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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인간다움 회복장치의 파괴자_태승철

by 태승철 · 17-12-08 09:18 · 6,685
예루살렘 성전은 주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철저히 파괴됩니다. 그러나 바벨론은 철거용역에 불과했습니다. 성전을 이 땅에서 없어지도록 바벨론을 동원하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셨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은 왜 당신의 이름을 두시기 위하여 택하신 성전을 스스로 철거용역을 동원하시면서까지 제거하셨을까요? 선민 이스라엘이 성전 존재의미를 파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전의 존재의미가 무엇일까요?상실한 인간다움을 다시 찾는 장치였습니다.

인간다움 회복장치의 파괴자

(시편 74:1~23)

 

1.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 어찌하여 주께서 기르시는 양을 향하여 진노의 연기를 뿜으시나이까

2. 옛적부터 얻으시고 속량하사 주의 기업의 지파로 삼으신 주의 회중을 기억하시며 주께서 계시던 시온 산도 생각하소서

3. 영구히 파멸된 곳을 향하여 주의 발을 옮겨 놓으소서 원수가 성소에서 모든 악을 행하였나이다

4. 주의 대적이 주의 회중 가운데에서 떠들며 자기들의 깃발을 세워 표적으로 삼았으니

5. 그들은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으니이다

6. 이제 그들이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7.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인간다움 회복장치의 파괴자>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인간다움 회복장치의 파괴자

지난해 3월 인공지능 알파고가 이세돌 9단을 4:1로 이겼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중국 커제 9단을 제쳤습니다. 이세돌과의 대전에서는 알파고 리라고 불리는 버전이었고, 커제와의 대전에서는 더욱 향상된 마스터라는 버전이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이 둘을 능가하는 제로 버전의 알파고가 나왔습니다. 이세돌 9단이 거둔 단 한 번의 승리는 바둑역사에서 인류가 인공지능에게 이긴 마지막 승리가 되었다고 합니다.

알파고 리와 알파고 마스터에는 2000년간의 바둑역사에서 사람들이 두었던 바둑의 내용을 저장해 놓았기 때문에 이길 수 있는 수를 찾아냈습니다. 그러나 알파고 제로는 역사적 데이터 없이도 스스로 학습하며 가장 좋은 수를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놀랍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신체적 지능적 비용적인 측면에서 기계가 인간보다 우월해지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인간이 이런 변화에 대해 이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가 관건이 됩니다.

11월에 미래인재교육을 위한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서 교육전문가들이 “4차 산업혁명시대의 교육방향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이 세미나에서 인하공전 컴퓨터시스템과의 손병희 교수님께서 명쾌한 답을 내놓으셨다고 합니다. “인간을 능가하는 인공지능의 4차 산업혁명시대에 인간이 대처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하고도 유일한 방법은 인간다움의 회복에 있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인간다움을 회복한다.’라는 말은 저의 공감을 100% 불러일으키는 명쾌하고도 진리에 입각한 대답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인간다움이 무엇인가를 예로 들었습니다. 걷고 뛰고 느끼고 보고 웃고 울고 소통하는 것은 아직은 인간의 영역입니다. 그러나 앞으로 이러한 능력이 30~40년 후에 인공지능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인공지능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인간다움의 요소가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재미있게도 멍 때리기라고 합니다. 넋을 놓고 있는 것입니다. 컴퓨터가 멍 때리고 있다면 곧 고장 난 것입니다. 인간이 멍 때릴 때에는 무의식의 정신세계 속에 숨겨진 무궁무진한 아이디어와 가능성이 나타나는 순간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인간다움을 다시 찾아야 한다는 말에는 100% 공감합니다만, 과연 멍 때리기가 인간다움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할 여지가 있습니다. 10년 전 만해도 아무도 인공지능이 바둑으로 이세돌 9단이나 커제 9단을 이기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눈물을 흘리며 슬픔을 느끼는 날이 오지 않으리라고는 누구도 장담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컴퓨터가 흉내 낼 수 없는 인간다움을 멍 때리기에 국한시켜서는 안 될 것입니다.

 

성경은 마치 21세기 4차 산업혁명을 예고라도 하듯이 인간창조 때에 이미 인간다움이 무엇인가를 규정하고 계십니다.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다움이 그렇게 단순치는 않습니다. 인간다움 자체가 갖는 힘이 상상이상으로 막강하기 때문입니다. 창조 때에 인간이 처음으로 삶을 시작한 곳은 에덴이었습니다. 타락하기 이전의 인간은 인간다움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상태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이 기쁨이라는 의미를 가진 낙원이었습니다. 즉 인간답기만 하면 삶은 낙원이 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인간다움의 증거는 낙원의 삶입니다.

