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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삼겹살 기다림과 삼중 채움의 기도_태승철

by 태승철 · 17-10-21 10:22 · 6,986
삼겹의 무늬가 구분이 뚜렷하게 선명하며 얼리지 않은 채 생으로 숙성이 잘 된 돼지 삼겹살 구이처럼 맛있는 게 어디 다시 있겠습니까? 쉬지 말고 해야 하는 기도는 구함과 기다림입니다. 그런데 이 구함과 기다림이 삼겹이라야 기도의 참 맛이 난다는 겁니다. 즉 반드시 응답이 주어지는 기도를 드리려면 오직 삼겹이라야 한다는 말씀이지요. 삼겹으로 구하고 기다리기에 그 응답은 삼중 채움으로 주어지게 되지요. 이제 삼겹살 기도 생활의 즐거움에 돌입해봅니다.

삼겹살 기다림과 삼중 채움의 기도

(시편 40:1~17)

 

 

1.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2.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3.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4.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5.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삼겹살 기다림과 삼중 채움의 기도>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삼겹살 기다림과 삼중 채움의 기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일 즐겨먹는 고기가 삼겹살이라고 합니다. 손쉽게 구해서 맛있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삼겹살구이입니다. 한편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마음에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삼겹살을 즐기는 것만큼이나 하나님의 교회 예수님의 교회에 속한 사람들이 삼겹살 기다림과 삼중 채움의 기도를 실행하고 맛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오늘 본문이 삼겹살 기다림과 삼중 채움의 기도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의 역사적 배경을 특정할 수는 없지만 다윗의 생애 동안 반복되었던 환란을 오직 기도로 대처하면서 살았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기도에서 특별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부분이 있는데 바로 삼겹살 간구와 기다림이고 그에 상응하는 삼중 채움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온전한 기도의 응답은 삼중으로 채워져야 합니다. 그리고 삼중으로 채워지는 온전한 응답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삼겹살 기도를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키워드는 1절에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라고 하였습니다. 간구하고 기다렸다니 하나님께서 귀를 기울이셔서 응답해주셨다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얼른 보면 전형적으로 기도했더니 응답받았다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문제는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라는 부분입니다. 이 부분을 일반적으로 해석한다면 많은 어려움과 급박한 상황들 속에서 다른 행동을 취할 수도 있었겠지만 지속적으로 참고 기다렸다는 것으로 이해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 원문을 보면 카오 키위티기다림 속에서 기다렸다라는 의미입니다. 이 말은 고통이 지속되는 오랜 기간 동안 줄곧 기다렸다는 의미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지속적인 기다림의 양상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의 질을 말하고 있습니다. 기다림 속에 기다렸다는 말처럼 겹을 이루고 있습니다. 속 기다림이 지속되는 동안에 겉 기다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본래는 기다림 속에서 기다렸고 바로 그 기다림 속에서 또 기다렸다고 해야 삼중 기다림이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시적인 표현이 너무 느슨한 감이 있기에 기다림 속에서 기다렸다고 표현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심한 어려움이 다가올 때에 단순히 이 어려움이 빨리 지나가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기다림이 겹겹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즉 삼겹의 기다림과 삼중의 채움입니다. 환경적 어려움이 주어졌을 때에 첫 번째는 여호와 의지하기, 두 번째는 환경에 대해 여호와께서 역사하시기, 세 번째는 여호와의 뜻을 나도 행하기입니다.

