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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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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을 쥐어짜니까 삶이 뒤틀린다_태승철

by 태승철 · 25-03-29 08:56 · 340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생각을 쥐어짜니까 삶이 뒤틀린다>의 줄거리 :

생각은 내가 쥐어짜 내는 것이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의 거울에 반사되어 나타나야 합니다. 생각을 쥐어짜면 생각하는 모든 대상도 역시 쥐어짜이게 되고 전체적으로 삶도 쥐어짜서 뒤틀리게 됩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에 거울처럼 비칠까요? 마음이 안식 상황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안식 상황에서 마음이 하나님에게만 집중되면 세상을 향해서는 내 생각이 작동을 멈춘 상태가 됩니다. 바로 이런 상태에서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나의 삶을 향하여 품고 계신 생각이 내 생각의 거울에 비친다는 것입니다. 마치 하늘에 뜬 보름달이 경포 호수 수면 위에 달그림자를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생각을 쥐어짜니까 삶이 뒤틀린다

 

(출애굽기 31:1~18)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살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3.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4.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5. 보석을 깎아 물리며 여러 가지 기술로 나무를 새겨 만들게 하리라

 

14.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

15.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 안식일에 일하는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죽일지니라

16.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이 안식일을 지켜서 그것으로 대대로 영원한 언약을 삼을 것이니

17.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일곱째 날에 일을 마치고 쉬었음이니라 하라

18.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

 

 

본문은 하나님께서 회막 제작을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장인들을 특정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1~5절에서 언급된 브살렐 외에도 오홀리압과 그들을 도울 장인들을 여럿 등용하십니다. 그리고 7~11절까지는 이들이 제작해야 할 회막에 관련된 여러 가지 기구들을 열거하십니다. 한편 12~17절에서는 맥락이 바뀌어서 앞에서 충분히 언급된 안식일 규정을 다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엿새 동안 창조하신 뒤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고 아담을 만나십니다. 이것이 태초의 안식일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증거판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하고 계시는 것을 돌판에 친히 쓰셨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내용을 중심으로 생각을 쥐어짜니까 삶이 뒤틀린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너희가 생각을 쥐어짜니 삶이 뒤틀리는 것 아니냐?’라는 선민을 향한 하나님의 탄식이 들어있는 제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여러분의 마음에 고민거리가 있습니까? 고민하기를 다른 말로 하자면 생각 쥐어짜기입니다. 염려라든지 어떤 일을 깊이 숙고하고 혹은 회의를 하기 위해 모이는 이유도 생각을 쥐어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이 잘못이라 말씀하십니다. 생각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부여하신 큰 은혜이자 특권입니다. 그렇기에 생각이라는 기능은 본래의 의도대로 잘 사용해야만 합니다. 이 세상에서 만나는 문제나 사건이나 상황을 위해 생각을 쥐어짜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에서 어긋나는 큰일입니다. 빨래를 강하게 쥐어짜면 옷감이 뒤틀리듯이 내가 어떤 대상에 대한 생각을 쥐어짤 때 그 상황 자체는 뒤틀립니다. 예를 들어 사장님이 사업 때문에 고민이 많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쥐어짜는 동안 사업 자체가 뒤틀리고 맙니다. 아무리 생각을 많이 해도 내가 쥐어짜서 나온 것이라면 그 사업을 향한 하나님이 갖고 계신 뜻은 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임하지 않아서 사업이 뒤틀리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생각을 쥐어짬으로써 스스로 사업 자체를 뒤틀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각할 수 있는 기능을 허락하신 이유는 하나님이 갖고 계신 생각을 반사하라는 것에 있습니다. 내가 생각할 수 있어야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이 비치는 거울입니다. 거울 앞에 서면 얼굴이 비치는 것과 같습니다. 강릉의 경포호수가 잔잔할 때면 밤에 달그림자가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생각은 땅에 있는 내 생각의 호수 위에 비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위해 생각의 기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생각을 쥐어짭니다. 내 생각을 쥐어짜면 하나님의 생각이 비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생각을 쥐어짠다는 것은 거울이 깨진 것과 마찬가지고, 호수에 풍랑이 일어서 달이 비치지 못하는 상태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생각이 내 생각이라는 거울에 투명하고 정확하게 비칠 수 있을까요? 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생각만 비칠 수 있다면 말과 행동도 하나님의 뜻대로 할 수 있습니다.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본문은 바로 이러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본문을 단순히 회막 제작에 관한 말씀이라고 여긴다면 우리와는 상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의미가 있으려면 본문이 무엇을 말씀하는지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땅을 향한 생각을 갖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선민이라면 거울에 얼굴이 비치고 호수에 달그림자가 비치는 것처럼 하나님의 생각을 복사하듯이 받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은 이것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본문의 의도를 제대로 이해했다면 이제 절대로 생각을 쥐어짜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내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을 반사하는 거울이요, 밤하늘의 보름달이 비치는 호수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마음가짐을 갖고 실제로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내면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본문에는 이러한 문제를 제시해 주는 특별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3~4절을 보면 하나님의 영을 그에게 충만하게 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 정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정교한 일이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마하솨브는 고안(考案)’이라는 뜻의 명사입니다. 고안이라는 말은 새롭게 생각해 낸 안이라는 뜻입니다. 정교하다는 말은 잊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연구하여라고 번역된 히브리어 하솨브는 고안하다, 생각하다, 계산하다라는 뜻의 동사입니다. 이러한 의미를 반영하여 4절 말씀을 직역하자면 고안을 고안하다혹은 생각을 생각하다라는 라는 희한한 뜻이 됩니다.

