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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바람(Wish)과 함께 사라지다_태승철

by 태승철 · 18-06-21 09:59 · 6,044
'바람'과 함께 사라지는(Gone With The Wind) 대신 '바람'과 함께 사라집니다(Gone With The Wish). 여주인공 스칼렛이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애슐리를 향한 사랑의 소원을 놓지 않음으로써, 결국은 자신의 진정한 사랑인 레트가 그녀를 떠납니다. 그러니 잘못 된 소원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이 사라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이처럼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이신 하나님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이 바로 나의 '바람'(Wish)과 함께 사라집니다.

바람(Wish)과 함께 사라지다

(이사야 3:1~26)

 

 

1.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 곧 그가 의지하는 모든 양식과 그가 의지하는 모든 물과

2. 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복술자와 장로와

3. 오십부장과 귀인과 모사와 정교한 장인과 능란한 요술자를 그리하실 것이며

4. 그가 또 소년들을 그들의 고관으로 삼으시며 아이들이 그들을 다스리게 하시리니

5. 백성이 서로 학대하며 각기 이웃을 잔해하며 아이가 노인에게, 비천한 자가 존귀한 자에게 교만할 것이며

6. 혹시 사람이 자기 아버지 집에서 자기의 형제를 붙잡고 말하기를 네게는 겉옷이 있으니 너는 우리의 통치자가 되어 이 폐허를 네 손아래에 두라 할 것이면

7. 그 날에 그가 소리를 높여 이르기를 나는 고치는 자가 되지 아니하겠노라 내 집에는 양식도 없고 의복도 없으니 너희는 나를 백성의 통치자로 삼지 말라 하리라

8.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유다가 엎드러졌음은 그들의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역하여 그의 영광의 눈을 범하였음이라

9. 그들의 안색이 불리하게 증거하며 그들의 죄를 말해 주고 숨기지 못함이 소돔과 같으니 그들의 영혼에 화가 있을진저 그들이 재앙을 자취하였도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바람(Wish)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바람(Wish)과 함께 사라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영화이자 소설인 작품의 제목은 Gone with the Wind입니다.

그런데 우리말 바람에는 한 가지 뜻이 더 있는데 바로 소원(Wish)을 의미합니다. 오늘 제목을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소원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sh).’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영화와 소설에서 여주인공 스칼렛은 애슐리를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애슐리는 좀 더 전통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스칼렛의 친구인 멜라니에게 사랑을 느껴 결혼하게 됩니다. 스칼렛은 이에 대한 반발로 멜라니의 오빠 찰스와 사랑도 없는 결혼을 하였지만 찰스가 전쟁에 나가서 죽습니다. 이에 스칼렛은 여동생의 약혼자이자 재력가인 프랭크를 빼앗아서 결혼합니다. 그런데 이 프랭크도 비밀결사에 가담하였다가 사살당하고 맙니다.

한편 스칼렛이 애슐리를 사랑하던 시절부터 옆에서 10여 년간을 지켜보았던 부유한 선장 레트 버틀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스칼렛은 10여 년이 지난 뒤에야 레트 버틀러와 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세 번째 결혼을 하고도 스칼렛은 여전히 애슐리에게 미련이 있었기 때문에 레트 버틀러는 스칼렛을 떠나려고 마음을 먹습니다.

그러던 중에 스칼렛이 사랑하던 애슐리와 결혼했던 친구 멜라니가 죽게 됩니다. 멜라니의 죽음 앞에서 애슐리가 충격을 받는 모습을 보게 되자, 스칼렛은 그들의 사랑에 자신이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죽음 앞에서 참 사랑을 깨닫게 되면서 애슐리와 멜라니가 보여준 참 사랑처럼 자신도 참 사랑을 찾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국 10년간 자신을 지켜보았던 세 번째 남편 레트 버틀러가 진정한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이미 레트 버틀러는 스칼렛을 떠나기 위해 작정하였던 때였습니다. 결국 스칼렛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레트 버틀러는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스칼렛은 슬픔으로 절망했지만 분연히 일어나 고향으로 돌아가 이번에는 자신이 레트 버틀러를 되찾겠다는 의지를 보이며 영화가 끝이 납니다.

