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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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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사람과 같을 바엔 차라리 죽자_태승철

by 태승철 · 25-03-15 08:40 · 378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세상 사람과 같을 바엔 차라리 죽자>의 줄거리 :

선민이라면, 교인이라면, 본의 아니게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돋보여야 합니다. 전혀 차별점이 없이 세상 사람과 같음을 선민은 너무 싫어해야 합니다. 세상 문제가 여전히 크게 느껴집니까? 여전히 세상 것이 좋습니까? 여전히 세상을 생각하고 추구합니까? 이렇다면 여러분이나 저나 모두 다 정말 창피한 줄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세상과 똑같을 바엔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이것은 제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세상 사람과 똑같은 선민이 스스로 알아서 죽어야 할 장치로 번제단을 허락하셨습니다.

 

세상 사람과 같을 바엔 차라리 죽자

 

(출애굽기 27:1~21)

 

1. 너는 조각목으로 길이가 다섯 규빗, 너비가 다섯 규빗의 제단을 만들되 네모 반듯하게 하며 높이는 삼 규빗으로 하고

2. 그 네 모퉁이 위에 뿔을 만들되 그 뿔이 그것에 이어지게 하고 그 제단을 놋으로 싸고

 

9. 너는 성막의 뜰을 만들지니 남쪽을 향하여 뜰 남쪽에 너비가 백 규빗의 세마포 휘장을 쳐서 그 한 쪽을 당하게 할지니

10. 그 기둥이 스물이며 그 받침 스물은 놋으로 하고 그 기둥의 갈고리와 가름대는 은으로 할지며

 

20. 너는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감람으로 짠 순수한 기름을 등불을 위하여 네게로 가져오게 하고 끊이지 않게 등불을 켜되

21. 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

 

 

본문은 번제단과 성막의 뜰과 등불을 관리하는 규례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각 항목에 대해 두 절씩 읽어보았습니다. 본문에서 언급되는 번제단은 솔로몬 때 지어지는 성전의 번제단보다는 매우 작습니다. 가로와 세로가 2.3m 정도이고, 높이가 1.37m 정도입니다. 성막의 뜰은 성소를 둘러싸고 남쪽과 북쪽으로 각각 45.6m 동쪽과 서쪽으로는 25.8m 정도 되는 휘장을 칩니다. 그리고 동쪽으로 9m 폭의 문을 만들고 뜰 안으로 출입할 수 있게 하고 여기에도 휘장을 칩니다. 등불 관리에 대해서는 순수한 감람유를 사용하여 일몰부터 일출까지 해가 없는 시간에 등불을 켜서 유지하게 합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지시 전체에는 세상 사람과 똑같을 바엔 차라리 죽어버리라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을 포함하여 선민은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예정하심으로 선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을 향해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다면 차라리 죽어버리라는 심정을 갖고 계십니다. 이것이 본문 전체를 아우르는 내용입니다.

 

번제단은 앞의 성막과 연결할 때 의미가 살아납니다. 성막을 덮었던 네 겹의 휘장은 완전한 차단을 의미합니다. 지성소의 법궤에는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증거판이 들어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는다는 것은 네 겹의 휘장으로 덮인 성막으로 들어가서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됨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혹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하나님을 부를 때는 그에 맞는 다짐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은 내 마음은 네 겹의 휘장으로 덮여 세상과 차단된 성막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차단된 성막에서 하는 일이란 내가 부르는 실제 하나님의 속성으로 둘러싸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적응하면서 무르익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무르익음이 무엇인지에 대해 풀어서 설명해 봅니다. 예를 들어 우리 삶에는 다양한 문제가 존재합니다. 돈 문제, 건강 문제, 직장 문제가 있을 수 있고 가정에도 배우자, 자녀, 부모, 형제자매를 비롯한 다양한 인간관계의 문제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선민이라면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아야 합니다. 이는 곧 네 겹의 휘장으로 덮여 있는 세상과 차단된 성막 안으로 들어가야 함을 의미합니다. ‘지금 내게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내 마음은 문제들이 있는 삶의 현장과는 차단되어야 한다.’라고 여겨야 합니다.

