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books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친정에 되돌아가 하는 신랑사랑_태승철

by 태승철 · 18-06-16 12:15 · 5,836
아버지 살아생전에 유산을 챙겨 집을 나갔다가 탕진하고 돌아온 탕자처럼, 예루살렘 왕궁으로 시집간 술람미 여인도 아버지와 어머니와 오빠들이 있는 친정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탕자처럼 망해서도 아니고, 친정 가족들이 그리워서도 아닙니다. 시골 친정집을 신랑 솔로몬을 사랑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술람미 여인의 친정으로 되돌아가 하는 신랑사랑. 이것이 선민의 하나님 사랑이 실제로 유효하기 위한 가장 본질적인 속성입니다.

친정에 되돌아가 하는 신랑사랑

(아가 8:1~14)

 

 

1. 네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더라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2.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머니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게 하겠고

3. 너는 왼팔로는 내 머리를 고이고 오른손으로는 나를 안았으리라

4. 예루살렘 딸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지니라

5.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가 너로 말미암아 네 어머니가 고생한 곳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에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친정에 되돌아가 하는 신랑사랑>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친정에 되돌아가 하는 신랑사랑

옛날 같으면 여자가 친정으로 돌아갈 때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신랑한테 소박을 맞았거나, 화로의 불을 꺼뜨렸거나, 제사상을 뒤엎어서 시부모에게 쫓겨날 때입니다.

그러나 요새는 친정 가족이 대세입니다. 특히 여자 형제가 많으면 친정은 강력한 관계의 대상이 됩니다. 시부모님이 마음에 부담인 반면에 친정 부모님은 편안합니다. 세상 모든 남자가 불편한 존재일지라도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오빠나 남동생은 편합니다. 어떤 경우에는 남편 모르게 친정 오빠들과 함께 사업에 투자를 했다가 망하는 바람에 그것을 메꾸느라 고생하는 경우를 몇 건 들어본 적도 있습니다.

드물게는 시집을 친정보다도 더 편하게 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시집이 권문세가이거나 큰 재력이 있는 경우에 그 위엄에 눌려서 친정과의 관계가 긴밀할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위해서 우리가 생각해볼 것은 평소에 친정과 연관 지어서 잘 생각하지 않는 부분입니다. 바로 신랑과 함께 한 시점이후로 이루어진 모든 역사가 친정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남편 때문에 주어진 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친정에는 없는 것들입니다.

 

오늘 아가서 마지막 장을 살펴봅니다.

하나님을 향한 선민이 부르는 사랑노래의 마지막입니다.

과연 어떤 내용이기에 친정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게 된 것일까요?

1~3절까지의 내용을 보면 참 난감합니다. 번역 상태도 아쉽습니다.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향해 노래를 하는데 감히 솔로몬을 어떻게 네가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1절을 보면 네가 내 어머니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더라면이라고 하였습니다.

차라리 솔로몬이 친오빠였다면 남들의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어울릴 수 있었으리라는 것입니다. 태생적 환경으로 인해 주변의 비웃음을 당하거나 나무라는 사람들이 있었으리라 여겨집니다. 왕궁은 보는 눈이 너무나 많고 격식도 너무나 많습니다. 솔로몬을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는데 방해를 받고 신경 쓰이는 요소가 많았던 것입니다.

2절을 보면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머니 집에 들이고라고 하였습니다.

시집간 여자에게 있어서 친정처럼 편안한 곳은 없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어서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라는 것은 솔로몬이 지혜가 많은 사람임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시대적으로 편차가 있을지언정 시바의 여왕이 찾아와서 솔로몬의 지혜듣기를 원하기도 했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지혜로운 솔로몬과 아무런 부담이나 격식이 없이 또는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으며 대화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게 하겠고라고 하였습니다.

석류즙도 시골 친정집을 떠올리게 하는 요소입니다. 우리나라로 말하면 어머니가 만든 식혜를 마시게 해주고 싶다라는 의미입니다.

왕궁에는 산해진미가 가득했습니다. 나라 안에서 생산되는 맛있는 것들이 모이는 것은 당연하고 심지어 솔로몬 시대는 이스라엘 역사상 부귀영화가 극에 달했던 때였습니다. 시골에서 자란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의 총애를 받으며 누릴 수 있는 것들은 엄청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오히려 솔로몬을 향한 사랑에 방해가 된다고 여긴 것입니다.

