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0,1)복음방송

먼저 먹기, 화평을 위한 최선_태승철

작성일
18-02-14 10:04
작성자
태승철
조회
6,328
2016년 9월에 있었던 마더 테레사 수녀님의 시성식을 기념하기 위해 출간된 책 제목이 '먼저 먹이라'입니다. 그분의 삶과 업적을 집대성했지요. 굶주리고 아픈 사람들을 보면, 다른 것 다 뒤로하고 먼저 그들을 먹이고 씻긴 다음에 그 영혼을 돌보셨음에 근거한 제목입니다. 그러나 진정 수녀님의 삶과 업적을 기리고 닮기 위해서 강조해야 할 말이 '먼저 먹이라'일까요? 아니지요. '먼저 먹으라'여야 합니다. 자신이 먼저 하나님을 먹었기에 그런 분이 되실 수 있었지요.

먼저 먹기, 화평을 위한 최선

(시편 120:1~7)

 

 

1.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내게 응답하셨도다

2.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3.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

4. 장사의 날카로운 화살과 로뎀 나무 숯불이리로다

5. 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6.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7.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먼저 먹기, 화평을 위한 최선>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먼저 먹기, 화평을 위한 최선

201694일에 프란체스코 교황이 직접 집전한 마더 테레사 수녀님의 시성식이 진행되었습니다.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서 출간된 책이 있는데 제목이 먼저 먹이라입니다. 빈자(貧者)의 성모로 알려진 마더 테레사 수녀님의 삶과 업적을 집대성하고 있습니다.

책 제목이 먼저 먹이라고 하는 이유는 마더 테레사 수녀님의 봉사 정신의 반영이라고 합니다. 가난하고 어렵고 헐벗은 사람들을 우선 먹이고 씻긴 후에 그 영혼을 돌보았기 때문입니다. 이유는 뱃속이 비면 하나님을 생각하기도 힘들겠다는 수녀님의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육체적인 굶주림을 해결함과 더불어 잊지 않고 챙겼던 것이 마음 채움이었습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님의 말을 인용해봅니다.

우리는 빵에 대한 굶주림만 굶주림이라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굶주림, 훨씬 더 고통스러운 굶주림이 있습니다. 사랑에 대한 굶주림, 나를 원하는 누군가에 대한 굶주림, 어떤 이에게 특별한 누군가가 되고 싶은 굶주림입니다. 환영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고, 거부당하는 마음이야말로 매우 큰 굶주림이자 커다란 빈곤일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주목해야 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정말로 수녀님의 삶과 업적을 기념하고 본받고자 한다면, 우리의 시선을 가난한 사람에게만 향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수녀님의 삶을 배우려면 우리가 잊고 살았던 가난한 사람을 보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수녀님 자신이 가난한 이들을 먹이기 전에 먼저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실에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켜야만 합니다.

책의 70쪽을 보면 기도는 우리 마음을 맑게 해줍니다. 맑은 마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본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시듯이 우리는 서로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은 맑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볼 때에 나온다는 것입니다. ‘맑은 마음으로 하나님을 본다라는 것은 곧 하나님을 먹는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맑다라는 것은 곧 비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들어오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 채워진 마음으로부터 가난한 사람들을 향하는 결단이 가능합니다. 하나님 크기의 마음 공백에 하나님을 먼저 먹는 채움이 없이는 수녀님의 삶은 불가능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단순히 마더 테레사 수녀님의 인간적 성격 때문에 그런 일을 행했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먼저 먹어 배불러진 사람은 이제 빈민촌에 가서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을 먹이고 씻기는 일에 종사해야 하는 것일까요?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으로 배불러진 마더 테레사 수녀님을 빈민촌으로 부르셨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사업장으로 부르실 것이고 정치가나 예술가로 부르실 수도 있습니다. 혹은 결혼으로 부르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삶에 공통점이 있습니다. 어떤 인생의 삶을 살고 활동을 하더라도 먼저 하나님을 먹은 사람은 자기 배를 채우기 위해서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업을 해도 남을 위해서 사업을 합니다. 내 배는 이미 하나님으로 채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나를 채우기 위한 움직임으로 삶을 살아가지 않습니다.

