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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만약 엄마와 아내가 물에 빠지면_태승철

by 태승철 · 17-12-14 09:44 · 7,141
'만약 오빠 엄마와 내가 물에 빠지면 오빠는 누굴 먼저 구할꺼야?" 아가씨들이 연애중인 애인에게, 아내가 결혼한 남편에게 한 번쯤은 반드시 답을 원하는 질문이지요. 단순하고 유치하지만 아들이요 오빠요 남편인 당사자로서는 쉽게 대답할 수 없는 어려운 질문입니다. 그런데 선민을 개별적으로 관계하실 때 이토록 단순 유치한 질문에 전능하사 천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께서 지나치다 싶을 만큼 치중하십니다. 이유가 뭘까요? 소망의 문제 때문입니다.

만약 엄마와 아내가 물에 빠지면

(시편 78:1~72)

 

 

1. 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2.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3. 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

4. 우리가 이를 그들의 자손에게 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영예와 그의 능력과 그가 행하신 기이한 사적을 후대에 전하리로다

5. 여호와께서 증거를 야곱에게 세우시며 법도를 이스라엘에게 정하시고 우리 조상들에게 명령하사 그들의 자손에게 알리라 하셨으니

6. 이는 그들로 후대 곧 태어날 자손에게 이를 알게 하고 그들은 일어나 그들의 자손에게 일러서

7. 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

8. 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만약 엄마와 아내가 물에 빠지면>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만약 엄마와 아내가 물에 빠지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작년 여름에 있었던 일인데 중국공영방송에 한 남자의 이야기가 보도되었습니다.

홍수로 인해 집이 물에 잠기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집안에는 나이 드신 어머니와 아내를 비롯한 두 아이가 있었습니다. 가장으로서는 일생일대의 선택을 해야만 했는데, 제일 먼저 어머니를 지붕 위로 대피시켰습니다. 물이 차오르는 속도가 엄청났기에 남은 가족들은 스스로 대피해야만 했는데 다행히도 모든 가족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일이 있은 뒤에 아내가 시어머니를 먼저 구한 남편에게 실망하여 자녀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떠나버렸다는 것입니다. 남자는 방송에 나와 인터뷰를 하면서 그 길로 아내를 찾아가 용서를 구하겠다고 밝혔는데, 이 일이 과연 용서를 구해야하는 일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됩니다.

물에 빠진 배우자를 구할 것이냐 부모를 구할 것이냐? 이 단순하고도 지극히 유치한 질문이지만 하나님께서도 선민들 각자에게서 이 대답을 듣기 원하십니다. 단순히 듣고 싶어 하심을 넘어서 하나님께서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듣기에 치중하십니다.

하나님의 질문은 내가 너에게 배우자를 주면 배우자와 나 중에서 누구로 만족하고 기뻐할래?’라고 하십니다. 형식은 다르지만 둘 중에 하나를 고르라는 것은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소중한 것을 주신 뒤에 유치한 질문에 목을 매십니다.

아브라함 백 살에 독자 이삭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신 질문이 너는 나로 기뻐할래? 아들로 기뻐할래?’라고 하십니다. 사도행전 72~3절에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에서는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영광의 하나님이 보여라는 것은 곧 선택의 대상으로서 당신을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당신을 보여주신 후에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도 다 하나님이 주셨음을 보이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너는 나로 기뻐할래? 고향 친척 아비 집으로 기뻐할래?’라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름다운 아내 사라도 주셨습니다. 고향을 떠나면 아내를 잃어버릴 것이 십중팔구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또 너는 나로 기뻐할래? 아내로 기뻐할래?’라고 선택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상하게 소중한 것을 주시고는 그것을 하나님과 비교하게 하십니다. 마치 앞서 보았던 남자의 선택처럼 나하고 이삭이 물에 빠지면 누구를 구할래?’라고 물어보시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질문으로 우리를 힘들게 만드시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이 그에 대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본 시는 출애굽으로부터 다윗왕의 통치 시기까지 500년 기간에 이스라엘이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에 반하여 반복적으로 되풀이되는 선민들의 하나님을 향한 대적과 원망과 반역을 회고하면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강조되는 부분을 다시 정리해보면 하나님께서는 선민의 삶에 직접 개입하셔서 기적적인 역사를 통해서 구원하시고 이끄시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선민의 응답은 반복적으로 불순종과 반역으로 일관되어왔습니다.

