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ww.everyday01.com - 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일상적 보편 범죄 중에 살인 계열>의 줄거리 :
제6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 언급된 각각의 범죄들은 단지 하나의 범죄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각각의 범죄는 하나의 계열을 이룹니다. 범죄 군 혹은 범죄의 족보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즉 살인 계열, 간음 계열, 도둑질 계열, 거짓말 계열, 탐심 계열입니다. 그래서 꼭 살인을 저지르지 않아도 거의 모든 사람은 살인 계열의 범죄를 일상적으로 저지르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은 나머지 간음 계열 등등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계열을 모르면 십계명 후반부의 다섯 계명을 정해주신 하나님의 의도와 취지를 온전히 간과하게 됩니다.
일상적 보편 범죄 중에 살인 계열
(출애굽기 20:13)
13. 살인하지 말라
제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앞서 하나님과 우리의 연합을 촉구하는 네 계명을 살펴보았고, 이러한 네 계명을 잘 지켰을 때 육체로 접하는 첫 번째 대상인 부모에 대한 공경이 나타남을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부모와 관계하는 방식을 습득하면 육체로 만나는 다른 대상에 대해서도 대처하는 방식을 알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공경입니다. 그리고 이로부터 공경이 이루어질 때 무난하게 지킬 수 있으되 공경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지킬 수 없는 다섯 가지 계명이 뒤따라 나옵니다. 이 계명 중에 첫 번째가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일상적 보편 범죄 중에 살인 계열”이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계열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서로 관련이 있거나 유사한 점이 있어서 한 갈래로 분류되는 계통’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으로부터 시작되는 다섯 가지 계명은 단순히 그 행위를 금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금지하신 행위가 대표하는 계열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살인은 살인이라는 하나의 범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살인으로 대표되는 계열에 속하는 범죄들을 통칭하는 표현입니다. 살인과 유사한 점이 있는 범죄들의 군(群)이나 족보를 대표하는 범죄로써 살인을 말씀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삶의 현장에서 보편적으로 저지르는 범죄 중에는 살인 그 자체는 아니더라도 살인 계열에 속하는 행위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17~18절에서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 준수는 예수님을 믿을 때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현상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었다면 구약에서 제시되고 있는 계명이나 율법의 일점일획도 내게서 떨어짐 없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것은 윤리적 완전성에 대한 요구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음이란 그리스도 연쇄 과정 속 예수님과 내 마음의 연합입니다. 이로부터 이 세상에서 다른 신을 좋아하고 섬기느라 얼룩졌던 주홍 같은 죄악이 십자가에서 씻김 받고, 하얀 마음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이것이 예수님 믿음의 효과입니다.
하나님을 직면하게 되면 마음은 어쩔 수 없어서라도 있음의 존재를 느끼고, 날이 갈수록 하나님의 존재감은 커지고 충만해집니다. 또한 마음은 하나님 크기로 비어있기에 좋음을 추구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직면하면 날이 갈수록 마음에서 하나님에 대한 열망이 점점 더 커집니다. 이러한 상태가 될 때 앞서 제시된 하나님에 대한 제1계명으로부터 제4계명까지의 계명은 지켜집니다. 그리고 제5계명인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대로 공경함이 나타납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습니다만 공경이란 내 멋대로 부모를 치켜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공경이란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가운데 하나님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를 공경함으로써 나머지 다섯 계명도 다 지킬 수 있게 됩니다.
이처럼 십계명의 준수는 결국 예수님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못하는 현상이 어떻게 나타나게 될까요? 구약에서는 어린양 상번제의 생활화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럴 때 마음은 하나님께로 올라가지 않고 이 땅에서 뒹굴게 됩니다. 제6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의 다섯 계명은 이러한 상황에서 벌어지는 범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천하 만물보다 값집니다. 이러한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이 땅에 남아서 뒹굴고 있는 가운데 발생하는 모든 행동은 범죄입니다. 이렇게 저질러지는 범죄는 크게 다섯 가지 계열로 나누어집니다. 마음이 이 땅에 남은 상태란 다른 신을 섬기며 흔적과 자국과 얼룩으로 더러움이 더해가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말이나 행동은 다 범죄입니다. 십계명에서는 그러한 범죄를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거, 탐심의 다섯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다만 이것은 각 범죄가 대표하는 계열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이 땅에 머물면서 하는 모든 일이 범죄이기에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거, 탐심을 하지 않았다고 해서 범죄와 무관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한편 이 다섯 가지 범죄는 마음이 이 땅에 뒹굴면서 노예처럼 값어치를 전락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증상들의 대표입니다. 하나님을 직면해야 하는 소중한 마음으로 배설물처럼 여겨야 할 다른 신들을 좋아하며 말하고 행동할 때 나타나는 증상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제6계명부터 제10계명까지 다섯 가지 계열로 나누신 것입니다. 제6계명인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은 마음이 땅에서 뒹구는 동안 저지르게 되는 범죄들 중에서 살인의 계열에 속하는 범죄를 저지르지 말라는 요청입니다. 제7계명인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간음이라는 한 가지 행위를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간음과 유사점이 있어서 간음 계열로 분류되는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범죄들을 저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도둑질도 도둑질이라는 행위 하나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도둑질 계열이 있다는 것입니다. 거짓 증거도 탐심도 마찬가지입니다.
