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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마음에 차곡히 하나님 쌓기 언약>의 줄거리 :
시내산 언약에서 하나님이 제안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응답합니다.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다." 그래서 언뜻 보면 계명과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언약에 충실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언약의 근본 취지는 마음에 하나님 쌓기를 약속하는 것입니다. 왜냐면 먼저 마음에 하나님을 쌓지 않으면 절대로 하나님의 지시를 지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차곡히 하나님 쌓기 언약
(출애굽기 19:1~25)
1.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을 떠난 지 삼 개월이 되던 날 그들이 시내 광야에 이르니라
2. 그들이 르비딤을 떠나 시내 광야에 이르러 그 광야에 장막을 치되 이스라엘이 거기 산 앞에 장막을 치니라
3.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말씀하시되 너는 이같이 야곱의 집에 말하고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말하라
4.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7. 모세가 내려와서 백성의 장로들을 불러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그 모든 말씀을 그들 앞에 진술하니
8.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 모세가 백성의 말을 여호와께 전하매
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빽빽한 구름 가운데서 네게 임함은 내가 너와 말하는 것을 백성들이 듣게 하며 또한 너를 영영히 믿게 하려 함이니라 모세가 백성의 말을 여호와께 아뢰었으므로
10.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며 그들에게 옷을 빨게 하고
11. 준비하게 하여 셋째 날을 기다리게 하라 이는 셋째 날에 나 여호와가 온 백성의 목전에서 시내 산에 강림할 것임이니
12. 너는 백성을 위하여 주위에 경계를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경계를 침범하지 말지니 산을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
13. 그런 자에게는 손을 대지 말고 돌로 쳐죽이거나 화살로 쏘아 죽여야 하리니 짐승이나 사람을 막론하고 살아남지 못하리라 하고 나팔을 길게 불거든 산 앞에 이를 것이니라 하라
14.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백성에게 이르러 백성을 성결하게 하니 그들이 자기 옷을 빨더라
15.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준비하여 셋째 날을 기다리고 여인을 가까이 하지 말라 하니라
본문은 시내산 언약을 맺기 위한 준비 과정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내산 언약의 내용이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 이제 저희 마음에 하나님 쌓기를 약속드리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희 마음에 하나님을 매일 차곡차곡 쌓아가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기에 앞서 전체적인 윤곽을 말씀드리자면 5~6절에서 그 내용이 잘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제사장 나라’란 온 세상 나라들 중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나라가 됨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거룩한 백성’이란 온 세상 사람들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추구함에 있어서 독보적인 민족이 되며, 삶의 방식도 하나님께서 떠맡아 주시는 특이한 민족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다만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을 잘 듣고 언약을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당사자로서 이러한 제안을 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8절에서 “백성이 일제히 응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우리가 다 행하리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것이 시내산 언약의 윤곽이자 골자입니다. 쉽게 말해 하나님은 ‘내 말을 잘 듣고 지키라’라고 말씀하셨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소유가 되고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까지 당신을 드러내시는 일에 역점을 두셨습니다. 출애굽의 열 가지 재앙과 홍해 도하의 기적이 있었고, 광야에서 먹고 마시는 문제를 해결하셨고, 오합지졸 이스라엘이 정비된 군사력을 갖춘 아말렉을 이기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하나님의 매력을 드러내시는 일에 역점을 두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지켜내며 하나님의 매력에 빠져 하나님을 좋아하는 상황이 되게 하시는 일에 주력하신 것입니다. 한편 시내산 언약은 이제 갖가지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매력이 드러난 상태에서 이스라엘이 자발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만을 따르겠다는 약속의 의미가 있습니다. 처음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님 자신에 대해 관심하며 하나님을 따르겠노라 약속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시내산 언약에 대해 우선 계명과 율법을 떠올립니다. 그 내용이 20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자세히 언급될 것입니다. 18장까지는 출애굽하여 두 달 동안 진행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리고 19장에서는 시내산에 도착하여 언약을 준비하는 장면을 보여주십니다. 20장부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이 지켜야 할 언약의 내용을 자세하게 이야기해 주십니다. 흔히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이 주시는 계명과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이 잘 지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상을 주신다는 내용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굉장히 피상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 한시도 우리의 마음을 쳐다보시기를 중단하지 않으십니다. 계명과 율법을 문자대로 행동하느냐가 아니라 내 마음의 상태를 관심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계명과 율법을 지킴이란 단순히 계명과 율법을 문자대로 외우면서 행동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린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계명과 율법을 받아들이는 마음 상태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 6장 45절에서 “선한 사람은 마음에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내나니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생각하며 말하고 행동한다는 것입니다. 시내산 계약에서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계명과 율법의 의미는 선민의 마음에 선을 쌓음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제시하신 계명과 율법은 무리 없이 지켜지리라는 것입니다.
