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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 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하나님의 먼저’에 할례로 응답하라>의 줄거리 :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먼저 찾아오셨고 모세에게 먼저 찾아오셨으며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에게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셔서 우리를 향하여 부르시는 사건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의 신은 사람들이 먼저 만들어 놓고 먼저 부르고 찾습니다. 그러므로 종교에서는 신이 사람에게 응답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에게 교인이 응답합니다. 이 응답의 방법이 바로 할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먼저 찾아오셔서 관계가 시작한 이후 제일 처음 맺은 언약이 바로 할례 언약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먼저’에 할례로 응답하라
(출애굽기 4:24~31)
24. 모세가 길을 가다가 숙소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서 그를 만나사 그를 죽이려 하신지라
25. 십보라가 돌칼을 가져다가 그의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갖다 대며 이르되 당신은 참으로 내게 피 남편이로다 하니
26. 여호와께서 그를 놓아 주시니라 그 때에 십보라가 피 남편이라 함은 할례 때문이었더라
27.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이르시되 광야에 가서 모세를 맞으라 하시매 그가 가서 하나님의 산에서 모세를 만나 그에게 입맞추니
28.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분부하여 보내신 모든 말씀과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령하신 모든 이적을 아론에게 알리니라
29. 모세와 아론이 가서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장로를 모으고
30.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신 모든 말씀을 전하고 그 백성 앞에서 이적을 행하니
31.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모세에게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아론과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써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먼저 찾아오셔서 당신에게로 부르고 계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본문 31절을 보면 “백성이 믿으며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찾으시고 그들의 고난을 살피셨다 함을 듣고 머리 숙여 경배하였더라”라고 했습니다. 약속의 명단에 있는 자들인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고난을 돌아보시고 기적의 표시와 함께 보내신 모세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숙연해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셨다는 것은 굉장히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과 신이 맺는 두 종류의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응답하는 신과 관계를 맺는 부류가 있고, 신에게 응답하는 사람과 관계를 맺는 부류가 있습니다. 종교에서는 사람이 주도권을 쥡니다. 사람이 먼저 움직이면 신은 사람에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인은 하나님이 주도권을 쥐시고 먼저 움직이시고 사람은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약속의 명단에 있는 사람이라면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습니다. 이 관계성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할례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할례의 의미대로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과 관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구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지으신 사람이 있고 아버지로서 낳으신 사람이 있습니다. 이들은 신을 다르게 관계합니다. 하나님이 창조주로서 지으신 사람들은 하나님과는 단절된 채로 스스로 삶의 주도권을 쥐고 필요에 따라 없는 신을 만들어 냅니다. 종교에서는 언제나 사람이 먼저이고 신은 나중입니다. 신은 사람에게 응답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단지 창조주로서 지으신 사람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낳으신 사람이 있습니다. 예정의 명단 안에 넣으신 자들입니다. 이들은 꼭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십니다. 이들은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에 대해 응답하고 반응하면서 관계가 시작됩니다. 이러한 모습을 한 마디로 ‘할례 의미의 생활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모세는 하나님에 의해 죽기 직전까지 몰립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에서 모세가 죽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병이 들게 하셨을 수도 있고, 독사에 물리게 하셨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맥락에서 드러나는 이유를 보면 할례와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세가 죽음의 직전까지 몰리는 상황에서 아내인 십보라는 둘째 아들 엘리에셀의 포피를 돌칼로 베어 모세의 발밑에 둡니다. 