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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현재를 살지 말고 지금을 살자>의 줄거리 :
선민의 인생관은 상번제 인생관입니다. 즉 세상을 잘 살기가 아니라 세상에 대해 철저히 죽기입니다. 이때 상번제 어린양을 통한 세상에 대한 죽음은 두 가지 현상을 수반합니다. 그 첫 번째가 인생에 할당된 모든 시간이 가루가 되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지정의육 즉 생각 감정 의지라는 기능과 육체가 하늘의 기운에 취하게 되는 일입니다. 이런 두 가지 현상을 상징하여 모든 어린양 상번제에 소제와 전제를 함께 드렸습니다. 이런 현상들은 상번제를 생활화함으로써 선민이 지금을 살기에 벌어집니다.
현재를 살지 말고 지금을 살자
(출애굽기 29:38~46)
38. 네가 제단 위에 드릴 것은 이러하니라 매일 일 년 된 어린 양 두 마리니
39. 한 어린 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 양은 저녁 때에 드릴지며
40. 한 어린 양에 고운 밀가루 십분의 일 에바와 찧은 기름 사분의 일 힌을 더하고 또 전제로 포도주 사분의 일 힌을 더할지며
41. 한 어린 양은 저녁 때에 드리되 아침에 한 것처럼 소제와 전제를 그것과 함께 드려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여 여호와께 화제로 삼을지니
42. 이는 너희가 대대로 여호와 앞 회막 문에서 늘 드릴 번제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고 네게 말하리라
지난 시간에는 상번제를 중심으로 보았습니다. 오늘은 소제와 전제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린 양을 드리는 상번제에 소제와 전제를 항상 함께 드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소제(素祭)는 곡식 가루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주로 밀가루가 쓰였는데 십분의 일 에바라 함은 2.3리터 정도입니다. 여기에 감람유 900밀리리터 정도를 넣어서 반죽을 만드는데 중요한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그리고 반죽은 화덕에 굽거나 번철에 부치거나 물에 삶아서 드립니다. 전제(奠祭)는 포도주나 도수가 높은 독주를 번제물 위에 부어서 드립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드리는 어린 양 상번제에는 반드시 소제와 전제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상번제의 취지와 연관하여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상번제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어린 양을 번제로 드립니다. 이러한 상번제의 근본 취지는 마음에서 항상 하나님을 만남에 있습니다. 항상이라는 표현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늦추거나 미루지 말고 ‘지금’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항상 존재합니다. 지금 하나님을 만나고 시간이 몇 분이 흘렀다면 지금이 또 찾아옵니다. 따라서 지금 하나님을 만나라는 것은 항상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언제나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시도 때도 없이 하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상번제의 취지입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드려지는 상번제는 어린 양의 죽음을 자기 죽음으로 인정하면서 세상을 빠져나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에 목적을 둡니다. 이것은 사람이 의식을 갖고 활동하는 시간에 항상 이루어져야 합니다. 상번제의 취지대로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상번제에 있어서 지금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매일 아침저녁으로 어린 양을 바치는 제사를 드릴 이유가 없습니다. 상번제는 지금 하나님을 만나야 되기 때문에 수반되는 두 가지 현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소제와 전제로 상징되고 있습니다.
