대표적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영광의 하나님을 본 후로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고, 아내 사라를 버렸고, 자기 미래인 독자 이삭도 버렸습니다. 언제나 목돌림이 부드러워서 마음의 시선을 잡아끄는 소중한 것들을 향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향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이스라엘 백성은 목이 뻣뻣한 모습을 보였고,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생명책에서 지우실 것임을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이미 선택하실 사람들의 이름을 예정하여 기록해 두셨습니다. 저나 여러분의 이름 또한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들이 세상에 태어나서 살게 됩니다. 이들은 세상에 사는 동안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목을 돌려 하나님을 향하고 마음을 하나님께로 계속 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마음이 하나님께로 보내지는 것이 분향단의 향불을 꺼뜨리지 않는 것으로 상징됨을 살펴보았습니다. 분향단의 향불이 꺼지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마음은 24시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인격의 핵심이 하늘로 올라감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의 존재감을 느끼십니다. 쉽게 말해 마음이 천국에 올라간 사람의 존재감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명책에 이름은 기록되어 있는데 아무리 기다리셔도 마음이 천국에 올라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태승철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인격의 핵심인 마음이 하나님이 계신 천국으로 올라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태승철의 있음의 존재감을 천국에서 느끼실 수 없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이 아무리 기다려도 마음이 하늘에 올라오지 않는 것이 빗나감입니다. 그리고 빗나간 상태에서 하는 모든 행동이 범죄입니다. 분향단에 향불이 항상 켜져 있는 것처럼 우리 마음은 24시간 하나님께 드려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생명책에 기록된 태승철의 이름을 보시며 ‘태승철의 마음이 올라왔구나!’라고 존재감을 느끼실 것입니다. 그리고 날마다 마음이 올라오는 양이 늘어남을 보시며 기뻐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천국에 올라오는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천국 보좌에 앉아계신 하나님의 마음속에서 나의 존재감도 커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기대하시며 예정과 선택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선민을 찾아오셔서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세상의 대척점에 당신을 세우시고 선민의 부드러운 목돌림을 기대하셨습니다. 습관적으로 세상을 향하고자 할 때마다 목을 부드럽게 돌려 하나님께로 향하기를 바라셨고, 선민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향해 자기 존재감을 키우고 어필하기를 기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선민들은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6개월이 넘도록 당신을 드러내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선민은 40일 동안 모세가 보이지 않자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이제까지 살아온 대로 마음의 흡입력을 세상으로 향합니다. 마음의 흡입력이란 결국 인격의 목입니다. 인격의 목이 세상을 향한 채로 뻣뻣하게 고정되어서 하나님을 향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난 6개월 동안 보이셨던 기적들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기적들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셨고 선민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제 선민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보내는 마음의 양을 키워갈 수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적어도 일정한 양의 선민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오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대치에 모자라는 정도가 아니라 선민의 마음은 아예 하늘로 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열망함이 전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교인이라는 이스라엘 선민의 마음을 계산해 보셨습니다. 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하늘로 올라와 있는지 존재감의 수치를 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수치를 보니 제로였던 것입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등을 돌렸던 것은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살펴볼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전체가 갖는 존재감은 제로 상태의 수준이었습니다. 하늘에 존재감이 없기에 생명책에 이름만 남겨둘 필요가 없습니다.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이란 해당하는 사람의 실제 존재가 천국에 올라가 하나님께서 느끼실 수 있어야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존재감을 느끼시려고 해도 느끼실 수가 없습니다. 그야말로 생명책에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 이름들을 지워버리리라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분향단의 향불이 상징하듯이 24시간 하늘로 올라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못한 채 이 세상을 향해 마음의 흡입력을 발동하며 살아가는 동안 모든 말과 행동은 범죄입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고정하고 하늘로 올라가는 중에 세상에서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할 확률이 점점 높아지게 됩니다. 하나님께 보내드리는 마음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범죄가 줄어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보내드리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가지고 싶어 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많이 가지고 싶어 하고, 하나님을 향한 열망과 소망이 크면 클수록, 내 마음은 하나님께로 많이 보내집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나의 존재감을 크게 느끼십니다. 이처럼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운다는 말씀과 존재감에는 중요한 연관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로부터 중보 기도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 중보 기도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가르쳐주고 계신 것입니다.