그러자 죽기 직전까지 몰린 모세가 소생하였습니다. 이러한 전개로부터 십보라가 모세가 죽을 위기에 처한 이유를 알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모세에게는 두 아들이 있습니다. 첫째 아들은 게르솜이고 둘째 아들이 엘리에셀입니다. 그중 엘리에셀은 모세가 출애굽의 사명을 위임받고 미디안 광야를 떠나 애굽으로 가는 도중이나 직전에 태어났으리라 여겨집니다. 출생 후 팔 일이 지났을 때 모세는 히브리인들의 전통대로 할례를 행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다만 아내인 십보라는 미디안 사람이기에 히브리인들이 행하는 할례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못했습니다. 또한 어머니의 마음으로는 여행 도중에 아기에게 상처를 내는 것을 쉬이 용납할 수 없기에 모세가 할례를 행하고자 하는 것을 막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전제를 염두에 두면 모세가 하나님에 의해 죽기 직전까지 몰리는 상황에서 십보라가 둘째 아들의 할례를 행해야만 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십보라가 돌칼로 둘째 아들의 포피를 베어서 모세의 발아래에 두자, 하나님께서 모세를 살려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모세가 할례에 예외를 둔다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의 생명이 끝날 것임을 가르쳐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약속의 명단으로 이루어진 교회를 상징합니다. 이러한 교회의 지도자가 할례에 예외를 둔다는 것은 다시 말해 ‘할례 의미의 생활화’에 있어서 예외를 두거나 중단시키거나 가르침을 멈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교회의 지도자로서의 생명은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목사님이 ‘할례 의미의 생활화’를 가르치고 있는지 늘 확인하시기를 바랍니다. 진즉에 ‘할례 의미의 생활화’를 중단한 채 다른 것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면 그는 이미 하나님에 의해 지도자로서의 생명이 끊어진 지 오래된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약속의 명단 안에 있는 교인이라면 그는 여러분에 대해 지도자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생활화해야 하는 할례의 본래 의미가 무엇일까요?
창세기 17장 1~2절을 보면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능한 하나님이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할 것을 언약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13절을 보면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육체는 죽으면 끝나니까 그런 의미에서 영원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영원이란 한순간도 중단없이 지속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라는 말씀은 살아있는 동안 한순간도 쉼 없는 할례의 표시가 언약을 상징하는 것임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한편 14절을 보면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남자가 할례를 받지 아니하여 할례의 의미를 생활하지 않는다면 그 남자에게 속한 가족 전체가 하나님으로부터 끊어지고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할례의 의식이 아니라 할례의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실제 삶의 현장에서 행해야 하는 ‘할례 의미의 생활화’란 어떤 것일까요?
사람은 언제나 어떤 대상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앞에 둔 대상에 대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함을 통해 반응합니다. 그런데 약속의 명단에 들어있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반응해야 하는 모든 순간과 장소에서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기억해야 합니다. 앞서 하나님이 창조주이실 뿐만 아니라 아버지로서 낳으신 자들이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들이 약속의 명단에 들어있는 자들입니다. 이들은 육체의 눈으로 보는 대상에게 반응하기에 앞서 육체의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것을 묻고 계십니다.
예를 들어 남편이 아내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를 먼저 찾아왔다. 내가 너를 나의 아들로 삼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나의 있음을 드러내 알려주었다. 이제 너는 아내에게 먼저 반응할 것이냐? 아니면 나에게 먼저 반응할 것이냐?’라고 물으시는 셈입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앞에 두고 있든지 하나님도 함께 계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눈에 보이는 대상들에 반응하기에 앞서 제일 먼저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할례 의미의 생활화’입니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습니다. 로미오가 약속의 명단에 있는 교인이라면 반드시 의식으로 봐야 할 대상은 하나님입니다. 눈으로는 줄리엣을 보고 있을지라도 의식은 하나님을 향하여 켜져 있어야 하고, 줄리엣에게 반응하기에 앞서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할례의 의미에 대해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할례의 표시를 몸에 새김이란 언제 어디서나 어떤 문제를 대하든지 항상 하나님을 향해 의식을 켜는 전원 스위치를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향한 의식의 전원 스위치를 켜는 것이 할례의 의미인 것입니다.