영화의 내용을 생각해보면 ‘Gone with the Wind가 아니라 Gone with the Wish.’라는 제목이 더 어울리는 것 같습니다. 스칼렛 일생의 소원은 오직 애슐리와 결혼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자 찰스와 결혼하고 또 프랭크와 결혼하고 마지막으로는 자신을 10년간 사랑했던 레트 버틀러와 결혼했지만 소원은 다른 곳에 있었기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애슐리에 대한 소원이 헛된 것이고 자신의 진정한 참 사랑이 레트 버틀러임을 깨닫는 순간 이미 그는 떠날 결심을 하고 말았습니다. 레트 버틀러는 바람(wind)처럼 사라졌지만 동시에 바람(wish)으로 인해 사라지게 된 것과 다름없습니다. 애슐리에 대한 헛된 소원이 진정한 사랑을 사라지게 만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Gone with the Wish의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보라 주 만군의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가 의뢰하며 의지하는 것을 제하여 버리시되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선민들이 의뢰하고 의지한 것들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나열하고 있습니다.

곧 그가 의지하는 모든 양식과 그가 의지하는 모든 물과 / 용사와 전사와 재판관과 선지자와 복술자와 장로와 / 오십부장과 귀인과 모사와 정교한 장인과 능란한 요술자를 그리하실 것이며라고 하였습니다.

의뢰와 의지로 번역된 말은 히브리어에서 같은 단어의 변형입니다.

의뢰하는 것은 남성명사 마쉬엔이고, 의지하는 것은 여성명사 마쉬에나로서 두 동사를 사용함으로써 의지하는 모든 것을 가리킵니다. 그 의지하는 것이 크거나 작거나, 중대하든 사소하든 의지하는 모든 것들이 해당됩니다. 일상적인 삶에서 평생 의지하는 것뿐만 아니라 순간적으로 의지하는 모든 것을 총망라합니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구분해보자면 첫째는 안보를 위한 군사적 지도자들입니다. 용사 전사 오십부장입니다. 둘째는 일상의 안정을 위한 민간인 지도자들인데 재판관 선지자 장로 귀인 모사입니다. 셋째는 우상숭배를 위한 종교지도자들로 복술자 요술자 정교한 장인입니다. 넷째는 가장 중요한 물과 양식입니다. 즉 이러한 것들이 평강한 삶을 위한 필수적 조건으로 여겨서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내가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이것을 바로 알아야 내가 의지하는 것들로 인해 하나님의 멸망의 심판을 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의지하는 것은 마음의 공백 상태에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의 공백이 있는 사람이 의지합니다. 이러한 사람은 자나 깨나 24시간 한 가지의 욕구를 가지고 움직입니다. 마음의 공백을 채워야만 한다는 욕구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의지의 대상은 당연히 마음을 채울 수 있으리라 여겨지는 대상입니다.

마음을 채울 때에 기쁨과 만족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무엇을 의지하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하면 좋겠다, ~되면 좋겠다, ~라면 좋겠다, ~이면 좋겠다.’라고 생각하고 말하는 모든 것들이 의지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마음이 비어있는 상태에서 의지하는 대상은 곧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입니다. 마음이 채워지면 기쁨과 만족이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내가 의지하는 대상을 알기 위해서는 좋겠다.’라는 말과 생각이 무엇에 연관 되어 있는지를 따져보면 됩니다.

부자였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한다면 부유함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마음을 채우는 것이 첫 번째와 마지막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애슐리와 결혼하면 좋겠다고 여긴 스칼렛은 애슐리를 의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취직하면 좋겠다고 하면 일자리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었으면 좋겠다, 나라가 통일되면 좋겠다, 부흥하면 좋겠다, 인정받았으면 좋겠다.’라는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모든 의지함은 마음을 채워서 기쁨과 만족을 얻기 위함입니다.

