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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충돌도 없는 시뮬레이션 게임_태승철

by 태승철 · 18-02-15 14:09 · 6,713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배는 항구에 머물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말입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모진 풍파를 예상하면서도 항구를 떠나 망망대해로 나갑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항해로서 삶을 살아갑니다. 그러나 복음의 삶은 다르지요. 십자가에 마음이 머물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항로가 나를 지나갑니다. 소위 오토바이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오토바이는 멈춰있고 도로가 오토바이를 지나 달리듯이 말입니다.

충돌도 없는 시뮬레이션 게임

(시편 121:1~8)

 

 

1.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2.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3.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5.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6.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7.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8.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충돌도 없는 시뮬레이션 게임>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충돌도 없는 시뮬레이션 게임

브라질 출신의 유명 작가 파울로 코엘료(Paulo Coelho)순례자라는 책이 있습니다.

파울로 코엘료는 직접 남프랑스에서 북부스페인까지 700km의 길을 순례한 뒤에 그 경험을 글로 옮김으로서 꿈꾸던 작가에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이 책에서 배는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지만, 배는 항구에 머물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닙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자체를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배가 항구를 떠나 망망대해로 나갈 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모진 풍파가 예상 될 때에도 나가야 되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이러한 순례자의 길을 걷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은 항구를 떠나는 배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 사건을 이루신 이유는 이 십자가가 모든 사람의 정박할 항구가 되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 마음의 시선은 십자가에 고정되어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라는 말씀을 자주 인용합니다.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얻지만 또한 믿음으로 삶도 얻습니다. 믿음으로 구원만 얻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삶을 얻지 못하고, 삶을 얻지 못하니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합니다. 복음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얻으며 오직 믿음으로 삶을 얻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상가 철학자 작가 등 모든 사람들은 인생을 순례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혹은 바다를 항해하는 배에 비유합니다. 사실 이런 생각은 기독교가 원조입니다. 이 세상이 순례의 길이라는 개념 자체가 기독교적 발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강조하는 삶의 형태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순례의 길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그네 길도 아닙니다.

 

십자가에 마음을 고정시키고 나면 스스로 길을 가는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에 계속 머물고 있을 때에 스스로 길을 찾는 것도 아니고, 스스로 길을 떠나는 것도 아닙니다. 길이 나를 찾아오고 길이 나를 지나갑니다. 십자가에 머물고 있을 때에 20대가 지나가고 30대가 지나가고 40대가 지나갈 것입니다. 그 지나가는 길들은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길이고 세상에는 없는 길입니다.

요셉은 꿈꾸는 자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고정시키고 늘 하나님과 대화하며 살았습니다. 그랬던 요셉에게 길이 지나가게 됩니다. 애굽의 노예라는 길이 지나가고 죄수라는 길도 지나가고 결국에는 애굽의 총리라는 길이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이 정도 되니까 천지를 지으셨다고 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준비하신 길로 지나가게 하십니다.

우리는 길을 떠나는 사람도 아니고 길을 가는 사람도 아니고 길에서 사는 사람도 아닙니다. 인생을 항해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마음을 고정시킨 사람들입니다. 그럴 때에 길이 나를 지나갑니다. 믿음이 없다면 그 유명한 파울로 코엘료조차도 이러한 사실을 알 수 없습니다. 머리 좋다는 철학자나 사상가 혹은 인생의 스승으로 불리는 이들조차도 믿음이 없다면 알 수가 없습니다.

