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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동물인 내가 짐승은 아닌 참 이유_태승철

by 태승철 · 18-04-18 09:39 · 6,201
인간을 동물이라 함은 객관적인 사실 언급이지만 짐승이라 하면 아주 심한 욕이 되지요. 짐승에게는 없는 지정의가 여전히 활성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 왜 짐승 같다느니 짐승만도 못하다느니 하는 질책을 하게 될까요? 짐승과의 진정한 차별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겠지요. 지정의 자체는 인간 됨과 짐승 됨의 진정한 차이가 아니라는 말도 됩니다. 그렇다면 이 차별화의 진짜 이유는 뭘까요? '뿌리'입니다. 혈통이 아닌 인격의 뿌리 의식입니다.

동물인 내가 짐승은 아닌 참 이유

(잠언 12:1~28)

 

 

1.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

2. 선인은 여호와께 은총을 받으려니와 악을 꾀하는 자는 정죄하심을 받으리라

3. 사람이 악으로서 굳게 서지 못하거니와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

4.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의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

5. 의인의 생각은 정직하여도 악인의 도모는 속임이니라

6. 악인의 말은 사람을 엿보아 피를 흘리자 하는 것이거니와 정직한 자의 입은 사람을 구원하느니라

7. 악인은 엎드러져서 소멸되려니와 의인의 집은 서 있으리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동물인 내가 짐승은 아닌 참 이유>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동물인 내가 짐승은 아닌 참 이유

사람에게 짐승 같다라고 하는 말은 심한 욕입니다. 사람을 짐승 같다든지 짐승만도 못하다고 욕할지라도 여전히 그 사람의 지정의는 작동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사람의 행위를 짐승에 빗대어 비난하는 셈입니다. 그러면 도대체 지정의가 활성화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짐승 같은 행위가 나오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을 사람 되게 하는 특징을 엿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에덴동산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본래 사람의 자리입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최고로 멋지고 높은 자리이고 얻어 볼만한 자리가 사람답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 때에 이처럼 사람을 최고의 모습으로 만드셨습니다. 사람이 만들어진 후에 수련의 과정을 통하고 연륜을 쌓아가면서 성숙되고 훌륭한 위치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 자체가 가장 완벽한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습대로 사람답기만 하면 사실 삶에는 어떤 문제도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의 자리는 에덴이었기 때문입니다. 에덴은 곧 큰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기쁘고 만족하기 위해서는 문제가 없어야 합니다. 사람은 이렇게 최고의 상태로 지음 받았으나 타락하여 최고의 위치에서 굴러 떨어졌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에 근거하여 말씀드리자면, 사람다움이 무엇인지를 알고 사람다움을 회복할 수 있다면 그 결과는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먹고 사는 문제를 시작으로 삶의 모든 문제들은 다 해결됩니다.

 

그렇다면 사람다움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백성들인 의인을 나무로 비유한 경우가 많습니다.

시편 13절에서도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시편 9212~13절에서도 의인은 종려나무 같이 번성하며 레바논의 백향목 같이 성장하리로다 / 이는 여호와의 집에 심겼음이여 우리 하나님의 뜰 안에서 번성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서 포도나무로 비유하셨고, 사도 바울은 로마서 11장에서 감람나무에 비유하였습니다.

나무의 특징은 뿌리에 있습니다. 나무의 뿌리는 땅 속에 숨겨져 있으면서 물과 양분을 흡수하는 역할을 합니다. 바로 이 흡수하는 모습이 식물과 나무와 인간이 동일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물인 짐승은 배부름을 위해서 한 곳에 머물지 않고 먹잇감을 찾아다닙니다. 나무가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양분을 빨아들이듯이, 사람은 마음의 배부름을 위하여 어느 한 대상에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과 짐승의 차이점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나 의인을 동물에 잘 비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양이 유일한 비유의 대상입니다. 이렇게 양에 비유되는 이유는 짐승과 다른 독특한 특성에 있습니다. 양은 배부름을 위해서 스스로 움직이지 않습니다. 양은 목자에게 뿌리를 내립니다. 목자가 움직이는 대로 따르며 풀과 물을 먹고 배부름을 얻습니다. 양은 목자에게 고정되어 있는 동물인 셈입니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양의 특성을 염두에 두고 선민에 비유했던 것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짐승은 움직이며 배부름을 찾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마치 나무처럼 뿌리를 내려 빨아들임으로 배부름을 찾습니다. 사람도 짐승도 움직인다는 점에서는 동물이지만, 사람은 짐승에게는 없는 인격적 뿌리의식이 존재합니다. 나무의 뿌리가 땅속에 뿌리를 내리고 물과 양분을 흡수하듯이, 사람의 마음도 어떤 대상에게 뿌리를 내리고 빨아들여서 채워져야 합니다. 이것이 뿌리의식입니다. 그런데 짐승에게는 이러한 인격적 뿌리의식이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마치 식물처럼 뿌리를 내리려고 합니다. 인격적으로 바른 뿌리의식을 가진 자가 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면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훈계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지정의를 가진 사람일지라도 짐승과 같다고 했습니다.

