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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되선택하지 않는 선민들 이야기_태승철

by 태승철 · 18-06-19 10:17 · 5,652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려고? 맞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복의 근원이 될 수 있는지 아십니까? 그렇습니다. 되선택하면 됩니다. 하나님이 인류 가운데 특정한 사람들을 선택하시는 이유는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도로 선택하게 하시려는 데 있습니다. 예언서 중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이사야서는 이렇게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으면서 하나님을 도로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되선택하지 않는 선민들 이야기

(이사야 1:1~31)

 

 

1. 유다 왕 웃시야와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 시대에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하여 본 계시라

2.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하셨도다

4.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5.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되선택하지 않는 선민들 이야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되선택하지 않는 선민들 이야기

이사야서 전체의 제목을 붙이자면 되선택하지 않는 선민들의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 후손인 이스라엘 민족도 선택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실 때에 이들의 상태가 어떠했는지가 중요합니다. 아브라함도 이스라엘 민족도 마음의 공백 상태에서 선택을 받았습니다. 이는 필연적으로 채워지기 위한 흡입력을 작동하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 마음의 공백으로부터 흡입력이 발생하는 상태 자체는 어떤 인간도 변경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주체성을 통해서 바꿀 수 있는 요소가 아닙니다. 인간의 주체적 활동이야말로 이 흡입력의 작동으로 인해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마음 안으로 어떤 대상을 흡입할 것이냐를 선택하는 것으로써 인간의 주체성은 나타나게 됩니다.

이것은 어떤 철학적 인간도 예외가 아닙니다. 아무리 뛰어난 사상과 사고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이 상태 자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위인이나 성인도 마음의 공백에서 비롯된 흡입력을 가지고 산다는 사실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훌륭한 인간과 그렇지 못한 인간의 차이는 마음의 공백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아니라, 마음 채움 거리를 무엇으로 선택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이렇듯 어떤 대상이 마음을 채워줄 수 있는가에 대해 선택하는 일에는 믿음이 작용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을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음의 공백 상태에서 흡입력이 발생하는 중에 선택하셨기 때문에, 선택받은 아브라함은 되선택이 요청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당신을 드러내시고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에 하나님을 되선택 함으로 응답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기 전에는 아브라함도 재물이나 아름다운 아내 혹은 고향 친척 아비 집이 마음의 채움 거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굳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후에 당신을 계시하시며 이것들을 모조리 버리고 떠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당신을 드러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 역시 사람이기에 무엇인가로 마음을 채워야만 기쁨과 만족이 생겨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필연성에 이끌리는 아브라함에게 선택의 대상으로 하나님 당신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해서 오늘 본문의 핵심구절은 4절과 28절에 여호와를 버리며라는 부분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물러간다.’라는 말씀 속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되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선민은 하나님을 버리고 떠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이 빛의 특권이라면, 하나님을 버리는 것은 어두움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혼한 사람만이 이혼을 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결혼을 하지 않은 사람은 부부간의 갈등을 겪거나 이혼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버리거나 업신여기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 선택받은 선민의 특권입니다.

4절을 보면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28절을 보면 그러나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할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이사야가 지적하는 하나님을 되선택하지 않은 선민들의 어두운 특권의 모습입니다.

다시 말해 여호와를 버리고 만홀히 여겼다라는 말은 하나님의 용도를 폐기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감히 하나님께 용도라는 말을 연결시키는 것이 거북하긴 합니다만, 하나님께서 실제로 당신을 우리에게 용도 즉 쓰임새 있는 존재로 제공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는 무한한 은총인데 바로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한 쓰임새입니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마음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우리의 마음 공백을 채울 수 있는 용도로 제공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버렸다라는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쓰임새 있는 존재로 선민들에게 제공하셨는데, 정작 선민들은 하나님을 불필요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선민들에게 정말로 하나님을 버렸냐고 묻는다면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버렸느냐?’라고 반문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경우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여전히 예루살렘의 번제단에서는 여호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가 계속되었고 기도도 열심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는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도 선민들이 하나님을 버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하나님을 버렸다라는 말은 본래의 용도대로 하나님과 관계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용도 있는 존재로 제공하셨을 때에 그 용도는 우리 마음을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마음을 채우시는 분으로써 쓰이기를 원하셨기에 스스로를 제공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용도를 폐기했기에 하나님을 버렸다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 더해 하나님을 만홀히 여겼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용도 폐기하고 세상의 가치를 얻기 위해서라면 여전히 하나님을 동원하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재물이 내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재물을 구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혹은 자녀 때문에 걱정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자녀로 인해 걱정이 생기는 이유는 자녀의 형통이 내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존재로 믿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마음 상태에서 하나님을 찾는다면 이것은 단순히 자녀와의 문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마음을 채우시겠다고 당신을 제공해주셨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의 자녀보다 더 큰 기쁨이 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돈이나 건강에 대한 걱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걱정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나의 기쁨과 만족이 되실 수 없다고 하나님의 용도를 부정하고 업신여기는 것인데 무서운 일입니다.