본문 72절까지 출애굽으로부터 다윗 이전까지 선민들의 역사가 개괄적으로 기술되는 가운데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반역하고 불순종했다는 이야기가 계속해서 반복됩니다.

10~11절에서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고 그의 율법 준행을 거절하며 /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과 그들에게 보이신 그의 기이한 일을 잊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17, 32, 36절에서 같은 내용이 반복됩니다. 40~41절에서도 그들이 광야에서 그에게 반항하며 사막에서 그를 슬프시게 함이 몇 번인가 / 그들이 돌이켜 하나님을 거듭거듭 시험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 하였도다라고 하였습니다. 56절에서도 이러한 내용이 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때에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너는 전대미문의 기적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광야에서 물을 주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이셨습니다. 이 모든 기적을 체험한 사람들이 왜 끊임없이 하나님께 반역하고 거슬렀던 것일까요?

우리는 이런 전대미문의 기적을 체험했다면 하나님께 절대로 반역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인간의 마음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더라도 하나님을 저항하고 거역하고 불순종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십니다. 바로 소망의 문제 때문입니다.

7절에 그들로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잊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계명을 지켜서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면 그의 행하신 일을 잊지 않고 그의 계명을 지키게 되지만,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으면 행하신 일을 다 잊어버리고 그 계명을 지킬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그들의 조상들 곧 완고하고 패역하여 그들의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그 심령이 하나님께 충성하지 아니하는 세대와 같이 되지 아니하게 하려 하심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의 소망을 하나님께 두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조상들처럼 완고하고 패역하여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며 하나님께 충성하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소망이 무엇입니까?

소망은 만족과 기쁨을 줄 것이라 믿어지는 대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내 수중에 없을 때에 나타나는 마음상태입니다. 즉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것은 만족과 기쁨이 하나님께만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소망을 하나님께 두지 않았기 때문에 전혀 납득할 수 없을 정도로 눈앞에서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거역하였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의 문제는 바로 이 소망을 하나님께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랬기에 홍해를 건넌지 삼일 만에 원망불평이 터져 나왔고 하나님의 출애굽 역사 자체를 비난했습니다.

출애굽 뒤에 이스라엘에게는 소망 자체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지구상 어느 민족에게도 뒤지지 않는 강렬한 소망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 소망이 하나님이 아닌 복지를 소망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에 땅에서 누리게 될 안정적이고 풍족한 삶을 소망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복지를 소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온갖 기적을 행하시고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끈질기게 반복적으로 저항하고 반역하고 거역했던 것입니다.

그럼 우리에게 질문이 하나 생깁니다. 애굽에서 450년간이나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적적으로 탈출하여 광야에서 행진하게 되었습니다. 이 행진 자체가 약속의 땅 가나안 복지를 향한 여정이었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복지를 소망하는 것이 왜 잘못되었단 말입니까?