제목에서 ‘현재를 살지 말고 지금을 살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선민은 현재를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지금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선민이 아닌 사람들은 지금이라는 단어를 쓰지만 실제 의미상 지금을 살 수 없습니다. 그들은 현재를 살 수 있을 뿐입니다. 선민인데도 지금과 현재를 구분하지 못해서 현재를 살고 있다면 실제로는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못하면서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현재와 지금의 차이를 생각해 봅니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끊어지지 않게 이어주는 교량과 같은 시간 개념입니다. 반면 지금이란 시간의 개념이 아닙니다. 지금이란 육체를 입고 있는 인간의 마음이 영원함과 닿을 수 있는 유일한 접점이자 틈새입니다. 시간이란 과거 현재 미래로 흘러가는 수평적 개념입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과 의식은 이러한 수평적 시간의 흐름 속에 갇혀서 함께 따라가고 있습니다. 이와 구분되는 선민의 지금이란 시간의 틈새가 벌어지는 상태라 할 수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수평적 흐름에서 끊김이 나타나는 틈새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은 영원함에 접촉할 수 있습니다. 영원은 시간이라는 수평적 흐름과 구분되는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 내 몸은 시간의 흐름에 담겨있지만, 내 마음은 지금이라는 틈새를 통해 시간을 뚫고 나와서 영원과 맞닿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를 사는 것과 지금을 사는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얼핏 현재도 이 순간처럼 보이고, 지금도 이 순간처럼 보입니다. 이 순간이 현재냐 지금이냐의 차이는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의식이 살아있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우리는 ‘내가 어제까지는 이렇게 살았지만 앞으로는 그렇게 살면 안 되겠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렇듯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의식으로 이 순간을 살고 있다면 현재를 사는 것입니다. 출근하면서 ‘오늘은 일찍 퇴근하고 좀 푹 쉬어야겠다.’라고 생각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앞을 내다보는 것은 현재를 사는 것입니다. 과거에서 미래로 움직이는 시간의 흐름 위에서 의식이 진행되고 있는 것이고, 과거와 미래를 의식하는 중에 이 순간을 살고 있으면 현재를 사는 것입니다.
어차피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이 순간에 일어납니다. 이 순간이 현재냐 지금이냐를 구분하는 것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의식이 살아있느냐로 정해집니다.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의식이 살아있는 채로 이 순간을 산다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현재를 사는 것입니다. 한편, 이와 구분되는 지금이란 과거와 미래에 대한 의식이 끊겨버리는 것입니다. 지금은 시간을 벗어나는 틈새이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흐름을 벗어나서 영원과 내 마음이 맞닿을 수 있는 유일한 접점이 지금입니다. 영원이란 시간이 아닙니다. 영원함 속에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흐름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영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영원일 뿐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지금이란 우리 마음이 영원함에 가 닿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의 틈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상번제와 지금에는 어떠한 연관성이 있을까요? 상번제는 이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상번제는 우리 마음이 세상을 탈출하여 하나님을 만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세계에 계십니다. 그렇기에 이 만남은 언제나 지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현재와 지금을 구분하지 않은 채 혼용해서 사용하고 있지만 우리에게는 영적인 의미에서 현재를 사는 것과 지금을 사는 것이 명확해야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번제의 의미를 살펴봄을 통해 세상에 대한 죽음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의 연관성을 살펴보았습니다. 번제의 의미는 마음이 이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로 가는 것으로 공간적인 의미에서 변화가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다만 세상을 탈출함이란 세상이라는 공간을 떠나는 것에만 있지 않고 시간을 떠나는 것이기도 합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수평적 흐름이 시간입니다. 내 마음과 의식이 시간의 흐름 속에 매여있으면 영원과는 분리된 상태입니다.
우리는 주님과 연합하여 세상을 탈출하여 하늘로 가야 합니다. 이것을 단순히 세상이라는 공간을 탈출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다만 주님과 연합함이란 시간의 흐름을 탈출하여 영원과 접점을 갖는 것입니다. 세상이라는 공간을 탈출하듯이 시간이라는 흐름을 탈출하는 일도 반드시 일어나야 합니다. 시간 탈출의 의미는 지금이라는 단어를 통해 분명해집니다.
선민은 하나님과의 만남을 주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주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원한 세계에 계십니다.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이 영원하신 하나님과 만나려면 지금이라는 틈새를 통해서 뚫고 나가야만 합니다. ‘내가 3일 동안은 바쁘니까, 3일 뒤에 하나님을 만나야겠다.’라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3일 뒤를 생각할 때 이미 시간의 흐름 속에 내 마음과 의식은 묻혀있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영원한 세계 속에 계시는 영원하신 하나님과는 만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공간과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이 세상이라는 공간 안에 있는 것들에 대해 죽는 것임과 동시에 시간에 대해서도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의식 속에서 지금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 짧은 문장을 말하는 사이에도 2~3초 지나가고 지금은 또 찾아옵니다. 지금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또 지금 하나님을 만나야 하고, 또 지금 하나님을 만나야 함이 반복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17절에서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지금 하나님을 만나라는 뜻입니다. 여기서 지금이란 시간의 흐름 속에 있는 현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가 상번제의 취지에 담겨있습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몇 시간씩 걸리는 번제의 과정을 반복하는 것이 제사장들끼리만 모여서 하는 일이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삶의 현장에서 상번제를 떠올리며 자기 죽음을 기억해야 했습니다. 지금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하기 위해 365일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저녁으로 어린 양을 바쳐가며 상번제는 드려졌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지금 하나님을 만날 때 일어나는 일이 소제와 전제를 통해 상징되고 있습니다.