10절을 보면 의인은 자기의 가축의 생명을 돌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짐승 같다라는 말이 단순히 짐승을 폄하의 대상으로 비하한 것이 아니라, 훈계와 징계를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짐승의 특성이 존재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짐승과 차별점이 있어야 되는데 바로 그 차이점이 3절에서 나타납니다.

사람이 악으로서 굳게 서지 못하거니와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짐승과 다른 점은 이 뿌리에 있다는 것입니다. 의인의 특성은 사람다움입니다. 타락 이전에 하나님이 창조하신 사람의 특징을 되찾은 자입니다. 이것을 뿌리를 통해 되찾았다는 것입니다. 반면 악인은 뿌리의 문제에서 사람다움을 되찾지 못한 이들입니다.

인간은 인격의 뿌리와 뿌리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짐승에게는 인격의 뿌리와 뿌리의식이 없습니다. 뿌리는 한 곳에 박혀서 물과 양분을 빨아들입니다. 짐승은 육체의 배부름을 채우기 위해서 여기저기로 이동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마음의 배부름을 위해서 한 곳에 뿌리를 내리고 흡수력을 작동시킵니다. 즉 내가 어떤 대상으로 마음을 채우려하고 있느냐가 뿌리의식에 의해 결정되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1절의 훈계를 좋아하는 자는 지식을 좋아하거니와 징계를 싫어하는 자는 짐승과 같으니라는 말씀이 전제로 삼은 것도 이와 같습니다.

지혜를 주제로 하는 잠언에서 훈계조의 모든 내용은 인격적 뿌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훈계를 싫어한다면 짐승처럼 뿌리의식을 가지지 못한 자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격적 뿌리를 돌아볼 여지가 없다면 짐승과 다름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면 시냇가에 심긴 나무가 되기 위하여 마땅히 마음의 뿌리에 관심을 두어야 할 터입니다. 그리고 잠언이 말하는 지혜의 훈계들은 모두 이 뿌리를 바로 잡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인격적 뿌리를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는 짐승과 같이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잠언이 소용없습니다.

15절을 보면 미련한 자는 자기 행위를 바른 줄로 여기나 지혜로운 자는 권고를 듣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자기 행위는 열매입니다. 인격적 뿌리로부터 채워진 마음에 의해 손과 발이 움직여집니다. 그리고 16절에는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미련한 자는 당장 분노를 나타내거니와라는 말에서 분노는 나의 기준을 완성된 것으로 여길 때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배우자에 대한 분노가 있다면 마음의 상태, 인격의 상태, 생각의 수준이 나의 기준에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온전하다고 여기기 때문에 나에게 맞추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돌아볼 여지가 없는 자입니다.

사람에게는 뿌리의식이 있다고 했습니다. 부단히 자신의 인격적 뿌리를 점검하는 자가 본래 사람입니다. 그래서 3절에서 사람이 악으로서 굳게 서지 못하거니와 의인의 뿌리는 움직이지 아니하느니라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12절에서도 반복됩니다. ‘악인은 불의의 이익을 탐하나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인격적 뿌리를 내린 인간의 모습을 4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어진 여인은 그 지아비의 면류관이나 욕을 끼치는 여인은 그 지아비의 뼈가 썩음 같게 하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뿌리에 대한 비유 이후에 갑자기 어진 아내에 대한 언급이 나온 이유가 무엇일까요?

언뜻 보면 무관한 것 같지만 실상은 보다 근원적입니다. 아담이 육체의 연관성 안에서 맺은 첫 번째 관계의 대상이 하와였습니다. 마음으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만, 육체의 연관성 안에서는 하와가 첫 번째였습니다. 이것을 염두에 둘 때에 4절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4절 말씀은 첫 번째 관계가 갖는 영향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첫 번째 관계가 어진 아내이면 지아비가 면류관을 쓰게 되지만, 첫 번째 관계인 아내가 욕을 끼치는 여인일 경우에는 지아비의 뼈가 썩음 같게 한다고 합니다. 첫 번째 관계의 중요성으로 마음의 뿌리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224절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며 그 특성을 정하시기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고 하셨습니다.

아담이 최초 인간으로 태어나서 첫 번째 육체의 연관성에서 하와를 만났던 것처럼 마음이 맺는 첫 번째 관계가 바로 뿌리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첫 번째 관계를 맺는 것은 나무가 뿌리를 통해 영양분을 빨아들이듯이, 인간은 하나님 크기의 마음 공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음의 뿌리를 내려 빨아들이기를 원합니다.

이렇게 흡수력이 작용하는 마음이 맺는 첫 번째 관계는 그 자체로 인격적 뿌리의식을 형성합니다. 이러한 마음은 하나님이 아닌 배우자나 자녀나 돈을 비롯한 세상의 가치에 뿌리를 내릴 수도 있습니다. 그것들로부터 마음을 채우려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이 세상의 가치는 나의 인격적 뿌리가 됩니다.

