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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하나님 기억하기를 멈춘 참 신앙_태승철

by 태승철 · 17-12-13 10:49 · 6,605
한 쌍의 남녀가 열애중일 때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서로 기억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들은 늘 함께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을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결혼 후 3년만 지나도 부부관계가 유지되게 해주는 힘은 기억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의 시절이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기억하는 때로 바뀌었습니다. 한 번 기억에 이어서 줄곧 함께해야 할 신앙이 망각과 기억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기억하기를 멈춘 참신앙

(시편 77:1~20)

 

 

1. 내가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내 음성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내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

2.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를 찾았으며 밤에는 내 손을 들고 거두지 아니하였나니 내 영혼이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3.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 셀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하나님 기억하기를 멈춘 참 신앙>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하나님 기억하기를 멈춘 참 신앙

언뜻 듣기에 도발적인 분위기가 느껴지기도 하는 제목입니다.

하나님 기억하기를 멈추었는데 어떻게 참 신앙이겠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단순히 하나님 기억하기를 반복하는 신앙은 참 신앙이 아니고 성숙되지 않은 비정상적인 신앙임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관계는 기억장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할 때에만 가능하기 때문에 기억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가 어린이집에서 하루 종일 친구들과 어울려 몰입해서 놀 때에는 엄마 아빠가 누군지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녁이 되어서 어린이집이 끝나면 엄마를 보고 뛰어나옵니다. 그런데 이 자연스러운 행동도 그냥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섯 살짜리 어린아이의 머릿속에 있는 기억장치들이 정상적으로 작동되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모든 인간관계는 기억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기억에 문제가 생긴다면 벌어질 일을 상상해봅니다. 제가 서재 문을 열고 거실로 나갔는데 웬 여자가 빨래를 개고 있습니다. 전혀 기억이 없기 때문에 누구신데 저희 집에서 빨래를 개고 계십니까?’라고 물을 것입니다. 기억장치에 문제가 생기면 거실에서 아내가 빨래를 개고 있어도 아내가 아닙니다. 그 여자가 아내인 이유는 기억 때문입니다.

아침에 눈뜨면서 배우자로 인식하는 것은 얼핏 당연하게 여기지만 기억장치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면 단번에 낯설어집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당신은 누구십니까?’라고 깜짝 놀랄 것입니다. 상대가 내가 당신의 아내입니다라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기억이 없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이러한 기억의 의미를 살려서 좀 독특한 관계 설정을 해봅니다.

열애중인 남녀가 있습니다. 연애중일 때의 특징은 기억하지 않는 것입니다. 몸은 떨어져 있어도 마음이 늘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세월호 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유가족들을 향하여 세월호 사건을 늘 기억하겠습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늘 기억하겠다.’라는 말은 곧 그것이 우리의 일상에서 격리되어 있음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망각하기 아주 쉽다는 것입니다. 망각하기 쉽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굳이 늘 기억하겠다는 강조를 하는 것입니다.

열애중인 남녀가 서로를 늘 생각하는 것과 세월호 사건을 잊지 않고 늘 기억하려고 하는 것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바로 주된 관심사냐 아니냐의 차이입니다. 열애하는 연인의 마음의 주된 관심사는 애인입니다. 이럴 때에 마음은 기억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열애를 하던 사람들이 결혼을 해서 1~2년 시간이 흐르면 함께하는 것보다는 기억함에 의지하게 됩니다.

열애 중이던 시절에는 직장에서든지 사업을 하든지 온통 애인에 대한 생각뿐이었습니다. 회식 자리에서 맛있는 것을 먹어도 애인 생각이 납니다. 그런데 결혼하고 시간이 흐르면 배우자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부장님의 말에 귀 기울이고 과장님의 마음을 맞추는 것에 온통 신경을 쓰다가 집에 돌아와서야 얼굴을 보면서 아내를 인식하게 됩니다. 이처럼 늘 함께하는 것과 늘 기억하는 것의 차이는 주된 관심사냐 아니냐의 차이로 나타납니다. 주된 관심사이면 늘 함께 하는 것이 됩니다. 주된 관심사가 아니면 늘 기억하려고 애쓰는 것이 됩니다.

