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books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출장안마,출장마사지,바나나출장안마이미지출장안마출장마사지

굳어진 삶의 판도 매일 백지화 하기_태승철

by 태승철 · 25-03-06 08:58 · 454

 

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굳어진 삶의 판도 매일 백지화하기>의 줄거리 :

이미 굳어버린 삶의 조건 상황 형국 판도 처지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굳어진 삶의 판도에 순응합니까? 저항합니까? 저항하다 이제는 길들어져서 순응합니까? 할 수 없어서라도 순응하며 살다가도 때때로 한탄이 나오고 또 다시 저항하게 됩니까? 나는 지금 보이는 대로, 주어진 대로 살다가 끝날 수밖에 없는 존재라고 여깁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굳어진 판도와 조건과 형세로 꽉 채워진 내 삶을 백지로 만들어 하나님의 계획 앞에 내놓을 수 있습니다.

 

굳어진 삶의 판도 매일 백지화하기

 

(출애굽기 23:20~33)

 

20.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를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21. 너희는 삼가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

22. 네가 그의 목소리를 잘 청종하고 내 모든 말대로 행하면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지라

23. 내 사자가 네 앞서 가서 너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에게로 인도하고 나는 그들을 끊으리니

24. 너는 그들의 신을 경배하지 말며 섬기지 말며 그들의 행위를 본받지 말고 그것들을 다 깨뜨리며 그들의 주상을 부수고

25.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26.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

 

 

이미 너무나 견고하게 굳어져 버린 원치 않는 삶의 조건, 상황, 형국, 판도, 처지에 둘러싸여 순응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날마다 저항하고 계십니까? 날마다 저항하다 지쳐 어쩔 수 없어서 순응하고 계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순응하며 살다가도 때때로 한탄이 솟아 나옵니다. 우리는 지금 놓인 조건과 상황대로 살다가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이제 우리는 압니다. 이제까지 어떻게 살았든지 앞으로의 여생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했던 과거 삶의 결과로써 지금 내게 주어져 있는 판도가 너무 견고해 보입니다. 그렇기에 정말로 과거의 죄악 된 삶의 결과로 주어진 판도가 뒤집어지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지의 삶이 내게서 이루어질 수 있을까?’라는 염려가 생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활화함이란 이처럼 너무나 견고하고 딱딱하게 굳어진 삶의 판도를 완전히 허물고 백지화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부터 이루시려는 계획 앞에서 내가 백지화되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판도가 아무리 굳어진 것처럼 보일지라도 십자가를 생활화할 때 하나님의 계획은 백지 위에서 그려질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에는 이 세상 어디를 가도 찾을 수 없고 누구를 만나도 들을 수 없는 지혜와 진리의 신비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20절을 보면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를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라고 하셨습니다. 불쑥 이러한 말씀이 튀어나온 것이 다소 이상하게 느껴집니다. 23절을 보면 내 사자가 네 앞서 가서 너를 아모리 사람과 헷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에게로 인도하고 나는 그들을 끊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사자를 앞서 보내어 하나님이 예비한 곳이란 가나안 족속들이 살고 있는 땅입니다. 사자가 너희를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면 하나님께서 그 가나안 족속들을 끊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담겨있는 논리의 구조를 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21~22절을 보면 너희는 삼가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 / 네가 그의 목소리를 잘 청종하고 내 모든 말대로 행하면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지라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사자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은 허물은 용서받지 못하고 구원에서 제외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자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따른다면 그곳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사자의 역할을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사자의 역할은 계속해서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획을 시작하실 수 있는 곳까지만 이끌어 가십니다. 이는 곧 사자의 말을 청종하지 않아서 사자가 이끄는 곳에 도달하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갖고 계신 계획을 이루실 수가 없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계획과는 무관한 삶을 살다가 결국 구원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사자는 하나님의 계획이 시작될 수 있는 지점까지 이끌어 가십니다. 그 지점까지 가야 하나님의 계획은 이루어질 수 있기에 사자의 목소리를 잘 청종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사자는 누구를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주석을 보면 사자에 대해 모세 자신을 가리킨다, 다른 선지자를 가리킨다, 막연하게 어떤 천사를 가리킨다는 등의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그런데 21절을 보면 너희는 삼가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의 허물을 용서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사자는 우리가 반드시 목소리를 청종해야 할 분입니다. 그리고 사자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으면 용서받지 못할 허물이 됩니다. 또한 사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분입니다.