먼저 소제의 의미에 대해 살펴봅니다. 지금 하나님을 만나면 내 의식 속에서 시간의 단위가 없어집니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오늘은 8시간 근무하고 퇴근해서 푹 쉬어야 되겠다.’라고 생각한다면 수평적 시간의 흐름 속에 마음이 잠겨있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지금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회사를 가려고 지하철을 탔다면 지금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지금 살아계시고, 지금 나를 보고 계시고, 지금 나를 알고 계시고, 지금 나의 모든 것을 생각하고 계획하고 계시고, 지금 내가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며 지금 하나님을 상대하기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루, 이틀, 사흘, 한 달, 일 년, 십 년이라고 하는 말은 하나님에 대해서는 의미가 없습니다. ‘내가 3년 동안 1억을 모아야지.’라는 생각을 할 때 내 의식은 시간이라는 수평적 흐름에 잠기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지금이라는 틈새를 통해 하나님이 계시는 영원의 세계에 수직으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마음이 시간이라는 수평의 흐름에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상번제의 취지대로 지금 하나님을 만난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씀대로 지금 하나님을 부르고 상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이 지나가면 또 다른 지금이 찾아옵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을 부르고 상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쉬지 않고 기도함입니다. 계속해서 오는 모든 지금에 하나님을 부르며 하나님을 상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 발생하는 일이 시간의 덩어리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시간은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한계 안에서는 초 단위로 움직입니다. 1초가 60개 모이면 1분이고, 1분이 60개 모이면 1시간이 됩니다. 초 단위든 분 단위든 시간의 덩어리를 이룹니다. 그러나 선민에게 시간은 덩어리일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소제의 의미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소제는 밀가루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가루가 가장 잘게 쪼개진 부스러기라는 점에서 선민에게 시간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해 어린 양과 함께 죽고 세상을 탈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께로 가서 하나님을 만나면 지금 내게 할당하시는 인생의 시간이 있습니다. 이러한 인생의 시간은 지금 주어지는 것이기에 내 의식 속에서 시간이라는 덩어리로 뭉쳐질 수 없습니다.
뭉쳐진 시간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군대에 간 남자 친구를 기다리는 여자가 있습니다. ‘애인이 제대할 때까지 한 달을 더 기다려야 한다.’라는 의식을 갖고 있는 한 달이라는 기간은 뭉쳐진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마음은 수직으로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혹은 ‘3년 동안 1억을 벌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며 매일 돈을 모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제 3년이라는 기간 동안 이 세상에서 수평적 시간의 흐름에 마음이 붙들리게 됩니다. 마음이 지금 수직으로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을 만날 수는 없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라는 말씀이 뜻하는 대로 지금 하나님을 만나서 상대하려면 내 의식 속에서는 하나님이 할당해 주시는 내 생애의 모든 시간은 초 단위로 가루가 되어야만 합니다. 하루, 한 주, 한 달, 일 년처럼 뭉쳐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가루로 제사를 드리는 소제의 의미입니다. 상번제를 통하여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하여 어린 양과 나를 동일시합니다. 이러한 삶에 하나님이 할당하시는 시간은 덩어리로 뭉쳐지는 것이 아니라 가루로 유지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시간을 특정 단위로 묶을 수 없어서 가루가 되었다면 다음 단계가 존재합니다. 소제는 곡식의 가루에 감람유를 섞어서 반죽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화덕에 굽든, 번철에 부치든, 삶든지 하여 제사를 드립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을 만나느라 어린 양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럴 때 내 의식 속에서는 시간이 뭉쳐지지 않고 가루로 흩어집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밀가루처럼 된 내 생애의 시간을 반죽으로 만드십니다. 한 시간, 하루, 한 주, 일 년, 십 년, 평생을 하나님이 내게 할당하신 모든 시간을 필요와 뜻과 계획을 따라 반죽을 만들듯이 뭉쳐서 이루어 나가십니다.