내가 마음으로 붙잡고 신경 써야 할 일이란 내가 붙잡은 이름이 가리키는 진짜 하나님께로 가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있음과 하나님의 좋음과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에 둘러싸여, 그 속성에 적응하며 무르익어 갈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들으며 마음이 하나님의 속성에 무르익어 가다 보면 마음에는 변화가 생깁니다.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이 커진 상태에서 심각하게 여겨지던 세상의 각종 문제들이 티끌처럼 사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으로 무르익음이고 이렇게 살아가는 자들이 선민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절대로 세상 문제에 둘러싸인 채 노출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들을 받아들이고, 그것들의 존재를 느끼고, 그것들을 붙잡고 씨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으면 우리의 마음은 세상과 차단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십자가 예수님이 성막으로 제공되고 계십니다. 성막이 네 겹의 휘장으로 세상과 차단되듯이, 우리의 마음은 십자가를 붙잡고 붙잡고 붙잡고 또 붙잡아서 세상과 차단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 안에 들어가게 되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의 속성으로 무르익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문제들은 하나님의 크기에 비하자면 사소할 뿐입니다. 우리가 비록 온전히 실제 하나님의 크기만큼 존재를 느끼지 못할지라도 세상 문제들은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극히 일부분이라도 실감할 수 있다면 세상 문제들은 티끌처럼 변하게 됩니다. 그 정도까지 무르익어야 합니다. 세상 문제에 휘둘리고, 세상 문제가 크게 느껴지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면 세상의 문제가 작게 여겨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살다 보면 그렇게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육체로 만나는 삶의 현장에서 나도 모르게 마음은 시시각각 세상에 노출됩니다. 그리고 마음이 세상에 노출되었다는 증거는 세상의 존재를 크게 느낌으로 나타납니다. 내가 창조주이자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부르고 있음에도 하나님의 속성에 내 마음이 무르익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노출되어서 세상으로 무르익었기에 마음에서 세상 문제의 존재감이 한없이 커지고, 하나님의 존재감은 티끌처럼 작아집니다. 또 세상 문제들이 너무나 중차대한 좋음으로 여겨져서 그것들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해결되거나 이끌려지지 않는다면 살 수 없다고 여깁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크다면 세상 문제는 사소하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사소한 문제에서는 좋음과 나쁨이 발생할 수도 없습니다. 문제를 크게 느끼기에 이로부터 내 인생의 좋음과 나쁨이 좌우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선민이 세상 문제를 크게 여긴다면 세상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그럴 때 겨울에 온실 밖 딸기가 얼어 죽듯이 선민다움이 얼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있음에 대한 존재감이 쥐꼬리만큼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좋음에 대한 소망이 세상 좋음에 밀려서 휴지 조각처럼 날아가 버립니다.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심에도 불구하고 세상에 대한 나의 주체성이 한없이 커져서 하나님의 주체성은 한없이 멀게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선민다움은 얼어 죽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번제단의 필요성이 생겨납니다. 세상으로 무르익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세상의 있음과 세상의 좋음과 세상에 대한 주체성이 활성화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는 상태에 대해 그렇게 살면 살수록 재앙이고 손해다. 행복과 평안과 기쁨과 만족이 없는 삶을 살 바엔 차라리 죽어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마치 방사능에 피폭되듯이 세상에 노출되어 살 바엔 차라리 죽어버려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제시된 장치가 번제단입니다.

예전에 식구가 많아 먹고살기 어려웠던 시절에는 어머니가 아이에게 험한 말을 많이 했습니다. 말썽부리는 아이에게 이 못난 녀석, 나가서 죽어버려라!’라는 말을 했는데 물론 실제로 나가 죽으라는 뜻이 아니라 이제 좀 달라지라는 바람이 담긴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심정이 이와 같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마음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창조주이고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른다면 세상 사람들과 다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삶의 문제를 태산처럼 크게 느낍니다. 세상의 속성이 들어와서 세상으로 무르익은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는 차라리 죽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아무렇게나 죽는 것이 아니라 번제단에서 죽어야 합니다. 이처럼 번제단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스스로 죽으라고 만드신 장치입니다.

이 세상은 방사능과도 같습니다. 우리 마음이 세상에 노출되면 방사능에 피폭되어 죽고 맙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선민일지라도 건강 문제, 돈 문제, 인간관계 문제 등의 방사능에 노출되어 피폭되면 그것들이 크게 보입니다. 그것들의 해결 여하에 따라 내 마음의 기쁨과 나쁨이 좌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럴 바엔 차라리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살면 살수록 재앙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문제 자체는 재앙이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생각이 있으시기에 이끌어가실 것입니다. 재앙은 문제를 크게 받아들이는 바로 나입니다. 문제로 인해 내 기쁨이 좌우된다고 생각하는 마음가짐이 재앙입니다. 이러한 나는 차라리 죽어버려야 합니다. 죽어야 할 곳은 번제단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가 내가 죽어야 할 번제단입니다. 구약의 번제단은 십자가 사건을 예표하는 모형으로써,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번제단의 본질적 원형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성막 뜰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말씀드렸듯이 성막의 뜰은 60개의 말뚝을 박고 남북으로 각각 45.6m 동서로는 22.8m 정도의 세마포 휘장을 두릅니다. 그리고 해가 뜨는 동쪽에는 휘장으로 문을 대신하는 출입구를 만듭니다.