 

본문 8절을 보면 그들의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역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사실 우리의 언어와 행위는 단 한 마디나 단 하나의 행위도 예외 없이 바로 이 좋겠다.’라는 판단에 따라 말하고 움직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악입니다. ‘좋겠다.’라고 여기는 것은 결국 의지하는 것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의 문제점은 하나님을 내게서 사라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 채 좋겠다.’라는 생각과 말은 마치 애슐리를 향하고 있는 스칼렛과 같습니다. 스칼렛이 그렇게 하는 동안에 참 사랑이었던 레트 버틀러는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세상을 향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사라지고 맙니다.

앞서 이사야의 전체 주제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민에게 당신의 용도를 결정해주셨습니다. 천지를 지으시고 거룩하시고 무한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채움 거리로 당신을 제공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선민들이 이런 놀라운 은총을 버렸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정하신 용도를 폐기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 채움을 위해 하나님보다 세상을 선택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동입니다.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업신여김은 일상적으로 ‘~하면 좋겠다, ~이면 좋겠다, ~라면 좋겠다.’라는 표현으로 드러납니다. 이 세상을 향하여 좋겠다.’라고 여기는 생각과 말에는 이러한 의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돈을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라는 소원을 가지면 돈에 대한 소원과 함께 하나님은 사라져버리십니다. Gone with the Wish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자녀가 잘되었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가져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칼렛이 애슐리에 대한 소원을 버리지 못했을 때에 레트 버틀러가 사라지게 되었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가지는 작은 소원들이 하나님을 사라지게 한다는 것입니다.

16절 이하를 보면 이 작은 소원들에 대한 예가 나타납니다. 예루살렘 여인들의 온갖 장신구들을 없애라고 하셨습니다. 팔찌나 목걸이와 같은 것들은 사소한 소원입니다. 길을 가다가 노점상에서라도 구경하면서 쉽게 살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이 의지하는 것이 됩니다. 하여간 좋겠다.’라는 마음을 가질 때에 그 순간 하나님은 사라져버리십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살라는 것일까요?

사람이 살다보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것들을 원하게 되는 것은 당연합니다. 배가 고프면 먹을 것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좋겠다,’라고 여기는 자연스러운 감정과 생각이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장면 먹고 싶다는 극히 사소한 생각을 하는 동안 하나님은 버려지실 수 있습니다. 자장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그 짧은 순간에도 먼저 십자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앞서 선민들에게 성전 뜰만 밟는다고 경고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번제단에서의 제사의 의미를 잊었기 때문입니다. 몸은 예루살렘 성전에 가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드려지는 상번제에 마음을 보내면 되었습니다. 자장면을 먹고 싶다는 사소한 소원을 가지는 순간 예루살렘 성전에서 상번제로 드려지는 어린양을 생각하며, 자장면을 먹고 싶어 하는 나는 죽었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것이 선민의 운명입니다.

단순히 자장면을 먹고 싶어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은 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자장면 먹는 걸 막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좋겠다가 있습니다.

8절을 보면 예루살렘이 멸망하였고 유다가 엎드러졌음은 그들의 언어와 행위가 여호와를 거역하여 그의 영광의 눈을 범하였음이라라고 하였습니다.