이사야는 바로 이러한 일이 선민에게서 일어나고 있음을 보았던 것입니다. 선민들은 제 딴에는 열심히 제사를 드리며 늘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제사와 기도야말로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행동이었습니다. 재물이 있어야 기쁠 수 있다고 믿어서 하나님께 재물을 구합니다. 자녀가 잘 되어야 만족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 자녀의 형통을 구합니다. 나이든 사람은 건강도 구하고, 젊은이들은 오락을 구합니다. 요새는 이렇게 취미에 극도로 빠진 사람을 속된 말로 덕후라고 한다죠? 이렇게 세상에 빠지는 것이 하나님을 용도 폐기하고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버린 뒤에도 여전히 하나님을 찾습니다. 하나님보다 더 좋아하는 것들을 얻기 위한 도구로 하나님을 동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선민들의 태도에 하나님이 진저리를 치고 계십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진절머리를 치시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배불렀고라는 말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선민들은 하나님께 뇌물을 바치듯 제물을 바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거 잡수시고 복 좀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래 제사의 의미는 이러한 뇌물의 성격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이외의 돈과 자녀 등의 세상의 가치를 흡입하려는 마음이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을 버리는 것임을 깨닫고, 제물과 나를 동일시하여 죽임으로써 죄로부터 돌이키려는 의미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 때나 우리의 시대나 이러한 제사의 의미는 퇴색되어 버렸습니다. 마음에는 하나님 이외의 세상의 가치들을 채우고 그것으로 기쁨을 얻고자 하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잘 이루어지게 해달라는 뇌물성의 제사와 기도를 드립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제사는 하나님 잡수시라고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하나님을 버렸던 나를 죽은 자로 여김을 기뻐하시지, 결코 내가 드린 제물을 드시고서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가 18절에서 드러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고 하였습니다.

제사를 드릴 때에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바로 죄입니다. 그런데 이 죄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제사를 드리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은 무려 일천 번제를 드렸는데 오늘 말씀에서처럼 그 일천 번제를 하나님께서 지긋지긋하게 여기실 만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이러한 제사를 지겹게 여기시기는커녕 기뻐하셨습니다. 솔로몬이 죄가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은 스스로 판단하는 것을 죄로 여겼습니다. 이러한 죄를 저지를 수 있는 자신을 천 번이나 죽였던 것입니다.

스스로 판단하는 기준은 기쁨이 될 수 있다고 믿어지는 것들입니다. 마음에 돈이 좋다고 여기면 돈을 벌게 하는 것들이 옳다고 판단합니다. 건강이 기준이면 건강하게 만드는 것들이 옳다는 판단을 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러한 판단이 죄임을 알고 일천 번제를 드렸기에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보는 선민들은 죄가 무엇인지를 전혀 모르는 채 제사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내 판단이 곧 죄입니다. 자녀일이 안 돼서 걱정하고 있다면 이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제사를 드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제사를 드리는 자세로 기도를 한다면 하나님! 제가 세상적인 기준으로 자녀의 일이 안 풀린다고 걱정을 했습니다. 이것은 자녀가 마음의 기쁨이 되리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런 믿음을 가짐으로써 하나님이 기쁨이 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을 용도 폐기해버렸습니다. 이러한 내가 번제단에서 죽어가는 어린양과 함께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선민들의 왜곡된 제사는 이와 반대입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비싼 돈을 주고 어린 양을 사서 제물로 드립니다. 그러니 자녀를 형통하게 해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합니다. 이 말은 앞으로 더욱더 하나님을 업신여기게 해달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정하신 용도를, 계속해서 폐기하겠다는 선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업을 위해 기도하고, 건강을 위해서 기도하고, 형통을 위해 기도하고, 이 세상의 기쁨거리를 얻기 위한 기도를 너무나 쉽게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도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 업신여김은 점점 커져갑니다. 더욱더 하나님을 잘 버릴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쓰임새 있게 되시기를 바라셨는데, 그 용도를 폐기하는 자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업이 잘되기를 바라는 이유는 사업이 마음의 기쁨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사업이 잘되게 기도하는 마음에는 하나님을 사업보다 못하다 여기는 판단이 숨어있습니다. 하나님의 용도를 폐기한 것입니다. 사업이 안 되는 상황에서 바른 기도를 한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하나님! 사업에 걱정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걱정이 되는 이유는 사업이 기쁨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하나님을 업신여긴 나는 어린 양과 함께 제단에서 각이 떠지고 불에 태워져서 완전히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업이 잘되거나 못 되거나 우선 하나님으로 기쁘게 해주시옵소서. 그리고 사업은 되든지 말든지 하나님의 뜻대로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이 하나 더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언 기도를 받는다는 말을 어렵잖게 합니다. 사업을 하는데 잘될 것인지 안 될 것인지 너무나 궁금하니까 하나님께 물어보고 대답을 얻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면 잘될 것이고, 저렇게 하면 안 될 것이라는 조언을 듣고자 합니다. 그러나 거짓 예언자들은 헌금을 많이 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정성을 봐서 상황을 좋게 해주실 것이다라고 대답해줄 겁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무엇을 팔거나 사고, 결혼문제에 대해서조차 자녀를 어디로 보내야 한다는 등의 말을 합니다. 이것을 예언 기도라고 받으러 다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참 예언자들은 정작 미래에 대해 관심이 없습니다. 예언자들의 관심은 예언과는 다르게 오직 현재입니다. 성경의 예언자들은 지금 선민과 하나님 사이에 간격을 측정해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선민의 마음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거리를 재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받은 하나님의 말씀이 미래에 대한 내용이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지금 하나님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지 못하고 계속해서 떨어져있다면 앞으로 멸망이 찾아오리라는 경고를 전하는 것입니다. 또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거리가 좁혀지면 미래에 어떠한 사건이 있으리라는 일들을 전했던 것입니다. 미래에 대한 예언은 어디까지나 현재에 종속된 것이지, 미래 그 자체를 관심의 대상으로 여겼던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가치를 더 얻기 위해 이루어지는 모든 예언과 기도는 전부 사이비라고 보면 됩니다. 우리는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나야 기뻐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 계신 하나님으로 기뻐해야만 합니다. 이것이 선민의 본분입니다. 미래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다 있습니다. 현재도 미래도 나는 하나님으로 기뻐하면 되고 만족하면 됩니다.