왕궁에는 지켜야할 격식이 많고 사람들은 눈치를 줍니다. 산해진미를 앞에 두어도 마음에는 솔로몬 생각뿐입니다. 아름다운 옷을 입어도 자신을 아름답게 하는 것보다 솔로몬에게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기껏 하는 이야기가 솔로몬이 차라리 친오빠였으면 좋겠다는 하소연입니다. 그렇게 남매처럼 어머니가 만든 석류즙이나 마시며 깊은 대화를 해보았으면 좋겠다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왕궁에서의 솔로몬은 근엄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술람미 여인은 아무 때라도 자신을 만나줄 솔로몬을 원하고 있습니다. 아가서의 마지막 장은 이처럼 한 여인이 지나칠 정도로 사랑을 갈구하는 마음으로 채워져 있는데,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이 이러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시골에서 자란 처녀에게는 왕궁에서 펼쳐지는 모든 장면들이 감탄과 환호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감사하며 누리기에도 부족할 텐데 술람미 여인은 오히려 시골의 친정집을 생각합니다. 이 친정집의 모습이 5절에 더욱 자세하게 묘사됩니다.

그의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가라고 하였습니다.

이 노래는 드디어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과 함께 친정으로 돌아오는 모습을 본 동네 사람들이 부르는 소리입니다.

이어서 너로 말미암아 네 어머니가 고생한 곳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에서 내가 너를 깨웠노라라는 노래가 나옵니다.

솔로몬 왕이 술람미 여인을 처음 보았던 자리가 바로 친정에 있는 사과나무 그늘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사과나무 아래에서부터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의 사랑의 관계가 시작되었습니다.

이처럼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이 처음만나 사랑을 시작하게 된 장소가 다름 아닌 술람미 여인의 친정집이었습니다. 술람미 여인이 친정을 그리워하는 이유는 단순히 가족들을 그리워함이 아닙니다. 솔로몬 왕을 처음 만났던 그 장소와 시점을 기준으로 술람미 여인의 인생은 전후로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솔로몬 왕을 만나 결혼한 후로는 주어진 것들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과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모든 나라의 왕들이 공주를 솔로몬에게 보냈고, 이스라엘 안에서도 권문세가의 세련된 딸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이 모든 여자의 시샘을 받는 자리에 술람미 여인이 있었던 것입니다.

옷이며 산해진미며 권세까지도 모두 솔로몬을 만난 이후에 주어진 것들입니다. 그런데 정작 술람미 여인은 친정을 그리워합니다. 솔로몬을 만난 사과나무 아래는 아직 솔로몬으로 인해 주어진 것들이 없는 곳입니다. 솔로몬은 이스라엘에서 최고의 부귀왕화를 누린 왕이었지만, 정작 부인 술람미 여인은 이러한 것들이 전혀 없었던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가기만을 바랍니다.

역설적이게도 바로 솔로몬 자신을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을 마음껏 사랑하고 싶은데 정작 불필요한 것들이 너무나 많이 주어졌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날마다 침을 흘리며 꿈에서조차 부러워하는 것들이지만, 술람미 여인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솔로몬에 대한 사랑을 방해하는 장애물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좋은 모든 것들이 하나도 없었던 장소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솔로몬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그 장소가 바로 친정에 있는 사과나무 아래의 그늘이었습니다.

부귀영화는 술람미 여인에게도 마음을 끌리게 하는 것들이었지만 솔로몬에 대한 마음이 자꾸만 흐트러지기 때문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에도 주는 대로 먹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먹을 수 있으니 그 맛있는 음식들 중에서 먹을거리를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저것이 다 신경이 쓰입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 밥상에 앉아서 반찬이 맛이 없다라는 말을 하면 어머니께서는 먹기 싫으면 먹지 마라고 혼을 내십니다. ‘다음번에는 더 맛있게 해주마.’라고 하셨으면 좋았을 텐데 숟가락 놓고 나가라고까지 하셨으니 술람미 여인과는 참 반대되는 상황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술람미 여인은 정작 하고 싶은 일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직 남편인 솔로몬 한 사람만 사랑하고 싶었습니다. 이 여자가 참 별스럽지만 이것이야 말로 선민이 하나님을 향하여 가져야할 사랑의 완결판임을 마지막 장에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격은 곧 마음에 라는 의식이 살아있는 상태입니다.

라는 의식을 갖게 된 시점에서 볼 때에 제일 먼저 확인되는 것은 나의 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알고 난 후로는 이 몸도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머니와 아버지를 통해서 나의 몸을 주셨고 형제자매들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으로 인해 내게 주어진 것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깨달아갑니다. 몸을 주셨고, 부모를 주셨고, 형제자매를 주셨고, 배우자를 주셨습니다. 배우자를 주신 것뿐만 아니라 자녀도 주셨습니다. 마치 시골 처녀가 왕을 남편으로 삼게 되자 왕궁에서 부귀영화를 얻게 된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우리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신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 사랑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만 사랑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이 주신 것들이 없는 상태로 돌아가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이 주신 것들이지만 그것들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마음을 통째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이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1034절에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일까요?

35절을 보면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이라고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이 대표하는 가족 관계처럼 여러 가지 환경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그것들과 불화해야 한다는 것일까요?