먼저 여호와 의지하기의 간구와 기다림에 상응해서는 여호와로 나의 마음 채우기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환경에 대해 역사하시기를 간구하는 기다림 속에는 여호와의 뜻으로 환경 채우기가 상응합니다. 마지막으로 여호와의 뜻을 나도 행하기를 간구하는 기다림에 대해서는 여호와의 뜻으로 행동 채우기가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이렇게 반드시 삼중으로만 응답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일한 기도 응답의 형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삼겹살 간구와 기다림이 되어야만 합니다. 이렇게 기도한 결과 2절에서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라고 총체적 평강이 찾아왔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이란 말에서 기가 막힐이라는 뜻은 사나운 물살이 삼킬 듯이 흐르는 계곡의 격류를 말합니다. ‘수렁은 밑을 알 수 없는 늪지대입니다. 삼겹으로 간구했어야 할 상황은 격류에 휩쓸리는 것 같았고 밑이 없는 늪에 빠져드는 것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다윗은 이러한 상황에서 삼겹살의 간구와 기다림을 수행하였고, 그 결과 총체적인 삶의 평강이 찾아왔습니다. 그 총체적 삶의 평강은 삼중의 채움을 통해 일어났습니다. 마음을 여호와로 채우고, 환경을 여호와의 뜻으로 채우고, 행동역시 여호와의 뜻으로 채울 때에 온전한 평강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삼겹의 간구와 기다림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삼중의 채움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3~4절에서 지배적으로 등장하는 단어는 여호와 의지하기입니다. 삼겹의 간구와 기다림 중에서 첫 번째에 해당합니다. 의지하기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번 기회를 통해서 깊이 생각해보고 올바른 기도를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개입을 통해 어려운 환경에 개선이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다윗에게는 이러한 간구와 기다림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돈 문제로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에 우리는 하나님! 이 돈 문제를 해결해주세요라고 문제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가 간구하는 것을 의지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적으로 오해입니다. 4절을 보면 여호와를 의지하고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앞서 말한 오해가 거짓에 치우치는 자들의 신앙형태입니다. 의지하기는 삶에서 벌어지는 여러 문제들을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가서 해결해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기쁨의 동산인 에덴 밖으로 쫓겨나서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에 가장 급박하고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아담과 하와가 자신들의 존재를 삼킬 듯이 압박하고 쇄도해 들어오는 두려움이었습니다.

하나님의 크기로 만들어진 마음의 공백 상태로부터 무시무시한 두려움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마음의 공백 상태는 인간이 느끼는 모든 두려움의 근원이 됩니다. 하나님만으로 채울 수 있는 마음이 하나님을 등진 채 세상을 향하는 이유는, 마음의 공백에서 발생하는 두려움이 이 세상에서 만나는 가지가지 대상들을 마음 채움거리로 믿게 하는 압박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의 공백을 세상 것으로 채울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바로 의지하기입니다.

자녀 문제로 하나님께 나가서 기도하는 것은 자녀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자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내 마음이 채워질 수 없고 만족과 기쁨이 없다는 고백일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돈 문제로 하나님을 구하는 것은 돈을 의지함입니다. 돈 문제가 있는 한 기쁠 수 없다며 해결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의지하기 위해 하나님을 동원하고 고용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사실 내면을 들여다보면 육체의 죽음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 그 자체는 입고 있던 낡은 옷을 벗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육체를 통해서 마음의 공백을 채울 수 있으리라 믿었던 대상들과 결별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돈 명예 권력 인기 가족 일 직장 승진 애인 등 모든 것들이 육체가 있어야 가질 수 있고 관계할 수 있습니다. 이것과 떨어지는 것이 죽음이기에 사람들은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육체가 죽으면 내 마음의 공백 채움 거리들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유일한 마음 채움의 대상으로 믿고 의지하는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몸이 죽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공백 채움 거리가 없어지는 상태입니다. 당연히 하늘에 계신 하나님으로 마음의 공백을 채우는 자들에게는 육체의 죽음이 두려울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한 논리에서 지옥은 마음의 공백을 채울 거리가 없는 상태에서 두려움의 압박을 받으며 영원히 살아가는 곳입니다. 이것이 바로 의지함의 의미입니다.

4절 하반부를 보면 교만한 자와 거짓에 치우치는 자를 돌아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돈을 의지하는 자들은 돈으로 만족하고 기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돈을 추구하게 됩니다. 그러던 중 일이 잘 풀려서 뜻대로 돈을 많이 벌게 되었습니다. 그럴 때에 이들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우월감에 빠집니다. 이들이 교만한 자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돌아보지 말라는 것은 부러워하지 말고 시기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돈이 아니라 일류대학이 그러한 대상일 수 있습니다. 지금껏 아픈 적이 없고 나이가 70세가 되었는데도 동안인 사람에게는 건강이 자랑거리일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동조하거나 부러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짓에 치우치는 자는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하면서도 마음에서는 세상을 의지하는 자들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을 고용하여 세상 가치를 얻으려는 자들이 바로 거짓에 치우치는 자들입니다. 이게 바로 의지하기입니다.

 

두 번째 겹을 이루고 있는 간구와 기다림은 하나님의 개입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입니다.

5절을 보면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도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 없다라는 것은 나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과 이루고자 하시는 계획이 너무나 많아서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환경적으로 어려움이 주어지는 상황에서 환경의 변화보다 먼저 마음의 채움을 기도하고 기다렸습니다. 비록 환경이 어렵지만 마음의 궁극적 만족과 기쁨은 환경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만으로 누릴 수 있는 것임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여호와 하나님만을 의지하며 여호와 하나님만으로 마음이 채워지기를 기다렸더니,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셔서 마음이 하나님으로 충만해졌음을 고백하였습니다.

