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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말씀으로 비틀어야 바로 보인다_태승철

by 태승철 · 18-02-13 10:12 · 6,740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들의 시각은 근본적으로 비틀려있습니다. 세상을 세상이 보듯이만 따라하는 한 시는 나올 수 없지요. “서툰 시 한 줄을 축으로 세계가 낯선 자전을 시작한다.” 그래요, 우리 마음은 물리적인 환경에 둘러싸여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용하는 언어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생각과 말을 바꾸면 마음은 같은 환경에서도 전혀 다른 세계를 맞게 됩니다. 시인의 시 한 줄이 지구를 낯설게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의 능력은 어디까지일까요?

말씀으로 비틀어야 바로 보인다

(시편 119:1~176)

 

 

17. 주의 종을 후대하여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18.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

19. 나는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사오니 주의 계명들을 내게 숨기지 마소서

20. 주의 규례들을 항상 사모함으로 내 마음이 상하나이다

21. 교만하여 저주를 받으며 주의 계명들에서 떠나는 자들을 주께서 꾸짖으셨나이다

22. 내가 주의 교훈들을 지켰사오니 비방과 멸시를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23. 고관들도 앉아서 나를 비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렸나이다

24. 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말씀으로 비틀어야 바로 보인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말씀으로 비틀어야 바로 보인다

진은영 시인의 앤솔러지라는 시가 있습니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을 보면 서툰 시 한 줄을 축으로 세계가 낯선 자전을 시작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시인들을 향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들의 시각은 아름답게 비틀려져 있다라고 합니다. ‘비틀려졌다라는 것은 곧 심사가 틀어졌다는 의미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거부하는 것을 뜻합니다. 항상 비틀려져 있지만 그것이 아름답게 비틀려져 있다는 말입니다.

앞서 보았던 시의 마지막 줄은 이렇게 아름답게 비틀린 마음에서 나오는 사고방식이야말로 늘 보아왔던 세상을 낯선 세상으로 만들어 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생각합니다. 평범한 일상의 덮개에 가려졌던 세계가 시 한 줄을 만남으로써 특별한 상황으로 변할 수 있기에 사람들은 시의 효용성과 능력을 찾습니다.

또 다른 예를 들어봅니다. 나희덕 시인의 푸른 밤이라는 시에서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연인이 싸우고 연락을 끊으면서 내가 너한테 연락을 하면 사람이 아니다라고 수없이 다짐을 했지만 그런 생각조차도 실제로는 마음이 연인에게로 향하는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생진 시인의 있었던 일이라는 시의 한 구절에서는 사랑은 우리 둘만의 일, 겉으로 보기에는 없었던 것 같은데 없었던 일로 하기 에는 너무나 있었던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사랑한다고 해서 세상은 변하지 않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합니다. 그런데 헤어지고 나자 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사랑을 할 때에 나는 목숨을 걸었다는 말입니다.

이런 시를 읽다보면 마음에 찡하게 울려오는 것이 있고 다른 느낌 다른 세상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만 더 읽어보도록 합니다. 박준 시인의 광장이라는 시의 한 구절입니다. “사람이 새와 함께 사는 법은 새를 새장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마당에 풀과 나무를 키우는 일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배우자와 함께 살아가는 이유는 내 말을 듣게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진정으로 함께 행복하게 살기위해서는 그 사람이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시인의 시 한 구절이 내가 사는 세상을 낯설게 해주고, 내가 잊고 있었고 굳어진 일상에 의해 가려졌던 인생의 풍성한 아름다움을 되찾게 해줍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시가 이러할진대 하물며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어떤 힘을 발휘하는 것일까요? 말씀으로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지구에 낯선 자전을 불어넣으시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십니다.

 

언어는 마음에 환경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육체가 놓여있는 환경에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환경은 곧바로 마음까지 전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언어를 통해서 환경은 마음으로 전달이 되고 마음을 반응하게 하는 것입니다. 육체가 놓인 상황은 객관적 사실입니다. 이 자체는 마음에 어떤 느낌도 주지 않습니다. 단순한 사실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중립적 가치관을 가진 사실을 언어로 표현할 때에 주관성이 생겨나면서 마음에 반응과 느낌을 불어넣기 시작합니다.

