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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새판짜기, 구심점만 바꾸자_태승철

by 태승철 · 18-06-20 09:15 · 5,778
새판짜기의 열풍이 불고 있습니다. 평창 동계올림픽, 남북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 6.13 지방선거 등으로 대한민국은 목하 새판짜기 태풍 속에 진입했습니다. 참새 한 마리 땅에 떨어짐부터 천하 만민의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이끄심인 것이 틀림없지요. 이번 기회에 덩달아 내 인생도 새판 한 번 짜보는 겁니다. 인생을 부분적으로 개선, 쇄신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판으로 바꾸는 겁니다. 오히려 어렵지 않습니다. 구심점만 바꾸면 새판 되니까요.

새판짜기, 구심점만 바꾸자

(이사야 2:1~22)

 

 

1.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받은 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한 말씀이라

2.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 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들 것이라

3.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

4.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5. 야곱 족속아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빛에 행하자

 

 

오늘 말씀 중심으로 <새판짜기, 구심점만 바꾸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새판짜기, 구심점만 바꾸자

부부관계가 영 껄끄러울 때에 이혼을 생각하면서 인생의 새판을 짜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혼을 한다고 해서 인생의 새판이 짜지지 않습니다. 구심점을 바꾸어야 합니다. 또 사업이 안 되어서 돈에 쪼들리고 힘들 때에, 돈을 더 많이 벌어서 삶을 극복하려고 하는데 구심점을 바꾸어서 새판을 짜야합니다.

최근 우리나라에 새판짜기의 열풍이 불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6.13지방선거가 끝났습니다. 매스컴에서는 야당의 패배를 보수진영의 괴멸이라고 표현할 정도입니다. 자유한국당과 바른미래당의 길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지금 보수진영의 정당들에게 요구되는 변화는 개선이 아닙니다. 혁신이나 환골탈태 같은 말로도 표현이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급기야 해체라는 말까지 동원되는 상황이기 때문에 완전히 새판을 짜야한다는 말이 반복적으로 매스컴을 통해 들려옵니다.

자유한국당의 김성태 의원은 당의 중앙조직을 해체시키고 새롭게 결성하겠다고 합니다. 바른미래당에서는 비대위원들을 젊은 사람들로 바꾸겠다며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어떤 시도를 해도 여전히 그 밥에 그 나물이라는 시선이 계속되기 때문에 자타가 안타까워하는 상황이 되어갑니다.

 

이렇게 새판짜기에서 가장 큰 문제로 부각되는 점은 바로 구심점입니다. 이 구심점이 대체 무엇일까요?

구심점(求心點)을 한자로 풀어보면 구할 구(), 마음 심(), 점 점()입니다. 다시 말해 마음을 구하는 것입니다. 구심점은 속한 단체의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 모으는 점입니다. 단체나 정당 혹은 나라의 구심점은 위치와 역할을 막론하고 모든 구성원이 마음을 보내어 머무르게 할 수 있는 점입니다.

현재 야당의 문제는 이 구심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구심점은 사상이나 이념 같은 추상적인 가치가 될 수도 있고, 구체적으로는 특정한 인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라 보수진영의 문제는 새판을 짜려고 해도 새판에 맞는 보수적 사고가 없다는 것입니다.

해방 이후로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라져서 살아왔습니다. 남북으로 갈라진 상황에서 보수가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급박하게 남북의 교류가 이루어지고 소통이 원활해져갑니다. 평창 올림픽, 남북 정상회담, 북미 정상회담을 비롯해 남북 고위급 회담이 계속해서 진행되어 갑니다. 미국과의 교류도 남북한의 교류처럼 활발해질 조짐을 보이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새판에서 보수의 역할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과거 북한의 태도를 떠올리며 의심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런 면에서는 저도 불안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참새 한 마리 땅에 떨어지는 것조차 하나님의 허락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고백을 합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께서 모르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십자가 복음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대한민국을 하나님께서 방기하시거나 무관심하게 여기실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다만 보수야당의 시점에서 새판을 짜기 위한 구심점이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분들만 탓할 필요는 없습니다. 국민들도 남북이 열려있는 새판에서의 보수의 역할에 대해서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완전히 미지의 세계를 걷게 된 셈입니다. 그러나 구심점 찾기가 꼭 어려운 것만은 아닙니다. 이건 제 생각이기 때문에 말씀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구심점 찾기는 너무너무 쉽고 오히려 새판짜기는 쉬운데 이것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안타깝지만 우리는 그들이 지혜를 가질 수 있도록 기도할 뿐입니다.

