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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 안면몰수 대장정의 시작>의 줄거리 :
모세가 시내산 꼭대기에 올라 하나님을 만나는 40일을 못 참고 이스라엘 교회 안에서는 사달이 나고 맙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라고 합니다. 즉 우리를 인도하도록 우리가 다른 하나님을 만들자! 라는 말입니다. 모세의 하나님에 대해 이스라엘은 안면몰수합니다. 이 안면몰수로부터 시작해서 선민의 역사는 하나님 안면몰수의 대장정을 시작하게 됩니다. 문제는 선민의 교회가 이렇게 진짜 하나님에 대해서 안면몰수하고 자기들이 멋대로 만들어 낸 신을 하나님이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전혀 모른다는 점입니다.
하나님 안면몰수 대장정의 시작
(출애굽기 32:1~6)
1. 백성이 모세가 산에서 내려옴이 더딤을 보고 모여 백성이 아론에게 이르러 말하되 일어나라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 이 모세 곧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찌 되었는지 알지 못함이니라
2. 아론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의 아내와 자녀의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내게로 가져오라
3. 모든 백성이 그 귀에서 금 고리를 빼어 아론에게로 가져가매
4.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
5. 아론이 보고 그 앞에 제단을 쌓고 이에 아론이 공포하여 이르되 내일은 여호와의 절일이니라 하니
6. 이튿날에 그들이 일찍이 일어나 번제를 드리며 화목제를 드리고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놀더라
이스라엘을 통해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대하여 안면몰수하는 행태를 보입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의 교회라 일컬어지는 선민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안면몰수가 끊이지 않고 이어지게 됩니다. ‘하나님 안면몰수 대장정의 시작’이라는 제목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 우리 시대에도 끝나지 않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끝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압도적이고 지배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안면몰수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면몰수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라는 질문이 타당할 정도가 된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힙니다. 1절을 보면 백성이 아론에게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는 요구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과연 이것이 인류역사상 최초로 등장한 하나님의 교회인 이스라엘 선민에게서 나올 수 있는 말인지 놀랍기만 합니다. 이때는 출애굽으로부터 6개월 정도가 지난 시점입니다. 우리는 이 6개월 동안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앞세워서 열 가지 재앙으로 초강대국 애굽을 초토화하셨고, 홍해를 갈라 벽처럼 세우심을 통해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건너게 하셨습니다. 또한 죽음의 땅인 사막에서 물과 만나와 고기를 먹이셨습니다. 들어본 적도 없는 전대미문의 기적들, 전무후무한 기적들로 채워진 꿈결 같은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기간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시내산에 이르러 하나님과 선민의 결혼식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로부터 모세는 이스라엘 선민이 하나님과 관계하려면 꼭 필요한 성막 제작에 관한 규례와 율법을 듣기 위해 시내산에 올라 40일을 있는데 산 아래에서는 기가 막히는 사달이 났습니다.
백성이 아론을 향해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고 요구합니다. 이들은 이제까지 모세를 통해 자신들을 인도한 하나님을 거부했습니다. 모세와 연결된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을 만들어 낼 것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의 종교관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영적인 존재를 필요로 하여 종교를 만듭니다. 마음에는 오직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만이 들어오셔야 하는데 하나님 외에 세상 것들을 담고 있는 더러움이 극치 상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인간들은 이러한 더러움의 상태에서 영적인 존재로부터 도움을 원하면서 종교와 신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는 백성의 요구는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더러움의 상태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제까지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앞세워 당신의 살아계심과 어떠하심을 선민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이러한 기적의 하나님조차도 일반 종교의 신들과 다를 바 없는 신으로 여겼습니다. 다른 종교의 신들이 이렇게까지 살아계심을 드러낸 적이 없었음에도 하나님을 다른 신과 똑같이 여겼다는 것입니다.
말씀드린 대로 이스라엘은 출애굽으로부터 6개월 동안 꿈결 같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렇듯 모세를 앞세워 당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을 어떻게 갈아치우겠다고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야말로 몸부림을 치시듯이 전지전능하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깨끗하게 하나님을 안면몰수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 안면몰수의 이유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이들은 모세와 연결된 기적의 하나님을 버리는 일에 있어서 아쉬움, 허전함, 안타까움, 아까움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어떤 대상과 이별할 때 아쉬움이나 미련이나 안타까움이 없다면 그 대상에게 마음을 준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떤 대상과의 이별에서 아쉬움과 고통을 느끼고 없음에 대해 허전함을 느낀다면 마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준 대상이 없어졌다면 그 대상을 향했던 마음은 허전할 수밖에 없고, 그 상황을 찢어지는 고통으로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가 40일 동안 산에서 내려오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모세가 대표하던 하나님을 버립니다. 하나님에 대해 아무런 아쉬움, 허전함, 아까움을 느끼지 못하고 깨끗하게 안면몰수하고 다른 신을 만들어 낼 것을 요구합니다. 지난 6개월 동안 하나님은 몸부림을 치시며 당신을 알려주시기 위해 온갖 기적을 행하시며 이스라엘 백성을 이끄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한 하나님을 이토록 쉽게 등질 수 있었던 이유는 애초에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을 쏟았던 대상은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땅의 것들이었습니다.