앞으로 계명과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이러한 말씀에 대해 우리는 그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계명과 율법이 무리 없이 저절로 지켜질 수 있을 만큼 마음에 선을 쌓으라는 말씀으로 들어야 맞습니다. 내 마음에 선을 쌓기는커녕 악을 쌓고 있는 중에 하나님이 제시하시는 계명과 율법을 행위로 드러내고자 한다면, 계명과 율법은 지켜지지 않을뿐더러 겉으로 지켜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마음에 선을 쌓았다는 증거는 하나님이 제시하신 계명과 율법이 무리 없이 지켜짐으로써 나타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음에 선을 쌓음의 의미를 알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시내산 계약을 통해 계명과 율법을 제시하시기 전에 요구하신 것이 무엇인지를 통해 그 대답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수리가 새끼를 등에 업고 날아가듯이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시고 두 달 동안을 광야에서 먹고 마시게 하셨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러한 과정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매력을 뽐내신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한 있음이고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있게 하신 것들이며, 또한 유일한 좋음인 하나님만을 가지면 모든 것이 해결됨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 역사의 의미는 ‘이제 내가 나를 드러냈다. 그러므로 나의 있음에 대한 존재감을 날마다 쌓아가라. 내 존재감이 너희 마음에서 점점 더 커지게 하라. 그리고 너희가 나의 좋음을 열망할 때 삶의 모든 문제가 해결됨을 보여주었다. 나의 좋음에 대한 소망과 바람을 날마다 키워가라.’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이렇게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점점 키워가고, 하나님 좋음에 대한 열망을 점점 키워서 세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상태가 되어감이 선을 쌓음입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있음이고 유일한 좋음임을 보여주셨습니다. 유일한 있음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존재감을 키움을 통해 선을 쌓을 수 있습니다. 유일한 좋음에 대해서는 하나님에 대한 열망을 키움으로 선을 쌓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바라시는 바이고 우리에게도 바라시는 바입니다.
선을 쌓음은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이것을 스스로 알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우리 또한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있음의 존재감을 마음에서 키워가고 있는지, 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좋음에 대한 열망을 마음에서 키워가고 있는지 궁금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방법으로 계명과 율법을 제시하십니다. 계명과 율법을 무리 없이 지켜나간다면 마음에서 선을 쌓았다는 증거입니다. 유일하게 선하신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이 차곡차곡 매일의 삶에서 쌓이게 된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제시한 계명과 율법을 지킬 수 없거나 지켜지지 않는다면 마음에 선을 쌓기를 중단했다는 증거입니다. 선을 쌓지 않음이란 중립이 아니라 마음에 악을 쌓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돈을 많이 벌고 싶어 합니다. 그 이유는 돈의 매력과 위력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서 돈의 있음을 강하게 느끼고 돈의 좋음을 열망합니다. 그러나 본래 사람의 마음에 쌓아야 할 유일한 있음과 좋음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대상을 마음에 담았기에 악을 쌓은 것입니다. 내가 건강을 바랄 때 건강의 있음과 좋음을 차곡차곡 쌓아가게 됩니다. 또 내가 가족의 형통을 바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두 악을 쌓음입니다. 하나님의 존재감이 커지기를 바라고, 하나님을 더 많이 가지려고 열망할 수 없다면 전부 악을 쌓는 것입니다.
이렇게 악을 쌓으면서도 계명과 율법을 지킨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창조주요 주권자이심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마음에서 존재감을 느꼈던 것은 돈이었고 좋아했던 것은 부자 됨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이 주신 계명과 율법을 잘 지키면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소원을 들어주시리라 생각했습니다. 마음에 쌓아둔 악의 소원을 이루기 위하여 계명과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께 감동을 드리고자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 것을 받기 위하여 하나님의 계명과 율법을 지키려는 거래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마음 상태입니다. 마음 상태를 확인하지 않고 계명과 율법에 접근하면 성경 자체를 잘못 이해하게 됩니다. 실제로 이렇게 오해하는 말씀이 많습니다. 신명기 28장 2~6절을 보면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청종하면 이 모든 복이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르리니 / 성읍에서도 복을 받고 들에서도 복을 받을 것이며 / 네 몸의 자녀와 네 토지의 소산과 네 짐승의 새끼와 소와 양의 새끼가 복을 받을 것이며 /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 형통하게 되리라는 의도에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 쌓기의 언약이 현상적으로 드러난 모습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계명과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이 등장할 때마다 ‘계명과 율법이 무리 없이 저절로 잘 지켜질 수 있을 만큼 마음에 선을 쌓으라는 말씀이구나!’라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선이란 하나님의 있음과 하나님의 좋음입니다. 하나님 있음에 대한 존재감을 키우고, 하나님 좋음에 대한 열망을 키워서 세상 것을 아무것도 바라지 않음이 선을 쌓음입니다. 이렇게 선을 쌓기만 한다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계명과 율법은 무리 없이 지켜질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계명과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에 대해 가져야 할 올바른 이해입니다.