6.13지방선거에서 낙마한 보수진영의 후보자들은 더욱 어려움에 처해있을 것입니다. 경제적인 문제를 비롯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어려움을 겪으실 텐데, 이 일을 기회로 삼아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기만을 기도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면 지방선거에 당선되는 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복을 거머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사야 선지자는 바로 구심점을 바꾸어서 새판짜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사야가 보았던 선민 남 왕국 유다는 일부분을 개선하거나 혁신함으로써 회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완전히 해체시키고 새판을 짜야만 하는 상황임을 66장이나 되는 이사야서의 첫 머리에서 선언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구성자체는 간단합니다. 1~5절은 메시아 예언이고, 6~22절까지는 현재의 상황이 부분적으로 개선됨으로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무너뜨리고 새판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앞부분에서는 메시아의 도래를 예언하고, 뒷부분에서는 여호와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임할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주목할 부분은 2절입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말일에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문자적으로는 날들의 끝에라는 의미입니다. 이 단어는 이사야 전체에서 단 한 번 나오지만 그 의미가 중차대하게 느껴집니다.

날들의 끝에라는 말은 일정한 시대가 마감하는 시점을 나타냅니다. 말일에라는 말과 함께 메시아 도래를 얘기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실제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 사건을 이루시고 부활 승천하셨습니다. 이후 오순절 성령강림을 통해 예수님께서 영으로 임하셔서 교회를 이끌어가시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이 나옵니다. 이러한 상황까지만 보더라도 당대의 이사야의 메시아의 예언을 들었던 사람들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BC.730~680년대까지 예언활동을 했습니다. 700여년이 지난 후에 오실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 이 당시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말일에 메시아가 도래할 것이라는 이 말씀에는 특별한 기능이 있습니다.

첫째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예언함으로써 선민들의 악한 영적 상태를 깨우치게 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둘째는 지금 당면하고 있는 이 악함의 정도는 개선될 여지가 없이 끝나고 새판이 와야만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도래는 곧 완벽한 상태를 제시해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앞서 말일에라는 말을 언급한 것은 지금의 상황이 반드시 끝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상황도 다르지 않습니다.