인간답기만 하면 인류의 숙원인 낙원의 삶이 허락되고 주어집니다. 궁극적 기쁨과 만족과 행복은 돈 건강 권력 승진 자녀들의 형통 등에 있지 않습니다. 궁극적 기쁨과 만족과 행복은 인간다움에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답다면 수위 아저씨도 에덴을 살 수 있고 노숙자도 에덴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답지 못하면 그 누구도 에덴을 살 수 없습니다. 사람은 사탄의 꾐에 빠져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는 말을 믿어서 타락하였고 인간다움을 상실하자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손병희 교수님의 말씀대로 감정과 이성과 판단력과 의지력은 동물과 비교했을 때에 인간다움의 요소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서있을 때의 인간다움은 나의 판단과 의지를 묶을 때에 발휘됩니다. 동물과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인간답기 위해서 스스로의 판단과 의지를 비활성화 시키는 것이 바로 선악과나무가 상징하는 바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국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인간다움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좋고 나쁨을 판단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즉 마음의 공백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지를 판단합니다. 예를 들어 돈이면 되겠다고 여기는 판단이 바로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만듭니다. 돈으로 만족할 수 있다고 믿고 돈을 추구하는 동안에는 에덴의 삶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강이 내게 기쁨과 만족을 주리라 믿고 판단할 때에 비인간화됩니다. 동물들과 비교해서는 인간다울지는 모릅니다. 그러나 더욱 발전할 인공지능과 비교한다면 그것이 인간다움의 요소는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진정한 인간다움은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다움입니다. 결과적으로 인간다움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선악과를 따먹지 않고 내 판단력과 의지를 묶고 비활성화 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판단과 의지가 들어오면서 하나님의 인격과 연합하게 됩니다. 하나님으로 마음의 공백이 채워집니다. 이렇게 마음을 하나님으로 채운 상태가 인간다움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두 번째는 이 땅에서의 삶을 하나님이 살아주시는 것이 인간다움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팔을 걷어붙이고 땀을 흘리며 열정적으로 사는 것을 인간답다고 합니다. ‘인간 승리나 의지의 한국인이라는 칭호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실제의 인간다움은 이 땅에서의 삶을 하나님이 살아 주시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인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서 에덴에는 선악과가 존재하였지만, 그것을 따먹음으로서 타락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타락해서 하나님처럼 되어버린 인간에게 인간다움을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선악과 자리에 십자가 사건이 들어섰고, 십자가 사건을 예표적으로 성취한 곳이 바로 성전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성전이 파괴되는 것을 경험한 아삽 자손의 시입니다.

십자가의 예표인 성전의 존재 의미는 타락한 인간이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곳입니다. 선악과는 곧 타락하기 이전의 성전이자 십자가입니다. 즉 선악과와 성전과 십자가의 존재 의미가 같다는 것입니다. 다만 타락 전후의 인간의 양상이 달랐기 때문에 그에 맞추어 형태를 달리하게 되었지만 그 존재의미는 동일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선악과는 인간다움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했던 것이고, 성전이나 십자가는 인간다움을 회복하고 유지시키기 위해 존재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전이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통해 성전을 파괴하셨다고 인식하였습니다. 그리고 선민의 나라를 멸망시키시고 선민의 근간이었던 성전을 파괴시켰던 하나님의 섭리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본문 구절구절마다 하나님을 향한 원망어린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1절에서 하나님이여 주께서 어찌하여 우리를 영원히 버리시나이까라고 하였고, 10절에서는 하나님이여 대적이 언제까지 비방하겠으며 원수가 주의 이름을 영원히 능욕하리이까라고 하였으며, 18절에서는 원수가 주를 비방하며 우매한 백성이 주의 이름을 능욕하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22절에서는 하나님의 원통함으로 비약시키며 하나님이여 일어나 주의 원통함을 푸시고 우매한 자가 종일 주를 비방하는 것을 기억하소서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시인의 착각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통함을 가지시는 대상은 BC.586년에 성전을 멸망시킨 바벨론이 아닙니다. 성전을 이 지상에서 사라지게 한 원흉은 선민 이스라엘이었고, 하나님이 원통함을 느끼시는 대상은 바로 선민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시인의 통찰은 그에 이르지 못한 채 바벨론을 향하여 가진 자신의 원통함을 하나님께 이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도 바벨론에 대해 원통함을 가지고 계실 텐데 왜 보고만 계시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마어마한 착각입니다.

분명히 이스라엘은 성전이 없어지면서 멸망하였습니다. 반대로 성전이 존재하는 한 이스라엘은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성전을 파괴한 자는 시인이 생각하는 대로 바벨론이 아닙니다. 실질적으로 성전 파괴의 원인을 제공한 것은 선민 당사자였습니다. 바벨론은 성전이라는 건물의 폐기처분을 위해 동원된 철거용역에 불과했습니다.

성전 파괴의 양상을 5~7절에서 보면 그들은 마치 도끼를 들어 삼림을 베는 사람 같으니이다 / 이제 그들이 도끼와 철퇴로 성소의 모든 조각품을 쳐서 부수고 / 주의 성소를 불사르며 주의 이름이 계신 곳을 더럽혀 땅에 엎었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바벨론을 통해 이렇게 처참하게 성전을 파괴하셨던 것일까요?

