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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오렌지색 줄의 십자가 프레임_태승철

by 태승철 · 18-02-21 10:50 · 6,798
동선 (動線)이란 건축물의 내외부에서 사람이 움직이는 자취나 방향을 나타내는 선입니다. 삶의 모든 문제는 바로 이 동선의 충돌에서 비롯되고 있지요. 하나님은 지금도 내 눈에 보이고 내 옆에 존재하는 모든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로서, 다스리시고 섭리하십니다. 백합화를 입히시고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시고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짐도 주장하시며 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시지요. 문제는 나와 하나님의 동선이 일으키는 충돌을 어떻게 피하느냐 하는 겁니다.

오렌지색 줄의 십자가 프레임

(시편 123:1~4)

 

 

1.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

2.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

3.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4.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오렌지색 줄의 십자가 프레임>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오렌지색 줄의 십자가 프레임

2005년에 출간된 이노베이션 스토리라는 책에 어린 코끼리를 훈련시키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린 코끼리를 훈련시키기 위해서는 질긴 오렌지색 줄로 나무에 묶어둔답니다. 어린 코끼리는 당연히 풀려나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그러나 수많은 시도가 실패하고 나면 묶여있는 현실에 체념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제 시간이 지나 코끼리가 장성하게 되면 그 힘은 100배 이상 증가합니다. 때때로 심사가 뒤틀리면 자신을 속박하던 쇠사슬까지도 뜯어버리고 난동을 피울 수 있습니다. 쇠사슬이 묶여있던 나무 쐐기가 뿌리째 뽑힐 정도입니다.

이럴 때에 주인은 창고에 넣어두었던 오렌지색 줄을 가지고 나옵니다. 광포하게 날뛰던 코끼리도 오렌지색 줄을 보고는 유순해집니다. 오렌지색 줄이 코끼리를 가두는 프레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프레임은 창틀, 뼈대, 구조를 말합니다. 오렌지색 줄은 코끼리가 자신을 바라보는 창틀을 형성합니다. 코끼리가 오렌지 색 창틀을 통해서 바라보는 자신의 모습은 오렌지 색 줄에 묶여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프레임은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미국의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가 정의한 바에 따르면 프레임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이라고 했습니다. 코끼리에게는 오렌지색 줄이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구조물인 것과 같습니다. 이 프레임은 우리의 믿음과도 중요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라는 프레임에 나를 가두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비전을 통해서 나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성공한 나, 부자 된 나, 높은 자리에 올라선 나, 형통한 나, 행복한 가정의 나라는 멋진 비전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나를 보면서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찾는다면 이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프레임 삼아 나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지금 그 십자가에 달려죽은 자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십자가 사건은 역사적으로 한 번 일어났지만 신앙적으로는 영원성을 띱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지금의 사건입니다.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 3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말한 것과 같이 십자가 사건은 언제나 지금의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 마치 광포하던 코끼리가 오렌지색 줄을 보고 얌전해지듯이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죽은 자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에 대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보니 나는 죽은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그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십자가를 맹목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라는 프레임에 나 자신을 가두는 마땅한 이유와 필요성이 있음을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다른 여러 가지 행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 프레임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 하나만 하면 구원으로부터 영생과 이 땅의 삶까지 다 해결이 되기 때문입니다.

 

본 시는 작자 미상입니다.

이 짧은 시가 우리 선민들의 삶과 신앙에 있어서 아주 근본적인 문제를 강력하고 인상 깊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시의 배경은 바벨론 포로귀환 후로 추정됩니다. 귀환한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려고 합니다. 그러자 주변의 이방인들이 심각한 방해 작업을 합니다. 이방인들의 방해와 조소와 멸시가 한계에 달하자 시인은 여호와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 특이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만을 기다리는 자신들에 대한 자의식의 표현입니다. 즉 자신들을 종과 노예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라는 프레임으로 자신들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러한 모습이 답답해 보일 수 있습니다. 조소와 멸시를 받아서 힘든 상황이 되었으면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저항하고 싸움을 하고 아니면 타협이라는 길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에서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극복의 과정이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할 때나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칠 때와 같은 용기와 권능을 허락해주셔서 이 방해를 능히 이겨나가기를 간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렇다면 선민답게 적극적으로 용기 있고 결단력 있게 눈앞의 장애들에 대해서 대처할 수는 없었단 말입니까?

다시 한 번 본문을 살펴봅니다. 1절을 보면 하늘에 계시는 주여 내가 눈을 들어 주께 향하나이다라고 하였는데 여기까지는 좋습니다. 그런데 2절을 보면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 같이, 여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 같이 우리의 눈이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며 우리에게 은혜 베풀어 주시기를 기다리나이다라고 하였는데 답답하기 그지없습니다.