먼저 먹이라는 마더 테레사 수녀님의 삶을 배우기 위한 책이지만 실은 그 내용의 반쪽밖에 담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듭니다. 그 의도를 완전히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먼저 먹어야만 합니다. 제가 책을 편집하는 사람이었다면 먼저 먹었다라고 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빈민촌에서 행한 일들은 스스로 행한 것이 아닌, 먼저 먹어서 내 안에 모셔 들인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었다는 복음과 일치하는 결론이 나올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로 수녀님의 삶은 그러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시편으로부터 134편까지 열다섯 편의 시가 성전 순례의 시라는 주제로 묶여 있습니다. 순례의 시로 편집된 것은 바벨론 포로귀환 이후라고 여겨지지만 본문은 다윗의 시로 추정됩니다.

다윗이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해서 도망을 시작했을 무렵에 제사장 아히멜렉을 찾아가서 떡을 얻어먹고 골리앗의 칼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에 에돔 출신으로 사울 왕의 목자장이었던 도엑이 이를 지켜보다 사울에게 밀고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일이 밀고할 일이 아니었던 이유는 아히멜렉은 다윗이 쫓기고 있음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윗은 국가적 영웅이었고 사울 왕의 사위였습니다. 사울 왕에게 충성하는 자라면 다윗에게도 마땅히 잘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도엑은 그것을 뻔히 알고서도 사울 왕에게 아히멜렉이 배반하고 다윗 편에 선 것처럼 밀고하였습니다. 결국 제사장 팔십오 명과 그 가족들이 몰살당하는 전대미문의 참사가 벌어졌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은 사울 왕과 도엑을 염두에 두고 오늘 시를 지었다고 추측됩니다.

2~3절을 보면 여호와여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에서 내 생명을 건져 주소서 / 너 속이는 혀여 무엇을 네게 주며 무엇을 네게 더할꼬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거짓된 입술과 속이는 혀가 바로 사울 왕과 도엑을 염두에 두고 지칭한 것입니다.

그리고 5~7절에서는 메섹에 머물며 게달의 장막 중에 머무는 것이 내게 화로다 / 내가 화평을 미워하는 자들과 함께 오래 거주하였도다 / 나는 화평을 원할지라도 내가 말할 때에 그들은 싸우려 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시는 화평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삼각관계입니다. 내가 있고 상대방이 있고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 삼각관계 안에서 인간들의 화평은 결정됩니다. 설령 상대방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거나 하나님의 이름은 부르지만 하나님을 첫 번째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 삼각관계 안에 포함되어 우리의 과제가 됩니다.

여기서 메섹과 게달의 장막에 있는 사람들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이들은 삼각관계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상징합니다. 혹은 사울 왕처럼 하나님의 이름은 부르지만 하나님을 삶의 첫 번째 현실로서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이 삼각관계 안에서 화평의 문제가 어떻게 다루어지는지가 나타납니다. 이제 설날이 다가와서 가족들이 모이게 될 것입니다. 갈등이 생길 수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화평해질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이 오늘 본문에서 제시됩니다.

 

먼저 오늘 말씀의 제목을 다시 한 번 살펴봅니다.

먼저 먹기가 화평을 위한 최선입니다. 내가 먼저 먹어야 하는 것은 하나님입니다. 나와 상대방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삼각관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화평(和平)’이라는 한자가 참 재미있습니다. 화목할 화()는 벼 화()에 입 구()가 합쳐진 글자이고 같을 평()자가 이어집니다. 즉 쌀이 입에 들어가는 양이 같은 상태가 화평한 상태라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를 삼각관계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봅니다. 삼각관계 안에는 나와 상대자가 있습니다. AB가 만났는데 돈 문제가 생겼다면 삼각관계 안에는 AB와 돈이 존재하게 됩니다. 그러한 관계에서 A가 돈을 많이 먹으려고 할 때에 B와의 싸움이 발생합니다. 서로의 입에 들어가는 돈의 양이 다를 때 상대에 대해 불만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모시고 있는 삼각관계에서 하나님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돈이 포함된 삼각관계에서는 돈을 먹기 위해 싸우고, 쌀이 포함된 삼각관계에서는 쌀을 먹기 위해 싸웁니다. 또한 자리다툼을 벌이고 나라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포함된 삼각관계에서는 양상이 좀 다릅니다. 각자가 먹을 수 있는 하나님의 양은 무한대로 허락되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는 싸움이 벌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과 사람사이의 화평은 각자가 삼각관계 안에서 하나님께 집중할 때에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을 먼저 먹어서 배불러지면 싸울 일이 없어집니다. 이 삼각관계 안에서 두 사람에게 벌어지는 경우를 생각해봅니다.