여기서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는 말씀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름과 실제 사이에는 거리가 존재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붙잡고 하나님께로 가야만 합니다. 그런데 사자에 대해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사자를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의식될 때 곧바로 간격 없이 하나님이 그곳에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돈 10억이라는 이름을 붙잡은 사람이 있습니다. 실제 10억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몇 조를 가진 재벌들에게 있어서 10억은 당장 접근할 수 있는 돈입니다. 10억이라는 이름에 해당하는 실제 대상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하나님이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니라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인격적 존재는 예수님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개인적으로 일대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구약 시대이든 신약 시대이든 예수님 안에 마음이 들어가야만 합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반복하여 증거되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는 마음이 반드시 예수님 안에 들어가는 믿음의 활동을 통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는 독생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따라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싶습니다.’라는 마음의 고백과 동시에 하나님을 부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연합함의 고백이 없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이름 부르기가 아님을 성경은 반복하여 가르쳐 줍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사자를 예수님으로 치환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서가시며 선민들을 예비한 곳으로 이끄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곳에서부터 계획하신 대로 가나안 족속들을 무찌르신다는 것입니다. 이제 사자가 누구인지와 사자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논리적으로 이해가 되셨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이러한 말씀이 등장했고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을 무찌르신다는 과정에는 어떤 의미가 들어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깁니다.

 

사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으면 예수님의 이끌림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선민들을 위한 계획을 시작하실 수도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목소리는 언제나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식민지하에서 해방되어 통일된 이스라엘을 건축하시는 왕의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하늘로 데리고 가십니다. 우리는 이 목소리에 청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이 땅에서 하나님이 계획하신 바는 하나도 시작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시작될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이고 구원과도 관계가 없습니다.

사자이신 예수님께서 하시는 일이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족속들이 있는 곳까지 이끄시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공간적으로 가나안 땅까지 이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먼저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족속들을 무찌르시겠다는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이러한 계획이 시작되기 위해서는 선민이 그 지점에 갈 수 있어야 합니다. 사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선민을 그 지점으로 이끌어 가시는 분이십니다. 이로부터 선민이 사자의 음성을 청종해야 할 필요성이 생깁니다. 선민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입니다. 그렇기에 사자는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나님께로 선민의 마음을 이끌어 가십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선민에게 사자의 목소리를 청종할 것을 계속해서 요구하면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요청이 이어집니다. 선민의 마음이 하늘에 가서 하나님을 마주하고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할 준비가 되면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들을 무찌르시려는 계획도 시작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자가 이스라엘 백성을 가나안 족속들 앞으로 이끌어간다는 말씀에 담긴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 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 어떤 일을 하시려고 3년 안에 100억을 몰아주시려는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시작되는 시점은 여러분이 사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청종해서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의 길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마주하게 되고 그 상태를 유지할 때입니다. 계속해서 예수님의 목소리를 잊지 않고 십자가를 기억하면서 세상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칠 때, 100억을 몰아주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작동되고 시작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의 특별한 상황과 관련하여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의 영도를 따라 출애굽 한 이후에 시내산에 이르러 언약을 맺게 됩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과 결혼 서약을 하는 중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염려와 불안과 걱정이 있습니다.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가야 하는데 그곳에는 이미 원주민들이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소식과 정보들은 오가기에 이스라엘 또한 가나안 땅의 사정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430년 동안 애굽에 머무르며 노예 생활을 하는 동안 가나안 족속들은 수백 년 동안 체제를 완비한 선진 문명 국가였습니다. 그에 비해 이스라엘은 오합지졸입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은 우리가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이르렀을 때 과연 그들을 무찌를 수 있겠는가?’라고 근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 살펴보겠습니다만 하나님의 약속에도 불구하고 결국 이 근심이 문제가 됩니다. 열두 명의 정탐꾼을 보냈을 때 열 명은 가나안 족속들이 막강하여 정복할 수 없다는 보고를 하고,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믿음의 보고를 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출애굽 당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20세 이상의 모든 성인이 광야에서 다 죽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의 불안감을 아셨던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을 향한 진군을 시작하기도 전에 거듭하여 내가 알아서 가나안 족속을 끊어내겠다.”라는 약속을 계속 주십니다. 여기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결의와 약속은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닙니다. 시대를 막론하고 선민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결의이자 약속입니다.