하나님께서 이러한 관계들을 주시기 전의 시점으로 돌이켜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와 비슷한 말씀으로 누가복음 1426절이 있습니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하였습니다. 부모와 처자나 형제와 자매 그리고 자신의 목숨까지도 모두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을 미워하라는 것은 이것들이 전혀 없었던 상태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이어서 누가복음 1825절에서는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고 하신 후에 29~30절에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전토나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는 다 버리라고 하십니다. 받기 이전 상태의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 왕을 남편으로 맞이한 이후에 많은 것들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이 하나도 없던 친정의 사과나무 아래로 돌아가고자 하는 바람을 갖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알게 되어서 나에게 주어진 많은 것들이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 오히려 이것들이 하나도 없었던 상태로 마음을 돌려보내라는 것입니다. 술람미 여인에게 있어서 친정으로 돌아가는 것은 솔로몬을 사랑하는 최초의 지점으로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사랑은 이렇게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한 대표적 인물이 아브라함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겠다,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 가나안 땅을 주겠다.’라는 여러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자세히 보면 아브라함은 이상하리만치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들을 귓등으로 스쳐지나가는 말로 여기는데도, 하나님은 전혀 기분 나빠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과 반대로 살아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 많이 있어야 감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좋아하시는 것은 오히려 주신 것들을 떨쳐내고 하나님을 향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귀한 배우자를 주셨으니 배우자에게 온 신경을 쓰며 기쁘게 하려한다면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버렸고 마음에서 아내 사라도 버렸습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배우자가 하나님 사랑의 방해가 된다면, 배우자를 주시기 이전의 마음으로 돌이켜야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에게서 주어진 것들이 하나도 없었던 시점인 친정집의 사과나무 그늘로 돌아가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곳이 솔로몬에 대한 태초의 사랑 지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것들이 없던 지점까지 돌아간다면 실제로 남게 된 관계들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이듯이 하나님은 이 세상의 왕이십니다. 술람미 여인이 자신의 부귀영화를 잊었을지라도 그 모든 것은 여전히 솔로몬의 다스림 아래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주관자이시기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하나 뿐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하나님이 주신 것들이 아무것도 없던 상태로 마음을 돌려보내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돌보시고 인도해 나가실 것입니다.

이혼이 많아지는 이유는 배우자를 최고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배우자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었다면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부부로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들이 하나님을 사랑함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은 모른 채 더 주시기만을 바랍니다. 안 주시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시켜서라도 받아내겠다는 일념으로 헌금을 드리고 충성봉사를 합니다.

그런데 술람미 여인은 그렇게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는 우리가 꿈에서조차 바라는 어마어마한 부귀영화가 주어졌지만 이 모든 것들을 쓸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영화에서 화가 난 재벌 총수가 책상 위에 있던 값진 도구들을 쓸어버려서 박살내는 광경 같습니다. 솔로몬 때문에 주어진 모든 것들을 내쳐서 박살내버리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솔로몬이 주었지만 그것들로 인해 솔로몬에 대한 사랑이 방해받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아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이지만 그것들로 인해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방해받는다면 하나님만 알게 된 때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선민과 이방인의 차이는 이 차이를 아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붙잡고 살면서도 하나님이 주셨는지조차도 모릅니다. 선민은 하나님이 주신 것들을 붙잡지 않고 인격의 태초로 돌아가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만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아가서는 바로 이러한 내용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본문 이후에 이어지는 이야기도 이러한 내용의 연장선상에서 부가적으로 쓰인 것들입니다.

 

아가서는 참 대단한 책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혁명적 변화를 요청하는 책입니다. 더군다나 마지막 장은 전율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술람미 여인은 부귀영화를 최고로 누린 솔로몬 왕을 남편으로 가졌지만 정작 자신에게 주어진 것들을 싹 치워버리기를 원했습니다. 오히려 아무것도 주어지지 않았던 친정집의 사과나무 그늘로 돌아가서 솔로몬만을 사랑하기를 간절한 마음이었는데, 이것이 바로 선민들이 하나님을 향해 가져야 할 사랑의 속성입니다.

우리가 매일 십자가 생활화를 위해 목 놓아 외치는 이유도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과의 싸움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셨지만 그것들이 내 마음을 빼앗아가게 되었으니 그것들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들을 주시기 전으로 마음을 돌려서 오직 하나님께만 마음을 드리고 싶어서 십자가 생활화에 목숨을 거는 것입니다.

솔로몬 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것처럼 왕이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내가 등진 나의 삶은 하나님께서 다스려 가십니다. 우리의 친정은 십자가입니다. 주어진 것이 하나도 없는 친정으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술람미 여인처럼, 십자가를 통해 나의 인격의 태초로 돌아가서 하나님 한 분께 마음을 전념하는 일에 여생을 바쳐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에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는 이유는 하나님 이외에 어떤 것에도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함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붙잡아 주셔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한 시도 잊지 않음으로써, 세상에 대해 죽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향하여 전념하는 마음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