이전에 새해가 되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 대신 ‘하나님 부자 되세요. 하나님 재벌 되세요.’라는 말을 하자는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 쌓기를 하자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하나님을 쌓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시내산에 도착한 이스라엘은 처음으로 하나님 자신에 대해 관심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쌓기란 하나님과 마주하여 관계함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관계해야 하나님의 있음과 하나님의 좋음이 내 마음에서 점점 더 쌓여갈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내가 하나님 부자가 되고 하나님 재벌이 될 수 있을까요? 본문은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상황과 관련하여 그 대답을 제시합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맞이하기 위하여 지시하신 준비들 속에는 하나님을 관계하여 선을 쌓기 위한 방법이 담겨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지금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님의 몸을 입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쌓아갈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연합함의 의미를 세 가지 관점에서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십자가 생활화의 의미를 가르쳐주시고 계십니다. 십자가에서 시작하는 그리스도 연쇄 과정 외에는 하나님과 관계하고 하나님을 쌓아갈 다른 길이 없습니다. 본문에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준비 작업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연합하여 그리스도 연쇄 과정을 따라 하늘로 올라감의 의미를 가르쳐 줍니다. 그 내막에 이러한 세 가지 측면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창세기 1장 1절부터 지금까지 살펴본 성경의 모든 내용은 십자가를 향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소재와 상황을 달리하여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함의 의미를 반복하여 설명해 줍니다. 우리는 말씀이 들려주시는 대로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하나의 사건을 우리의 개념 속에서 되새기며 새로운 마음으로 십자가 생활화를 시도해 나갈 수 있습니다.
첫째로 12절을 보면 “너는 백성을 위하여 주위에 경계를 정하고 이르기를 너희는 삼가 산에 오르거나 그 경계를 침범하지 말지니 산을 침범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경계를 넘어오는 자는 사람이고 짐승이고 다 죽으리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마음 상태를 말씀하시는 것이기에 사람에 대해서는 이해가 됩니다만 짐승은 왜 죽인다고 말씀하신 것일까요? 짐승이 의도를 갖고 하나님께 나갈 수도 없는데 굳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절대로 육체를 앞세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2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려가서 백성을 경고하라 백성이 밀고 들어와 나 여호와에게로 와서 보려고 하다가 많이 죽을까 하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까지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직접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습니다. 시내산에 임재하실 때도 하나님의 모습은 빽빽한 구름에 가려져 있었고, 모세만 하나님을 대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짐을 통해 확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마음의 행위인 믿음으로만 관계하기를 원하십니다. 이처럼 짐승까지 죽이신다는 것은 육체를 앞세워서 하나님과 관계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육체를 앞세움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 충만의 증거로 향기가 난다거나 가슴이 뜨거워짐을 경험한다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신체 일부가 불에 타는 듯한 느낌을 받거나 실제로 자국이 남는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성령 체험 중에 육체적으로 느끼는 특이한 경험을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음으로 하나님을 믿다 보면 하나님께서 육체에 이러한 현상들을 제공하실 수 있습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기에 이러한 경험을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아예 육체를 하나님의 있음과 하나님의 좋음을 받아내는 그릇으로 여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있음과 하나님의 좋음은 마음에서 믿음으로 관계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느끼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좋음을 열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육체를 내세워 하나님 있음과 좋음의 증거를 구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끊어지게 됩니다.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하여 죽는다는 것은 이제까지 육체를 입고 살던 마음이 육체를 벗고 예수님의 몸을 입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많은 기독교 종교인들이 마음이 육체를 입은 상태를 고수하며 예배당 생활을 하는 것을 신앙이라 착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진 상태입니다. 마음이 육체를 입고 있는 상태에서는 절대로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마음은 반드시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몸으로 갈아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만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유일한 좋음이고 하나님은 유일한 있음’이라는 것은 믿음으로만 확증할 수 있습니다. 육체에 하나님 있음의 증거를 구했더니 ‘몸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라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혹시 그러한 증거를 받았더라도 그것은 귀신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하나님에 대해 믿음으로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인간으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하나이지만 모든 사람의 마음이 입을 수 있는 그리스도로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예수님과 연합함으로써 육체의 몸을 벗고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하나님을 쌓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16~18절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언약을 체결하신다고 말씀하신 뒤 셋째 날 아침에 하나님이 임재하시는데 시내산에 우레와 번개가 치고, 빽빽한 구름이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고, 연기가 옹기 가마 연기같이 떠오르고, 온 산이 진동하는 광경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 요란하게 임재하심의 모습을 설정하셨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을 쌓을 때의 마음가짐을 가르쳐주는 것입니다.