예를 들어 돈이 없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불안과 염려와 근심이 생길 것입니다. 그런데 돈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걱정과 근심을 불어넣는 것이 아닙니다. 풍족하지 않은 상황을 해석하게 하는 주관적인 언어로 인해서 걱정과 근심은 생겨납니다. 풍족하지 않다는 말 자체가 이미 객관성을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세상에서 배운 것입니다. 세상은 돈이 풍족하지 않으면 인생의 실패자로 여기는데 이 언어가 마음에 작용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주관적 판단이 지금 통장의 잔고 상태를 걱정하고 염려하게 됩니다.

돈이 없으면 실패자이고 부끄러운 것이고 사람답게 살 수 없다고 하는 세상에서 배운 언어를 통해 현재의 상황을 해석합니다. 그러자 지금 나의 상황은 돈이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고 따라서 불안하고 걱정을 해야 되는 것으로 여겨 마음이 반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머리 둘 곳 없이 사셨습니다. 돈 없기로 치면 우리들 중에서 꼴찌이실 것입니다. 그래도 예수님은 통장의 잔고로 인해 가지시는 마음 상태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 외에도 세상에는 여러 가지 말들이 있습니다. ‘서울대학을 졸업하면 팔자가 피고, 강남에 사는 것이 성공이고, 외제차를 타야 인정받는다라고 하는 모든 언어가 이 세상 가치관에 근거 된 말들이고 세상에서 배운 말들입니다. 마음은 이 말들에 반응하는 것이지 실제로 육체가 놓인 객관적 상황에 반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언어를 바꿀 수 있다면 마음은 변합니다. 세상의 언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시인의 언어만 되어도 상황은 바뀔 것입니다. 시인들은 아름답게 비틀어진 말을 통해서 세상의 언어를 거부하고 삶을 낯설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신앙인들은 어때야 할까요?

신앙인은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 된 언어를 사용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민수기 13장에 가나안을 정탐하고 보고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31~33절에 열 명은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라라고 하였습니다. 이게 세상 사람들이 가르쳐준 언어대로 가나안 땅을 정탐한 결과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30절에서 우리가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라고 하였고 149절에서는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라고 하였습니다.

똑같은 정탐을 하고도 신앙을 가진 자의 말은 달랐습니다. 가나안 복지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언어에 근거해서 가나안 거민들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희로애락에는 정해진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은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갑에게는 기쁨인데 을에게는 분노이며 병에게는 슬픔이고 정에게는 즐거움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가 이와 같습니다.

119편은 신구약 성경 66권중에서 가장 길면서 또한 성경의 중간에 위치합니다. 이러한 119편의 주제는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본문은 답관체 형식으로 쓰였습니다.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여덟 절씩 한 단락을 이루며 22개의 단락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단락을 보면 1~8절까지가 전부 히브리어 알파벳의 첫 자인 알렙(א)으로 시작합니다. 두 번째 단락 또한 여덟 절로 이루어져 있는데 모든 절이 두 번째 알파벳인 베트(ב)로 시작합니다. 마치 우리나라의 사행시와 같습니다. 22개의 문자로 하되 한 문자로 여덟 절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아주 조직적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총 176절중에서 단 두 절을 제외한 모든 구절이 하나님의 말씀을 나타나는 율법 법 증거 도 법도 율례 규례 계명 판단 약속 등의 단어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즉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사랑하되 이론적 차원이 아니라, 다양한 삶의 국면에서 체험하는 말씀의 능력과 은혜를 경외하므로 노래 한 것입니다. 간단히 말해 말씀을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생활화했습니다. 생활의 다양한 국면에서 말씀을 붙잡았더니 이러한 은혜가 주어지더라는 것과, 말씀이 이토록 대단한 힘을 가졌음을 176절이나 되는 노래를 통해서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긴 시편을 쉽게 이해할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하며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다가 눈에 들어온 단어가 하나 있는데 바로 읊조리다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읽은 23절에도 나왔지만 152748789799148절에서도 나옵니다. 우리말의 읊조리다라는 말은 조용한 말로 읽어가는 것을 말합니다만,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이 단어가 묵상하다, 대화하다, 불평하다라는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묵상하는 것은 마음속에서 말씀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23~24절을 보면 고관들도 앉아서 나를 비방하였사오나 주의 종은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렸나이다 / 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고관들도 앉아서 나를 비방하였사오나라고 하는데 재판정에서 고관들이 시인의 죄목을 들춰내며 의논하는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시인의 처분을 두고 고관들이 의논하는 가운데 시인은 작은 소리로 읊조립니다. 그들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혼잣말로 구시렁거렸던 것입니다. ‘구시렁거렸다라는 말은 불평어린 어조로 혼잣말로 나지막하게 하는 것입니다. 고관들은 세상의 주관자들이자 나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시인은 세상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읊조렸다는 말입니다.