대한민국의 상황을 정치적인 면에서만 이해해보면 해방된 이후로 남과 북은 갈라져서 살았습니다. 그렇게 이미 7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러던 중 서로를 악의 축으로 비난하던 북한과 미국이 교류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새판이 짜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전까지 남북이 막힌 상태에서 가지고 있었던 정치적 이념이나 사상이 이제는 쓸모가 없습니다. 완전히 바뀌어야만 하는 상황에 이른 것입니다. 물론 일부 보수진영의 정치인들은 여전히 상황을 우려하며 안보를 외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전제하에 이루어지는 일이라고 볼 때에, 이 상황은 결코 이전보다 위협적인 상황은 아닐 것입니다. 바로 12월까지 ICBM과 핵 실험이 이루어지던 상황에 비하자면, 북한이 비핵화를 공공연하게 선언한 지금의 상황이 위협적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이 독단적으로 비핵화의 행보를 멈추고 세계평화에 역행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이제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가혹한 압박을 경험하게 될 것이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설령 그 압박을 견디다 못해 초토화될지라도 누구도 불쌍히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안보는 군인들이 총을 들고 있어야만 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외교를 통해서 보다 큰 관점에서 안보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4절에도 이러한 상황과 비슷한 말씀이 나옵니다.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완전히 새판이 되리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선민들의 영적인 상황을 표현하는 것입니다만, 현재 우리나라의 물리적인 정치적 상황과도 맞물리고 있기 때문에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아 도래의 기능이 완벽한 상태를 제시함으로써 지금 선민들의 상태가 얼마나 썩었는지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말일에라는 단어를 사용함을 통해서 썩은 상태가 개선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끝나고 새판이 짜여야함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메시아 예언은 지금 종식되어야하고 해체되어야하는 상황에 살고 있는 우리가 어떠한 행동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가르쳐줍니다. 말씀드린 대로 메시아 예언은 현실이 얼마나 악한지를 보여주고, 이 현실이 끝나야만 함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동시에 지금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3절에 그 힌트가 나옵니다.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로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산에 오르다라는 것은 메시아가 도래해서 이루어지는 온전한 영적 상태에서 일어나는 일을 비유한 것입니다. 모든 선민이 여호와의 산으로 올라간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산으로 올라 갈 때에 하나님께서 말씀을 주실 것이고, 그 말씀과 율법이 몸을 통해 지켜지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앞서 보았던 112절의 말씀을 보면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대하는 것에 대한 경고였습니다. 아직 메시아는 오시지 않았지만 표면적으로는 이미 모든 선민들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는 상태입니다. 메시아가 도래해야만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112절에서 말하는 성전의 마당만 밟는 것과 오늘 본문이 말하는 메시아의 시대에 여호와의 산에 오르는 것이 어떠한 차이를 가지는 것일까요?

마당만 밟는다.’라는 말은 몸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올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루살렘은 사람들의 몸이 모이는 곳이었으나 구심점은 아니었습니다. 구심점은 말 그대로 마음이 모이는 곳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끝나야만 하고 온전한 의미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즉 몸은 어디에 있든지 마음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는 의미입니다.

 

메시아 도래는 곧 나라와 민족을 초월하여 모든 인류의 구심점이 되심을 의미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구심점으로 하는 것은 번제단을 구심점으로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성전 의미의 완성이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법궤 안에 말씀의 돌판이 있었습니다. 이 돌판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 세상에서의 구심점을 예루살렘으로 잡았던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번제단에서 번제로 드려지는 제물과 함께 나의 마음을 죽이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가기 위하여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구심점으로 붙잡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사야가 예언한 새판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이 새판이 오기 전에 악한 판에 속해있는 나의 삶은 반드시 종식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위해 해야 할 일은 예루살렘의 번제단을 구심점으로 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의 번제단은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입니다.

현재 보수정당들이 새판을 짜겠다고 당의 중앙조직을 해체시키고, 젊은 사람들로 비상대책위원회를 만들고 노력을 하지만 정말로 필요한 것은 구심점입니다. 문제는 이 구심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문 대통령을 구심점으로 삼은 민주당은 이러한 문제를 겪지 않습니다. 혹자는 이번 선거도 문 대통령 혼자서 했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대통령에 당선되고 1년이 지났는데 지지율이 79%에 이른다는 결과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해보자면 민주당 후보들은 선거를 거저먹은 셈입니다. 문대통령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구심점 삼아 인생을 거저먹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의 정치나 역사까지도 주관하시듯이 우리의 삶도 주관해나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지지하는 당에 관계없이 모든 이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구심점으로 삼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3절의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라는 말씀처럼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되어 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새판을 짜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점은 바른 구심점을 잡는 것입니다.

앞장에서 이사야는 선민의 상태를 소돔과 고모라에 비유하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는 단 열 명의 의인이 없어서 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약에 열 명의 의인이라도 있었다면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열 명의 의인은 이 세상 사람들이 악한 판에서 살아갈 때에 혼자라도 새판을 짜는 사람들입니다. 새판을 짜기 위해서는 예루살렘 성전의 번제단을 구심점으로 삼는 것입니다.