본문의 주제는 이스라엘의 타락보다는 중보 기도의 의미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중보 기도를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등장한 모세의 중보 기도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예표됩니다. 제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중보 기도란 하나님의 최측근만이 할 수 있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서 그 존재감이 크게 느껴지는 자가 하나님의 최측근입니다. 이러한 자의 특징은 하나님을 열망하는 마음이 커서 분향단이 상징하는 대로 날마다 마음이 하나님께 보내지고 하늘에 쌓이는 마음의 양이 점점 커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이르는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으로 주어진 마음 드림의 길입니다. 다만 똑같은 길이 주어졌어도 하늘에 누적되는 마음의 양은 천차만별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부여받고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도록 허락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는 양이 월등히 많은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존재감을 크게 느끼십니다. 이들이 하나님의 최측근이자 중보 기도를 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 자들입니다.
예를 들어 최 집사님과 김 집사님과 박 집사님이 구역 예배로 모였습니다. 그런데 세 사람 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마음을 하나님께 드림의 의미를 모릅니다. 이들의 이름은 생명책에는 기록되어 있지만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기에 하나님께서 이들의 존재감을 느끼실 수 없는 상태입니다. 구역 예배 자료집을 보니 끝날 때 나라를 위한 기도를 하라, 가족을 위한 중보 기도를 하라, 서로 중보 기도를 하라고 쓰여있기에 따라서 해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진정한 중보 기도가 아닙니다. 마음의 목이 뻣뻣해서 여전히 세상을 향하고, 마음에 세상을 끝없이 담아서 더러움의 극치에 이른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나라를 위해, 가족을 위해, 서로의 문제를 위해 중보 기도를 한다고 하지만 웃기는 노릇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책을 보시며 마음이 얼마나 하늘에 올라와 있는지 보시는데 존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생명책에 이름은 기록되어 있으나 하늘에 올라온 마음의 양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중보 기도를 하겠다고 하고 있으니 도무지 신뢰할 수 없다고 느끼실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중보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대통령과의 만남을 주선하고, 재벌 회장과의 만남을 주선하고, 대학 총장과의 만남을 주선하고, 하다못해 남녀의 소개팅을 주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중보자는 측근이어야 합니다. 중보자를 신뢰할 수 있어야 소개한 사람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세상에서도 통용되는 상식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존재감을 느끼실 수 없어 생명책에서 이름을 지울까말까 고민하시는 사람이 나라를 위해 이웃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하겠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1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뜻을 돌이키사 말씀하신 화를 그 백성에게 내리지 아니하시니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말씀의 의미를 오해합니다. 모세처럼 중보 기도를 하기만 하면 하나님이 진멸하시겠다고 결정하셨더라도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신다고 여깁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목이 뻣뻣하여 여전히 세상 것만을 마음에 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모세처럼 중보 기도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장 27절에서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에 세상을 담은 상태가 바로 이와 같습니다. 지성소와 같이 하나님만이 담겨야 할 마음에 세상 것들을 가득 담은 채, 이 세상의 악함을 위해 중보 기도를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측근이라면 하나님이 존재감을 느끼실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측근은커녕 존재감 자체가 없는 상태입니다. 생명책에 이름만 있을 뿐이지 그 인격의 핵심인 마음이 눈곱만큼도 하늘에 올라와 있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좋아해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좋아하는 것은 우리의 일이요, 과업이요, 은퇴 없는 직업입니다. 이러한 말을 들어본 적도 없고 그렇게 생각해 본 적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뜻을 돌이킬 정도로 중보 기도가 효과를 발휘하는 실제 상황이란 어떤 것일까요? 12절을 보면 모세가 “어찌하여 애굽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가 자기의 백성을 산에서 죽이고 지면에서 진멸하려는 악한 의도로 인도해 내었다고 말하게 하시려 하나이까 주의 맹렬한 노를 그치시고 뜻을 돌이키사 주의 백성에게 이 화를 내리지 마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뜻을 돌이키사’라는 표현이 등장합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대할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진멸하시기로 결정하셨다가 모세가 기도하자 뜻을 돌이키시고 진멸의 계획을 철회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중보 기도가 하나님의 계획을 좌우하거나 변경할 수 있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이해입니다.