정리해 봅니다. 내 의식 속에서 시간은 가루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내가 언제까지 무엇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루가 되지 못한 상태입니다. 수평적 시간의 흐름 속에 마음이 휩쓸린 상태이기에 하늘로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듯이 눈에 보이는 대상에 대해서만 죽는 것이 아니라 내 의식은 시간의 흐름에 대해서도 죽어야 합니다. 소제가 번제와 함께 드려진 상징적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시간의 흐름에 대해 죽는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이 지금으로 쪼개지는 것입니다. ‘내가 앞으로 몇 년간은 이렇게 해야겠다.’라는 생각으로 시간이 특정 단위로 묶인다면 절대로 마음이 세상을 떠날 수 없습니다. 꼭 몇 년의 계획이 아니더라도 ‘오늘 하루는 이렇게 해야겠다.’라는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어떻게 하든지 지금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선민의 생명이자 존재 이유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미룰 이유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지금 하나님을 만나야 하므로 시간은 가루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가루가 된 시간을 내려다보시면서 반죽을 하시듯이 단위로 묶으셔서 뜻하고 계획하신 바를 이루어 가십니다. 하루가 필요한 일이라면 하루 단위로 묶어서 계획을 이루실 것이고, 몇 년이 필요한 일이라면 년 단위로 묶어서 계획을 이루실 것입니다. 내 속에서는 가루가 되어버린 시간을 하나님께서는 밀가루로 반죽을 만들듯이 뭉쳐서 뜻과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것이 바로 상번제와 함께 드리는 소제의 의미입니다.
한편 전제는 이러한 하나님의 계획들이 실제로 어떻게 구체적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보여주십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하실 일은 우리가 간섭하지 않아도 그대로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내 주변의 일들, 내가 상관할 바 없는 상황들, 내가 자발성을 띨 필요가 없는 일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이루어 가십니다. 그러나 내 생각과 감정과 의지가 있고 육체로 말과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나는 지정의와 육체를 통해 삶을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전제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전제는 번제물에 독주나 포도주를 붓는 제사입니다. 지금 하나님을 만나라는 번제의 취지와 연결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을 만날 때 시간은 내 의식 속에서 가루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시간을 반죽처럼 뭉친 뜻과 계획을 내 생각 감정 의지와 육체를 움직여서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전제의 의미에서 그 내용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번제물에 술을 붓는 것은 지금 하나님을 만나면 지정의와 육이 취하게 됨을 의미합니다. 내 지정의와 육이 하나님께 취할 때 하나님은 나를 통해 당신의 계획을 이루어 가실 수 있습니다.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육체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지정의와 육이 취함이란 내 속에서 발생하는 기운이 아니라 외부의 기운에 의해서 내 정신과 몸이 영향을 받는 상태입니다. 정신이란 생각 감정 의지를 다 포함합니다.
내가 지금 하나님을 만나려고 어린 양 상번제이신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대해 죽고 하늘로 올라갑니다. 그러면 내게 할당되는 모든 시간은 가루가 됩니다. 가루가 된 시간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다 모아서 반죽을 만들듯이 덩어리를 만드십니다. 그것은 하루일 수도 있고 주 단위 혹은 년 단위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계획들을 이루시기 위해 나의 정신인 지정의와 육을 하늘 기운에 취하게 하십니다. 나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와 육체가 하늘 기운에 취해서 움직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제에 담겨있는 의미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때 제자들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 나라의 방언으로 말했습니다. 그때가 오전 9시였기에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은 이들이 낮술에 취했다고 여겼습니다. 성령의 임재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볼 때 제자들은 자기들 속에서 발생하는 기운이 아니라 외부의 기운에 의해 장악된 상태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외부적 기운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기에 술에 취했다고 본 것입니다. 이 사건은 전제를 번제물에 붓는 이유를 잘 드러내 보여줍니다. 우리 마음이 지금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하늘로 올라가면 하나님께서는 나의 시간을 반죽처럼 덩어리를 만들고 단위를 만들어서 뜻과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그 뜻과 계획이 이루어질 때 내 정신인 지정의와 육은 하늘 기운에 취하여 일하게 됩니다.
