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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사탄숭배의 진수, 하나님 경멸_태승철

by 태승철 · 18-04-20 11:06 · 6,554
사탄숭배는 고의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의식을 통한 소극적 방식과, 적극적으로 마귀의 왕 루시퍼를 빛의 신으로 숭배하는 적극적 방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사탄의 소유가 된 자들의 숭배가 사탄에게 기쁨이 될까요? 아니지요. 사탄의 기쁨은 다른 데 있습니다. 선민들의 하나님 경멸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 즉 교회가 하나님을 경멸할 때 사탄의 기쁨은 절정에 달하는 것이지요. 선민의 하나님 경멸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사탄숭배의 진수, 하나님 경멸

(잠언 14:1~35)

 

 

1.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

2.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여도 패역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멸하느니라

 

11.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

12.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13.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

14. 마음이 굽은 자는 자기 행위로 보응이 가득하겠고 선한 사람도 자기의 행위로 그러하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사탄숭배의 진수, 하나님 경멸>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사탄숭배의 진수, 하나님 경멸

잠언의 주제를 언뜻 지혜로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러나 깊이 들어가 보면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는 의인의 특징적 요소로서의 지혜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즉 의인의 삶의 모습에서 지혜가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면 사탄에 대한 언급이 아주 빠질 수는 없습니다.

마태복음 1016절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에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 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하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속에서 비둘기같이 순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순결함에 지혜가 결여된다면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주님께서는 어리석은 순결함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 지혜로움의 전형적인 예를 뱀 즉 사탄으로 드셨습니다.

창세기 31장에서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라고 했습니다.

뱀 즉 사탄이 지혜롭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사탄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과 판단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명입니다. 사탄은 세상의 그 어떤 사람보다도 진리를 정확하고 명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탄의 정체성은 진리를 알면서도 그 진리에 대적함에 있습니다. 어떤 측면에서는 사탄이 가장 지혜롭기 때문에 숭배할 만합니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세상에는 사탄숭배가 존재합니다. 사탄숭배는 크게 소극적 방법과 적극적 방법의 두 가지로 분류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무조건적으로 행복하게만 해주시는 분이 아니라 온갖 역경과 고난과 불행을 주시기 때문에 인류를 배신했다고 합니다.

소극적 방법의 사탄숭배자들은 하나님이 인류를 배신했다라는 이 말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의적으로 무시하고 모독하는 자들입니다. 한편 적극적 방법의 사탄숭배자들은 아예 하나님을 어두움과 악의 본질로 여기고 루시퍼를 빛의 신으로 섬기는 자들입니다.

앞서 보았듯이 예수님께서 인정하실 정도로 사탄은 지혜롭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세상에서 어리석고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사탄숭배자들입니다. 사탄이 자신을 숭배하는 자들에게 의리를 지키거나 그들을 사랑하는 일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사탄에게 있어서 가장 무가치한 존재들이 사탄숭배자들인 것입니다. 사탄은 사탄숭배를 좋아할 만큼 어리석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그 정도에 불과했다면 예수님께서 뱀같이 지혜롭게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사탄이 비중 있게 여기고 선호하는 사람들은 바로 선민이고 교인입니다. 사탄을 기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택하시고 사랑을 주신 선민들이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사탄은 결코 사탄숭배자들로 인해서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가장 하찮고 어리석게 여기면서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해도 사탄에게는 기쁨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선민은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창조주로 고백하는 자들이고, 무소부재하신 역사의 주관자로 찬양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고백하고 찬양하면서도 하나님을 경멸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중에도 하나님을 경멸할 수 있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공경한다고 하면서도 경멸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진정으로 사탄을 기쁘게 하는 사탄숭배의 진수입니다.

비록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교회에 대한 기본적인 핵심 교리를 인정하는 정통 교회에 속했을지라도 사탄은 그들을 타락시킴으로써 진정한 기쁨을 찾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교회에 대한 핵심 교리를 인정하면서도 어떻게 하나님을 경멸할 수 있다는 것일까요?