이것이 단순히 치밀하게 고안하여, 잘 고안하여라는 의도의 말씀이라면 하나님께서 굳이 이러한 중첩된 표현을 쓰실 이유가 없습니다. 치밀하게 생각하고, 세밀하게 생각하고, 잘 생각하면 되는 것인데 굳이 생각을 생각하라고 하신 것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표현을 사용하신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주석들은 이렇게 중첩된 표현에 대해 예술적인 고안들을 만들어 내다라는 어색한 해석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대로라면 성령 충만을 받은 뒤에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브살렐이나 오홀리압 같은 장인들이 스스로 예술적인 아이디어를 따라서 회막을 장식할 작품들을 만들었다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이것은 본문의 의도에서 어긋난 잘못된 해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교한 일로 번역된 마하솨브는 고안이라는 뜻의 명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기에는 사람의 생각 이전에 하나님의 생각이 이미 있었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회막 제작과 관련하여 창조적이고 새롭게 당신의 계획안을 갖고 계셨습니다. 따라서 장인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이전에는 없었던 예술적이고 아름다운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앞서 가지셨던 고안을 그대로 받아서 회막을 제작했습니다. 연구함으로 번역된 동사 하솨브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장인들이 스스로 연구하고 생각했던 것이 아닙니다. ‘고안을 고안하다라는 중첩된 표현이 의미하는 대로, 이미 존재하는 하나님의 생각을 내 생각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가르쳐주시는 표현인 것입니다.

말씀드렸듯이 고안을 고안하다혹은 생각을 생각하다라고 직역할 수 있는 본문은 앞선 생각이 존재했음을 전제합니다. 앞서 존재한 하나님의 생각을 나의 생각 속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이해를 염두에 두고 본문을 쉽게 풀어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는 회막 제작에 대한 계획안이 있으셨습니다. 따라서 회막을 제작하는 장인들은 하나님의 계획안을 자기 생각 안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생각을 장인들의 생각에 복사해 주셨고, 이들은 성령에 의해 복사된 하나님의 생각을 따라서 회막을 제작하게 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6절을 보면 오홀리압이라는 장인의 이름이 언급되면서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 모든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라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지혜로운 마음이 있는이라는 부분도 번역이 분명치 않습니다. 이 부분을 직역하면 숙련된 기술이 있는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숙련된 기술이 있는 모든 자에게 내가 지혜를 주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등장한 말씀과 상통하는 의미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회막에 대해 앞서 갖고 계신 고안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고안을 복사하듯이 장인들에게 부어주셔서 회막을 제작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회막 제작과 우리 삶의 연관성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회막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제작되어야 하듯이,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집짓기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을 집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갈 때는 하루하루 문제를 만나고, 사람을 관계하고, 일을 대하고, 과제를 처리해 나가게 됩니다. 이러한 모든 상황에서 생각은 작동합니다. 그런데 이 생각이란 모든 일에 대해서 마치 젖소에서 젖을 짜듯이 우리 머리에서 쥐어짜는 생각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미 앞서 존재하는 하나님의 고안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란 거울에 비치고 호수에 달그림자가 비치듯이 하나님의 고안을 받아들이고 반사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생각을 가진 인격체로서 살아가는 올바른 방식입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갑자기 안식일 규정이 언급됩니다.