이러한 예가 베드로 사도에게서 나타납니다. 베드로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벌벌 떨던 사람입니다. 그랬던 베드로가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에는 산헤드린 공회에서 기탄없이 예수님을 전파합니다. 베드로는 자기 기운으로 말했던 것이 아니라 하늘 기운에 취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에 마태복음 5장 39~40절을 보면 “…네 오른 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때리는 사람에게 뺨을 들이대고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벗어주는 모습은 마치 술에 취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하신 모든 말씀은 내 속에서 나오는 기운을 가지고는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외부의 기운에 의해서 나의 정신과 육체가 장악되어야만 할 수 있습니다.
소제와 전제의 의미는 번제가 가리키는 대로 영원과 맞닿을 수 있는 유일한 틈새인 지금을 놓치지 않음으로써 충족됩니다. 주님과 함께 시간의 흐름을 빠져나가서 지금 하나님을 만나는 일이 철저하게 수행되면 될수록 하늘 기운에 취함의 정도는 강력해집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상번제를 드리는 이유는 지금 하나님과 만나야 함을 철저히 강조함에 있습니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상번제에서 어린 양이 타죽고 있음을 염두에 두라는 것입니다. 꼭 그 시간에 맞추어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하나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지금은 항상 지금입니다. 5초 뒤에도 지금이고, 1분 뒤에도 지금이고, 한 시간 뒤에도 지금입니다. 선민의 생명은 지금 하나님을 만남에 있습니다. 직장이 어떻든, 가정이 어떻든, 어떤 문제가 있든 지금 하나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 하나님을 만나면 시간은 가루가 됩니다. 내가 시간을 뭉치지 않고 가루로 만들 때 하나님께서는 내 시간을 반죽처럼 뭉쳐서 뜻과 계획대로 사용하십니다. 그리고 나의 지정의와 육을 하늘의 기운으로 취하게 만드셔서 그 뜻과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하늘 기운에 취하는 것과 세상에 중독되는 것의 차이는 명확합니다. 하늘 기운에 취하면 세상 것은 아무것도 필요 없는 자유를 표현합니다. 세상에 중독되면 자유는 없습니다. 돈에 중독되고, 건강에 중독되고, 자녀에 중독되고, 배우자에 중독됩니다. 세상 것이 없으면 안 되는 예속 상태를 드러내며 살게 될 뿐입니다. 또한 하늘 기운에 취하면 하늘 것을 사람들에게 제공하며 살아갑니다. 반면 세상에 중독되면 사람들에게 세상 것을 구걸하는 심정으로 만나며 살아가게 됩니다. 세상에 대한 모든 애착은 중독입니다. 철저히 십자가를 생활화하여 상번제의 의미를 이루어 나간다면 지금이라는 틈새를 통해 영원한 세계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지금이라는 틈새를 통해 영원의 세계로 들어가기를 반복함을 통해 하나님과의 만남을 지속하고 영원의 세계에서 머물기를 유지한다면 하늘 기운에 취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흩어진 나의 인생의 모든 시간을 모아서 뜻과 계획을 위해 반죽하시고, 하늘 기운에 취한 나를 통해 이루어 가십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6장 31절에서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고, 34절에서는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민은 내일을 생각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지금 하나님을 만나는 자들입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면 지금 어린 양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연합하여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다. 내일, 모레, 한 주, 한 달처럼 시간을 덩어리로 묶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내 시간은 밀가루처럼 가루로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가루가 된 내 시간을 반죽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만남이 철저하면 철저할수록 우리의 정신인 지정의와 육은 하늘 기운에 취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 기운에 취해서 생각하고, 하늘 기운에 취해서 감정이 움직이고, 하늘 기운에 취해서 의지가 발동할 것이며, 하늘 기운에 취해서 말하고 행동하게 될 것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 이후의 제자들과 같은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현재를 사는 자들이 아니라 지금을 사는 자들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십자가가 항상 의식에서 켜져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상태에서 지금이라는 시간의 틈새로 빠져나가 영원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삶을 통하여 소제와 전제의 의미가 온전히 이루어지는 삶이 될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