고사 성어에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태도에는 진인사는 없고 대천명만 있습니다. 사지가 멀쩡한 사람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하늘의 도움만을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방해 앞에서 모멸과 멸시를 받는 것을 억울하게 생각했다면 맞서 싸우는 것이 타당하게 여겨집니다. 싸우다 저들도 힘들어 지치면 타협의 길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의 태도에는 이러한 난관의 극복과정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을 종으로써 격하합니다. 예루살렘 성벽을 건축하는 것도 하나님의 종으로써 시키시는 일을 하고 있을 뿐이라고 여기며,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하는 일이 아님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자신들이 원해서 하는 일도 아닌데 설상가상으로 이방인들이 방해하고 끝없는 멸시와 조롱을 보내고 있으니 구원해달라는 것입니다.

종의 프레임으로 자신들을 바라보는 이러한 모습은 요새 교인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입니다. 요즘 교인들은 일단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받았다고 믿고 나서는 자유로운 삶을 살아갑니다. 세상에 대한 시각은 세상 사람들과 똑같습니다. 똑같은 성공 기준을 가지고 그 좋아하는 비전을 갖습니다. 세상 기준으로도 형통하고 성공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 판단하고 분석한 후에는 추진해나갑니다.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철야하고 금식하고 하나님의 힘을 빌리고자 합니다. 또 성공을 위해 하나님께 투자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기 위해 충성하고 봉사하고 헌금을 합니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면 은총을 베풀어 주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눈물이라도 흘리시면서 복을 펑펑 쏟아 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오늘 시편은 이러한 신앙생활의 모습과는 전혀 일치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들은 포로생활을 통해서 깨달은 것이 있었습니다.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던 이유는 바로 앞서 언급한 요즘 교인들의 신앙생활과 같은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풍요와 다산을 위해서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젖 먹던 힘까지 추진력을 발휘하며 살았던 결과가 바로 포로생활이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스스로 판단하고 분석하고 소원하고 계획하고 추진한 삶을 살다가 그래도 부족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을 동원해서라도 얻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삶을 살면서 정작 하나님을 잃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뭐라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창조주이십니다.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모든 존재들을 다스리고 섭리하고 계십니다. 백합화를 입히시고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십니다.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져 죽는 것조차 주장하시며, 내 머리털까지 세신 바 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삶에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부분은 한 곳도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나의 생각을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의 움직임과 나의 움직임이 충돌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충돌 상황에서 내가 굽히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은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이 돌이키도록 징벌도 하시고 선지자를 통해서 가르쳐주시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모든 말씀을 무시하고 오로지 풍요와 다산을 쫓았습니다. 나의 추진력 판단력 분석력을 삶에서 그대로 표현하며 살기를 계속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머리털까지 세실 정도로 세밀하게 나의 삶에 대한 계획을 주장하고 원하시기 때문에 나와는 충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삶은 결국 하나님을 쫓아내고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상태로 전락합니다.

예를 들어 집에 손님이 오셔서 식사를 대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손님이 뭐라도 돕겠다며 자꾸만 주방에서 어슬렁거리면 바쁘게 식사를 준비하는 주인의 동선과 부딪히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가서 가만히 기다리시다 준비가 다 되면 맛있게 드시기만 하세요.’라는 말이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삶에 대해 이와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홍해 앞으로 끌고 오셨습니다.

뒤에는 애굽 군대가 추격해오고 있습니다. 백성들은 난리가 났습니다.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끌어냈느냐고 모세를 원망합니다. 그냥 애굽 사람들을 섬기는 노예로 살아가는 것이 나았다고 한탄을 합니다. 이러한 백성들에게 출애굽기 1413~14절에서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라고 말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앞에는 홍해가 있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있는 상황에 대해 관심을 가지시고 세밀하게 움직이고 계시니까, 마음을 움직여서 하나님의 동선과 충돌을 일으키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입장에서는 가만히 있을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있지 않는다면 창조주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잃게 됩니다.

지금까지 풍요와 다산을 위해 너무나 열심히 살아왔습니다. 성실하고 근면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돈 벌 수 있다면 바알숭배이든 아세라숭배이든 가리지 않고 동원하였습니다.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풍요와 다산을 이루는 수단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곧 가나안 사람들이 추구하는 풍요와 다산의 방법론입니다. 가만히 있는 것은 게으름이라 여겼기에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리고 창조주 하나님을 잃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삶에는 하나님께서 손을 뻗으실 수가 없습니다.