마치 하박국 317~18절에서 하박국 선지자가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찌라도 /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고백한 것과 같습니다.

다윗 또한 같은 마음으로 채웠더니 그 하나님께서는 가만히 계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내 삶의 처한 환경에 대해서 뜻을 펼쳐나가시는데 셀 수도 없는 많은 기적과 역사들이 있었고,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사랑과 평강으로 나에 대한 계획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하나님으로 먼저 채울 때에 내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에 의해서 모래알처럼 많은 사랑의 뜻이 환경에도 역사하시게 됩니다. 그리하여 내 환경은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환경적 어려움에 처했을 때에라도 그것이 해결된다고 해서 내 마음이 궁극적으로 만족하고 기쁠 수 없다는 고백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내 마음의 만족과 기쁨을 위해서 하나님만을 의지함을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환경이 유지되는 동안에도 하나님으로 만족하며 감사하는 심령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할 때에 하나님은 내 마음 안에 오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내 안에 오신 뒤에는 내가 처한 환경에 대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만 개입하시고 역사하시기를 바라는 기도가 두 번째 겹을 이루면서 기다림의 내용을 채워야 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7~8절을 보면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환경에 채워질 때에 살아있고 생각하는 존재로서 가만히 장승처럼 서 있을 수는 없습니다. 이때에 생각과 행동 속에 하나님의 뜻이 채워지기 시작합니다. 나의 행동은 앞선 두겹의 간구와 기다림이 채워진 뒤에 나타나야만 합니다. 환경적으로 어려움이 생기면 곧바로 반응하며 하나님께 그 해결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최우선으로 은행을 찾아가거나 돈을 빌리려하는 대신에 먼저 하나님으로 내 마음이 채워졌는가를 살피며 간구하고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심지어 내가 망할지라도 혹은 건강이 악화되어 죽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으로만 환경이 채워지기를 바랄 때에 하나님의 뜻을 내 마음과 생각에 넣어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뜻이 나의 소원으로 여겨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내가 행동해야 될 시점은 어려운 환경 중에서도 마음에 감사와 기쁨이 생길 때입니다. 그래서 어려운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내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랄 수 있습니다. 이전에는 환경이 바뀌기만을 바랐지만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만족하면 환경에 대한 바람은 사라집니다. 환경은 하나님의 뜻으로만 채워지기를 원하게 됩니다.

이때에 나타는 증거는 성경에서 주신 모든 말씀의 무게가 가뿐해집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환경이 흥하든지 망하든지 죽든지 살든지 하나님의 뜻으로만 채워지는 것을 성공이자 형통으로 믿을 수 있다면, 두루마리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들이 마음에 가뿐하게 여겨지게 됩니다. 이것이 이제는 내가 행동해도 된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지고 환경이 하나님의 뜻으로 채워짐을 믿고 난 뒤에 하나님께서는 내가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마음에는 세상을 채우고 세상 것으로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가운데 하나님께 나가서 기도하는 것은 거짓에 치우진 자입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타인과 비교하여 우월감을 얻으려고 하는 자는 교만한 자입니다. 그런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으로 환경이 채움을 받고 하나님의 뜻으로 나의 생각과 행동이 채움을 받아야 합니다. 이러한 삼겹살 간구의 기다림과 삼중 채움의 기도가 바로 사도 바울의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던 기도이며 십자가 생활화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우리는 끊임없는 원죄의 체질적 영향력 아래에서 육체로 만나는 것들을 의지하려 하고,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해 선악을 판단합니다. 심지어 차를 타고 가다가 추월을 당했다고 화를 낸다면 그것에조차 기쁨에 대해 판단합니다. 우리는 매순간 마음을 십자가에 걸어둠으로서 원죄의 체질은 억제됩니다. 그럴 때에 우리의 마음은 부활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으로 채움을 받습니다. ‘라는 주체가 떠나버린 내 삶의 환경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당신의 뜻을 채우실 것이고, 이 몸을 통해서 이루실 일이 있다면 우리의 행동에 하나님의 뜻을 채우실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이 되었다는 증거로 성경을 읽을 때에 주어진 명령과 말씀들이 너무나 가뿐하게 여겨집니다.

오늘 다윗은 우리에게 삼겹살의 기도를 보여주었고, 이에 상응하는 삼중의 채움을 경험적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쉬지 않고 삼겹살의 간구와 기다림을 지탱하게 하시며, 또한 쉬거나 중단 없이 삼중의 채움을 경험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