요즘은 IT시대가 되면서 이러한 감각이 좀 더 현실적이 되었습니다. 오토바이 시뮬레이션 게임을 예로 들면 대형 화면 앞좌석에 앉아있으면 마치 실제처럼 도로가 나를 향해 달려옵니다. 오토바이에 앉아서 그 길을 달리는 느낌을 받게 합니다. 이때에 불시에 나타나는 장애물들을 피하며 오래 달리는 것이 게임의 목적이 됩니다. 복음으로 사는 신앙인의 삶은 마치 오토바이 게임과 비슷합니다. 길이 나를 지나갑니다. 장애물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이 나를 좌우로 지키시며 장애가 흘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이런 삶을 살아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 설이 다가오는데 명절의 기쁨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빚더미 위에 앉아 있거나, 가족이 병들었거나, 인간관계가 풀리지 않아서 고민하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길을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길을 떠나려고 하지 마세요. 그냥 내 마음을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의 십자가에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마음을 십자가에 고정시키면 하나님이 준비하신 길이 곤란에 빠진 여러분에게 다가올 것입니다. 여러분이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길이 지나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순례는 마음을 고정시키는 순례이기 때문입니다. 배가 항구에 정박하듯이 마음을 십자가에 고정시켜 머물러 있으면 항로가 배를 지나가는 것처럼 길이 지나갈 것입니다. 우리의 순례는 우리가 걸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은 복음성가로도 애창되는 유명한 시편입니다.

어제 보았던 120편과 마찬가지로 이 시도 성전 순례의 시 중의 하나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3대 절기에 모든 성인 남자가 성전으로 올라가서 예식에 참여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에서 농사지으며 살던 아버지와 아들도 절기를 맞이하여 길을 나섭니다.

1절을 보면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라는 말은 성전이 위치한 시온 산을 마음으로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라고 도움을 찾고 있습니다. 이제 광야를 지나려면 살인적인 더위를 지나야 하고 밤에는 사무치는 추위가 찾아올 것입니다. 치안부재로 도적떼의 위험이 있을 수도 있는데 이런 길을 걸어가야 하는 아버지와 아들에게는 힘이 없습니다.

그러나 2절에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라고 하나님으로부터 도움이 올 것임을 노래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 성전에 마음을 두고 멀고 먼 길을 가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주무시거나 졸지도 않으시고 실족하지 않게 지키시리라는 것입니다.

순례에 나선 아버지와 아들의 마음은 오직 성전이 있는 시온 산을 향합니다. 마음이 성전에 고정되어 있을 때에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지키신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둔 성전을 마음으로 그리워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만나 뵐 것이라는 기대에 부풀어서 마음을 성전에 고정시켰을 때에 그들을 지나가게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오토바이 시뮬레이션 게임에서 피해야 할 장애물이 등장하듯이, 광야를 지나는 순례자들에게는 많은 장애물이 있습니다. 뜨거운 해와 냉기가 가득한 달이 있습니다. 비바람이 있을 수 있고 도적떼와 맹수들의 위협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길이 이들을 지나가게 될 것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향을 그리워한다고 하는데 곧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그리워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고정시킨 상태에서는 이 땅에 시선을 둘 수 없습니다. 마음의 시선을 하늘로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선을 하늘로 향한 상태에서는 땅을 걸을 수가 없습니다.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선을 하늘로 향한 자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하나님께서는 길 자체를 움직여서 돌부리를 피하게 하십니다.

성전에 마음을 고정시켰다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성전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두신 하나님의 이름은 곧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성전에 마음을 고정시키는 것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마음을 고정하는 것입니다. 하늘을 보고 있는 자는 땅을 걸을 수가 없기 때문에, 이들을 위해서 오토바이 시뮬레이션 게임처럼 길이 지나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의 비결입니다.