뜻을 돌이키셨다는 표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 마음속을 들여다보아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향한 공의의 마음과 사랑의 마음을 갖고 계신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공의의 마음이란 사람의 죄악에 대해 심판하시고 형벌을 내리시는 의로움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불의함을 두고 보시지 못하는 분이십니다. 공의로우시기에 사람의 범죄에 대해 그 값을 물으시고 형벌과 심판을 내리십니다. 한편,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은혜와 용서와 구원과 자비를 품고 계십니다. 사람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마음 안에는 공의의 마음과 사랑의 마음이 항상 공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선택하셨을 뿐만 아니라 전대미문의 기적을 통해 당신을 소개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있음과 좋음의 대상으로 상대할 수 있도록 조건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선택하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들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시기로 정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헌신짝처럼 버렸습니다. 뻣뻣한 목을 유지하면서 하나님을 안면몰수하고 세상을 향해 마음을 계속해서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마음은 거절당하고 배신당하고 이제 공의의 마음이 작동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애초에 하나님이 선민을 사랑하시기로 하신 것은 이들이 잘났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참담한 죄악을 아셨지만, 선민으로 예정하시고 사랑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선민이 죄악을 이길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주시기 위해 모세를 부르셨고 성막과 제사의 의미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얼마나 좋고 대단한 분이신지를 계속 보여주셨습니다. 이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마음 드림을 통해 하나님께서 존재감을 느끼실 수 있게 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뻣뻣한 목을 고집하며 마음을 세상 쪽으로 향했고, 하나님은 이들의 존재감을 전혀 느끼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로부터 공의의 마음이 발동하여 진멸을 결심하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울을 생각하시면 좋습니다. 비유적으로 말해서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공의의 접시와 사랑의 접시가 있는 저울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악행이 공의의 접시에 담길수록 저울은 기울어집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사랑보다 이들의 악행이 심하게 드러나고 표현되자 이제 사랑보다 공의로움을 드러내실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진멸하시겠다는 뜻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모세가 개입하면서 중보 기도를 드립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사랑을 그대로 받아들여서 자기 마음 전부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세를 보실 때는 사랑의 접시에 무게가 실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모세가 사랑의 접시에 올라감을 통해 하나님의 저울은 공의에서 사랑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다시 말해 250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지 않고 악을 행함으로 공의의 접시에 올려졌습니다. 그 상태에서 모세가 사랑의 접시로 올라가자, 공의의 접시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고 진멸하시기로 한 뜻을 일단 보류하시게 된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편에 선 사람이 소수 있었지만 250만 이스라엘의 존재감의 무게는 다 합쳐도 없는 것에 가까웠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서 이스라엘 전체의 존재감보다 모세 한 명의 존재감이 더 무거웠던 것입니다. 이것이 중보 기도를 할 수 있는 자의 조건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아브라함을 떠올려 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부터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통보 받고 중재에 나섰습니다. 아브라함은 계속해서 하나님께 조건을 제시했고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조건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결국 소돔과 고모라에는 아브라함이 최종적으로 제시했던 의인 10명조차 없었고 진멸 당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악행은 극에 달했고 하나님의 공의는 발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이 중재에 나섭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존재감을 얼마나 크게 느끼셨는지 알 수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백성 전체의 악행은 어마어마한 것이었으나 아브라함이 사랑의 접시 위에 올라가 개입하자 하나님의 저울은 수평을 이룹니다. 이제 의인 10명만 있으면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조금이라도 마음을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단 10명만 있었다면 이들의 존재감이 아브라함의 존재감에 보태져서 하나님의 저울은 사랑의 접시 쪽으로 기울어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 혼자의 존재감으로는 소돔과 고모라의 악행의 무거움을 다 감당할 수는 없었습니다. 중보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존재감이 모세보다 작았기에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막을 수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는 소수지만 여호와 하나님의 편에 선 자들이 있었습니다. 