마태복음 5장 19절을 보면 다소 무서운 내용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설교자의 입장에서는 이 말씀이 무섭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십계명에 대한 설교를 전하기 전까지의 생각과 한 구절 한 구절 기도하면서 묵상하는 가운데 전하는 지금은 십계명을 그렇게 간단하게 볼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히 살인을 했냐 안 했냐, 간음을 했냐 안 했냐, 도둑질을 했냐 안 했냐, 거짓 증거를 했냐 안 했냐는 식으로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의 비중과 무게가 그렇게 간단하게 처리되고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마음을 내리누릅니다. 그렇기에 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하나하나 면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6계명인 “살인하지 말라”라는 짧은 말씀에 대해서도 시간이 부족할 지경입니다.
마태복음 5장 20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를 언급하시며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나아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우리가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행하는 윤리적인 차원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알다시피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율법에 맞추어진 행위를 사명감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도덕적 윤리적 차원에서 흠이 없습니다. 이들보다 못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은 윤리적인 완전성을 강조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의 진정성과 완전성을 강조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제대로 믿어서 예수님과 연합했다면 반드시 하늘로 올라가 하얀 마음으로 하나님을 직면하게 됩니다. 하나님께만 마음을 몰두하고 있다면 이 땅에서는 육체를 통해 율법과 계명이 지켜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계명을 행하라고 강요하시는 것이 아니라 율법과 계명이 지켜질 수 있도록 제대로 된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행위가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을수록 행위를 고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믿음을 고칠 수 있어야 하고, 믿음이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말씀드렸듯이 우리는 계열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살인이라는 행위 하나만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삶의 현장에서 거의 모든 사람이 일상적이고 보편적으로 저지르는 범죄들 중에 살인 계열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먼저 살인이 발생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마음이 땅에 머물러 뒹굴고 있을 때 경험하게 되는 현상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충돌 현상이고 여기서 발생하는 대표적인 범죄가 바로 살인입니다. 말씀드렸듯이 계열을 염두에 두자면 충돌 현상에서 비롯된 모든 범죄를 살인 계열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딱히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더라도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살인 계열에 속하는 범죄를 행했다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계명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려면 예수님을 잘 믿는 수밖에 없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하여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입고,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서 하얀 마음으로 하나님을 직면하고, 하나님께 몰두해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땅에 사는 내 몸에서 살인 계열의 범죄들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땅에서 뒹굴 때 충돌이 일어나는 이유는 좋음을 추구함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본질상 채움을 위하여 좋음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좋다고 확신하는 다른 신을 섬기게 됩니다. 이로부터 좋고 나쁨에 대한 기준이 생깁니다. 이제 이 기준을 따라 살다 보면 나와 얽혀있는 주변 사람들과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충돌이 일어날 때 상대방의 있음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며 제거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살인의 발생 과정입니다. 이처럼 살인의 원인은 이 땅에서 마음이 뒹굴면서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고, 그것을 호불호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럴 때 내 좋음에 걸림이나 방해가 되는 사람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내가 호불호의 기준을 갖고 있기에 좋음 추구에 방해가 되는 타인의 있음 자체를 용납할 수 없어서 죽이게 됩니다. 타인의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는 것이 살인입니다.
한편 다른 신을 섬기는 흔적과 얼룩과 자국이 없는 하얀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있을 때는 살인은 절대 일어날 수 없습니다. 지금 내가 하얀 마음으로 만나는 하나님께서 내가 마주하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있게 하시는 중입니다. 하나님께서 내 앞에 있게 하시는 사람을 내가 없게 할 수는 없습니다. 마음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직면하지 않고 땅에서 뒹군다면 내가 기준이기에 내 앞에 있는 사람을 없애고자 합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나타나는 범죄가 살인입니다.