시내산에 이르러 모세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 들은 이스라엘 백성은 한마음으로 ‘우리가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로부터 하나님과 선민의 결혼식이라고 할 수 있는 시내산 언약은 체결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겉으로는 남편을 맞이하는 아내의 모습과도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 내막은 달랐습니다. 산에 올라간 모세가 40일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자 죽었음을 확신하며 다른 신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이들에게는 모세를 염려하는 마음도 없고 모세가 대표하던 하나님에 대해서는 완전히 관계를 끊었습니다. 마치 하나님을 용도폐기하려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 ‘모세가 40일이 지나도 안 내려오는 걸 보면 이미 죽었다. 이제 모세와 모세가 대표하던 하나님은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라고 여긴 것입니다.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하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설령 모세가 죽었더라도 하나님을 버리고자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애초에 하나님께 마음을 쏟은 적이 없기에 아주 쉽게 하나님을 용도폐기해 버립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이 세상의 삶을 위하여 모세와 연결된 하나님은 이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라고 여기며 아론에게 우리를 인도할 다른 신을 만들라 요구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와 무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안면몰수한 적이 없다.’라고 말하고 싶을 수도 있습니다. 적어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게 된 뒤로는 하나님을 안면몰수한 적이 없다고 여기실 수 있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어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붙인 적은 없기에 이스라엘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말로 그럴까요?
4절을 보면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금 고리를 받아 부어서 조각칼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의 신이로다 하는지라”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자신들을 출애굽 시킨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붙입니다. 모세와 연결된 하나님이 아니라 다른 신이라고 합니다. 이 금송아지는 애굽의 ‘아피스’라는 신을 모방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름을 아피스가 아닌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붙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모세와 연결된 하나님은 없다고 여기며 안면몰수해 버립니다.
우리는 가정, 직장, 시장, 관공서, 학교, 군대를 비롯한 다양한 생활 현장에서 살아갑니다. 그럴 때 우리의 의식에서는 하나님을 완전히 잊어버린 채 세상일에 몰두할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이스라엘의 행태와 다를 바 없는 하나님을 안면몰수하는 것입니다. 자녀가 서울대에 입학했다면 부모에게는 굉장한 자랑거리가 됩니다. 밖에 나가서 일을 하고 누군가를 만나도 아이가 서울대에 입학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부모의 마음이 아이의 서울대 입학이라는 사실에 강력하게 쏟아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강력하게 쏟아지는 대상에 대해서는 안면몰수하려야 할 수가 없습니다.
안면몰수는 이미 면식이 있고 관계가 있는 대상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박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난 6개월 동안 이스라엘 백성에게 엄청난 기적을 보여주시며 당신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것처럼 다른 신에게 집중하고 얼굴을 향하고자 합니다. 이들이 이러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들이 마음을 쏟아부었던 대상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하시는 이 세상에 대한 일들이었습니다. 그러한 일을 하시는 하나님 자신에 대해 마음을 쏟아부은 적이 없었기에 하나님에 대한 아쉬움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이들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하나님께로 갔다면 하나님에 대한 안타까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모세가 40일 동안 보이지 않는 걸 보니 혹시 죽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어떻게 하나님과 헤어질 수 있겠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본 적이 없기에 조금도 아쉬워하지 않고 깨끗하게 하나님에 대한 관계를 잘라버립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스라엘에만 해당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도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깨끗하게 잊어버리고 살 때가 많습니다. 마치 하나님을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살아간다면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라는 이름 아래에서 교회와 교인을 자처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님을 안면몰수하는 일이 어떻게 벌어지고 말았을까요? 우리는 그동안 세상을 향해서 진한 짝사랑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언제나 문제만을 주었습니다. 건강 문제, 자녀 문제, 배우자 문제, 돈 문제, 나라 문제를 비롯하여 다양한 문제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짝사랑의 양에 비해 세상이라는 녀석은 너무나도 쉽게 우리를 향해 안면몰수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기쁨과 만족과 평강과 행복은 세상을 통해 주어진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은 세상을 향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해서는 안면몰수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러한 일이 일어난 것에는 많은 부분 아론과 같은 지도자들에게 결정적 책임이 있습니다. 아론의 태도를 봅니다. 아론은 백성의 요구에 맞추어 신을 만들어 줍니다. 아론의 위치는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있는 제사장입니다. 아론은 깔때기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넓은 입구는 하나님을 향하고 좁은 쪽은 백성을 향하는 깔때기가 되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백성에게 전해줄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아론은 깔때기의 입구를 백성을 향하고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제사장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한때 초대형교회의 대표로서 미국의 새들백 교회가 유명했습니다. 