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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내가 하는 모든 말의 팩트체크_태승철

by 태승철 · 18-04-21 10:03 · 6,458
삶의 내용은 결국 언어입니다. 판단도 생각도 말도 그리고 종국에는 행위도 언어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언어를 통한 판단과 생각 없는 행동은 반사적이고 맹목적이라 행위라고는 할 수 없으니까요. 그리고 이러한 언어는 그릇입니다. 그릇인 언어에 반드시 담겨야 하는 필수적인 내용물이 바로 '사실', '팩트'이지요. 팩트가 담기지 않은 언어는 바람떡같이 공허합니다. 그러나 그 팩트 또한 육적인 팩트인지 영적인 팩트인지를 반드시 체크해야만 합니다.

내가 하는 모든 말의 팩트체크

(잠언 15:1~33)

 

 

1.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

2.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

3.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

4. 온순한 혀는 곧 생명 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내가 하는 모든 말의 팩트체크>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내가 하는 모든 말의 팩트체크

언어 즉 내 입에서 나오는 말에 대한 내용들이 본문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7절을 보면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하여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정함이 없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14절에서는 명철한 자의 마음은 지식을 요구하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즐기느니라라고 하였고, 28절에서는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입에서 나오는 언어에 관한 교훈이 반복되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앞선 장들에서도 다루지는 않았지만 입과 혀라는 단어가 반복되어서 지혜에 대한 교훈을 주었음을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주제를 염두에 두고 제목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요새 가짜뉴스가 난리입니다. 방송 용어로는 마타도어(Matador)라고 합니다. 마타도어는 스페인어의 투우사를 뜻하는 마타토르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투우경기에서 투우사가 맨 마지막에 소의 정수리를 칼로 찔러서 죽입니다. 이처럼 가짜뉴스가 근거 없는 사실을 조작하고 흑색선전으로 상대방과 그 단체를 중상모략하고 교란하는 모습이 투우와 닮았습니다. 황소의 정수리에 꽂히는 칼처럼 치명적일 수 있기 때문에 가짜뉴스를 마타도어라고 일컫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짓이 사실을 압도하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영국 옥스퍼드 사전은 매년 그 한해를 가장 잘 반영하는 단어를 선정하는데 2016년에는 탈 진실(Post-truth)이라는 단어였습니다. 그 정도로 가짜뉴스가 횡횡하는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JTBC의 손석희 앵커가 진행하는 뉴스에서는 이러한 마타도어에 대비하기 위하여 팩트체크 코너가 있다고 합니다. 사실에 근거되지 않은 조작된 내용들의 뉴스와 정치가들의 억지주장이나 흑색비방들을 가려내겠다는 의도입니다. 과연 그러한 주장이나 비방들이 사실을 담고 있느냐를 따지고, 사실이 아니라면 가짜뉴스 억지주장 흑색선전으로 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이러한 팩트체크를 통해서 사람들이 진정한 의미의 가짜뉴스와 진짜뉴스를 구별할 수 있을까요? 뉴스관계자를 비롯한 기자나 방송인 혹은 사회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회학자들이나 정치가들 시사평론가들조차 가짜뉴스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합니다. 영적인 사실을 담지 않은 뉴스가 바로 가짜뉴스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인 사실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육적인 사실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주로 사실로 믿고 행동하는 것들입니다. 육적 개념이 영적 개념에 반대되기 때문에 신앙인들에게 부정적인 뉘앙스로 다가오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그것이 무조건 잘못 된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뉴스 등을 통해서 말하는 일반적인 사실이 바로 육적인 팩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육적인 팩트조차 아닌 거짓은 오늘은 아예 논외로 치고 생각해보기로 합니다. 다만 영적 팩트가 담겨있지 않다면 그 육적 팩트도 모두 거짓말이 됩니다.