 

첫 번째는 내가 하나님으로 배부르고 상대방도 하나님으로 배부른 경우입니다.

이럴 때에 나와 상대방 사이에는 자연히 화평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상대에게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상대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를 살피게 됩니다. 이상적인 경우입니다. 부부간에 사이가 좋으려면 서로 마주보고 사랑한다는 말을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우선은 각자가 하나님 먹기에 몰두해야 합니다. 아내는 기도하다가 하나님으로 배불러서 나오고 남편은 서재에서 하나님으로 배불러서 나오면 서로 간에 화평이 이루어집니다. 반대로 부부관계에서 애정을 사이에 두고 배 부르려 한다면 싸움이 발생합니다.

두 번째는 나도 상대방도 하나님으로 배부름이 없는 상태입니다.

삼각관계 안에서 하나님 먼저 먹기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 크기의 마음 공백상태가 채워지기 위해 24시간 흡입력이 작용합니다. 이 흡입력으로 만나는 사람을 통해 마음 채움 거리를 찾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마찬가지입니다. 그럴 때에 갈등과 부조화와 싸움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런 굶주린 배를 움켜쥔 상태에서 서로가 조합을 이루는 경우는 야합 이외에는 없습니다. 3의 대상을 향한 목표를 세우고 일시적으로 야합하는 것입니다. 국제사회에는 영원한 친구도 없고 영원한 적도 없고 영원한 이익이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이익을 위해서는 야합을 이룰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번 올림픽에 미국의 펜스 부통령이 왔는데, 오기 전에 일본에 들려서 아베 총리와 북한의 핵문제에 대해 공조를 다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와서는 외교적 결례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부적절한 행동을 하고 돌아갔습니다. 미국은 중국을 라이벌로 생각하고 북한을 적으로 생각하며 우리나라도 미국 마음에 들게 행동하기를 바라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역사적으로 미국 본토를 침공한 나라는 일본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 일본과 우방이 되어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들끼리의 야합입니다. 이렇게 제3의 목적을 위해서 일시적으로 야합할 수는 있지만 여기에 영원한 평화가 존재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은 우방으로 모여 있지만 이익에 따라 또 갈라지게 될 것입니다.

정리합니다. 첫 번째는 둘 다 하나님 먹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화평이 이루어지는 진정한 화평입니다. 두 번째는 어느 쪽도 하나님 먹기를 하지 않으므로 상대방을 보면서 24시간 마음 채움 흡입력의 작용으로 물고 뜯고 싸우고 상처를 주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삼각관계에서는 부부 간에도 마찬가지고 친구 간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서로에게 이해관계가 없을 때에만 친구관계가 유지되고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경우가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으로 배불렀는데 상대방은 그렇지 않은 경우입니다. 본문에 나온 메섹은 예루살렘 동북쪽에 위치한 흑해와 카스피해의 중간이었습니다. 게달은 예루살렘 남쪽의 아라비아 반도에 살던 도적떼를 일컫는 것입니다. 이들은 전혀 하나님과 무관한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다윗 또한 실제로 그들과 함께 살았던 것은 아니지만 그러한 사람들과 함께 있었음을 노래했던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을 먼저 먹었는데 상대방은 전혀 하나님을 먹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크기의 마음 공백에서 비롯된 굶주린 상태로 나를 만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나를 만날 때마다 헐뜯고 비난하고 자신들의 만족을 꾀하려고 짓밟습니다. 다윗이 오늘 시편에서 당하는 상황의 원인이 된 사울 왕과 도엑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이럴 때에는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이런 경우에는 쌍방간의 평화는 없지만 싸움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윗은 억울하게 죽은 아히멜렉과 제사장 가족에 대한 찢어지는 아픔을 가지고 사울 왕이나 도엑을 원망하는 노래를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들과 맞붙어 싸우려하지 않았습니다. 쌍방간의 평화는 없어졌지만 그렇다고 해서 싸움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그 가장 극단적인 예가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사건입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님은 기도는 우리 마음을 맑게 해줍니다. 맑은 마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듯이, 스데반 집사님이 기도할 때에 하늘 보좌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와 주님을 뵈었습니다. 먼저 마음으로 하나님을 먹은 것입니다. 이때에 사람들은 주변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먹기를 거부하고 스데반 집사님을 돌로 쳤습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은 그들과 싸우기는커녕 그들의 죄가 용서받기를 바랐습니다. 쌍방간의 평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싸움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태도가 이러해야 합니다. 내가 만나는 사람들은 하나님 먼저 먹기를 하지 않는 사람들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나의 삶에 물리적인 가치로 해를 끼친다 할지라도 그것은 내가 그들과 싸워야 하는 이유가 아닙니다. 앞서 마더 테레사 수녀님의 책을 먼저 먹이라가 아닌 먼저 먹었다라고 하였다면 좋았겠다고 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18절에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라고 하였고 또한 히브리서 1214절에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곧 원수 삼는 마음을 없애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마태복음 543~44절에서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신바 있습니다. 그런데 또한 마태복음 1034절에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하나님과 우리를 화평하게 하시고 이를 통해 이웃과도 화평하게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왜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라는 말씀을 또 하셨던 것일까요?