나의 기쁨과 만족의 근원이 되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창조주로, 역사의 주관자로, 나를 사랑하는 아버지로, 나와 연합하기를 원하는 남편으로 당신을 계시하시고 제시해주셨습니다. 이제 내가 할 일은 하나님을 되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은 애초에 하나님을 계시해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무지한 상태로 살아갑니다. 이들은 유전죄 안에서 하나님을 버렸을 뿐이지, 주체적으로 하나님을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된 상태임에도 돈 걱정이나 하고 산다면 이것은 주체적으로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하나님을 버리는 일이 됩니다. 심지어 오늘 본문에 나온 것처럼 제사와 기도를 드리는 중에도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죄가 무엇인지 가르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 살인하거나 강간하고 도둑질하거나 이웃을 탐하지 말라는 윤리적 차원에서만 죄를 가르쳐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위들은 죄의 열매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이 강조하는 죄는 열매를 맺게 하는 나무 그 자체에 대한 것입니다. 마음의 공백을 무엇으로 채우려 하느냐가 바로 나무입니다.

돈을 좋아해서 돈으로 마음을 채우려고 합니다. 세금 꼬박꼬박 잘 내고 도둑질하거나 거짓말 안 했으니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에 세금 떼먹고 도둑질하는 사람들만 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그 돈을 사랑함 자체가 죄입니다. 돈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을 업신여기고 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기쁨과 만족을 위해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분이라며 용도 폐기를 해놓고 돈을 선택하면서 죄인 줄을 모릅니다. 이러한 마음 상태에서는 예배를 드리면 드릴수록, 하나님을 찬양하면 찬양할수록 죄는 깊어갑니다. ‘나는 하나님을 더욱더 업신여기고 버리겠습니다. 하나님을 더욱더 잘 버릴 수 있도록 사업이 잘 되게 해주시고, 건강하게 해주시고, 형통하게 해주시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리고 있는 셈입니다.

본문 11절에서처럼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제사를 지긋지긋하게 여기십니다. 제사가 지긋지긋하다는 것은 예배가 지긋지긋하다는 의미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지긋지긋해 하시는 선민들이 어떤 사람들인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그리고 어떻게 달려져야만 하는가에 대해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과제는 하나님을 되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기쁨을 위해서 만족을 위해서 이 세상 것들을 선택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의 선민에게는 상번제가 필요했으며 우리에게는 십자가 생활화가 필요합니다. 우선 죄가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도둑질하지 않고 간음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고 이웃을 탐하지 않으면 선한 삶을 사는 줄로 착각하기에 십자가를 생활화하지 못합니다.

기쁨과 만족의 용도로 허락하신 하나님을 용도 폐기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리고 세상 가치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고 근심걱정하고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을 되선택하기 위해 십자가를 더욱더 생활화해야만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죄가 무엇인지를 몰랐기에 예배와 기도를 드릴수록 더욱더 하나님 업신여김이 강화되고 말았습니다. 이제 죄를 깨닫고 등한시했던 십자가 생활화에 모든 것을 걸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하나님을 되선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