내 삶의 상황을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육적 팩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 나의 정수리를 찌를 가짜뉴스를 스스로 만들고 있는 셈입니다. 분명한 사실이지만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17절을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이 나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의학 학교가 유명했던 도시로서 특산품으로 안약을 팔아서 큰 부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이곳에 있던 교회도 물질적으로 부유했던 것은 틀림없는 팩트였습니다. 주님께서도 이 라오디게아에게 대해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책망하셨는데 이것 역시 팩트입니다. 똑같은 상황에 대해서 주님이 보시는 것과 교인들 스스로 여기는 것이 서로 다른 사실로서 존재했던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육적인 팩트만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적인 팩트를 보셨습니다. 라오디게아 교인들은 스스로 마타도어 즉 가짜뉴스를 만들어 사실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정수리에 칼을 꽂는 짓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또한 라오디게아 교인들과 같은 태도를 가지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육적인 팩트의 언어로 가족들에게 말을 합니다. 그럴 때에 그 말은 가족들의 정수리에 꽂히는 칼과 다름없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 교인들은 예수님이 보시는 영적 팩트 상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스스로 부하다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가난함으로부터 벗어날 기회를 스스로 제거하였던 것입니다.

 

며칠 전에 미국 뉴저지에 계신 한 자매님으로부터 메일을 받았습니다. 그 내용이 참 인상적이어서 일부분을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간단히 제 소개를 하자면 일단 예수 믿고 쫄딱 망한 케이스입니다.

아들도 엉망진창잘 나가던 남편의 비즈니스도 폭삭

2007년에 하나님을 만난 이후 기도하던 모든 일이 구체적으로 망가졌습니다.

이제 다 망가졌겠느니 생각했는데 아직도 더 망가질 것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실패 가운데 확신하게 해주십니다.

나의 삶을 흔드는 주체가 사탄이 아닌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소소한 임재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물론 실패 중의 임재이지만요.”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전에 오늘의 번제의 말씀을 인용하셨습니다. 제가 전에 한 숨도 못자고 오늘의 번제를 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 잠을 잘 수 없었던 이유가 대통령도 어떤 현자도 갖지 못한 하나님을 갖게 되었음이 너무 기뻤기 때문이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매님도 같은 경험을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얼마나 세세하게 망하게 하셨는지 그 누구도 설명할 수 없는 안 좋은 일들로 이루어진 지난 몇 년의 시간들 속에서 저 혼자만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다고 하셨습니다.

육적인 팩트로 보면 이 자매님의 말씀대로 쫄딱 망한 것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팩트는 하나님을 실제로 만나서 하나님으로 부자 되기에 좋은 상태로 발전한 것입니다. 망했다는 것은 세상 기준을 따라 내가 나에게 전해주는 가짜뉴스일 뿐입니다.

아들도 엉망진창, 잘 나가던 남편의 비즈니스가 폭삭 주저앉았으니 세상 사람들은 당신 인생은 망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가짜뉴스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영적인 팩트체크를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망했다고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영적 팩트를 담고 있느냐를 점검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 가짜뉴스가 내 정수리를 칼로 찌르게 됩니다.

 

본문 1절을 보면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상식적인 문구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지혜와 의인이라는 개념과 연관 지어서 생각하면 깊은 의미가 담겨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먼저 분노를 쉬게 하여도라는 말에는 타인의 분노가 전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분노를 접했을 때의 일반적인 반응은 대개 정해져 있습니다. 맞서서 분노하거나, 분노가 격렬하거나, 내가 무언가 찔리는 구석이 있으면 겁을 먹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대체 누구의 잘못 됨에 분노하는 것인지 무엇에 대해 분노하는 것인지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분노하는 자를 대하는 지혜자와 의인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혜의 관점에서 볼 때에 분노가 생겨난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 또한 마음의 공백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진짜 이유는 죽음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몸이 살아 있어야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육체로 만나는 것들 중에 마음을 채울 수 있는 대상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결국 마음을 채울 수 없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이 원망과 분노가 됩니다. 돈으로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고 열심히 벌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내가 번 돈에 손실을 끼쳤습니다. 그럴 때에 분노가 나타납니다. 이 손해로 인해서 마음을 채울 수 없게 되었다고 생각할 때에 두려움이 생기고 그것이 분노로 바뀝니다.