나무의 뿌리는 원뿌리가 있고 곁뿌리가 있고 뿌리털이 있습니다. 원뿌리에서 곁으로 뻗어나가는 곁뿌리가 있고 곁뿌리에 뿌리털이 있습니다. 돈을 첫 번째 마음의 대상으로 삼으면 돈에 대한 믿음이 마음의 원뿌리가 됩니다. 그러면 친구를 사귀어도 돈과 관련된 사람을 찾습니다. 이러한 마음이 곁뿌리가 됩니다. 그리고 곁뿌리가 뻗어나가는 중에 마치 뿌리털이 퍼지듯이 돈과 연결된 모든 세세한 일들에서 기쁨과 만족을 추구하게 됩니다. 이렇게 빨아들인 양분들은 생각과 언어와 행위로 열매 맺게 됩니다. 그 열매들의 모습이 산발적으로 28절까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의 근원이 바로 뿌리입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될 것도 바로 이 뿌리의식입니다. 마음이 채워지기 위해서는 나무가 물과 양분을 흡수하듯이 무언가를 흡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그 첫 번째 마음이 맺게 되는 관계가 바로 첫 번째 대상인 원뿌리입니다. 그렇기에 잠언의 모든 말씀은 이 뿌리를 돌아보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이 세상의 어떤 것에도 마음의 인격적 뿌리를 내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뿌리의식이 없다면 짐승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대상에 뿌리를 내리고는 다시는 자신의 뿌리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 대상은 돈일 수도 있고 자녀의 형통일 수도 있으며 승진이나 성과일 수도 있습니다. 일단 뿌리를 내렸으니 돌아보지 않고 계속해서 빨아들입니다. 그 결과가 생각과 언어와 행위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은 뿌리의식이 사라진 짐승의 모습입니다.

뿌리의식은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 끊임없이 돌아보아야만 합니다. 우리의 뿌리가 하늘에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과 함께 연합하여 세상에 대해 죽는 것은 다시는 마음의 흡입력을 세상을 향해 발동시키지 않겠다는 다짐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죽음과 연합할 때에 부활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우리의 마음은 하늘에 뿌리를 두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생각과 언어와 행위에서 하늘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하늘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유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계속해서 바라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하여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고백함이 중단될 때에 마음은 자동적으로 세상을 향해 뻗어나갑니다. 나무의 뿌리가 물과 양분을 빨아들이듯이 세상으로부터 기쁨과 만족을 빨아들이려고 합니다.

입으로 생각으로 십자가를 고백할지라도 열매가 맺혀지지 않는 것은 뿌리가 유지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뿌리의식은 인격적이기에 돌봄이 필요합니다. 끊임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봄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마음의 뿌리는 하늘을 향해 뻗어가고 유지될 수 있습니다. 믿음은 곧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함은 일회성의 행사가 아닙니다. 세례 받을 때에 한 번 고백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장사할 때나 자녀와 함께 있을 때에도 잊으면 안 됩니다. 행여 TV에서 뉴스나 드라마를 보는 순간에도 우리는 십자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라는 고백은 지속되어야만 합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 현장에 대해서 죽어야 마음의 뿌리가 하늘로 뻗어갈 수 있고 하늘로 뻗은 뿌리가 유지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장사하는 현장에서 하늘의 열매가 맺힐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이 생각과 언어와 행위에서 열매 맺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봄이 중단되면 마음은 금세 세상에 달라붙어 뿌리를 내리려 하고 뿌리의식의 내용을 돌아보지 않으려 합니다. 기존의 상태가 옳다는 전제를 가지고 계속해서 빨아들이는 것입니다. 마음의 뿌리를 세상의 가치에 내린 상태에서는 그것들을 더욱 추구하기 위한 수단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이렇게 마음의 뿌리의식이 중요하기에 잠언의 훈계들은 모두 뿌리를 향해있습니다. 그러므로 뿌리를 돌아보지 않는다면 망하는 것입니다. 의인이 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은 뿌리 때문입니다. ‘훈계를 좋아하는 자라는 말은 뿌리가 하나님을 향해 뻗어있는 것을 계속해서 확인하는 자입니다. 반면 짐승으로 비유된 사람은 뿌리를 돌아봄이 없습니다.

타락한 인간에게는 십자가 생활화만이 사람다워질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세상에서 흡수하려는 기질을 근원적으로 차단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렇게 마음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믿음을 가진 자들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책임지시고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일회성의 고백을 믿음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뿌리를 세상에 내리고 예수님의 이름의 능력을 이용하려는 것일 뿐입니다. 믿음이 성립하지 않았기에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말 자체가 적용될 상황도 아닙니다.

우리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끊임없이 마음을 십자가에 두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을 따라 하늘에 마음의 뿌리를 내릴 수 있습니다. 마치 물구나무를 선 것처럼 살아갈 때에 이 땅에서 말이 나올 때마다 손을 대는 일마다 발이 닿는 곳마다 하늘의 열매가 맺히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마음의 인격적 뿌리를 끊임없이 관리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믿음이 지속됨을 통해 뿌리가 견고히 하늘에 뻗어가게 하여 주셔서 시냇가에 심긴 나무처럼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되 하늘과실을 많이 맺는 주인공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