본문에는 회막과 관련된 기구들과 회막의 구조와 제사장의 옷이 언급됩니다. 그런데 앞서 충분히 언급된 안식일에 관한 규례가 다시 등장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심지어 안식일에 대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어조는 굉장히 강렬합니다. 14절을 보면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5절을 보면 엿새 동안은 일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큰 안식일이니 여호와께 거룩한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는 아담이 인생의 첫째 날을 안식일로 맞이했음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아담은 의식이 깨자마자 첫 번째 대상으로 하나님을 마주했습니다. 다른 대상의 얼룩이나 흔적이 없는 하얀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안식일에서 이루어 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안식일을 말씀하신 이유는 회막 제작이 하나님의 일이고 하나님이 직접 지시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회막을 제작하는 자들이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는 것은 설령 하나님이 맡기신 일일지라도 하나님 자신보다 우선할 수는 없음을 의미합니다. 브살렐과 오홀리압을 비롯한 모든 장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회막 제작이라는 중차대한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이들은 200만 명이 넘는 선민들 중에서도 특별히 택함 받은 소수의 장인이기에 막중한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회막 제작의 책임감보다도 더 중시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회막 제작이 하나님의 일이지만 하나님 자신보다 우선시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목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가 중요하지만, 하나님보다 목회를 더 우선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우선해야 할 대상은 언제나 하나님 자신입니다. 이것이 안식일의 의미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만 집중하는 상태입니다. 마음에서 하나님보다 더 큰 존재감을 가진 대상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보다 더 크고 좋게 여겨지는 대상이나 바람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안식의 상태가 어떠한 것인지가 잘 드러난 예가 변화산 사건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통하여 비치는 하나님의 빛을 보고 황홀경에 빠져서 산 아래의 세상을 까맣게 잊어버립니다. 이처럼 안식이란 하나님의 좋음에 흠뻑 빠져서 세상을 잊는 것이고, 하나님을 가장 큰 존재감의 대상으로 여기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일이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서는 내 생각이 작동을 멈추는 것입니다.

우리의 지정의는 존재감을 크게 느끼는 대상이나 좋아해서 바라는 대상을 향해서 움직입니다. 안식 상황에서 하나님의 존재감이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크게 느껴진다면 상대적으로 세상 것들은 너무나 작게 여겨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 하나님에 대한 소망과 하나님에 대한 열망 이외에는 다른 어떤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내 생각은 세상을 향하여 작동하지 않습니다. 생각은 존재감을 느끼며 좋아하는 대상을 향해 작동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안식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존재가 가장 크고 하나님 외에는 다른 좋음이 없기에 세상을 향한 생각의 기능이 작동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대해 죽은 것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땅을 향해 갖고 계신 생각이 있습니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거울처럼, 밤하늘의 보름달이 비치는 호수처럼 하나님의 생각을 비치게 됩니다. 이것이 안식 상황에서 나타나는 일입니다.

안식은 마음의 존재감과 좋음이 하나님께만 집중되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안식 상태에서는 하나님 이외의 다른 대상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이외의 대상에 대해서는 생각이 죽은 것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갖고 계신 생각은 나를 거울삼아 비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가 세상에 일에 대해 스스로 생각을 짜내는 상황이라면 거울이 깨진 상태이고 호수에 풍랑이 이는 상태입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라면 사업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생각의 기능에 하나님의 생각이 비칠 수 있을까요? 사업에 대해서 생각이 죽은 것 같은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마음은 거울처럼 되고 잔잔한 호수의 수면처럼 되어서 사업에 대해 하나님이 갖고 계신 생각이 비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따라 말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사업에 대해 생각이 죽으려면 안식 상황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마음이 쏠리는 상태가 되어야 사업에 대해 마음이 죽은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업에 대해 마음이 죽은 상태가 되어야 생각은 멈춰집니다. 이로부터 사업에 대한 하나님의 고안이 비치고 내 생각의 기능은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회막 제작에 대한 생각이 있으셨습니다. 장인들이 그러했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하나님의 생각을 복사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은 어떨 때 하나님의 생각을 내 생각에 복사해 주시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세상일에 대해 생각을 쥐어짜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에 대해 생각이 죽은 것처럼 되어야 합니다. 내 생각의 기능이 죽은 것처럼 맑고 고요하게 유지될 때만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생각을 복사해 주실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에게서 발생하는 믿음의 오류를 짚고 넘어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관계자가 모여서 회의하는 것을 굉장히 중시합니다. 회의에서 많은 사람들의 의견이 모이고 좋은 생각이 나타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렇기에 실제로 많은 일에서 회의는 필수적으로 여겨지고 효과를 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선민은 인간의 생각을 쥐어짠 결과물들을 모아서 답을 얻고 길을 찾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지키라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곧 어떤 세상일도 하나님 자신을 관계하는 것보다 우선순위에 놓일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일이라도 하나님보다 우선시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일이고 내게 맡겨 주신 사명이니 잘하고 싶어서 고민하고 염려하며 스스로 계획을 짜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동시에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도 잃어버립니다.