전도서 121절에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에서처럼 일단 한번 기억하였으면 앞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잊어버리면 다시 떠올리기를 반복해야 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바른 신앙의 모습이 아닙니다. 신앙이 아니라고까지는 못할지라도 성숙되지 못한 모습입니다. 일단 하나님을 기억했으면 그 다음부터는 하나님과 늘 함께해야만 합니다.

이제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어 임마누엘의 계절이 돌아왔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라는 뜻의 임마누엘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일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관계는 기억하는 것이 아닌 함께하는 것입니다. 늘 기억하는 것도 대단하긴 하지만 하나님을 주된 관심사로 여기고 있다면 함께 하게 됩니다. 주된 관심사가 돈 버는 일과 같은 세상일에 대한 것이라면 하나님을 애써 기억하려는 셈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와 하나님이 함께하심이지 늘 기억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세월호를 늘 기억하려는 마음이 훌륭하듯이 하나님을 늘 기억하려는 마음도 대단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성숙되지 못한 신앙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 기억에 관한 문제를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절망적인 위기에 처한 시인이 자신의 슬픈 처지를 한탄하면서 하나님께 아뢰는 비탄조의 시입니다. 시인은 탄식에서 출발해서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은혜로우신 역사를 이루어 주셨음을 기억해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내용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1~3절까지는 하나님을 잊고 살다가 환난을 당하고 나서야 하나님을 기억해냈음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3절에 보면 내가 하나님을 기억하고 불안하여 근심하니 내 심령이 상하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기억해서 현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시기를 바라며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십니다.

이것을 4~9절에서 기록하고 있는데 7~9절의 부분을 살펴보면 주께서 영원히 버리실까, 다시는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실까, / 그의 인자하심은 영원히 끝났는가, 그의 약속하심도 영구히 폐하였는가, / 하나님이 그가 베푸실 은혜를 잊으셨는가, 노하심으로 그가 베푸실 긍휼을 그치셨는가 하였나이다라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히 여기심에 대한 회의를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순서를 정확하게 기억해봅니다. 하나님을 잊고 살다가 환난에 처하자 하나님을 기억하며 밤새도록 기도를 합니다. 시인의 고통의 정도를 보면 철야기도하고 금식기도도 했으리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해도 응답은 없습니다. 환난의 상황은 전혀 바뀔 기색이 없습니다. 그러자 마음에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는가?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시더니 그 사랑이 어디로 갔느냐? 긍휼히 여기신다더니 어떻게 내게 이런 환난의 상태가 오래 지속될 수 있단 말이냐?’라고 하나님에 대한 회의와 의심이 생겼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이 없어도 어쩌면 이렇게 없을 수가 있으며, 어떻게 암에 걸릴 수 있단 말인가? 자녀의 진로가 이렇게 꽉 막힐 수 있고, 어떻게 하는 일마다 되는 일이 없느냐?’라고 하면서 이래도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이래도 긍휼의 하나님이냐는 의심이 생깁니다. 다 거짓말인 것 같고 허탄한 말들인 것 같습니다.

시인은 이러한 의심에 빠졌다가 다행스럽게도 돌이킵니다. 10절을 보면 또 내가 말하기를 이는 나의 잘못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잘못의 히브리어 원어를 살펴보면 할로티라고 합니다. 이 할로티는 하라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는데 죽인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잘못이라라는 말은 곧 내가 나의 신앙과 영성을 죽였다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나에게 이러실 수 있는가? 하나님이 내 육체의 아버지시라면 내 고통을 이처럼 오래 두고 보셨을까?’라고 하는 회의와 의심이 생기는 것이 바로 자신의 영성이 죽었기 때문임을 깨달았던 것입니다.

이것을 깨달은 시인의 생각이 10절 하반부로부터 11절에서 나타납니다.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 / 곧 여호와의 일들을 기억하며 주께서 옛적에 행하신 기이한 일을 기억하리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지존자의 오른손의 해라는 말은 하나님의 오른 손, 권능의 손, 기적의 손, 구원의 손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났던 시절을 11절에서 기억한다고 합니다. 이 말은 출애굽 때에 홍해가 갈라져 마른 땅을 건너고 뒤 따르던 애굽 군대가 멸절된 기적의 역사를 떠올리는 것입니다.