본문 1절을 보면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중심은 여인에 관한 것이 아니라 지혜에 관한 것입니다. 지혜가 지니는 특성의 한 측면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당장의 상황이나 조건이 열악하거나 풍요로운 것은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지혜를 가진 자가 머무는 곳에는 세워지고 흥하고 기쁨과 성공의 열매가 맺힙니다. 다시 말해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사라지게 됩니다. ‘집을 세우되라는 의미가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집을 세우는 일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실 때에 혼돈이 뜻하는 무질서가 없어지고, 공허가 사라지고 열매가 맺힙니다. 그리고 흑암이 걷히고 광명이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지혜를 가진 자가 머무는 곳이면 이제까지의 상태와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창조 때와 같은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저희 할머니가 시집오실 때에 가마떼기 거적을 들추고 들어오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친정은 어느 정도로 부자였는가 하면 만주에서 기차를 타고 오면 보이는 것이 전부 아버지의 콩밭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부유했던 집의 딸이 가난한 한의사의 집으로 시집을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할머니가 시집을 오시면서 집안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지혜로운 사람이 있는 곳에는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걷히게 되고 가문이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단 여인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지혜로운 직장인이라면 직장을 세워가고, 지혜로운 학생은 학교와 학급을 세워갑니다. 이렇게 지혜가 머무는 곳마다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물러가는 엄청난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이 지혜의 특성입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내가 있는 곳에서 지혜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물리치는 역사를 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 답이 2절에 나타납니다.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여도 패역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멸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정직하게 행하는 자는 여호와를 경외하여도라는 문장을 다시 논리에 맞게 해석해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면 정직하게 행함이 증거로 나타난다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여호와를 경멸하는 자는 패역하게 행하게 된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써 정직하게 행하는 증거가 나타나면 하늘에서 비가 내리듯이 지혜가 내려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이 걷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처한 상황이 문제가 아닙니다. 흙수저로 태어났든지 금수저로 태어났든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음으로 지혜롭지 않다면 금수저로 태어났어도 혼돈과 공허와 흑암에 파묻히고야 맙니다. 그러나 흙수저일지라도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혜로움을 가지고 있다면 처한 상황에 광명한 평강이 주어지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증거는 정직함으로 나타난다고 하였습니다. 반대로 여호와를 경멸함은 패역함 곧 정직하지 않은 행위로 나타납니다. 여기서 말하는 정직함이란 단순히 거짓말을 하지 않거나 남을 속이지 않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정직하라, 거짓말 하지 말라는 말이 개별적으로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말하는 정직함이란 무엇일까요?

사람의 마음에는 움직임이 있습니다. 정직함은 마음의 궤적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그 궤적이 하나님께로 향한 직선이 되어있는 상태가 정직함입니다. 직선은 두 점 사이를 잇는 가장 짧고 곧은 선입니다. 선민을 향해 언급되는 정직함은 나와 하나님의 점 사이를 잇는 마음의 궤적 상태입니다. 나와 하나님 사이를 잇는 궤적이 직선을 유지하고 있을 때에 그것을 정직하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정직함으로 행함은 삶의 모든 상황에 적용됩니다. 나가서 일을 하든지 집에서 가사를 돌본다든지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께 직선으로 이어져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직선으로 이어진 상태에서 모든 일을 해나가는 것이 바로 정직으로 행함입니다.

구체적으로 돈이나 자녀 혹은 배우자로 인해서 문제가 생긴 사람이 정직하려면 마음을 하나님께 직선으로 보내야만 합니다. 믿음 때문입니다. 모든 물체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마음은 믿음이라는 에너지를 통해서 움직입니다.