14절을 보면 너희는 안식일을 지킬지니 이는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 됨이니라 그날을 더럽히는 자는 모두 죽일지며 그날에 일하는 자는 모두 그 백성 중에서 그 생명이 끊어지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생각을 쥐어짜고 있다면 안식 상황을 놓친 것이기에 하나님의 선민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 안에 들어가면 24시간, 일주일 내내, 365일을 안식 상황에 머물 수 있습니다. 안식일이 안식 상황이 된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항상 안식 속에 머물며 하나님과 관계하며 기뻐하고, 항상 하나님과 대화하듯이 기도함으로써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는 죽은 자가 되고, 하나님의 주권만이 움직이고 있음에 대해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앞서 우리는 상번제와 함께 드려지는 소제와 전제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번제의 의미대로 세상에 대해 죽은 내가 움직여야 할 때는 소제와 전제의 의미가 발휘됩니다. 우리는 소제의 의미를 따라 지금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주님이 죽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지금 주님의 길을 따라 하나님을 붙잡고 하나님을 관계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세상에서는 전제의 의미대로 술기운에 취하듯이 하늘 기운에 취해서 살게 됩니다. 회막과 관련하여 안식일 규정을 말씀하신 것은 상번제에 포함된 소제와 전제의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고 계신 것입니다.

전제가 의미하는 하늘 기운에 취함이란 하나님이 이미 갖고 계신 생각을 내 생각이라는 거울이자 호수에 비치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살아감을 의미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안식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상번제의 의미대로 세상에 대해 내 마음이 죽고 오직 하나님을 향해서만 마음과 생각이 활성화되는 상태를 유지해야 합니다. 이것이 곧 십자가 예수님과 연합한 상태이기도 합니다. 내가 주님과 함께 죽음이란 세상에 대한 죽음이고 안식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열심을 내야 좋은 아이디어도 생기고 일도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미 앞서서 이 세상에 대한 고안을 갖고 계십니다. 선민이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는 방법은 하나님께서 이미 앞서서 창조적으로 고안하신 것을 받아내는 것입니다. 세상일에 열심이어서는 하나님의 고안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세상일에 대해서는 내 생각의 기능은 죽은 것처럼 되어야만 합니다. 거울처럼 호수의 수면처럼 조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하나님으로 채워 주세요! 하나님의 존재감을 크게 느끼게 해주세요! 하나님의 좋음을 열망하게 해주세요! 그래서 이 세상에 대해서는 어떤 것의 존재감이나 좋음도 티끌처럼 여길 수 있게 해주세요!’라는 안식 상황의 기도를 이어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세상에 대해 죽은 내 생각의 기능은 거울처럼 호수처럼 땅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서 비치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본문 18절을 보면 증거판에 대한 말씀이 등장합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 위에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마치신 때에 증거판 둘을 모세에게 주시니 이는 돌판이요 하나님이 친히 쓰신 것이더라라고 했습니다. 증거판은 십계명이 기록된 돌판으로써 하나님 친히 쓰셨음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좋아하고 당신의 있음을 유일한 존재감으로 느끼는 안식 상황에 들어온 사람들의 마음을 확인하고 끌어안으시고자 하십니다. 다만 이들의 몸은 땅에 남아있습니다. 몸과 연결된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기능 또한 땅에 남아있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지정의와 육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하나님의 생각을 새겨넣으십니다. 돌판에 친히 십계명을 새기셨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돌판에 하나님의 생각을 새기셨듯이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에 하나님의 생각을 새겨 넣으시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할 일은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었다는 사도 바울의 영원한 진리의 말씀을 철저하게 수행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안식 상황에 들어가야 합니다. 아담이 어떤 대상도 상대하지 않은 하얀 마음으로 하나님을 마주했듯이,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은 마음으로 하얀 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란 내 마음이 하나님 이외에 어떤 대상의 존재감이나 좋음도 바라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대해 죽을 때 오직 하나님의 존재감만을 느끼고 하나님만을 좋음으로 소망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해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세상에 대해 죽은 내 생각의 수면 위에는 보름달이 비치듯 하나님의 생각이 비치게 됩니다.

 

이제는 더 이상 우리의 생각을 쥐어짜는 삶을 이어가서는 안 됩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 무엇인가 생각한다는 것은 안식 상황이 깨졌음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죽음을 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지금 들어갈 수 있는 안식 상황은 주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면 죽임을 당하고 선민으로부터 끊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주어지는 안식 상황으로 들어가지 않고, 지금 이룰 수 있는 안식 상황을 지키지 않으면 선민으로부터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안식 상황에 들어가 세상에 대한 생각이 죽은 상태가 되어서 하나님의 생각이 비치고 반사하는 거울이 되고 호수의 수면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서 고난과 외로움 속에 죽임을 당하신 주님 안에 우리의 안식이 항상 준비되어 있음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마음은 자나 깨나 집에서나 길을 갈 때나 무엇을 할 때든지 십자가 주님 안에 들어가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하나님의 존재감만을 느끼고 하나님의 좋음을 열망함으로써 세상을 향하여 죽은 것같이 되어버린 내 생각이 이 땅을 향해 갖고 계신 하나님의 생각을 비치고 반사하는 호수의 수면이 되고 거울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