여기서 유순한 대답을 하는 자 즉 의인은 이러한 상황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분노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입니다. 그가 분노하는 이유를 파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돈을 벌어야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건강하고 장수해야만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녀가 잘 되어야만 만족할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길을 막는 사람이 나타나면 그들은 당연히 분노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분노가 육체로 마음을 채우기 위한 것이기에 지혜자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모습이 불쌍하게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본문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라는 지시를 주는 것이 아니라 유순한 대답을 할 수 있는 마음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노하는 사람 앞에서 지혜자가 가져야 할 마음 상태는 곧 긍휼히 여김입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마음을 채울 수 없다는 지혜 중의 최고의 지혜를 가진 의인은 가짜뉴스를 통해 분노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이어서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 과격한 말은 분노하는 사람이 가치 있게 여기는 육적인 대상을 향해 똑같은 마음을 품은 자들의 반응입니다. 즉 육적 팩트에 근거를 둘 때입니다. 너 때문에 손해를 봤다며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서 분풀이 하는 것과 같습니다.

분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길 수 있는 지혜자라면 그의 분노가 틀렸다며 잘못을 타박하기에 앞서 우선 사정을 들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받아들여 주고 같이 울어주고 공감하면서 서서히 그를 깨우치게 할 것입니다.

 

4절을 보면 온순한 혀는 곧 생명 나무이지만 패역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온순한 혀는 원문을 보면 치료나 약을 뜻합니다. 직역하면 치료하는 혀입니다. 이러한 지혜자의 말이 생명나무와 같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최고의 지혜로 가진 자라면 육적 팩트에 사로잡혀 상실감을 느끼고 분노하는 사람을 치유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분노하는 이유는 언어 때문입니다. 언어 속에 육적 팩트가 담겨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7~8절에서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라고 하였습니다.

육적 팩트의 언어로 볼 때에는 돈이나 명예나 권력이 좋은 가치입니다. 그러나 영적 팩트의 언어를 사용하는 자들에게는 이것들이 배설물과 다름없습니다. 배설물은 빨리 배설을 해야 좋은 것입니다. 마음에 한시도 담아둘 수가 없습니다.

영적 팩트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돈이나 재물과 같은 것들은 마음에 한 순간도 담아서는 안 되는 가치 없는 것들입니다. 반면 육적 팩트의 언어에 사로잡히면 분노와 절망과 우울함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육적 팩트로 인한 거짓뉴스가 나 자신을 찌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를 찌름에 있어서 좌절하고 분노가 일어나고 우울증이 생겨납니다.

 

2절을 보면 지혜 있는 자의 혀는 지식을 선히 베풀고 미련한 자의 입은 미련한 것을 쏟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7절에서도 지혜로운 자의 입술은 지식을 전파하여도 미련한 자의 마음은 정함이 없느니라라고 지식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식이 바로 영적 팩트입니다.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이 영적 팩트는 지혜자가 선한 마음으로 베푸는 참 지식입니다. 영적 팩트가 담기지 않았다면 모두 거짓 지식이고 가짜뉴스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 영적 팩트는 인생경험도 아니고 세상학문으로 인한 지식도 아니며 사상이나 윤리 혹은 철학 같은 것이 아닙니다.

8절을 보면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라고 제사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에게는 일천 번제를 드린 경험이 매우 중요했을 것입니다. ‘번제는 세상의 가치로 마음을 채울 수 있다고 믿는 습성을 죽이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세상의 가치에 대해 호불호를 가리려는 나의 판단을 죽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정직한 관계에 설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를 잇는 선이 직선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최초의 관계의 대상이 되십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나의 상황을 바라보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돈을 못 버는 상황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적으로 망한 것입니까? 혹은 영적으로 흥하기 위한 발돋움입니까? 하나님을 최우선적인 관계의 대상으로 모시고 나서 세상을 바라볼 때에 영적 팩트가 담긴 언어로 판단하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나를 살리고 죽음의 길에서 꺼내어 줄 것입니다. 그렇기에 온순한 혀 곧 지혜자의 말은 치료하는 말이라고 했던 것이고 또한 생명나무라고 하였습니다.

 

이 생명나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기로 합니다.