가나안 땅이 풍요로웠던 것은 거기에 살던 사람들의 노력이 아니었습니다. 세밀하신 하나님께서 늦은 비와 이른 비를 때를 따라 내리게 하셨기에 젖과 꿀이 흘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 모든 계획을 세우시고 움직여 가시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다들 열심히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가려 했고 그 결과가 포로생활이었습니다. 귀환한 이들은 이것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방인들의 성벽건축 방해는 극심했습니다. 멸시하고 조롱하며 심지어 왕에게 투서해서 반역죄로 모함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옛날 같았으면 풍요와 다산을 추구하던 결집력을 다시 한 번 발휘해서 당장 전쟁이 일어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하나님을 놓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 방해 받는 현장을 지켜보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나보다 나를 더욱 사랑하시고 계신 분이심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모든 일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살아계시고 관여하고 계십니다. 내가 손길을 뻗으면 창조주 하나님의 손길과 충돌을 일으키기에 자신을 종의 프레임으로 가두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창조주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으십니까? 또한 하나님께서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신 것을 믿으십니까? 나는 나의 머리털 개수를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세밀하게 아신다는 것이 믿어지십니까?

하나님께서 그 정도로 세밀한 관심을 보내고 계시고, 내가 침 삼킬 동안에도 나를 잊지 않고 계심을 믿는 것은 곧 그 하나님과 함께하고 하나님을 잃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꾸만 동선이 충돌하는 일은 하지 않아야 합니다. 주인이 손님을 부엌에서 내보내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나를 십자가라는 프레임에 가두어야 합니다. 나를 가두지 않으면 하나님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창조주 되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삶에 기쁨이 없는 이유는 자꾸 창조주 되신 하나님 아버지를 쫓아내기 때문입니다. 자꾸 동선이 충돌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태도는 답답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답답한 종의 프레임에 스스로를 가두는 것은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알고 계시고 보고 계심을 믿습니다. 종이 상전의 지시를 기다리고, 여종이 여주인의 지시만을 기다리고, 상전이 베푸는 일용할 양식을 기다리는 것처럼, 그 손에서 베풀어질 은총과 허락을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종은 주인의 허락이 떨어지지 않으면 행동할 수 없습니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을 가지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던 것입니다.

이들의 첫 번째 과제는 성벽 자체의 완성이 아니라 하나님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과제는 사업이 아닙니다. 사업장에서 하나님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오렌지색 줄에 코끼리가 자신을 묶듯이 사업장에서 나의 마음을 십자가라는 프레임에 묶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못 박혀 죽은 자임을 기억할 때에 마음은 답답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함과 멸시가 있을 수 있습니다. 당장이라도 뛰어나가서 무엇이든 해야 할 것 같은 답답함이 있을 수 있지만 우선 창조주 하나님을 잃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사랑하심과 세밀하심을 믿는다면 삶에서 하나님을 잃지 않는 것이 최우선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적자를 보더라도 하나님을 잃지 않기 위해서, 건강을 잃더라도 하나님을 잃지 않기 위해서, 실패를 하더라도 하나님을 잃지 않기 위해서 십자가 프레임에 나를 가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것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나를 십자가 프레임에 가두었을 때에 어떠한 역사가 나타나게 될까요?

이러한 역사가 요셉의 생애와 다윗의 생애에서 나타났습니다. 또한 여호사밧 왕이 암몬과 마온의 연합군이 침공했을 때에 성가대를 앞세워서 여호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찬양하자 적들이 자멸하게 되었습니다. 히스기야 왕 때에도 앗수르의 십팔만 오천 명이 하룻밤 사이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러한 역사만 있을 뿐만 아니라 똑같이 하나님을 잃지 않았을 때에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현장과 같은 일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순교했고 베드로도 순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잃지 않는 자들은 순교현장에서 순교 때문에 불행하지 않습니다. 전쟁에 승리했다고 해서 승리로 인해 기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프레임으로 나를 꼼짝 못하게 가두었다는 것은 우리에게는 십자가로 적용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면 움직일 수 없습니다.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썼기에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배에 창이 찔렸으니 소원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살갗은 채찍에 맞아 터졌듯이 내 마음에서 사랑하던 것들과의 찢어지는 결별이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못하는 십자가 프레임에 갇힌 상태에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크기로 만들어진 마음으로 들어오시고 나를 채워주실 것입니다. 그럴 때에 순교 현장에서도 불행하지 않고 세상적인 승리의 현장에서도 기쁨이 새삼스러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창조주의 동선과 충돌이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나의 동선과 창조주의 동선이 충돌하지 않기 위해서는 십자가 프레임에 가두어야 합니다. 세상의 시선으로는 답답하고 바보같이 보일지도 모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게으르다 욕할지도 모릅니다. 십자가에 나를 가두어 둠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을 잃지 않음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고, 나를 통해서 이루실 일에 대해서는 장갑으로 삼으실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가 이루어지는 삶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사람들이 되기 위해서는 십자가 프레임에 나를 가두어야 하고,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자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삶의 모든 순간을 맞이하라는 말씀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렌지색 줄을 통해 자신을 본 코끼리가 유순해지듯이, 십자가 프레임을 통해 나를 봄으로써 나의 동선과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의 동선이 부딪힘이 없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를 얻는 역사가 있게 해주시고 나의 삶은 온전히 아버지에 의해서만 진행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