사람의 마음에는 공백이 있고 영이신 하나님이 들어오실 때에만 채워질 수 있도록 지음 받았습니다. 이 마음의 공백 부분이 바로 영입니다. 이 공백은 채워지기 위한 흡입력 즉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을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어떤 대상에게 믿음을 가지고 움직인 궤적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아 직선으로 움직인 것이 바로 정직함입니다.

 

돈 문제가 있는 사람은 돈과 마음을 직선으로 연결시킵니다.

돈 문제가 해결되어야만 내가 기쁘고 만족할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게 되었습니다. 이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찾고 있지만 마음의 궤적은 직선이 아니라 굽은 선이거나 꺾인 선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이 말하는 패역하게 행함이고 하나님을 경멸함입니다.

하나님이 계심을 알면서도 마음이 돈 문제를 향하는 것은 하나님이 내 옆에 계시지만 결코 내 마음의 기쁨과 만족이 되실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나는 기쁨과 만족의 문제가 급한데 그 일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아무 역할도 하실 수 없으므로 하나님을 젖혀두는 것입니다. 그리고 돈 문제를 붙잡습니다. 돈 문제가 해결되어야 기쁨과 만족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고 역사를 주관하시고 생사화복의 주권자 되심을 고백할지라도 이것은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고백도 두 번째 세 번째로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가 이것을 가르치지 못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속성 중에 하나님만이 유일한 만족과 기쁨이 되신다는 것을 가장 먼저 가르쳐야 했습니다. 인간의 삶은 에덴동산에서 시작되었으나 타락함으로 인해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구원은 곧 에덴으로의 회복입니다. 에덴은 기쁨의 동산이고 기쁨은 곧 하나님의 우선적인 속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관계할 때에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첫 번째 속성이 기쁨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기쁨이 되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입으로는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고백하면서도 기쁨의 대상으로는 마귀의 유혹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하나님께로 움직여 가는 것이 항상 굽어지고 꺾어진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멸하는 일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찬양하면서도 현재 마음이 세상의 가치로 인해서 슬퍼하거나 걱정하는 이유는, 돈이나 자녀의 형통 혹은 배우자의 승진 명예와 권력 심지어 나라의 문제에 마음이 직선으로 향하면서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어디에서 존경받으실 수 있고 공경 받으실 수 있고 경외되실 수 있습니까?

하나님만이 유일한 기쁨이 되시며 만족의 원천이심을 고백할 때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우리에게서 사랑받으시는 것이고 공경 받으시는 것이고 경외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다면 모든 미사여구를 동원할지라도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본문 14절을 보면 마음이 굽은 자는 자기 행위로 보응이 가득하겠고 선한 사람도 자기의 행위로 그러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굽었다라는 것은 곧 하나님을 향한 마음의 궤적이 굽었음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기쁨과 만족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 자의 모습입니다. 바른 신앙인은 돈 문제나 건강문제가 생겼을 때에 오히려 돈과 건강을 경멸해야만 합니다. 돈이나 건강으로 인해서 문제가 발생했지만 내 마음의 기쁨과 만족에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돈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내 마음에 궁극적인 기쁨과 만족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돈을 경멸해야 합니다. 건강도 경멸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사람들이 추구하는 성공과 형통을 경멸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교인이라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멸하면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본문 12~13절을 보면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고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웃을 때에도 마음에 슬픔이 있는 이유는 돈 문제가 해결되면 기쁠 줄 알고 웃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는 슬픔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님 크기로 만들어진 마음의 공백이 돈으로는 채워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즐거움의 끝에도 근심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플 때에는 건강 문제만 해결되면 즐거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치유되어 건강을 회복하지만 삼일이 지나지 않아 다른 걱정 근심이 마음에 들어오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경멸하고 세상을 경외하는 굽은 마음의 상태입니다.

경외란 그것이 없으면 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입니다. 마음에 돈이나 건강 때문에 걱정과 근심이 생길 때에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걱정과 근심은 세상의 가치를 얻지 못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지지 않는 한 이 걱정과 근심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고백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고 돈을 경멸하는 정직한 자의 고백입니다.