몸에 행한 할례의 흔적이 있다고 해서 ‘나는 선민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할례를 받았기에 다른 민족과는 차별된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러나 할례의 의미는 내가 선민인 것을 의식하게 함에 있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대상들이 내 앞에 있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내 앞에 계십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하나님께 제일 먼저 반응하도록 의식을 켜는 것이 할례의 본래 의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명단에 들어있는 교인들이 이것을 생활화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무조건 하나님을 우선시하여 의식해야 한다면 내 눈에 보이는 대상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일까요? 무조건 도외시하고 투명 인간 취급해야 할까요? 하나님께 먼저 반응하기 위해서 그들의 말을 무시해야 한다는 것일까요? 회사에서 상사들과 이야기할 때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가 이야기할 때 서로를 투명 인간 취급하라는 것일까요? 자녀를 투명 인간 취급하고, 친구를 투명 인간 취급하라는 것일까요?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도 마치 상대가 없는 것처럼 투명 인간 취급하라는 것일까요?
이것에 대한 대답은 보다 실천적인 형태로 나타납니다. 말씀드렸듯이 눈에 보이는 대상들과 하나님은 함께 계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제일 먼저 반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먼저 나를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모든 종교의 신과 다른 점입니다. 모든 종교의 신은 인간이 먼저 신을 찾아갑니다. 없는 신을 만들고 그 신을 필요에 따라 부릅니다. 그러면서 신이 인간의 요구에 응답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인의 참 신앙에서는 언제나 살아계신 하나님이 먼저 찾아오십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한 사실로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 제일 먼저 응답해야만 합니다. 다만 문제는 어떻게 눈에 보이는 대상들보다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에 대해 먼저 반응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대상들과 항상 함께 계십니다. 그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이십니다. 아내를 마주할 때 하나님은 아내를 있게 하심으로써 내 앞에 계십니다. 이때 나는 아내를 있게 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건강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 문제를 있게 하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건강 문제를 상대한 다음에 하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종교가 됩니다. 물론 성경에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응답하신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본래의 의미는 우리가 주도권을 쥐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도권을 쥐고 응답을 요구하면 들어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돈 문제가 생겼을 때 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은 돈 문제에 먼저 반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눈앞에 보이는 돈 문제를 있게 하신 하나님에게 반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처럼 내 눈앞에 보이는 대상들을 있게 하신 하나님께 반응할 때 하나님이 있게 하시는 대상에 대한 반응도 결정됩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지시를 받아서 반응할 수 있을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 미묘한 차이가 실제 삶의 현장에서 일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할례 의미의 생활화’입니다. 내 눈앞에 보이는 모든 대상보다 먼저 있게 하시는 하나님께 반응함으로써 하나님 뜻에 따라 필요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무척 미묘한 과정입니다. 이러한 과정이 실제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할례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육체로 덮여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에서 육체를 잘라내는 것이 그리스도의 할례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2장 11절에서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라고 했습니다. ‘그 안에서’는 그리스도 안을 의미합니다. 할례는 태어난 지 팔 일 된 아기의 포피를 베는 의식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하나 됨이란 내 마음을 덮고 있는 육체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할례는 신약에 와서 갑자기 등장하거나 강조된 개념이 아닙니다. 모세는 신명기 10장 16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라고 말했습니다. 목이 곧음이란 마음이 육체를 입은 상태에서 육체의 눈으로 보는 대상에게 먼저 반응하기를 끈질기게 유지하는 상태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실제로 존재하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도 실제로 존재하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로서 우리가 눈으로 보는 모든 세상 것들을 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께 먼저 반응하지 못한 채 눈에 보이는 것들에 먼저 반응합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마음이 육체에 쌓여있기 때문입니다. 태어난 지 팔 일 된 아기의 포피를 베어내듯이, 마음을 감싸고 있는 육체를 잘라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수 없다면 마음은 항상 육체에 덮인 상태에서 오감이 포착하는 대상에 대해 먼저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지금 육체로 마주하고 있는 대상을 있게 하신 하나님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유일한 있음입니다. 그 하나님께 반응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있게 하신 대상들에 먼저 반응하는 것은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할례의 의미가 실현되지 않고, 할례의 의미가 생활화되지 못하는 모든 순간은 하나님에 대한 배반입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 의식을 켜고 반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보이는 것들에만 반응한다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향하여 등을 돌리는 것이고 배반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한 삶이 지속된다면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끊어지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예배당에 다니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모든 대상에 먼저 반응합니다. 