실제로 주님의 공생애를 보면 주님께서는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이나 대제사장들과 결코 화평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사회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 대해서는 냉담하다 못해서 호전적으로 다투셨습니다. 채찍을 들어 성전에서 장사꾼들의 상을 엎어버리셨을 정도입니다. 화평을 추구하는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이 삼각관계에서 하나님 먹기를 하고 있지 않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테레사 수녀님이 주님을 따라 빈민들에게 봉사했듯이, 주님은 오병이어의 기적 등을 통해서 빈민들을 먹이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선적으로 관여하신 것은 먼저 하나님을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마태복음 1036~37절에 보면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라고 하셨습니다. 설령 가족이라도 예수님보다 더 사랑한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먹지 않겠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화평의 십자가이지만 동시에 검이 되는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라면 자기 집안 식구조차도 원수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먹기 위해서입니다. 내 마음이 자녀를 사랑하여 그들을 마음에 우선해서 담은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윽고 자녀들과의 화평은 깨어지게 됩니다. 나를 채우기 위해 하는 사랑의 방식으로는 자녀와의 화평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형제간이든 부부간이든 부모자식관계에서든 화평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사랑의 대상이 되는 그들을 원수 삼아 마음에서 내보내야 합니다. 그들을 끌어안은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끗해진 마음으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을 먼저 먹을 때에 비로소 화평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럴 때에 설령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먹는 사람들이 아닐지라도 내가 그들에게 빼앗길 것이 없기 때문에 싸움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내 몫은 어차피 하늘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 아버지와 주님과 성령님이 내 몫입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내 기업인 한 누구도 이 기업을 빼앗을 수 없으며 흠집조차 낼 수 없습니다.

나를 원수처럼 대하며 미워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라도 우리는 이들과 싸울 이유가 없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라고 하였고 히브리서에서도 화목과 거룩함을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싸움이 생기면 자연히 원수를 마음에 담게 되고 하나님을 잃어버립니다. 원수를 담으면 원수가 없어져야만 행복할 것이라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에는 또한 하나님을 먹을 수 없게 됩니다.

마더 테레사 수녀님의 삶은 흉내도 내지 못할 정도로 거룩하고 모범적인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먼저 먹이라는 책의 제목은 한 가지를 놓치고 있습니다. 그러한 마더 테레사 수녀님은 그러한 삶을 살기에 앞서 하나님을 먼저 먹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먹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이 세상에 대해 죽어야만 합니다. ‘기도는 우리 마음을 맑게 해줍니다.’라는 말처럼 마음이 맑아져야만 거룩하신 하나님을 내 안으로 모실 수 있습니다. 이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을 먼저 먹고 마더 테레사 수녀님이 그랬듯이 우리의 모든 활동이 남을 위한 것이 되게 하여 주시고, 가는 곳마다 화평의 씨앗들이 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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