마치 사람들이 보기에 시인이 세상에 비틀어진 시선을 보내는 것과 같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비틀어진 마음상태로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모습입니다. 고관들은 나의 처분을 두고 왈가왈부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시인은 신경도 쓰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다는 의미입니다.

148절을 보면 주의 말씀을 조용히 읊조리려고 내가 새벽녘에 눈을 떴나이다라는 구절도 있습니다.

밤에 자다가 일어나서 주의 말씀을 읊조려야 했던 이유는 세상의 언어가 들려왔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돈이 없다가는 큰일 날 것이다, 병든 몸을 방치한다면 오래 못 살 것이다, 자녀들에게 신경 쓰지 않는다면 다 망할 것이다.’라고 하는 세상의 말들이 떠올라 잠들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이런 세상의 말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세상에 대해서는 비틀어진 마음 자세를 취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읊조리며 하나님을 향합니다. ‘돈이 없으면 망할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는 세상을 향해서 웃기지 말라라고 하며 불평하고 구시렁거리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세상에서 배운 언어대로 시인을 판단합니다. 저렇게 돈이 없으니 볼 장 다 봤다며 말들 하지만 시인은 세상에 대해 아주 비틀어진 마음 자세를 취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게 읊조리는 것입니다. 세상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커녕 그런 게 어디 있어?’라며 세상에 대해 불평하듯 하나님 말씀만 의지하였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시어머니의 팔순 잔치에 동서 셋이 모여 돈을 모으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가장 잘 산다는 맏동서가 솔선수범은커녕 구구절절 핑계를 대며 돈을 안 내려고 핑계를 댑니다. 크루즈 여행도 한 번 못가고, 명품 백도 못 가져서 불행하다고 생색을 냅니다. 그런 말을 듣는 둘째 동서는 똑같이 나도 그렇게 못하고 사니까 불행하다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신앙이 있는 어린 막내 동서는 그렇게 못사는 건 나도 마찬가지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서 행복하고 감사하다.’라고 그들과 같은 마음이 되기를 거부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읊조리며 세상에 대해 비틀어진 마음 자세를 취했던 시인과 같습니다.

하박국 선지지가 하박국 317~18절에서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라고 노래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는 외양간에 소가 없으면 기뻐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신앙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오히려 세상에 대해 비틀어진 마음 태도를 가진 자들입니다. 세상의 언어에 대들고 몰아내는 자들인 것입니다.

다른 예로 스데반 집사님의 돌에 맞아 순교하던 상황을 생각해봅니다.

돌에 맞아 죽는 상황은 기쁜 상황입니까? 슬픈 상황입니까? 돌에 맞아서 아프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기쁨일지 슬픔일지는 선택의 대상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하나님의 언어를 받아 기쁨을 선택하자 자신을 돌로 치는 자들을 용서하고 얼굴이 천사와 같이 빛이 났습니다.

사도 바울과 실라가 차꼬에 채워져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슬픈 일입니까? 기쁜 일입니까? 그러나 상황 자체는 중립적입니다. 이때에 바울과 실라는 노래를 부르며 찬송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언어를 받게 되니 상황에 대한 선택이 달라졌던 것입니다.