 

믿음은 마음 심장을 꺼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신명기 65절에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라고 하셨습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다 드렸는데 힘과 뜻을 돈 버는 일에 소모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다라는 것은 마음 심장을 꺼내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라틴어의 크레도(Credo)나는 믿는다라는 뜻으로서 사도신경을 의미합니다. 이 크레도의 어원이 나의 심장을 꺼내서 드린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곧 믿는 것은 마음을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마음을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에 이 땅에는 마음을 줄 수 없고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 땅의 길을 지나가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성전의 의미가 십자가 사건을 통해 완성되었고, 우리에게 십자가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 31절에서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말했던 것과 같이 십자가에 시선을 고정해야만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편지할 때에 십자가 사건은 역사적으로는 이미 몇 십 년 전에 일회적으로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영적으로는 언제나 지금의 사건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유는 오직 십자가에서 영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그리워하며 만나고 싶고 하나님으로만 만족하고 기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사람들이 만족과 기쁨으로 여기는 가치들에 대해서는 귀를 막고 듣지 않습니다. 이것이 마귀의 장난이고 속임수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은 돈을 벌면 기쁘다고 말하지만 하나님 크기의 마음이 돈으로써 채워질 수는 없습니다. 자녀의 형통이나 외모나 명품이 채워줄 수 없습니다. 지난 설교에서 보았듯이 우리는 이러한 세상에 대해 내 마음의 공백이 하나님의 크기인데 어떻게 돈으로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이냐?’라고 비틀어진 자세를 취하는 것입니다.

돈 없어서 큰일이다라는 걱정이 생겨나는 이유는 세상의 말들이 떠오르기 때문인데, 그러한 말들은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모두 세상에서 듣고 배워서 익숙해져버린 것들입니다. 이럴 때에 비틀어야 합니다. ‘내 마음의 공백이 하나님 크기인데 돈이 있고 없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나는 하나님을 만나야만 한다.’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은 내 마음을 십자가에 고정시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며 마음을 채우는 것이 가장 급한 일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열심히 움직이는 것도 결국은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 십자가에 마음 시선을 고정할 때에 길이 지나가기 시작할 것입니다.

 

성막은 성전으로 바뀌었으나 그 구조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성막에는 지성소와 성소가 있고 지성소 안에는 법궤가 있습니다. 성소에는 분향단이 있고 오른쪽에는 떡상이 있고 왼쪽에는 등대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선민들에게 왜 광야에서 이러한 구조의 성막을 만들라고 지시하셨을까요?

선민들이 광야에서 사십 년을 지내는 동안 모세를 포함한 선민들은 어디로 가야할지 알지 못했습니다. 구름기둥이 움직이는 대로 따라갔을 뿐입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마음을 두어야 할 곳이 복지가 아닌 성막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성막에 마음을 붙이고 있으면 복지는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우기로 인해 요단강이 범람했을 때에도, 성막에 마음을 둔 선민들 앞에서 요단강은 갈라져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성막에 마음을 둔 백성들은 길을 간 것이 아니라, 길이 그들을 지나난 셈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들은 성막에 붙어있었을 뿐입니다.

후에 예루살렘에 성전을 짓게 하셨고 백성들은 흩어져 살게 되었습니다. 어디에 살든지 마음은 성전에 고정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죄의 체질 때문에 마음의 지성소에 세상 가치의 이름을 담습니다. 그 이름을 담는 이유는 그 이름이 가리키는 대상이 만족과 기쁨을 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상징하는 분향단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추구함입니다. 지성소에 이름을 담고 있으면 그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를 손에 쥐기 위해서 추구하게 됩니다. 추구하는 이유는 떡상이 상징하는 대로 배부름 즉 만족하기 위함입니다. 그 추구함의 기준이 되는 것은 등대가 상징하는 대로 판단합니다. 지성소에 담은 이름을 기준으로 무엇이 유리하고 불리한지에 대해 판단하는 것입니다. 등대는 어둠을 밝히는 것인데 곧 판단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음의 지성소에 돈을 담게 되면 돈 버는데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판단하게 됩니다. 사람을 사귀어도 돈 버는데 도움이 되는 사람을 사귀려고 합니다. 목사님들도 마음의 지성소에 돈을 담게 되면 부자 교인이 오면 반갑고 가난한 교인은 숫자로 밖에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삶을 살지 않게 하기 위해 성막과 성전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성전을 기억하며 마음의 지성소에 들어온 세상의 이름을 번제단에서 죽여야 합니다. 마음에 돈, 건강, 자녀의 형통, 명품 아파트 등에 대한 이름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것들이 있어야 행복할 수 있다고 믿었던 내가 온통 죄로 찌든 상태임을 깨닫고 번제단에서 죽는 것입니다.