모세만큼 온전히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지는 않았을지언정 적어도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야 한다는 양심을 가진 소위 의인이라고 부를만한 자들은 있었던 것입니다. 금송아지 숭배에 참여하지 않은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존재감과 모세의 존재감이 합쳐지면서 하나님의 저울은 사랑의 접시 쪽으로 기울어질 수 있었습니다. 진노하셔서 진멸하시겠다는 공의의 접시 쪽으로 하나님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 결과 선민 전체가 진멸 당하는 상황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소돔과 고모라에는 아브라함이 최소한으로 생각했던 의인 10명 조차도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멸망을 피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다만 모세의 중보 기도는 일시적이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후에도 목이 뻣뻣함을 버리지 못했고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출애굽 1세대는 광야에서 진멸 당하고 맙니다. 31절을 보면 “이제 가서 내가 네게 말한 곳으로 백성을 인도하라 내 사자가 네 앞서 가리라 그러나 내가 보응할 날에는 그들의 죄를 보응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이 말씀대로 이스라엘은 출애굽 한지 채 2년이 못 된 시점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고 한 세대 전체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게 됩니다. 이들의 행위가 너무 악했기에 모세조차도 더 이상 이스라엘 백성을 중보할 힘을 잃게 되었던 것입니다.
심지어 사람들은 예수님의 중보의 무게조차도 능가하는 악의 무게를 보여줍니다. 그 결과 인류는 예수님의 중보에도 불구하고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의 중보의 효과는 명확합니다. 내가 하는 말과 행동이 하나님의 뜻에 맞지 않는다면 즉사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공의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지구의 80억 인구는 하늘에서 정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말하고 행동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멀쩡하게 살아갑니다. 주권자 하나님의 마음속 저울에는 인류의 죄악이 공의의 접시에 담겨 있습니다. 그 반대편의 사랑의 접시에는 독생자 예수님이 올라가 계십니다. 독생자 예수님의 존재감이 지금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 말하고 행동하지 않아서 즉사해야 마땅한 자들에 대한 공의의 심판을 더 가볍게 만들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 한 분의 존재감이 인류 죄악의 무게감보다 더 나가기 때문에 예수님의 중보가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그렇기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늘에서 정하신 뜻대로 말하고 행동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버젓이 살아 있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뻣뻣한 목을 고치고 부드러운 목돌림을 회복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향하던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이고,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예수님의 중보에도 불구하고 멸망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습니다. 한 인간의 죄악이 어떻게 예수님의 중보를 초과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존재를 등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의 무게를 버림으로써 예수님의 존재감으로 이루어진 중보를 능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의 존재감을 예수님의 존재감에 보태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 가족을 위하여, 우리 이웃을 위하여, 우리나라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진정한 중보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단지 의인 10명의 존재감이 아브라함의 존재감에 보태질 수 있었다면 진멸을 피했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이 그나마 구원의 기회를 연장할 가능성 또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감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하나님 마음의 저울에서 십자가 복음 방송을 듣는 여러분만이라도 존재감을 실어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인류가 예수님의 존재감을 초월하는 죄악을 범할 때도 우리가 의인 10명의 역할을 함으로써 사랑의 접시 쪽으로 더 무게가 나가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연장하여 제공할 수 있습니다.
중보 기도는 구원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구원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나설 수 있는 기회를 늘리는 것이고 멸망의 시간을 늦출 수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가족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중보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될 수는 없을지라도 아브라함이나 모세와 같은 중보자는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존재감이 하나님께 크게 느껴지는 최측근이 될 수 있도록 주님께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이루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존재감이 어제보다 오늘 더 커지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하여 그리스도 연쇄 과정 안에서 우리의 마음이 떠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존재감 때문에 가족과 이웃과 나라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류 전체가 좀 더 구원의 기회를 연장하는 중보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