살인 계열 범죄의 특징은 내 마음에서 먼저 하나님을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죽일 수 있을까요? 그러나 이것은 우리 마음에서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내가 하얀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있다면 하나님이 있게 하시는 사람을 내가 없게 만들 수 없습니다. 따라서 내게 걸림돌이 되고 방해가 되는 사람의 있음을 없음으로 바꾸는 살인을 저지르려면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지금 그를 있게 하시는 하나님을 내 마음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하나님을 죽여야만 타인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이처럼 살인(殺人)은 반드시 마음에서 살신(殺神)을 전제로 합니다. 내 호불호의 기준에 어긋나서 마음에 맞지 않고 방해가 된다고 느끼는 사람을 죽이려면, 먼저 그를 있게 하신 하나님을 내 마음에서 죽여야만 합니다.
모든 살인이 살신을 전제로 함을 염두에 두자면 살신의 계열에 속하는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범죄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타인의 육체를 죽이는 살인이 아닐지라도 내 마음 안에서는 얼마든지 살인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의 있음에 너무나 거부감이 생겨서 밉고, 싫고, 무시하고 싶어질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일상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을 내 앞에 있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마음에서 어떤 사람에게 거부감이 들어서 밉고, 싫고, 무시하고 싶다면 이미 나는 마음에서 그를 있게 하시는 하나님을 죽인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하나님은 누가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마음과 의식에서는 하나님의 있음을 얼마든지 없애고 죽일 수 있습니다. 꼭 육체를 죽이는 일이 아니더라도 내 마음에서 어떤 사람의 있음이 없어지기를 바란다면 살인 계열의 범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앞에 있게 하신 사람이 없어지기를 바라고, 밉고, 싫고, 무시하고 싶다면 이미 내 마음은 하나님을 죽인 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과 행동은 살인 계열의 범죄들입니다.
그 사람의 있음이 싫습니다. 그 사람의 있음이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 사람의 있음이 밉습니다. 그 사람의 있음을 무시하고 싶습니다. 이러한 마음 상태에서는 공경할 수 없습니다. 사람에 대한 공경이란 사람을 대할 때 하나님 마음에 들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공경이 나타날 수 없는 이유는 그를 있게 하신 하나님을 이미 내 마음에서 죽였기 때문입니다. 살신이 일어났기 때문에 생기는 타인에 대한 미움과 무시와 거부감과 싫음은 그 자체가 살인 계열에 속하는 범죄들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5장 21절에서 “옛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십계명의 “살인하지 말라”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22절을 보면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단지 살인이라는 행위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밝히시며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라고 살인 계열의 범죄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형제란 한 어머니 배에서 나온 형제와 자매만이 아니라 나와 더불어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 화를 내는 이유는 있음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또한 ‘라가’라는 말은 속이 비어서 아무 쓸모 없는 놈이라는 뜻으로써 그 사람의 있음을 완전히 무시하는 욕입니다. ‘미련한 놈’이라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너무 싫어서 그의 있음이 너무나 싫고 미워할 때 이러한 대우를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분노가 일어날 정도로 거부감을 일으키고, 라가라 말할 정도로 속이 비어서 아무 쓸모 없는 놈이라고 무시하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고 할 정도로 싫어하는 마음이 생기면 살인 계열의 범죄를 저지르고 있음을 알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살인을 한 적이 없더라도 주위의 사람에게 거부감을 느낀 적이 있고, 그 사람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말하고 행동했고, 그 사람이 정말로 밉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그를 있게 하신 하나님을 마음에서 죽인 것이고 살인 계열의 범죄를 저지른 것입니다. 타인에 대한 거부감, 미움, 싫음, 무시는 천하보다도 값진 마음이 땅에 뒹굴게 된 결과입니다. 나의 존엄을 스스로 해치고 한 줌의 똥 덩어리밖에 안되는 이 세상의 좋음이라는 다른 신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 호불호의 기준이 생기고 충돌 현상이 생깁니다. 꼭 살인이 아니라더라도 거부감을 느끼고, 싫음을 느끼고, 미워하며, 무시하는 살인 계열의 범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우리는 사람을 공경해야 합니다. 사람에 대한 공경은 하나님에 대한 네 가지 계명이 지켜질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하얗게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하나님을 직면하는 일에 투입되어야 합니다. 천하보다 소중한 마음을 더럽힌 채로 이 땅에 뒹굴게 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살다 보면 정말로 미워하고, 거부감이 생기고, 싫어할 만하고, 무시할 만한 사람이 많습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서 내 마음에 스며들어 오게 하는 것은 바보가 하는 짓입니다.