이와 관련된 책을 보면 지역 주민들이 교회에 바라는 바를 듣고 그들의 요구에 맞춰주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던 것이 기억납니다. 이것은 제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목회자란 대중의 요구를 맞추어 주는 자가 아닙니다. 대중의 반응이나 요구에 상관없이 하나님이 지시하시고 하나님께 받은 것들을 전하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죽었으며, 사도들은 톱에 켜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하나님을 먼저 알게 된 자들의 책임은 세상을 지배하는 대중들의 요구에 맞춰주는 것이 아니라 죽더라도 하나님의 요구를 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론은 이러한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아론은 지도자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해서라면 죽음을 불사하고 대중의 요구에 맞설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대규모로 하나님을 안면몰수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이 오늘날에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교계의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대중의 인기와 찬사와 추종을 기대하며 이들의 요구와 관심에만 귀를 기울입니다. 이 세상 지도자들이 목숨 걸고 얻으려는 가치와 똑같은 가치를 추구합니다. 투표 숫자, 여론조사의 수치, TV 시청률, 판매 부수, 구독자 수, 클릭 수 등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대중의 요구에 맞추면 살고, 대중의 요구에 맞서면 소멸하고 사장된다고 여깁니다. 이로부터 진짜 교회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대중들의 요구가 교인들에게 전염되고, 다시 그러한 교인들의 요구에 맞추어서 설교가 이루어집니다. 그렇게 지껄이는 내용을 보면 못사는 사람들도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어렵고 고달프게 사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준다고 합니다. 이런 것을 하나님의 메시지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미친 짓입니다. 교회라고 일컫고 교인을 자처하는 집단 전체가 하나님을 안면몰수하는 달인들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세상에서 잘 살고 싶다는 것이 대중들의 요구라면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떠나라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야 한다고 가르쳐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합니다. 목회자들은 어떻게 하든지 많은 사람을 모으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돌에 맞아 죽어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씀을 전하는 것이 성공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 동료 목사님들이 저를 우습게 볼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확신합니다. 누가 뭐라 해도 저는 성공한 목사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이라는 진리를 전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날마다 하나님께 마음을 많이 드려야 하고 세상을 탈출하여 천국에 진입해야 한다는 것을 언제나 말씀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성공한 목사임을 자처합니다. 인터넷으로 말씀을 전하는 입장에서 목회하는 현장이 없기에 등록한 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에 제 동료 목사님들이 저를 꼴등이라고 생각하지만 저는 성공한 목사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저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자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갖다 붙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학들이 있습니다. 정통 신학, 자유주의 신학, 신 죽음의 신학, 민중 신학 등의 이름으로 불립니다. 많은 이름의 신학들이 존재하고, 학자마다 자기의 주장을 하며, 다양한 종파가 존재합니다. 다 금송아지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인 것 같이 다른 신을 섬기는 상태입니다.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게 된 이유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여 시내산에 올라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모세는 출애굽으로부터 6개월 동안 하나님을 소개받은 선민의 대표였습니다. 따라서 모세를 대표로 따르는 선민이라면 그 마음이 모세를 따라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상황 속으로 가야 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은 전부 산 아래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각자가 하나님을 잘 관계할 수 있기 위한 방법을 제시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은 모세를 따라 시내산으로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마음은 계속 산 아래에 남아있었고 40일이 지나자 아예 마음을 닫아버립니다. 애초에 이들은 모세가 산에 올라갈 때부터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습니다. 모세가 내려올 때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큰 선물이나 받아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 40일 동안 모세가 내려오지 않자 모세와 하나님을 폐기하기로 합니다. 6개월 동안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에 대해서는 안면몰수하고,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그것에 출애굽을 시킨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수많은 신학 이론과 종파들이 말하는 하나님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금송아지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여서 부르고 있을 뿐입니다. 금송아지는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세상에 남아있음을 가리킵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마주하는 시내산으로 올라갈 때 백성의 마음도 모세를 따라 올라갔어야 했습니다. 마음이 모세를 따라 올라가지 않은 사람들의 마음은 세상에 남아있는 상태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도 세상에 머무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럴 때 반드시 금송아지를 하나님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이것은 지금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이것은 명확한 사실입니다. 