 

오늘 시인의 환난은 개인적이기도 하지만 민족적인 환난까지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시인의 영적심리상태의 과정을 살펴봅니다. 삶이 바쁘고 힘들어서 하나님을 잊고 살았습니다. 잘해보겠다고 문제를 끌어안고 이리저리 궁리했습니다. 사람도 만나고 쫓아다니다가 결국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환난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때에 삶에 밀려계시던 하나님을 기억해냅니다. 하나님이 창조주시며 나의 아버지이시고 사랑과 긍휼이 많으신 분이시라는 것을 기억해내고, 이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주시고 해결해달라는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데 아무리 기도를 드려도 응답이 없자 이번에는 하나님을 원망하고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시라더니 이렇게 불쌍한 나의 삶에 대해 왜 응답이 없으신가? 내 육체의 아버지라면 당장 뛰어와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실 텐데 하나님은 왜 그러지 않으신가?’라는 의심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문제는 하나님이 아닌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자신의 영성이 완전히 죽어버렸음을 깨달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일으키셨던 과거의 기적들을 회상하며 하나님을 찾아 나섭니다. 과거의 기적들은 지금 나의 삶의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들입니다. 그렇지만 옛날에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셨던 그 장면으로 돌아간 것은 마음의 관심이 하나님의 존재로 옮겨졌음을 뜻합니다. 마음의 주된 관심사가 삶의 문제로부터 하나님께로 옮겨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여기서 끝이 납니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졌어야 할까요?

세상으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을 주된 관심사로 삼게 된 마음은 하나님을 가져야 만족할 수 있음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가지기 위해서는 세상만사로 가득해진 마음이 죽어야 하고, 부활한 마음이 되어야만 하나님께로 갈 수 있고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결국 오늘 시편은 성전의 필요성에 대해서 말씀해주시면서 우리의 마음을 그 지점까지 끌고 가고 또한 보여줍니다.

성전을 통해서 세상을 주된 관심사로 붙잡고 있었던 마음을 죽이고, 하나님을 주된 관심사로 삼을 때에 하나님을 만나게 되고 그 다음부터는 끊임없이 성전을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이 마음에 들어오는 순간마다 성전에서 죽기를 반복하면서 하나님을 잊는 순간들이 없도록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간들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이 뜻하는 바입니다. 언제 어디서나 주된 관심사는 하나님이셔야만 한다는 것이 바로 임마누엘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과 늘 함께하는 사람은 오히려 이 세상일을 기억해야 합니다. 변화산에서 베드로와 제자들이 하늘나라에서의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보고 황홀경에 빠지자 그 순간을 잃을까 두려움에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영원히 살기위해 장막을 짓겠다는 제안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이때에 베드로는 삶을 망각해버렸습니다. 산 아래에서 진행되었던 삶과 이루고자 했던 비전도 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산 아래에 아직도 살아야 될 삶이 있음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삶을 기억하게 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은 주님과 함께 있어야 하고 삶은 기억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반대로 삶과 함께 있고 하나님을 기억하려고 하는 것을 신앙으로 여깁니다. 이렇게 하나님 기억하기를 되풀이할 뿐인 성숙이 없는 비정상적인 신앙생활을 할 때에 나타나는 일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한 의심입니다.

 

몇 년 전에 드라마에서 주인공이 한 말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회자되었던 적이 있습니다.

서있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지는 거야라는 대사입니다. 정말로 그 말대로입니다.

나이아가라 폭포는 하나이지만 미국 쪽에 서서 바라볼 때에는 상대적으로 작고 보잘 것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캐나다 쪽에서 바라보면 차원이 다른 장관이 펼쳐집니다. 폭포를 인생에 비유하자면 미국 쪽에서 캐나다 쪽으로 가면 풍경이 달라질 텐데, 사람들은 미국 쪽에서 바라보는 폭포가 맘에 안 든다며 그것을 뜯어고치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저자는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환난도 서 있는 곳을 바꾸면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세상 편에 서서 환난의 풍경을 바라보면 시인의 말처럼 말할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이 느껴질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신 하늘에 서서 환난을 본다면 어떨까요?