그러는 동안 스스로 있는 자이신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꺼진 상태에서 등을 돌리고 배반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구원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그렇게 살아가는 모든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진 자들입니다. 모세가 할례의 의미를 자기 아들에게 적용하지 않은 채로 있다가 죽음 직전까지 몰렸던 것과 같습니다. 할례의 의미를 붙잡지 못하고 생활화하지 않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끊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행하면 완전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완전하게 되기에 눈앞에 보이는 대상을 향해 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에도 틀림이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죄와 저주에 찌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완전함이란 윤리적으로 완벽해지는 사람을 뜻하는 게 아닙니다. 완전함이란 마음이 하나님을 대면하는 장자의 자리에 섬으로써 하나님의 있음과 좋음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이 세상 것은 어떤 것도 필요성을 느끼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은 머리 둘 곳 없이 사셨지만, 하나님 아버지 한 분으로 만족하셨습니다. 머리 둘 곳조차 필요로 하지 않으셨고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해서도 필요로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완전함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서로를 채우시고 계시기에 채움을 위하여 세상을 필요로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바깥으로 나와서 세상을 만드신 것이지, 세상으로부터 채움을 위하여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완전해지기 위해서는 내 마음의 채움을 위해서는 이 세상을 필요로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 마음은 육체에 덮여있는 상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마음을 덮고 있는 육체를 잘라내고, 그리스도로 옷 입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요구하신 완전함은 이루어집니다.
내 마음이 완전한 상태가 되면 눈에 보이는 대상들에 대한 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 또한 완전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녀 문제에 쫓기는 상태에서 친구를 대할 때와 돈 문제 때문에 압박을 받으며 친구를 대할 때는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혹은 직장에서 사장님을 대할 때 평소에는 사장님의 존재감이 너무나 크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어느 날 로또에 당첨이 되자 똑같이 직장에 나가더라도 사장님의 존재감이 너무나 작게 느껴집니다. 예전에는 잘리지 않기 위해서 ‘사장님께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면 이제는 ‘자르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십시오.’라고 태도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 것으로 만족하려고 하는 상태에서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은 완전하지 못한 악입니다. 마음에서 육체라는 포피를 잘라내고 하나님으로 채워진 상태에서만 완전함은 나타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완전해진 상태에서 상대방에게 하는 모든 말과 행동도 완전하게 나타납니다. 내 마음에 십자가의 할례가 이루어졌다면 친구를 만났을 때 ‘너는 눈에 보이는 친구에게 이런 말을 해라. 저런 말을 해라.’라고 하나님이 직접 말씀하시지 않더라도 완전함이 나타납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께 먼저 반응하여 하나님으로 채워지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묶여있는 상태라면 내가 친구를 대하여 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은 완전하게 나타나리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누구든 문제가 무엇이든 무조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지시이며 하나님의 계획이 수행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행해야 하는 할례는 마음에서 육체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의 지도자라면 날마다 이 할례를 외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외 없이 적용되어야 하며 가르쳐야만 합니다. 마음에서 육체를 잘라내는 할례의 의미를 생활화하는 것에 대해서 가르침이 단 하루라도 멈춘다면 지도자로서의 생명력이 끝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배반하는 자가 되어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낳으신 자들을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자가 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먼저 찾아오셨습니다.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에 대해 반응하는 방식은 제일 먼저 하나님께 응답하는 것입니다. 내 눈에 보이는 대상이나 일들은 다급하게 응답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스스로 있는 자이신 유일한 있음인 하나님에 의해서 있는 중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앞에 보이는 대상을 있게 하시는 하나님께 먼저 반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반응의 방식은 마음에서 육체를 잘라내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입고 하나님께로 가야만 합니다. 마음이 하나님께 붙어있는 상태에서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이 먼저 하나님께 반응하는 상태에서는 마주하는 사람이 누구든 과제가 무엇이든 나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심각한 재정 문제가 발생한 상태에서는 당연히 재정 문제가 풀리는 것을 기쁨과 만족의 이유로 삼고자 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입니다. 재정 문제를 있게 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있게 하신 것에 먼저 반응한다면 종교가 됩니다. 지금 눈앞에 있게 하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반응하는 자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자 장자이고 참 신앙인이며 교인입니다.