이러한 성막의 뜰은 선민의 삶의 현장을 상징합니다. 삶의 영역을 가리킵니다. 선민의 삶의 영역은 삶의 범위인데 관계들로 이루어집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있고, 일과의 관계가 있고, 문제와의 관계가 있고, 사물과의 관계가 있습니다. 하얀 세마포 휘장으로 성막의 뜰을 두른다는 것은 삶의 영역이 세상과 구분되어야 함을 가리킵니다. 이 지구에는 다양한 나라와 민족이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구를 위에서 내려다본다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면 선민의 삶의 영역은 하얀 세마포로 둘러친 것처럼 세상 사람들과는 구분되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구분되지 않을 바엔 차라리 번제단에서 죽어버려야만 합니다. 번제단에서 죽고 다시 태어난 마음으로 선민다움을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시내산 언약에서 번제와 화목제가 언급되었습니다. 번제가 세상 탈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화목제는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처럼 천국 진입을 의미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같은 나는 번제단에서 죽여버리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난 마음으로 하얀 세마포를 두른 것처럼 구분되고 차별화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우리는 차단과 구분의 의미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앞서 성막을 덮었던 네 겹의 휘장은 세상과의 차단을 의미합니다. 첫 번째는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을 정교하게 수놓은 휘장, 두 번째는 염소 가죽으로 만든 휘장, 세 번째는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만든 휘장, 네 번째는 매우 질기다고 알려진 해달의 가죽으로 만든 휘장입니다. 한편 성막의 뜰을 하얀 세마포 휘장으로 두른 것은 구분을 의미합니다. 차단은 끊어냄에 의도가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 등 돌리고 간격을 벌려가면서 멀어지게 함입니다. 구분은 차별화에 있습니다. 한데 섞여 있는 중에 눈에 띄는 것입니다.

이로부터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민의 모습에 대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성막이 네 겹의 휘장으로 덮여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선민의 마음은 세상과 차단되어야 합니다. 다만 마음은 살아있기에 존재를 느껴야 하고, 좋음을 흡입해야 하고, 주체의 에너지를 발산합니다. 그런데 세상과 차단된 상태이기에 마음의 작용은 오직 하나님을 대상으로 삼습니다.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서만 반응하면서 존재를 느끼고, 좋음을 흡입하고, 나의 주체성을 하나님께 쏟아부을 때 하나님으로 무르익게 됩니다. 다만 세상과 차단된 마음과 달리 육체는 여전히 세상 속에 있습니다. 마음이 세상과 차단되어 하나님의 속성으로 무르익으면 생각과 말과 행동이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가 생겼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노출되면 겨울에 온실 밖 딸기가 얼어 죽듯이 선민 됨은 죽습니다. 하나님의 있음은 티끌처럼 느껴지고 돈 문제의 있음은 태산처럼 크게 느껴집니다. 한편 마음이 십자가로 세상에 대해 차단되면 반대의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 함께 죽고 다시 태어난 마음으로 상대할 수 있는 존재는 하나님뿐입니다. 마음은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과 주권자 되심의 속성으로 무르익으며 선민 됨은 분명해 집니다. 이제 하나님의 있음이 태산처럼 크게 느껴지고 돈 문제는 사소하게 느껴지게 됩니다. 세상으로 무르익은 마음으로 사는 사람과 하나님으로 무르익은 마음으로 사는 사람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같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노출된 사람의 마음은 세상이 전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반면 세상을 차단하고 하나님의 속성으로 무르익은 사람의 말과 행동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원하십니다. 우리 삶의 영역을 가리키는 성막의 뜰을 하얀 세마포로 휘장을 두르게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러한 구분됨이 없으면 선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선민이라면 세상 사람들과 구분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 노출되어서 세상 사람과 똑같이 문제가 커 보이고,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기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 주체성을 투입하는 상태라면 차라리 번제단에서 죽어버려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번제단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세상에 대한 죽음입니다. 성막을 덮은 네 겹의 휘장이 의미하는 대로 세상에 대한 차단이며, 또한 세상에 노출되어서 하나님의 선민다움이 얼어 죽은 나를 죽이기 위한 장치입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을 바엔 반드시 내가 나를 죽여야 합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이 문제가 크게 여겨지고, 세상 사람과 똑같이 세상에서 좋은 것을 원하고, 세상 사람과 똑같이 세상에서 잘살아 보겠다고 주체성을 투입하고, 세상 사람과 똑같이 지금보다 더 나은 미래를 향하고 있다면 차라리 죽어버려야 합니다. 그러한 삶은 재앙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진정한 재앙은 자연재해나 사건 사고가 아닙니다. 세상에 노출된 마음으로 사는 것이 재앙입니다. 그렇게 살 바엔 차라리 죽어버려야 합니다. 그러한 나를 살려두면 안 됩니다.