그의 영광의 눈을 범하였음이라라는 말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장면 먹는 것조차 하나님이 바라신다면 먹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하와와 함께 사는 것이 좋겠다고 결정하신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 결과로 부부관계가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저 여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여겨서 이루어진 관계가 아닙니다. 나의 좋겠다는 마음은 오직 하나님께만 향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더 많이 가졌으면 좋겠다는 것이 유일한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오늘도 내일도 24시간 이러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선민의 삶입니다. 세상의 일들을 의지하며 어떻게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날 때마다 십자가를 떠올려서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오직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방향성을 따라가면서 하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지금 무엇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욕구의 대상을 하나님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자장면 먹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하나님 많이 먹었으면 좋겠다로 바꾸고, 돈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하나님 많이 벌었으면 좋겠다로 바꿉니다. 자녀가 형통하면 좋겠다는 마음을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형통하면 좋겠다고 바꿉니다. 환전소에서 원을 달러로 바꾸듯이, 좋겠다는 마음을 십자가에서 전부 하나님으로 환전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영광의 눈이 나를 지켜보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 좋아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시며 이렇게 하면 좋겠다.’라고 여기시는 마음이 그대로 이루어지도록 삶을 좀 내버려 두라는 것입니다. 내 삶에 대해서 가지는 나의 좋겠다.’를 죽이고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좋겠다.’가 이루어지도록 해야 합니다. 자꾸 내가 끼어들어서 소원을 품을 때마다 Gone with the Wish가 됩니다. 이 세상을 향한 작은 소원이든 큰 소원이든 내가 소원을 가질 때에, 하나님이 나에 대해 가지시는 보시기에 좋은 소원들이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앞서 설명 드린 16절에서 여인들이 가지는 장신구에 대한 소원을 예로 든 것은 결코 여성을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여인들의 삶의 특성을 비유적으로 동원한 것입니다. 작은 장신구 하나 갖고 싶다고 여기는 마음까지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귀걸이가 필요하다고 여기신다면 합당한 귀걸이를 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으시다 여기시는 것들은 어떠한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게 되는 것일까요?

하나님이 허락하셔도 어차피 귀걸이를 사려면 돈을 지불해야 합니다. 돈을 쓸 때에 그것이 하나님이 좋다고 여기시는 일인지, 내 마음이 좋다고 여기는 일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귀걸이를 보면서 전혀 원하지 않게 될 정도로 마음을 먼저 하나님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 다 그렇습니다.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에 먼저 돈이 있거나 없거나 하나님으로 만족한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돈 버는 일에 대해 드는 생각은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이 됩니다. 내가 결혼하고 싶은 여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를 원하지 않게 될 정도로 먼저 하나님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청혼도 하게 하실 것입니다.

신앙대로라면 스칼렛은 어떻게 해야 했을까요? 애슐리와 결혼을 하고 싶어 했지만 애슐리는 친구인 멜라니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 때에 애슐리에 대해 미련을 갖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러면 미련은 사라지고 진정으로 그들을 축복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멜라니가 죽고 애슐리의 마음이 스칼렛에게로 향하게 된다면 하나님의 뜻이겠지만 아니더라도 하나님으로 만족할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닌 애슐리에 대한 소원으로 채워져 있다면 작품의 주제처럼 진정한 사랑은 바람과 함께 사라져버릴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다고 여기시는 것들은 내가 먼저 하나님으로 가득 채워져서 더는 그것을 원하지 않게 될 때에 방향이 제시되고 역사하심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는 아예 좋겠다.’라는 생각과 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언어와 행위는 이 좋겠다.’라는 판단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우리의 진정한 행복과 기쁨과 만족은 이 세상을 향한 소원과 함께 다 사라져버리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의 눈으로 나를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일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세상을 향한 나의 바람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지속적으로 죽어야 합니다.

그렇게 십자가의 주님과 연합해서 세상을 향한 바람을 가진 나를 죽인다면 Gone with the Wish의 상황은 사라지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소원이 나의 삶에 알알이 열매 맺혀 가게 될 것입니다.

바람(wish)과 함께 사라집니다. 꼭 기억하셔서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세상을 향하는 나의 바람을 죽이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과 함께 하나님만을 바라는 사람들이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세상으로 방향을 고정시킨 채 끊임없이 좋겠다고 바라는 나의 인격 자체를 주님의 십자가에서 반복하여 죽게 해주셔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겠다고 여기시는 일들만 일어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