성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도 그 죽음을 생활화할 수 있도록 번제단에서는 매일 상번제가 이루어졌습니다. 지금도 성전에서 어린양이 죽어가고 있음을 생각하며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순례의 길에 오른 아버지와 아들이 성전을 향해 가며 생각하는 것은 하나뿐입니다. 돈도 아니고 건강도 아니고 세상에서의 성공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기쁨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전죄의 체질로 인해 자꾸만 세상을 바라보며 걱정합니다. 돈이 없어서 걱정하고 건강에 이상이 생길까 걱정합니다. 일이 잘 안 될까 걱정하면서 이 세상 것을 믿으려는 체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성전을 마음에 담고 번제단에서 끊임없이 나를 죽였던 것입니다. 상번제의 어린양의 죽음을 내 죽음으로 인정하는 동안 길은 계속 지나갑니다. 하나님께서 성전과 성막을 주신 이유는 바로 이렇게 마음을 고정시키라는 것이었습니다.

 

신앙인의 모습은 파울로 코엘료의 순례자의 모습과 반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배는 항구에 정박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나 스스로 길을 떠나 항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배가 아닙니다. 성전과 성막은 마음을 고정시키기 위한 항구입니다. 고정시키면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지구위의 인생길은 예비하신 길이 지나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스스로 길을 찾는 이들은 설령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시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내가 떠나려는 길을 막으실 것입니다. 십자가로 돌아와서 정박하라고, 십자가에 마음의 시선을 고정하라고, 오직 십자가만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내게 충만히 임하실 수 있는 유일한 지점이 십자가이기 때문입니다. 그 십자가에 머물러 있어야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으로 충만해질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마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고 세상에 대해 죽었음을 고백하므로 세상을 들여놓지 않아야 합니다. 세상의 어느 길도 가지 않고 찾지 않을 때에 마음은 하나님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내가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길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길입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빌립 집사님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에티오피아의 내시에게 세례를 주고 안수한 적이 있었습니다. 39~40절을 보면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빌립 집사에게로 에티오피아의 내시를 이끄셨고, 그 다음에는 또한 사마리아를 빌립의 앞으로 보내셨습니다. 빌립 집사님이 가고자 해서 간 것이 아니라 그저 십자가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들을 차례로 빌립 앞으로 끌어다 놓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으나 우리도 이렇게 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내가 길을 찾을 필요도 없고 내가 길을 가야할 이유도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몸이 어디에 있든지 마음을 성전에 붙이고 있었던 순례자들처럼 해야 할 것입니다. ‘성전에 마음을 붙였다라는 것은 곧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마음을 붙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길은 하나님께서 지키실 것입니다. 하늘을 보고 있는 사람은 세상길을 걸을 수 없습니다. 길이 나를 지나갈 뿐입니다.

이렇게 살면서 여러분이 느끼시는 은혜와 감사와 충만함을 저에게도 알려주시길 바랍니다. 어제는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지나가게 하였다든지, 나는 십자가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엉켜있던 모든 문제들이 싹 지나가버리고 말았다든지

우리 삶은 충돌 없는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고정 된 의자에 앉아있으면 길이 지나갑니다. 십자가에 고정시키면 어떤 장애물에도 충돌함이 없이 십자가에서 예비하신 길을 지나가게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길을 찾지도 말고 길을 떠나지도 말고 해결 방안을 구하지도 말게 하여 주시옵소서. 문제가 산더미 같이 쌓인 지금 이 순간에 우리 마음을 주님의 십자가에 고정시키고 내일도 모레도 죽을 때까지 반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내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라 길이 나를 가는 순례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