베드로가 내일 참수형을 언도받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바울과 실라가 죽도록 매를 맞고 차꼬에 채워져서 빌립보 감옥에 갇혔습니다. 이러한 환난 속에서 베드로는 천사가 허리를 발로 차도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깊은 잠을 잤습니다.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찬양하며 하늘로 인한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똑같은 환난이라도 서있는 곳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신앙의 문제는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가 계신 하늘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땅에 발을 딛고 서있기 때문에 주어지는 환난이 감당하기 어려운 괴로움이 됩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사랑과 긍휼까지 의심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기억하기를 반복하는 신앙의 문제점입니다.

마음이 늘 하나님께 함께 있으면 환난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알게 됩니다. 그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품 안에 있음을 놓치지 않습니다. 그러한 마음은 환난이 점령하지 못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걸어갈지라도 하나님이 내 삶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목적지로 향하는 첩경인 것을 믿을 수 있고 알게 됩니다. 태도가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려움이 주어졌을 때에 자리를 바꾸어야만 합니다. 미국 쪽에서 보이는 나이아가라 폭포가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폭포를 바꿀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캐나다 쪽으로 옮겨가서 보면 풍경이 달라집니다. 삶에 어려움이 있어도 그것을 만져서 내 뜻대로 해결하려 하지 마시고, 내 기준을 없애고 서있는 자리를 하늘로 옮겨야 합니다. 이 상황이 고통스럽다는 것은 마음이 땅에 발을 디디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위해 십자가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삶의 어려운 풍경을 보면서 괴로워하는 나를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입니다. 이 삶의 문제라는 풍경을 담은 채로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마음은 주님과 함께 부활할 것이고, 승천하신 주님과 함께 하늘로 올라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고백하고 선언하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의 기쁨과 만족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만으로 결정될 뿐, 이 땅의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궁극적 기쁨과 만족이 생기지도 않을뿐더러 또 다른 문제에 봉착하고야 말 것입니다.

영원한 기쁨과 만족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이것을 고백하고 선언하며 기도함으로서 하나님을 구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주시는 평강으로 그 문제를 다시 바라보면 그 안에 하나님의 뜻이 보입니다.

시인은 환난이 해결되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하였지만, 그 환난이 하나님의 사랑 자체임을 알게 됩니다. 이 환난이 왜 필요했는가도 하나님이 지혜를 주심으로 인해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환난을 해결하는 근본적인 첩경입니다.

서있는 곳이 바뀌면 풍경도 달라집니다. 기억하는 신앙은 마음이 땅에 머무는 신앙입니다. 땅에 머물기 때문에 환난이 닥치면 하나님을 찾으면서도 의심합니다. 이것은 결코 성숙되지 못한 신앙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함께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망각하게 됩니다. 십자가에서 내 힘으로는 어쩔 수 없다. 나는 죽었다. 내가 살아서 할 수 있는 일은 세상 문제가 아니라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다라고 삶에 대해서 죽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풍경은 십자가에 달려서 바라보는 풍경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향해서만 살아있을 때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이고 다이내믹하게 활동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주님께서도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찾고 구하고 두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만이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죽으심은 곧 가족 건강 직장 등 모든 삶의 영역에 대해서 죽는 것임을 사실로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렇게 마음을 하늘로 보내면 지금의 풍경은 달리 보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기억하기를 반복하는 것은 결코 올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임마누엘의 하나님은 곧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연인들이 손 붙잡고 데이트하는 동안에는 서로를 기억할 필요가 없습니다. 함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잊고 있다 집에 돌아와서야 떠올리는 매너리즘에 빠진 부부관계가 아닌 언제나 함께 하는 열애중의 관계여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시되 하나님 기억하기를 반복하는 미성숙의 영성으로부터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탈피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로 세상에 대해 마음이 죽음으로 하나님과 늘 함께하여 하나님을 기억해내던 미성숙의 영성으로부터 온전히 벗어나 완벽한 복지에 우뚝 서는 주인공들이 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