앞서 가나안 복지를 정탐했던 이들에 대한 예를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의 상황에서 복지는 주어질 수 있을까요? 여러분의 마음이 세상의 언어를 받아들인다면 복지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세상의 언어대로라면 돈도 없고 몸도 아픈데 복지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이 그랬던 대로 세상의 언어대로 상황을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돈이 없는 상황은 아낙 자손을 본 것 같습니다. 병이 든 상황은 굳건한 국가체제와 철기문화를 갖춘 가나안 족속을 마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복할 수 없을 것 같기에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427절에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앙인이라면 하나님의 언어로 세상의 언어를 쳐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은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임할 수 있고, 억울하게 매 맞고 차꼬에 채워져서 감옥에 던져지는 순간에도 채워질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돈이 없고 몸이 불편하고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해서 복지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상황에서도 복지를 이루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마음에서 세상의 언어를 밀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언어를 내 마음에 가르치지 마세요. 우리는 세상의 언어를 나의 생각과 판단이라고 여기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주체적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주는 것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하나님의 뜻과 계획대로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몫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렇다면 성경 66권을 다 외워야 말씀을 통해서 세상의 언어를 쳐낼 수 있을까요?

맞습니다. 제가 성경 66권을 달달 외우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이 상황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었습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이 성경 66권을 다 외우는 것과 같습니다. 창세기 첫 장부터 요한계시록의 마지막 장까지 성경의 모든 말씀은 십자가로 수렴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 처해있든지 십자가를 통해서 이 상황에 대해 죽었음을 고백해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다라는 것은 상황이 어떻든 그것이 나의 기쁨과 만족과는 상관없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에 마음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부활하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주님이 마주보고 계신 하나님 아버지가 나의 기업이고 기쁨과 만족이 되십니다. 그리고 내 마음이 죽어서 떠나게 된 세상의 상황은 하나님의 일이 될 것입니다. 이것을 생활 속에서 기억하는 것이 성경 66권이 말씀하시는 내용을 달달 외우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절을 보면 주님을 소개할 때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성경 66권은 전부 예수님을 통해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모든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다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생활 속에서 적용할 수 있다면 장장 176절에 걸쳐 노래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애착과 경외가 완벽하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삶은 십자가를 읊조리는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이 없으면 불행하다, 건강이 없으면 불행하다라고 하지만 우리는 돈이 없다고 불행하지 않다, 건강이 없다고 해서 잃는 것이 아니다라고 읊조릴 수 있습니다. 우리의 기업이자 몫은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내 몫에 조금도 흠이 생기지 않았는데 불행할 이유가 없습니다. 몸이 아프지 않다고 해서 영원히 사는 법은 없습니다. 끝까지 이 세상에서 살 수 있다고 해도 좋은 하늘나라를 놔두고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이렇게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에 대해 구시렁거리는 것입니다. 이게 읊조리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근심 걱정을 하면서도 희망을 갖고 사는 이유는 이 세상에서 기쁨을 찾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마음을 십자가에서 죽이고 나면 다른 사람들이 열 내며 사는 모습을 오히려 심드렁하게 바라보게 될 것입니다. 시인이 세상을 비틀어지게 보는 것과 같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세상에 열을 낼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에서는 내 기업이 없으니 기쁨을 찾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대해서는 아름답고도 올바르게 비틀어진 마음이 우리에게 적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언어를 받아들이지 않도록 비틀어진 마음은 십자가에서 수렴된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은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의 비틀어짐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올바른 것입니다. 세상의 언어를 곧이곧대로 따르는 것이야말로 틀린 것입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아름답고 올바른 비틀어짐을 통해서 주어진 상황을 바라보며 감사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에 비틀어진 세상이 바르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성경 66권의 말씀이 수렴되고 완성된 것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마음에서 붙잡고 늘 아름답고 올바르게 세상에 대해 비틀어지게 해주셔서 세상 사람들의 말과는 다른 읊조림을 하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