앞서는 미국의 동부인 뉴저지에서 온 메일을 소개했습니다. 이번에는 미국의 서쪽인 캘리포니아 시골에 사시는 자매님이 보내 온 메일을 소개해봅니다. 자매님께서 제게 질문을 하셔서 설교 말씀으로 답변을 드린 적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다시 답장이 왔습니다.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십자가를 먼저 바라보면 하루하루 잘 죽을 수 있다고 하신 말씀을 듣고 생활습관을 바꾸었습니다. 기존에는 아침 먹고 뉴스 보고 오늘의 번제를 들은 후에 일을 하러 나갔는데, 이제는 일어나자마자 말씀 듣고 아침을 먹고 뉴스를 봅니다. 그리고 밭에 나가서도 말씀을 들으면서 일을 합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 뉴스를 들으며 계속해서 판단을 하던 저의 모습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뉴스를 우선할 때에는 당연히 육적 팩트가 담긴 언어를 사용하게 됩니다. 심지어 영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도 육적 팩트가 지배하는 논리의 범위 안에서 부르게 됩니다. 내 사업이 이러다보면 망할 것 같으니까 망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이렇게 저렇게 도와달라는 식입니다. 자녀가 이래서 문제니까 저렇게 바뀔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도와달라는 식으로 하나님을 부릅니다. 나의 삶을 육적 팩트가 담긴 언어로 이해하며 영적인 하나님을 부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육적 팩트에 종속시키려 합니다.

그런데 먼저 오늘의 번제를 우선시함으로써 마음의 언어를 영적 팩트로 채웠을 때 세상을 바라보는 시점이 달라졌다고 하였습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는 고백을 반복함을 통해 일천 번제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다보면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채우시고 나를 만나주십니다. 영이신 하나님이 나의 첫 번째 관계의 대상이 되십니다. 적어도 이러한 고백을 할 수 있는 상태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기존의 세상과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쫄딱 망한 것 같아도 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갖고 하나님으로 부자 되기에 유리한 조건으로 바뀐 것입니다. 내가 지독하게 가난한 이유는 그 자체로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으로 충분한 행복함을 느낄 수 있는 과정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나로 인한 기쁨과 만족함을 극대화시키길 바란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친구 목사님들은 큰 예배당 짓고 잘 나간다는데 왜 나는 이 모양입니까?’라는 생각이 들 때에 우선 하나님께서 완전한 만족과 기쁨을 주시기 위해 목회를 붙잡고 계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이 영적 팩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영적 팩트 대신 육적 팩트에 의존하려는 경향을 버리지 못합니다. 이제 나이가 40이 되고 50이 되고 개척한지는 10년이 넘었는데 교인은 손에 꼽을 정도 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이것을 망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육적 팩트의 언어인 가짜뉴스입니다. 이 가짜뉴스가 끊임없이 내 삶의 기쁨과 만족의 정수리에 칼을 꽂도록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을 막기 위해 일천 번제가 드려져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을 통해 기쁨을 찾고 판단하려는 나를 죽이기를 계속해야 합니다. 그럼으로써 하나님과의 첫 번째 관계를 직선으로 만들어야만 합니다. 이 상태를 유지하면서 장사도 하고 밭일도 하고 자녀도 양육하고 배우자에게 관여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나의 언어는 치료의 약이 될 수 있습니다. 반드시 팩트체크가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나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돈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돈이 없어서 망했다고 여기게 하는 육적 팩트입니다. 세상에서 배운 대로 받아들임으로써 불행은 시작됩니다. 돈이 없다는 사실 자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것을 내가 받아들일 때에는 영적 팩트를 살펴보아야만 합니다.

주님께서는 물질적으로 부유하다고 자부하던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어떤 것이 팩트입니까? 예수님의 말씀이 팩트입니다. 우리의 팩트체크는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 완성됩니다. 세상에 기쁨과 만족거리가 있다는 믿음에 대해 죽는 것이고, 세상에 대해 판단하려는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직선으로 유지하는 것입니다.

하루에 일천 번이라도 번제를 드리며 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에 내 마음에서는 영적 팩트의 언어만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영적 팩트가 내 생각과 마음을 지배할 때에 기쁨과 감사가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분노하더라도 유순하여 질 것이고, 마음에 상처를 입은 자들은 치유함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우리는 먼저 나의 언어 속 팩트를 체크해야만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 죽음으로써 영적 팩트의 언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분노한 자에게는 노를 쉬게 하고, 상처 입은 자에게는 치유함을 얻게 하며, 죽음으로 향하는 자들에게는 생명을 전하는 언어들이 내 입에서 콸콸 쏟아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