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books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아메리카 퍼스트와 멕시코 장벽_태승철

by 태승철 · 18-02-20 09:51 · 6,512
America First! 트럼프 대통령이 선거공약 때부터 취임 후 지금까지 줄곧 외쳐대는 구호입니다. 그럼 우리나라나 다른 나라 정치인들은 Yes, We are Second!로 화답하여야 합니까? 공생과 상생의 정신이 물 건너간 이 구호의 가장 상징적인 실천이 바로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세우는 일이지요. 공존과 섞임에는 퍼스트가 없으니까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이 막무가내의 '퍼스트' 구호가 이토록 마음 깊이 그리운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메리카 퍼스트와 멕시코장벽

(시편 122:1~9)

 

 

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2.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3.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4.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아메리카 퍼스트와 멕시코 장벽>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아메리카 퍼스트와 멕시코 장벽

잘 아시는 대로 미국을 이끌어 가고 있는 트럼프 정부가 선거 때부터 외친 공약이 미국 우선주의 즉 아메리카 퍼스트입니다. 취임 이후에도 이 구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계속해서 정책에 반영되는 상황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문재인 대통령은 이 구호 앞에서 한국은 2등으로 족하다며 화답을 해야 하는 것일까요? 일본의 아베 수상은 실제로 트럼프를 만날 때에 행동으로 일본은 2등이고 미국이 1등이라는 것을 몸소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태도도 미국의 태도도 올바른 것은 아닐 것입니다.

독일의 메르켈 총리가 난민 수용을 설득시키기 위한 연설에서 혼자 가면 빨리 갑니다. 그러나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습니다.”라고 인디안 속담을 인용하였습니다.

난민 수용은 국가에 큰 부담이 되는 일이지만 해야 된다는 당위성을 주장한 것입니다. 이 좁은 지구촌에는 상생과 공존의 정신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최강대국인 미국 대통령의 마음속에는 막무가내식의 아메리카 퍼스트가 작용하고 있으니 걱정이 될 뿐입니다.

엊그제는 미 상무부에서 한국을 비롯한 몇몇 나라들로부터의 철강 수입에 대해서 53%의 관세를 매기겠다는 제안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올라왔다고 합니다. 참 이상한 것은 한국 내 수출이 급증하고 있는 미국산 쇠고기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균형을 이루고 있는 FTA조약이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눈에는 손해가 나는 부분만 눈에 띄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언론은 조용히 무역전쟁 전운의 가능성을 예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아메리카 퍼스트를 가장 상징적으로 잘 드러내는 행동은 지금 건설 중인 멕시코 장벽일 것입니다. 향후 2년간 20조원에 달하는 비용을 투자하여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에 장벽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아메리카 퍼스트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조화로움과 공존보다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환경이 필요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언제쯤이면 미국을 위해서도 조화와 공존을 통한 상생이 필요하다는 상식을 깨닫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웃어야 될지 울어야 될지 모르겠는데 이 막무가내식의 아메리카 퍼스트와 같은 일이 신앙적으로 우리에게서 일어나야 합니다. 체면도 염치도 없고 상생과 공존의 희망이 사라져버린 독불장군 어린이와 같은 마음이 선민들에게 그리움으로 다가와야 합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막무가내 식으로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쳤듯이, 선민은 여호와 하나님 퍼스트를 외쳐야만 합니다. 이 막무가내식의 여호와 하나님 퍼스트를 처음으로 외친 자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인 이유는 체면과 염치도 없이 조화와 공존도 거부하면서 여호와 하나님 퍼스트를 외쳤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난 것은 결코 고상한 결단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주변사람들이나 친척들 아내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무 대책도 없는 막무가내식의 처사였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나타나셨다고 주장하면서 지시하신 땅으로 가야한다고 합니다. 설득도 없고 염치도 체면도 없는 막무가내식의 여호와 하나님 퍼스트입니다.