일단 사람이 정해진 길에 들어서면 목적지를 마음에 품게 됩니다. 이것은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학생이 서울대학을 목표로 삼는다고 해서 그 누구도 문제 삼지 않습니다. 부산행 열차에 올라탄 사람이 부산에서 내리는 것을 문제 삼으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이스라엘 백성들이 향하고 있던 가나안 복지는 애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간구한 적도 없었던 곳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발적으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 약속한지 450년이 흘러 아무도 그곳을 바라지 않는 상황에서 모세를 보내셔서 애굽으로부터 내보내시고 약속의 땅을 향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이 도착지로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를 소망했다는데 잘못된 점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 가나안 복지를 소망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역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생사를 가르는 중요한 신앙의 문제가 우리 앞에 대두됩니다. 이 문제를 잘 극복하면 신앙은 날개를 달게 되고, 신앙으로 사는 것이 너무나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정말로 복지를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복지 대신에 하나님을 소망했다면 고작 2~3주 안에 가나안에 입성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복지에 들어간 뒤에도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다면 복지가 상실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복지에 들어간 뒤에도 여전히 젖과 꿀이 흐르는 풍족한 삶을 소망했기 때문에 결국은 복지를 잃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비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좋아하거나 기뻐할 수 있는 것들을 꿈이나 비전을 통해서 약속해주십니다. 나를 통해 이 땅에서 이루고자 하시는 계획과 뜻이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기뻐하고 좋은 것을 주시거나 주셨거나 주시려고 하는 이유는 하나님 사랑의 구체적 실행을 이루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어느 정도로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 그 목표를 구체적으로 정해주시는 것입니다. 때마다 하나님 사랑해야 될 방법과 하나님 사랑해야 될 크기를 정해주시기 위해서 내가 좋아서 펄펄 뛸만한 것들을 주시거나 주셨거나 주시려고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젖과 꿀이 흐르는 복지의 땅을 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누구나 다 그곳에 들어가서 누릴 풍족한 삶을 생각하고 기쁨과 만족을 느낍니다. 생각만 해도 노래가 절로 나오고 만족감이 흘러넘치는 심정으로 마음에는 강렬한 소망이 생겨납니다. 이렇게 이 세상을 향한 소망이 생기면 그 자체가 하나님 사랑의 기준이 됩니다.

출애굽 한 이스라엘 사람들의 마음에서는 복지에 대한 소망이 컸습니다. 그러나 복지로 인해 얻게 될 그 만족과 기쁨의 크기만큼을 하나님을 통해서 지금 누리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복지가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만큼 지금 하나님으로 마음의 기쁨과 만족을 채우라는 것입니다. 복지를 주신다는 약속은 기쁨과 만족의 크기를 유발시킨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복지를 약속하신 근본적인 의도입니다.

TV에서 자장면을 맛있게 먹는 장면이 나올 때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먹는 모습을 보면 자연스레 먹고 싶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 집의 오늘 식사는 칼국수입니다. 마음에는 자장면이 있지만 현실에는 칼국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칼국수를 먹고 배가 부르게 되니 자장면을 먹고 싶은 마음이 사라집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복지를 약속하신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칼국수 정도가 아닙니다. 세상과 하나님을 음식에 비유하자면 자장면 대 스테이크입니다. 자장면을 먹고 싶었을지라도 스테이크를 먹었을 때 느끼는 만족감이란 그것을 훨씬 초월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지를 약속해주셨고, 복지에 들어가 살아갈 이들의 삶을 계획하시고 이루시길 바라셨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단 한 번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받아들이지를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예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지를 약속하신 뒤에 열 가지 재앙의 기적과 홍해를 가르는 기적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시내산에서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많은 율법이 주어졌지만 한 마디로 말하면 복지를 소망하여 생겨난 기쁨과 만족의 크기만큼을 이 광야에서 하나님으로 채우라는 것이었습니다. 복지는 없어도 된다는 생각이 들만큼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기뻐할 때에 복지도 주시겠다는 것이 바로 시내산 계약의 내용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복지와 내가 물에 빠지면 누구를 먼저 구할래?’라고 물으셨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 많습니다.