하나님께 반응하기 위해서는 미리 준비해야 합니다. 마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합니다. 내 마음이 육체와 분리된 상태에서 세상에 나오고 사람을 대하고 가족을 만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할례의 의미가 마음에 살아있기를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육체를 벗어버리고 그리스도로 옷 입고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직면하는 상태를 유지하게 해주세요. 그러기 위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 세상에 대해서는 담이 쳐지게 해주세요. 마음이 세상에 넘어가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할례의 의미를 확인한 뒤에 사람과 문제를 대하며 떠오르는 아이디어대로 행하면 됩니다. 이것이 ‘할례 의미의 생활화’입니다.
중요한 것은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께 제일 먼저 반응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은 내 눈앞에 보이는 상황을 있게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께 먼저 반응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마음에서 육체를 잘라내야만 합니다. 잘라낼 수 없다면 마음은 세상에 빨려 들어갈 것입니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상황과 대상이 나타나는 대로 반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는 내 육체와 마음 사이를 가르는 담이자 칼날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가 언제나 내 마음과 세상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야 합니다. 내 마음이 세상을 먼저 보면서 육체를 입으려고 할 때마다 십자가의 칼날로 막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께 먼저 반응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사람과 상황을 있게 하신 하나님께 먼저 반응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로 할례를 행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례를 행하면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집니다. 돈 문제가 생겨도 돈 문제의 해결을 바라지 않습니다. 내 마음의 채움은 지금 마주하고 있는 하나님을 많이 갖는 것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돈 문제에 대해 바라지 않습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돈 문제에 대해 떠오르는 생각과 말과 행동은 무조건 완전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주시는 말씀입니다. ‘너는 마음의 할례를 행하여 마음이 언제나 내게 붙어있는 상태여야 한다. 네가 마주하는 이 세상의 사람과 대상과 문제에 대하여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다. 내가 계획했는데 안 될 일이 없고, 내가 계획하지 않았는데 될 일은 없다. 그러므로 내가 계획하지 않은 일을 할 필요가 없고, 내가 계획한 바를 네 힘으로 이루려고 할 필요도 없다. 어차피 너는 이 세상에 대해 관여할 바가 없다. 나는 전지전능한 하나님이요, 스스로 있는 자이신 너의 아버지이다. 그러므로 너는 모든 삶의 현장에서 할례를 행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례를 행함이란 십자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기억함으로써만 할례의 상태는 유지될 수 있고 마음은 하나님께 반응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드리자면 할례를 받을 수 없는 여자는 제외되는 것 아니냐는 의문을 가지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3장 27~28절을 보면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마음에 예수님의 십자가를 기억하고 예수님의 죽음을 짊어지고 다니며 육체를 잘라낸 사람들은 남자든 여자든 하나님의 장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할례의 의미를 생활화할 때 삶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이루어져 나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고, 계획하시지 않은 일이라면 아무리 애를 써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할례의 의미가 원활하게 생활화되는 삶이 오늘도 여러분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할례 의미의 절대성을 놓치지 않게 하여 주심으로써 눈에 보이는 것들에 먼저 반응하여 하나님을 등지고 배반하여 하나님의 백성들 중에서 끊어지는 일이 없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