가나안 족속들은 요지부동으로 보이는 견고한 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선민을 향한 계획에 아무런 방해 요소가 될 수 없습니다. 백지와도 같은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가나안 여섯 족속 혹은 일곱 족속으로 언급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이방 문화를 토대로 완벽한 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살아가는 상황은 굳어져 버린 판도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선민을 향한 계획 앞에서는 백지와 다름없습니다. 그렇기에 염려하지 말라는 뜻에서 본문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22절을 보면 네가 그의 목소리를 잘 청종하고 내 모든 말대로 행하면 내가 네 원수에게 원수가 되고 네 대적에게 대적이 될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시고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원수나 대적이 된다면 그들의 형세가 아무리 견고하고 굳건해 보일지라도 백지와 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요셉의 일화를 떠올려 봅니다. 요셉은 히브리 유랑민의 열한 번째 아들입니다. 이러한 요셉이 초강대국 애굽의 총리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히브리 유랑민의 아들과 지금의 미국과 같은 초강대국 애굽의 총리라는 자리 사이에는 뛰어넘을 수 없는 인간 조직과 판도와 형국이 존재합니다. 따라서 일개 히브리 유랑민의 아들이 총리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렇게 굳어진 판도를 백지처럼 여기시며 요셉의 인생을 그려가셨습니다. 개인의 인생뿐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홍해조차 백지와도 같았기에 가나안 족속들 또한 예외일 수 없습니다. 가나안 족속들의 국가 체제가 아무리 견고하더라도 홍해보다 견고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끝내 하나님의 신비한 약속의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일입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삶의 조건이나 판도가 너무나 견고하게 여겨질 때가 있습니다. 사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청종할 때 내 마음에 나타나는 이상한 증상이 있습니다. 그동안 나를 가두고 있던 삶의 모든 판도와 형국이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계획 앞에 백지와도 같은 상태임이 믿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사자의 목소리에 청종할 때 가나안 족속들 앞으로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공간적인 의미에서 가나안 땅에 접근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가나안 족속들을 끊어내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시작 버튼을 누른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자의 목소리에 청종할 때 이르게 되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곳이란 바로 하나님 앞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자리입니다. 사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청종할 때 내 마음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아들의 자리에 이르게 됩니다. 그럴 때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버튼은 눌러집니다. 지금 내 삶을 이루고 있는 판국과 형세는 하나님께는 백지와도 같습니다.

여기서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나는 그동안 수년에 걸쳐서 십자가 생활화를 해왔다.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님과 함께 세상에 대해 죽고,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을 직면하여 하나님과 친해지고 하나님을 더 많이 벌기 위해 기도했다. 늘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고, 내 마음이 하늘에 올라갔음을 예수님을 통해 의식하고 하나님과 관계해 왔다. 그런데 왜 아직도 내 삶의 판도가 뒤집히거나 형세가 바뀐다는 것을 경험할 수 없는가?’라고 질문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고 계십니다. 가나안 땅의 판도를 바꾸시는 것과 같이 지금도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것도 최선으로 역사하고 계시는데, 느끼지를 못하는 것뿐입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갔는데도 어제와 똑같은 오늘이 진행되고 있다면 실은 엄청난 변화입니다. 지난 설교에서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염려를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내 마음은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마주하고 있는 상태를 놓치지 않고, 점점 더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발버둥 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하나님은 이 땅에 대한 계획을 이루어 가시기를 염려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왜 나는 삶의 판도가 뒤집히거나 형세가 바뀐다는 것을 경험할 수 없을까?’라는 질문을 하는 것 자체가 아직도 세상을 향한 애착과 미련이 남았다는 증거입니다. ‘내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땅을 내려다보며 하나님을 향하여 내가 지금 마음이 떠난 내 삶을 보고 있으니 기가 막힌 판도의 뒤집힘과 변화를 이루어 주세요.’라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생각이 든다면 실제로 마음이 하늘에 올라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십자가를 생활화한다고 하면서도 아직도 세상의 판도가 바뀌기를 기대하는구나.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죽은 것도 아니고 하늘로 올라간 것도 아니다.’라고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여러분의 십자가 생활화가 온전치 못하다고 해서 그 모든 시도를 무효로 보시는 것은 아닙니다. 어제의 판도와 오늘의 판도가 똑같아 보이는 이유는 하나님의 강렬한 바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어제의 판도와 오늘의 판도가 똑같아 보여도 나를 향해 빨리 하늘로 올라오라!’는 메시지는 더욱 강해지고 있습니다. 마음이 정말로 하늘로 올라갔다면 이 세상의 판도가 유지되든 뒤집히든 상관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악 소리가 나올 정도로 좋아지든 나빠지든 상관이 없습니다. 나의 관심은 100% 하나님을 향해 쏟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갔다는 의미입니다. 사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원하시며 우리를 이끌어가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판도의 변화를 기다립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을 25~26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너희의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너희 중에서 병을 제하리니 / 네 나라에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을 것이라 내가 너의 날 수를 채우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사자의 목소리를 청종해서 내가 가나안 땅과 너희를 향해 갖고 있는 계획의 시작 버튼을 누르게 되면, 양식과 물에 복을 내리고 낙태하는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자가 없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풍요와 다산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굳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신 이유는 모든 사람이 풍요와 다산을 마음에 꿈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힘으로 풍요와 다산을 가질 수 있겠다고 여기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풍요와 다산을 마음에서 지워버리라는 것에 의도가 있습니다. ‘너희 삶에 관계된 모든 문제는 내가 관심을 가질 것이니 너희는 관심을 끊어라. 너희는 나에게만 관심을 가져라.’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하면서도 하나님의 일을 내 일로 바꾸려는 태도를 보일 때가 많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내 일이 잘 됐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을 유지해 나가는 것입니다. 정말로 세상에 대한 관심이 죽었다고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어제와 오늘의 판도가 똑같다고 느껴진다면 그것이 나의 죄성에 대한 최선입니다. 죄성이 완전하게 유지되고 있는 상태에서 눈에 보이는 판도만 바뀐다면 그야말로 큰일입니다.