그런데 대단한 석학이라고 세상이 찬양하는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수천, 수만 장의 신학 논문을 써내더라도 이 명확한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부 금송아지에 하나님의 이름을 붙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께 드려져야 함을 말하지 않는다면 수천, 수만 장의 신학 논문은 금송아지일 뿐입니다. 예수님으로 대표되는 하나님, 예수님과 연결된 하나님이 아닌 다른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것은 누구를 비난하는 것이 아닌 분명한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계신 목사님이 있을 것입니다. 인터넷으로 접하는 목사님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목사님들이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마음을 하나님께 다 드려야 함을 이야기하지 않은 채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면 그 목사님은 금송아지 하나님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연결된 하나님은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산에 오르는 모세에게 마음을 주었더라면 결과는 달랐을 것입니다. 만에 하나 모세가 죽었더라도 하나님을 쉽게 버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일말의 아쉬움과 허전함과 안타까움도 없이 깨끗하게 하나님을 안면몰수하는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오히려 너무나 쉽고 간단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여 세상을 탈출하고, 승천하여 보좌 우편까지 이르러 천국에 계신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이러한 이야기가 중단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이미 금송아지로 상징되는 전혀 다른 하나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1절을 보면 백성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라고 요구합니다. 이것은 내 마음이 굳이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로 가지 않고 이 땅에 남아있어도 나무라지 않는 하나님을 만들라는 요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이 모세가 하나님을 대면하는 시내산으로 올라가야 했듯이,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이 하나님을 대면하시는 장소로 가야만 합니다.
모세의 인격이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을 담는 그릇이라면, 예수님의 인격은 전 세계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선민들의 마음을 담는 그릇입니다. 예수님을 따라서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한 하나님과 관계할 수는 없습니다. 땅에 머무는 마음으로 충분히 관계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면 금송아지로 상징되는 다른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세상에 대해 완전히 죽어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 완전히 안면몰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하나님은 금송아지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마음을 하나님께 드릴 때, 내 마음에서 하나님의 비중은 점점 더 커집니다. 하나님께 집중하는 동안 세상에 대한 안면몰수가 일어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란 평생을 함께 한 배우자에 대해 안면몰수하는 것이고, 배 아파 낳은 자녀에 대한 안면몰수하는 것이고, 모든 걸 바쳐 일군 사업에 대한 안면몰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기 위해 세상을 생판 모르는 남처럼 안면몰수하는 사건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동안 관계하며 소중했던 살처럼 아까운 모든 것들을 십자가를 통해 안면몰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럴 수 없다면 하나님을 안면몰수하게 됩니다. 그리고 금송아지로 상징되는 만들어 낸 신을 하나님으로 부르게 됩니다.
세상에는 목사님들이 만든 다양한 공식이 있습니다. 삼박자 축복이다.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그 속에 날마다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서 마음을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는 이야기가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드려야 한다는 이야기,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는 이야기, 마음이 세상을 탈출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없다면 본문이 말씀하시는 대로 금송아지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인도할 신을 만들라”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러한 요구는 지금도 대중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땅에 붙어 있어도 되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하늘로 보내지 않아도 되기를 바랍니다.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승천과 보좌 우편에 이르신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잘라내도 되기를 바랍니다. 그저 십자가에서 죄 사함을 받았다고 믿으면서 마음 놓고 세상에 남아있어도 관계할 수 있는 하나님을 만들어 내라고 합니다. 이러한 대중들의 요구에 부응해서 신을 만들고 설교한다면 우리 마음이 예수님의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로 진입하고 하나님께 마음을 다 드려야 한다는 이야기는 완전히 잘리고 삭제되고 제거될 수밖에 없습니다.
실제 하나님께 마음 드림이 없다면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기 위하여 세상 탈출, 천국 진입을 말하지 않는 모든 설교나 모든 신학은 모조리 금송아지를 향하여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하나님을 안면몰수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연결된 하나님을 안면몰수했듯이, 지금도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과 연결된 하나님을 안면몰수하는 일은 벌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대장정입니다. 우리만이라도 이 대장정의 연결고리를 끊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살처럼 여겼던 세상 모든 것들을 십자가를 통해 안면몰수하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께 마음을 다 드림으로써 잠시라도 하늘 아버지를 잊어버리는 것조차 허전하고 아깝고 찢어지는 고통을 느낌으로써 더 이상 하나님을 외면하고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