백세에 얻은 이삭에 대해서도 그러했습니다. 이삭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들인 이삭에게 여호와 하나님 퍼스트를 행합니다. 하나님이 첫 번째고 이삭은 두 번째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첫 번째로 여기기 위해 아들을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죽이려는 이런 막무가내식의 아버지가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트럼프 대통령이 외치는 아메리카 퍼스트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외치는 여호와 하나님 퍼스트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아메리카 퍼스트가 문자대로 철저하게 지켜진다면 다른 나라는 어쩔 수 없이 손해와 피해를 감수해야만 합니다.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고 핵탄두를 7,200개나 소유하고 있는 미국을 어떤 나라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마음먹고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한다면 그것을 감당해내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여호와 하나님 퍼스트를 외치는 선민들의 삶은 세상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요?

아브라함이 염치불구하고 체면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 퍼스트를 외치자 믿음의 조상이자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통하여 그 후손들이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불어나서 하나님의 은총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다른 결과입니다.

 

오늘 시편 122편은 다윗의 시로서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기 위해 지구 표면 전체 중에서 유일하게 택하신 성전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선민들이 모여 살고 있는 이스라엘의 정치적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시는 이런 예루살렘에 영광과 평강이 있기를 기원하는 시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눈에 띄는 표현이 있습니다. 특별히 예루살렘을 둘러싸고 있는 외곽의 성벽에 주의를 기울여서 예루살렘 성의 안과 밖을 의도적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냥 예루살렘에 도착하였다, 예루살렘에 있다라고 하면 되는데 이것을 굳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라고 표현하였습니다.

7절에는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라고 하였습니다.

네 성 안이라고 하는 것은 성벽 안쪽에는 평안이 있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3절에서는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잘 짜여진 성읍이라고 하는 것은 문자적으로는 한데 묶여있고 하나로 결합되었다라는 뜻입니다. 이 의미를 잘 풀어보면 다윗의 의도가 보입니다. 예루살렘 성 안에는 성전과 왕궁과 집들이 있었습니다. 마치 장작을 끈으로 묶어서 다발을 만들 듯이 예루살렘에 존재하는 건물들을 성벽으로 묶어둔 것처럼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예루살렘 성벽은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서 무너졌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벽이 건축공학적으로 길이 남을 우수한 성벽이거나 어떤 강력한 나라의 군대도 범할 수 없는 철옹성이었기 때문에 다윗이 노래했던 것은 아닙니다. 진시황의 만리장성이나 우리나라 고려시대의 천리장성처럼 규모가 주목할 만하다거나 했던 것도 아닙니다. 다윗은 성벽이 가진 영적인 의미에 주목했습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은 어떤 의미에서 찬양 받을만한 성벽을 가졌던 것일까요?

5절을 보면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심판의 보좌 곧 다윗의 집의 보좌라고 하는 것은 다윗이 앉은 보좌는 선민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통치의 시작점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의 판단을 통치에 반영하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의 생각과 소원과 판단을 끊임없이 번제단에서 이루어지는 상번제를 통해 죽이는 성막의 삶을 실천하던 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판단을 죽인 왕의 자리에는 하나님의 판단이 임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의 판단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것들이 선민의 나라로 흘러가도록 하는 은총의 자리가 되었던 것입니다.