그렇기에 출애굽 후 정탐 사건까지는 2년이 걸리지만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40년간 광야에서 배회하게 됩니다. 만약 가나안 진입이 출애굽 이후 곧바로 시작되었다면 아무도 사자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았을 것이고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광야 생활 40년은 훈련의 시간입니다. 선민이 하나님 계획의 시작 버튼을 누르는 자들이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내 계획의 시작 버튼은 너희 마음이 하늘로 올라오는 것이다. 내가 예비한 아들의 자리에서 나를 보아라.’라고 말씀하고 계신 셈입니다. 우리는 독생자 예수님이 그러하셨던 것처럼 오직 아버지 한 분께만 마음을 다 쏟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가지신 이 땅에 대한 계획의 시작 버튼은 눌러질 수 있습니다. 십자가 죽음은 비유가 아닙니다. 정말로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완전히 관심이 끊어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세상을 향한 내 말과 행동도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뜻하신 대로 나올 수 있습니다.

세상에 대한 관심 끊기는 결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서는 완전히 관심을 끊고 사는 경우가 있습니다. 요즘 나라가 매우 복잡합니다. 대부분의 기독교 종교인들 또한 정치판에 많은 관심을 둡니다. 그러나 전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정치에 아예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보이지만 어떤 사람은 완전히 다른 관심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세상 관심 끊고 하나님께만 관심을 돌리자는 말만 불가능하게 느낄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이 하늘에 별처럼 많지만, 우리가 관심을 갖는 일은 사실 몇 가지 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께 관심을 돌리기 위해서는 세상에 대한 관심에 죽어야 한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만은 불가능하고 비현실적인 것이라고 느끼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심지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내 삶의 시시콜콜한 모든 일에 관심을 갖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내 삶에 관심을 가지시고 원하시고 계획하신 대로 이끄시기 위해서는 조건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에 청종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다고 여기시는 창조적 계획의 단추를 누르는 일은 사자이신 예수님을 따름으로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대한 관심을 죽여라. 하나님에 대해서만 관심을 쏟아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주식에 관심을 쏟는 사람은 연예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신경 쓰지 않습니다. 게임에 관심을 쏟는 젊은이는 공부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만 관심을 가질 때 세상에 대한 관심은 없어집니다. 그럴 때 땅에서는 하나님의 계획의 버튼이 눌러집니다. 우리는 사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십자가 안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관심을 계속해서 유지해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땅에서 우리의 삶을 관심하시고 이끌어가십니다. 나의 관심은 하나님께 다 쏟고 있기에 하나님이 땅에서 무슨 일을 관심하시고 이루시든지 내가 관심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땅의 일은 하나님의 일이기에 나는 무관심하면 됩니다.

 

사자이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관심을 가지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이루실 일에 무관심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무관심해야 성령께서 오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말하고 행동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이 인격화되신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땅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 성령은 오실 수 없습니다. 점선을 따라 실선을 그리듯이 성령이 오셔야 하늘에서 이루신 뜻이 이루어져 나갈 수 있습니다.

사자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세상을 향한 마음의 관심을 죽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 올라가 아버지를 마주함을 유지하는 데 우리의 총력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이 땅을 향한 하나님의 관심이 인격화되신 존재인 성령께서 오셔서, 내 몸을 당신의 몸으로 입으시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실 것입니다. 가나안 족속들과 같은 과제에 대해서도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끊어내시면서 삶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럴 때도 우리의 관심은 이 땅의 일이 아닙니다. 날마다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이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써 하나님께 관심을 집중한다는 것은 굳어진 삶의 판도와 형국과 조건을 매일 백지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백지 위에 마음껏 계획을 이루어 가실 수 있도록 내버려두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사자이신 예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여 굳어진 삶의 판도와 조건과 형세가 매일 백지화되게 해주시옵소서. 전지전능하신 아버지의 관심이 내 삶에 반영되고 표현될 수 있도록 늘 주님의 십자가를 잊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