우레와 번개가 치고, 불과 연기가 피어오르고, 나팔 소리가 크게 들리고, 산이 진동하는 상황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다른 어떤 일에도 신경을 쓸 수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가짐이 이와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쌓기 원한다면 이 세상에서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하나님께로 관심의 방향을 돌릴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내 관심을 빼앗아 갈 만한 어떤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의 임재하심의 광경보다 더 강렬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 이외의 다른 상황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하나님만을 의식하고 하나님께로 관심의 방향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삶은 걱정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내 모든 관심을 하나님께 집중해도 이 세상 일은 하나님이 다 책임지십니다. 어떤 식으로든지 내 삶에 대한 구상은 이미 하나님께 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효과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이란 지금 내 마음의 관심을 빼앗는 일이 있더라도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하나님께로 마음의 방향을 전환하는 일이 됩니다.
셋째로 10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백성에게로 가서 오늘과 내일 그들을 성결하게 하며 그들에게 옷을 빨게 하고”라고 했고, 14절을 보면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 백성에게 이르러 백성을 성결하게 하니 그들이 자기 옷을 빨더라”라고 했습니다. 옷을 빨고 성결하게 하라는 말씀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쌓기 위해서는 꼭 몸을 씻고 성결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하나님을 매 순간 만나시던 예수님께서는 특별히 옷을 빨고 몸을 성결하게 하라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23장 25절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라고 하셨고, 27절에는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라고 유대인들의 정결 의식을 비판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사업을 하느라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이제 무엇을 하든 마음에 남아있는 사업의 여운이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로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을 쌓기를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쌓고자 한다면 마음에 이제까지 해오던 일의 잔영이나 여운이 남아있으면 안 됩니다. 세상일에 대한 근심과 염려를 갖고서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해본 적이 없는 것처럼 어떠한 찌꺼기도 없는 순백의 마음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보혈이 주홍 같은 우리의 마음을 흰 눈처럼 양털같이 하셨습니다.
주님이 흘리신 보혈에 우리 마음을 씻어야만 마음은 깨끗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쌓아가기 위해서는 심지어 가족일지라도 남아있을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10장 36~38절에서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음에 얼룩을 만들던 세상의 잔영과 여운은 십자가에서 씻겨야만 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는 피를 흘리셨습니다.
실제로 몸이 깨끗하지 못하거나 옷이 더럽다고 해서 하나님을 쌓을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몸을 씻고 옷을 깨끗하게 입으라는 말씀의 의미는 마음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정결해져야 하는 것은 마음입니다. 십자가 보혈로 세상에서 해오던 일들의 잔영과 여운의 찌꺼기를 다 지울 수 있어야 합니다. 마치 아무 일도 안 하다가 하나님을 첫 번째로 만나는 것이 될 수 없다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고 하나님을 쌓아갈 수도 없습니다.
시내산 언약은 이처럼 우리 마음과 관련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 가지 방식으로 마음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쌓기를 가르쳐 주십니다. 이러한 세 가지 측면이 십자가 생활화 속에 들어있습니다. 오늘도 십자가를 붙잡으면서 그 의미를 되새겨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육체를 내세워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자 하는 것은 신비주의일 뿐입니다. 첫째, 십자가를 붙잡는다는 것은 이렇게 육체를 내세우는 삶이 중단되는 것입니다. 둘째, 우레와 번개가 치고, 불과 연기가 피어오르고, 나팔 소리가 나고, 산이 진동하는 광경을 보듯이 오직 하나님께만 신경을 쓰고 마음의 방향을 향해야 합니다. 셋째, 이제까지 마음을 빼앗겼던 일들의 모든 잔영과 얼룩은 십자가 보혈로 지워야만 합니다. 이렇게 해서 오늘도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과 하나님 좋음의 열망을 키워감으로써 마음에 선을 쌓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성경 속에 나오는 모든 계명과 율법이 무리 없이 지켜질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그때그때 하나님께서 뭔가 지시를 내리실 때 그 지시가 즉시즉시 수행되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붙잡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갖게 하시기 위하여 본문의 말씀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 모든 사람들은 돈을 쌓으려 하고, 경력을 쌓으려 하고, 명예와 인기를 쌓으려 하고, 성과를 쌓으려 합니다. 그러나 당신의 소유로 삼으시고 거룩한 백성으로 삼으신 우리만큼은 오늘도 하나님 있음의 존재감을 쌓아가고, 하나님 좋음의 열망을 쌓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기록된 말씀뿐만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그때그때 주시는 지시를 받아 행할 수 있도록 마음에 선을 많이 쌓을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