 

한편 등불 관리에 대한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에 노출된 마음으로 사는 자들과 달라야 한다. 세상에 차단된 마음으로 나의 속성으로 무르익은 상태가 되어라. 그러면 너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빛을 발하는 등대가 된다. 너희의 몸은 등불의 심지가 되어야 하고, 너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등불의 빛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불붙은 떨기나무가 타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떨기나무가 타지 않았던 이유는 그 불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기운으로 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늘의 기운으로 타오르는 불이 되어야 합니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등불이 필요 없습니다. 성막의 입구를 통해 성소 안으로 빛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해가 지면 등불을 켭니다. 그리고 등불은 다시 해가 뜰 때까지 유지합니다. 21절을 보면 아론과 그의 아들들로 회막 안 증거궤 앞 휘장 밖에서 저녁부터 아침까지 항상 여호와 앞에 그 등불을 보살피게 하라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대대로 지킬 규례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등불의 의미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등불의 의미는 앞서 언급된 번제단과 성막의 뜰로부터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번제단은 세상과 같을 바엔 죽어버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선민이라면 마음이 세상에 노출된 사람들과 같아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본의 아니게 세상에서 돋보여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돋보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돋보여야 합니다. 여러분이 직장에 출근하면 하나님께서는 직장을 내려다보십니다. 그때 여러분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동료들과 같을 수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한다면 등불이 꺼진 것입니다.

이 등불이 계속 켜져 있으려면 순수한 감람유가 공급되어야 합니다. 감람유는 하나님 아버지의 생각과 뜻과 계획입니다. 내 마음이 세상과 차단되어서 성막이신 예수님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렇게 하늘에 올라가 하나님만을 상대할 수 있는 상태가 유지될 때 하늘의 기운이 내려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계획이 감람유처럼 우리 육체의 지정의(知情意)의 기능으로 내려옵니다. 감람유가 공급될 때 등불이 유지되듯이, 하나님의 생각과 뜻과 계획이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의 불꽃을 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등불을 유지함이란 이것이 지속되어야 함을 가리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선민에게 원하시는 바입니다.

 

우리는 앞서 성막의 휘장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았고, 오늘은 번제단과 하얀 세마포를 두른 성막의 뜰과 등불의 관리에 대한 말씀의 의미를 살펴보았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개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서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는 이야기가 성막으로부터 번제단과 성막의 뜰을 두르는 휘장과 등불 관리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세상과 같을 바엔 차라리 죽어버리자라는 우리의 결심을 실행하는 장소입니다. 선민이라면 세상 사람들과는 달라야 합니다. 삶의 문제를 티끌처럼 여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나라 문제 개인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시국을 바라보면서 진보나 보수의 편을 드는 마음이 있다면 차라리 죽어버려야 합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진보냐 보수냐가 아닙니다. 우리가 선민이라면 마음은 세상과 차단되어야 합니다. 어느 한쪽을 편들고 소속되기를 바란다면 하나님이 계신 천국에 소속될 수는 없습니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죽어버려야만 합니다. 돈 문제가 여전히 크게 보이고, 건강 문제가 여전히 크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상태로 살 바에는 나가 죽으라는 옛날 어머니들 말마따나 죽어버려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을 실제 생활에서 적용할 수 없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십자가 생활화는 나사가 풀리듯이 느슨해집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번제단을 제시하신 이유, 성막 뜰을 제시하신 이유, 등불 관리를 제시하신 이유를 분명히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을 바엔 차라리 죽어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선민이 죽을 장소는 번제단입니다. 우리의 번제단은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난 마음으로 삶의 현장에 들어가면 반드시 세상 사람들과 차별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생각과 말과 행동은 빛을 내는 등불이 됩니다.

오늘도 내 마음을 돌아보며 점검하시기를 바랍니다. 세상 사람과 똑같을 바엔 아버지의 말씀을 받들어서 주님의 십자가 번제단에서 차라리 죽어버립시다. 그리고 세상과 차단된 마음으로 다시 태어나서 하나님의 속성으로 무르익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죽어버리라 하시니 이처럼 감사한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세상 방사능에 피폭되어 좀비가 된 상태로 살면 살수록 나 자신에게 재앙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 사람과 똑같을 바엔 차라리 살지 말고 지금 당장 우리의 번제단인 주님의 십자가에서 죽어버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