선민들이 성전의 존재 의미를 파괴하였기 때문입니다. 선민은 성전이라는 건축물을 파괴하지 않았지만 성전이 존재하는 의미를 파괴했습니다. 성전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다움을 회복시키는 장소였습니다. ‘인간다움은 곧 판단하시고 의지가 있으신 인격자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나의 판단과 의지를 묶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 이외에 이 세상에서 만나는 대상들로 내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 있다는 믿음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즉 이 세상을 나의 힘과 생각으로 사는 것이야 말로 인간다움의 상실이었던 것입니다.

성소와 번제단은 비인간다움을 죽이는 곳이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이러한 역할을 하는 장소입니다. 이 세상에서 마음 채움 거리를 찾아서 믿고 추구하는 삶이 인간다움을 상실하는 것입니다. 돈 많이 벌어서 인간답게 살아야겠다는 말을 쉽게 하지만 실제로는 완전히 비인간적인 발상입니다. 인간다움을 상실한 자의 생각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에 짝의 아버지가 제주도에서 콩 한 가마니를 지고 서울로 올라와서 자수성가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정도면 인간승리 아닙니까? 그러나 오히려 인간다움을 상실했을 뿐입니다. 인간다움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하나님께서 살아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가 내 삶을 책임지는 가운데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능력을 동원하려고 합니다. 비인간적인 삶을 지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죽는 장소가 성전이었고 우리에게는 십자가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을 세우시고 십자가 사건을 일으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성전은 하나였고 선민은 수백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백만 명의 마음속에 성전을 담게 하시기 위해 건축물로서의 성전을 허락하셨습니다. 십자가 사건의 존재 의미도 이와 같습니다. 예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이 언제 어디서나 십자가에 달려죽으신 예수님을 마음에 품고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민들은 건축물로서의 성전만을 인식한 채 성전 본래의 의미를 마음에 담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인간다움이 상실된 삶을 지속하게 되었습니다. 돈을 최고로 여기는 순간 마음의 지성소의 법궤 자리에는 하나님 대신에 돈이라는 이름이 들어옵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624절에서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있는 지성소에 들어올 수 있는 라이벌들의 대표로서 재물을 지목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누가복음 1426절에서는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모나 처자나 형제자매나 자기 목숨 또한 하나님의 이름이 있어야 하는 마음의 지성소에 들어올 수 있는 이름들입니다.

마음의 지성소에 하나님의 이름 대신에 자녀의 이름이 들어온다면 자녀의 형통이 곧 나의 기쁨과 만족이 된다고 믿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생길 때마다 마음으로 성전의 의미를 되새겨야 합니다. 지성소의 법궤가 뜻하듯이 우리의 마음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와야 하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추구하여 기쁨과 만족을 누려야 합니다. 그러나 자녀라는 이름을 들여놓고 자녀의 형통을 통해서 삶의 기쁨과 만족을 누리려고 했습니다. 이때에 이러한 나는 번제단에서 죽어야만 한다고 여겼어야만 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건축물로서의 성전이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에는 그들의 숫자만큼 성전이 있어야 했습니다. 전 세계에 7억 명의 기독교인이 있다고 하면 이들의 마음에 7억 개의 십자가가 있어야만 합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정작 수십억 수백억 개의 십자가 장신구가 있고 교회마다 각양각색의 십자가는 있을지언정, 마음에는 십자가가 사라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럴 때 십자가의 존재 의미는 사라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에 성전이 사라진 이상 건축물로서의 성전 또한 의미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성전과 십자가를 품지 않는다면 인간다움은 회복될 수 없습니다. 짐승들이나 인공지능 앞에서 인간다움을 주장할 수는 있을지언정 하나님 앞에서 인간다움을 회복할 길은 없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성전 없이, 신약시대에는 십자가에 달린 주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의 인간다움은 회복할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직장에서 사업장에서 심지어 교회에서 목사님들의 마음속에서 십자가가 사라졌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교회조차도 인간다움을 상실한 비인간들의 집단이 되어버렸습니다. 교회에 가면 어디에나 십자가가 걸려있지만 정작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십자가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완전한 인간다움을 실현해야 할 예배당에서 교인들이 스스로 십자가 존재의 의미를 파괴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있든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때에 십자의 의미는 말살되기 때문입니다. 구약으로 말하면 어디에 살든지 예루살렘 성전을 마음에 담아야만 했던 것과 같습니다. 선민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건축물로서의 성전의 의미가 말살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도 언제 어디서나 마음으로 십자가를 기억하셔야 합니다. 에덴동산 중앙에 선악과가 있었던 것 같이 우리는 십자가를 기억함으로서 인간다움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인간다울 때에 에덴이 뜻하는 바대로 기쁨과 만족이 충만할 것이고, 이 세상의 삶은 하나님께서 사시게 될 것입니다. 이것을 기억하셔서 인간다움의 회복장치를 100% 활용하는 에덴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긍휼히 여겨주시옵소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세상이 아무리 급물살 같을지라도 우리의 마음이 휩쓸리지 않게 해주셔서 언제 어디서나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을 기억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