안과 밖이 구분되도록 철저하게 빈틈없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도성 안에는 다윗의 보좌가 있었고, 다윗은 자신의 소원을 끊임없이 상번제를 통해 죽이는 왕이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좋다고 여기시는 것들이 다윗의 보좌를 통로 삼아 끊임없이 예루살렘 성 안으로 흘러들어오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흘러들어오면 예루살렘 성안에 하나님께서 흘려보내고 계시는 하나님의 좋은 것들이 샘물이 되고 강물이 되어서 성벽위로 차오르게 되고 마침내 넘쳐흐르게 됩니다. 그래도 성벽은 안과 밖을 구분하는 채로 계속해서 굳건히 유지가 됩니다. 예루살렘 성벽의 참 의미는 여호와 하나님 퍼스트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좋은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세상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들을 차단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트럼프 정권이 세우는 장벽이 멕시코와 미국을 차단하듯이, 예루살렘 성벽은 세상과의 차단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그랬기에 포로생활로부터 귀환한 이들이 우선시했던 것도 성벽재건이었습니다. 성벽을 통해 철저하게 외부와 차단됨으로서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차고 넘치게 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안과 밖이 구분되도록 잘 짜여진 예루살렘 성벽은 이러한 영적인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

 

강릉 주문진에서 오대산 꼭대기인 진고개로 가는 길에 송천 계곡이 있고 그 옆에는 송천 약수터가 있습니다. 이 송천 약수터는 탄산수가 나옵니다. 철분이 많이 포함되어 있어서 많이 마실 수는 없지만 조금씩 마시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하여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입니다.

이 고갯길을 가다가 차를 세우고 송천 약수터로 가려는데 먼저 갔다 오는 사람들이 가지 말라고 합니다. 이유는 작년에 심한 가뭄이 계속되다가 비가 많이 온 적이 있었습니다. 강릉의 수원지인 오봉댐에도 물이 가득해졌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계곡의 물이 넘치게 되자 쌓였던 낙엽과 유기물들이 섞여 내려오면서 송천 약수터를 덮어버렸던 것입니다. 약수터에서는 변함없이 탄산수가 나오고 있었지만 계곡물이 덮쳐서 함께 흐르고 있으니 도저히 그 물을 마실 수가 없는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모습을 보고 외부로부터의 차단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외부로부터 차단되는 것이 오히려 외부를 위해서도 유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송천 약수터를 감싸는 벽이 있었다면 불어난 계곡물도 피해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철저하게 세상으로부터 차단되어야 합니다. 교회의 만족과 기쁨은 세상이 추구하는 가치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내려와야 되기 때문입니다. 선민이 느끼는 만족과 기쁨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올 수 있기에 여호와 하나님 퍼스트를 외치는 것이고, 교회의 벽은 세상의 가치를 차단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세상은 돈이 좋고, 건강이 좋고, 일류대학이 좋고, 명품 등이 좋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이 좋아하는 가치들이 교회에서는 완전히 차단되어야 합니다. 하늘에 계시는 하나님만이 좋으신 분이고 하나님께서 주시고 허락하시는 것만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있어야 합니다. 성벽이 있었던 예루살렘처럼 하늘의 은총이 차고 넘쳐서 세상으로 흘려보내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 성벽이 없다면 오히려 세상이 유입되어서 교회를 장악하고 맙니다. 세상에 장악당한 교회는 숫자적 부흥을 좋아하고, 많은 돈을 들인 화려한 예배당을 좋아하고, 넉넉한 재정을 좋아합니다. 세상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는 단체가 되어버립니다. 여기에 무슨 하늘의 은총이 임할 수 있겠습니까? 낙엽과 유기물이 섞인 계곡 물과 합쳐진 송천 약수터는 마실 수 없는 물이 되었던 것과 같습니다. 교회는 많은데 어디를 가도 마실 물이 없습니다. 탄산수를 마셨을 때처럼 짜릿하고 시원한 하늘의 은총의 물이 없습니다. 세상의 가치에 장악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마음에는 세상과의 공존과 섞임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마음은 하나님 크기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채우실 수 있고 하나님만으로 기쁨을 누리도록 만들어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돈이나 건강 혹은 일류대학 같은 세상의 가치를 집어넣고 공존하려고 하는 한 하늘의 은총은 내려올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실제로 어떻게 마음의 성벽을 쌓아서 여호와 하나님 퍼스트를 실현시킬 수 있을까요?