내 마음은 천하보다도 소중한 존엄의 근거입니다. 그 존엄의 근거가 되는 마음을 그런 사람들과 접촉하게 하고 반응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붙잡아야만 합니다. 거부감이 생기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 무시하고 싶은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그 사람을 거부하고, 싫어하고, 무시하고 싶어 하는 나 자신을 죽여서 그 사람으로부터 마음을 떼 내야만 합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도 당연한 일입니다. 내 안에서 거부감이 들고, 싫어하고, 무시하고 싶을 정도의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길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그런 사람들과의 충돌 현상을 통해 나타나는 범죄적 분위기를 십자가에서 죽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타인으로 얼룩진 마음을 하얗게 만들어서 하나님께로 가야만 합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가 있는 동안에는 그들 또한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을 공경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공경이란 그 사람을 치켜세우고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가운데 하나님 마음에 드는 말과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8장 26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노라 하시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이 땅에 뒹굴면서 더럽고 찌든 상태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마음에 드셨을 리가 없습니다. 화가 나고 미워할 만하고 거부감을 느끼시고 노아 홍수 때처럼 쓸어버리시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러한 마음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같은 더러운 사람들을 마음에 스며들지 않게 하시고, 오직 마음을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다 드리셨습니다. 예수님 앞에는 마음에 들지 않는 열두 제자가 있었고, 유대인들이 있었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이들에 대해 어떤 말과 행동을 해야 할지 가르쳐 주셨고, 예수님은 그대로 말하고 행동하심으로 하나님께 기쁨을 드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람에 대한 공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저주하셨습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하나님께 들은 대로 하셨기 때문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공경이었습니다. 채찍을 들고 성전을 정화하실 때도 대제사장에 대한 공경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수많은 적대적인 행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사람들을 있게 하시는 주권자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셨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셔서 마음을 드리셨고 사람에 대해서는 공경만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마음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세상에는 거부감이 드는 사람, 싫어해도 되는 사람, 미워해도 괜찮을 사람, 무시해도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마음에 담고서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 사람들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지에 반하여 살인 계열의 범죄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내가 마음에 접해야 할 대상은 사람들이 아닌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내 앞에 거부감이 드는 사람, 싫어하기에 마땅한 사람을 두실 수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하나님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공경입니다.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에 안들고 충돌을 일으키는 그 사람을 계기로 하나님을 한 번 더 만나면 됩니다. 내가 하얀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보면 그런 충돌을 일으키는 사람이 계속해서 내 앞에 있든지, 있다가 사라지든지, 없다가 나타나든지, 관계가 얼마나 지속되든 상관없습니다. 사람과의 관계는 하나님이 타이밍을 정하셔서 알아서 이끌어 가십니다.
조금 있으면 하나님이 치우실 사람을 내가 굳이 미워하거나 거부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굳이 거부감이 들 수밖에 없는 사람을 내 앞에 두셨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깎으시고 다듬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실 수 있습니다. 내가 거부감을 느낄 사람, 내가 싫어할 만한 사람, 내가 미워할 만한 사람을 괜히 놔두시지 않습니다. 거부감이 일어난다면 얼른 감사로 바꿀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을 내 앞에 두신 은혜로운 이유가 있을 것이다.’라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 앞에 수많은 대적자를 두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에 스며들지 않게 하셨습니다.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 마음을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대적자들을 공경하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보시기에 마음에 드실 말과 행동만을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 우리에게도 일어나게 하시기 위해 주님은 십자가에서 ‘이리로 와라. 세상에서 뒹굴고 있는 너의 마음을 나와 함께 죽이자. 네 마음이 하얗게 되도록 내가 피를 흘릴 것이니 양털처럼 흰 눈처럼 하얀 마음을 회복하고 하나님께 전념해라. 하나님에 의해서 있게 된 모든 사람에 대하여 살인 계열의 죄를 짓지 말고 공경함으로 관계를 해나가며 삶을 채워라.’라고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이것이 제6계명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의도이자 취지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살인은 물론이려니와 살인 계열의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범죄로부터 이제는 온전히 자유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도 주님의 십자가를 내 심장처럼 끌어안고 살게 해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모든 살인 계열의 범죄로부터 자유로워지게 하시고 누구를 만나든지 공경함으로 내 삶의 내용들을 일관되게 채워나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