배우자를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배우자 때문에 의지가 되고 기쁨이 됩니다. 자연히 배우자에게 기대하는 기쁨과 만족과 행복의 크기만큼을 하나님 사랑으로 채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식과 크기를 알려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서 소중한 대상들을 주신 것입니다.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의 삶이 형통하게 흘러간다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유치원가서 으뜸이 되더니 초등학교 들어가서도 전교회장을 하고 과외도 안했는데 중고교에서도 일등만 하더니 서울대에 들어갑니다. 아이가 아직 어리지만 상상만 해도 기쁩니다. 심지어 이 아이가 효자이기까지 하다면 이 자녀에 대한 기대로 인해 유발된 만족과 기쁨의 크기만큼을 하나님으로 채우길 바라십니다. 자녀가 어떻게 되든지 기쁨과 만족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만큼 하나님으로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업이 잘 될 것을 상상하면 마음이 절로 기뻐집니다. 그 기쁨의 크기만큼을 사업이 진행되기도 전에 하나님으로 채우라는 것입니다. 사업은 잘 되거나 말거나 내 기쁨과 만족과는 전혀 상관이 없을 정도로 하나님으로 기뻐져야 합니다. 본래 그렇게 하라고 사업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본래 의도는 무시한 채 죽어라 사업만을 소망합니다. 7절에 소망을 하나님께 두며라고 하였는데 그 반대로 소망을 사업에 두고서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을 찾으면서도 하나님을 거역하고 반역하게 되고 이것이 반복되므로 신앙생활에 재미가 없습니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이 2~3주 만에 광야를 지나 복지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복지를 약속해 주셨을 때에 생긴 기쁨의 크기만큼을 시내산에서 하나님으로 채웠어야 했습니다. 복지를 안 주시더라도 기쁨과 만족에는 조금도 영향이 없을 만큼 하나님으로 채워지기를 바랐다면 오히려 복지가 주어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기에 2주 만에 갈 수 있는 거리를 40년 을 광야에서 배회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사업을 하면서 하나님을 소망하지 않음으로 본래 하나님이 계획하신 성공을 40년이 지나도록 성취하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2주를 40년으로 늘리는 광야생활을 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직도 복지에 도달하지 못한 채 광야를 배회하는 고달픈 인생을 살아가는 이유는 하나님을 소망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소망하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기대하는 모든 기쁨과 만족의 크기만큼을 하나님으로 얻기를 소망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마음을 가질 때에 죽을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영화로운 삶을 계획하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만, 설령 그것이 영화롭지 않을지라도 우리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으로 만족하기 때문에 슬픔과 원망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도 다윗처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노래를 부르게 될 것입니다.

 

남자들은 차를 좋아합니다. 생전보지 못한 외제차가 한 대 지나가면 나도 저런 거 한 번 타봤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겨납니다. 그럴 때에 그 작고 사소한 소원조차도 전부 하나님을 향한 소망으로 환전하시기를 바랍니다. 외제차가 주어졌을 때에 생겨날 기쁨의 크기만큼을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입니다. 외제차가 내게 전혀 불필요한 것으로 여겨질 정도로 하나님의 기쁨과 만족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에 날개를 다는 원리입니다.

이 세상 자장면 먹고 싶을 때마다 하나님 스테이크로 배를 채우세요. 그러라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그러고 나면 자장면은 필요할 때에 주실 것입니다. 2주 만에 도달할 거리를 40년 동안 배회하는 삶에서 벗어나야 할 것입니다.

갖고 싶고, 얻고 싶고, 이루고 싶고, 도달하고 싶고, 잘 됐으면 좋겠다는 소망은 곧 하나님 사랑의 크기를 결정짓습니다. 이 세상 자장면이 전혀 먹고 싶지 않을 정도로 하나님 스테이크로 배불리는 것이 신앙의 원리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삶에는 40년 걸릴 것이 2주로 줄어드는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도와주시옵소서.

이 세상을 향한 소망과 소원이 생길 때마다 십자가에서 죽게 하시고 그 소망의 크기만큼을 하나님을 향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세상의 소망들이 무색할 정도로 하나님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세상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뜻만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