염치불구하고 체면불구하고 막무가내로 여호와 하나님 퍼스트를 외쳐야만 합니다. 그 외치는 방법은 세상의 가치가 들어온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마음의 시선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모습을 먼저 바라보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십자가를 밝히 보는 시선이 마음의 성벽을 쌓는 벽돌이 됩니다.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 퍼스트를 외침으로서 하늘의 은총이 쌓이고 넘치도록 해야만 합니다. 자녀들까지도 두 번째, 세 번째로 밀어내고 하나님이 첫 번째가 되셨을 때에 나를 채운 은총이 자녀들에게도 흘러들어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본문 8절에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라고 하는데 예루살렘 성안에 평안이 있을지어다라는 뜻입니다.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은 오히려 내 마음이 그들과 차단되고 하늘의 샬롬으로 가득 차는 것입니다. 형제와 친구들은 예루살렘의 성벽 바깥에서 살아가는 이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에게 하늘의 은총을 흘려보내기 위해서는 우선 이 성벽을 굳건히 지켜서 하늘의 은총으로 가득 채워야만 합니다.

채워지면 넘치는 것이 바로 아메리카 퍼스트와 여호와 하나님 퍼스트의 차이점일 것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만국 앞에서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치는 것처럼, 우리는 배우자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 퍼스트를 외쳐야 할 것입니다. 내가 하늘의 은총으로 차오르면 넘치는 은총이 배우자에게로 흐릅니다. 진정한 공존과 상생을 위해서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자리에서 성벽을 쌓고 여호와 하나님 퍼스트를 외치며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나의 마음에 이미 세상이 들어와 있다면 하나님과 공존할 수 없는 마음상태를 십자가에서 죽은 것으로 인정해야만 합니다. 한 번 죽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십자가에 시선을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모든 좋은 것들, 즉 하늘의 은총이 내려오는 지점은 오직 십자가뿐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십자가에 둘 때에만 하늘의 은총으로 채워질 수 있고 넘칠 수 있습니다. 다른 지점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려는 은총과 구원과 모든 아름다운 것들이 세상으로 내려오는 유일한 지점이 십자가입니다.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는 동안에만 흘러 들어올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대한 시선이 끊어지면 이미 나는 세상 것을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것을 보는 동안에 마음에는 세상이 들어올 것입니다. 계곡물이 덮쳐버린 송천 약수터 같은 마음이 되어버리면 하나님의 은총이 흘러들어올 수 없고 흘려보내도 소용이 없습니다. 하늘의 은총을 은총대로 맛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잠언 423절에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생명은 곧 내게 영원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살맛이 나게 하는 것이고 살아야 될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내게 만족과 기쁨을 주는 것입니다. 유일한 참 생명이신 하나님으로 채워질 때에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 되십니다. 그럴 때에 배우자에게 자녀들에게 동료들에게 또는 가는 곳곳마다 생명의 근원이 되어서 하늘의 기쁨과 만족이 넘쳐흐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서 우리는 어디를 가든지 세상과 성벽을 쌓아야 합니다. 세상과 이웃들에게 베풀어야 하는 것은 나의 생각이나 배려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과 생각과 배려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람들과 살면서도 마음으로는 십자가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십자가를 향한 시선은 내 마음의 성벽을 쌓는 벽돌이 될 것입니다. 세상이 들어오지 않을 때에 하늘의 은총이 가득하게 담기고 마침내 넘치게 되어 이웃들에게도 하늘의 은총이 흐르게 됩니다.

아메리카 퍼스트를 외치던 트럼프 대통령의 막무가내식의 태도처럼 우리는 모든 상황과 모든 사람들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 퍼스트를 외쳐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한 상생과 공존의 유일한 참 길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에 고정된 시선이 성벽을 쌓는 벽돌이 되어 마음을 지키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러한 사람들이 모여서 교회인 예루살렘 성벽을 쌓게 하시며 하늘의 은총이 차고 넘쳐서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근원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