마음의 공백 상태는 채워지고자 합니다. 그 대상을 하나님 한 분만으로 삼는 것이 정직함입니다. 돈은 없어도 되지만 하나님 없으면 안 된다고 여기는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함입니다. 그러나 많은 교인들이 철저하게 하나님을 경멸하며 살아갑니다.

 

11절을 보면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멸하고 있으니 흥할 수가 없습니다. 앞서 1절에서 보았던 집안을 세우는 지혜로운 여인과 집안을 허무는 어리석은 여인의 비유와 상통하는 말씀입니다.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라고 하였습니다. 누가 악한 자입니까? 뉴스에 나오는 범죄자들만이 악한 자들이 아닙니다. 진짜 악한 자들은 교회에 있습니다. 목사에 장로에 권사에 몇 십 년씩 교회를 다녔다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멸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어떤 범죄자가 몇 십 년간 하나님을 경멸한 자보다 악할 수 있겠습니까?

목사 장로 권사 집사들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돈 많이 벌고 예산이 늘어나고 좋은 예배당을 짓고 사업이 확장되는 것입니까? 이들이 대화할 때에 세상적인 형통이 존경을 받고 어깨에 힘이 들어간다면 그것이 악함입니다. 자녀가 형통하고 남편이 성공했다면 그 사람을 우러러보고 추켜세웁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들이 하나님을 경멸함입니다. 권사회로 모여서 하나님을 경멸하고, 장로회로 모여서 하나님을 경멸하고, 목사들이 모여서 하나님을 경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마음이 직선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부정직함입니다. 그런 마음에는 지혜가 생기지 않습니다.

가난하고 실패했고 자녀가 공부를 못할지라도 지혜는 흘러나올 수 있습니다. 정직하게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기쁨과 행복이 되심을 고백해야 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돈 못 버는 남편 앞에서도 불평할 수 없습니다. 남편과 돈이 기쁨이 될 수 있다고 믿기에 불평이 생기는 것입니다. 공부 못하는 자녀를 나무라는 것도 하나님 경멸이 될 수 있습니다. 자녀가 공부를 잘해야 기쁠 수 있다고 여기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건강을 위해서 간구하고 철야하는 것이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입니다.

 

제발 좀 하나님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것까지도 하나님께서 주관하시는데 몸에 병든 것을 모르시겠습니까? 몸을 하나님께 맡기고 믿어보시면 안 되겠습니까? 내가 내 몸을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께서 내 몸을 더 사랑하시는 것이 바르고 크고 옳다는 생각으로 믿으시길 바랍니다. 몸이 좀 아프면 하나님의 뜻을 찾기도 전에 치유되길 바라셔야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고 경멸해도 되겠느냐는 말입니다.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우리가 세상 것을 구하지 말아야 되는 이유는 세상 것이 귀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세상 것이 바보 같고 멍청한 것이기에 경멸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것이 아무리 귀하더라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보다 귀할 수 없고 하나님의 존재자체보다 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활동하심을 믿으면 세상의 어떤 것도 구할 입장이 아님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보다 귀한 것이 없으니 세상의 부족함이 많을지라도 하나님을 우선 찾는 것이 정상입니다.

사탄은 결코 사탄숭배자들을 비중 있게 여기지 않습니다. 사탄은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하는 자들이 삼위일체 하나님과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건과 그의 교회에 대한 기본 교리를 붙잡고 있는 정통 교인들이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을 기뻐합니다. 사탄은 마음이 굽어서 하나님께 정직하게 행하지 못하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는 것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하나님과 나 사이를 직선으로 잇지 못하게 하는 모든 대상들에 대하여 일천 번제를 드리는 마음으로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나와 하나님의 연결이 직선이 되게 해주시고, 그러한 마음으로 모든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