내가 살고 있는 지역이 예루살렘에서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구심점이라는 말의 뜻대로 마음이 가서 머물러야 할 곳이 예루살렘 성전의 번제단이 되어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는 이를 위해 아침저녁으로 상번제가 드려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민들이 이 상번제의 의미를 잊고 말았습니다. 몸은 예루살렘에 가서 양을 바치며 제사를 드리고 있지만, 구심점은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6절 이하에 그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들에게 동방 풍속이 가득하며 그들이 블레셋 사람들 같이 점을 치며 이방인과 더불어 손을 잡아 언약하였음이라라고 하였습니다.

동방은 앗수르나 아람이나 바벨론이 있던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뜻합니다. 이러한 이방인들의 종교와 풍속이 선민들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블레셋 사람들처럼 점을 쳤다고 했습니다. 미래에 대한 궁금증에 사로잡혀서 사는 이들과 똑같은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동방 풍속들에 사로잡히게 된 이유는 선민들의 구심점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7절을 보면 선민들의 구심점이 나타납니다. ‘그 땅에는 은금이 가득하고 보화가 무한하며 그 땅에는 마필이 가득하고 병거가 무수하며라고 하였습니다. 선민들이 은금과 보화를 구심점으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또한 병거와 마필은 당시 군사력의 핵심이었습니다. 힘을 길러서 그것들을 얻고자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은금과 보화를 구심점으로 삼았기에 다툼과 전쟁이 일어납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구심점일 때에는 평화가 찾아옵니다. 미국과 중국이 무역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하는데 다 돈 때문입니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싸움도 돈 때문에 일어납니다. 일본이 군사력을 키우며 독도를 자기네 땅으로 우기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의 은금이 구심점이 되어버리면 어떻게든지 강해져서 남의 것을 침략하고 먹으려는 성향이 드러납니다. 은금과 보화는 돈뿐만이 아니라 영토를 비롯해 가치 있다고 여겨지는 세상의 모든 것들의 상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구심점으로 삼으면 75억 인구가 배부를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재화는 누군가가 많이 가지면 내게 돌아오는 양은 그만큼 적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내 몫을 빼앗기지 않습니다. 그럴 때에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평화(平和)’라는 단어는 같을 평()에 화할 화()를 사용합니다. 화할 화()는 벼 화()에 입 구()가 붙은 말입니다. 쌀이 입에 똑같이 들어감이 평화로운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은금과 보화를 구심점으로 삼으면 평화가 올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구심점으로 삼고, 또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심점으로 삼는다면 75억 인구가 모두 달려들어도 하나님은 모두를 배불리실 것입니다. 이렇게 먹고 나면 끝나는 게 아니라 이제부터 하나님의 뜻이 나타납니다.

물론 75억 전체가 하나님을 구심점으로 삼지는 못하더라도, 소돔과 고모라의 비유처럼 단지 열 명, 스무 명, 백 명만이라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심점으로 삼는다면 그 삶으로부터 하나님의 뜻이 흐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위해서 대한민국 역사를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십자가를 구심점으로 삼고 인생의 새판을 깔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십자가 복음이 전해질 수 있도록 북한이든 일본이든 미국이든 러시아든 중국이든 다스려 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소돔과 고모라에 열 명의 의인도 없었던 것처럼, 하나님을 잊는다면 선민이라 할지라도 말일에라는 단어가 뜻하는 바대로 깡그리 없어짐을 당하고 말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완전히 하나님을 버리고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있음을 선민들이 은금과 보화에 구심점을 두고 사는 것으로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대한민국 교회에 해당될 수 있습니다. 몸은 예배당에 와있지만 구심점은 돈입니다. 목사님들이 부흥을 원하는 이유도 궁극적으로 따지고 보면 헌금이 많이 늘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가 말하는 대로 말일에 이 판이 깨어져야만 할 것입니다. 교회도 개선되거나 쇄신되는 것이 아니라 새판이 짜여야만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새판으로 깔려야하고 이것이 어렵지 않음을 알려주셨으니 감사합니다.

구심점을 십자가로 바꿈을 통하여 새판을 살게 하여 주시고, 주위의 사람들이 악한 판을 지속하더라도 새판인 내 삶에 오신 하나님께서 주변까지도 바꾸어 가시는 역사가 우리 눈에 확인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