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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질병에 대한 복음적 이해와 대처_태승철

by 태승철 · 17-10-20 09:58 · 7,033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내게 질병을 주신 것임으로 내가 그 질병에 대하여 이렇고 저렇고 입을 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늘 다윗의 시편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왜 하나님은 당신이 그토록 사랑하시는 다윗 같은 분에게까지 극심한 고통을 수반하는 질병을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질병 없는 생을 사는 사람이 없는 세상에서 십자가 생활화가 가져다주는 질병의 이해와 대처법을 살펴봅니다.

질병에 대한 복음적 이해와 대처

(시편 39:1~13)

 

 

4.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5.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셀라

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7.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질병에 대한 복음적 이해와 대처>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질병에 대한 복음적 이해와 대처

질문을 하면서 말씀을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아는 어떤 집사님이 평소에 배가 아팠지만 병원에는 가지 않고 견디시다가, 어느 날 너무 아파서 병원을 갔더니 대장암 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너무 늦게 발견하는 바람에 대장암이 이미 다른 장기로 전이된 상태였고, 치료를 시작한 뒤에도 암의 기세는 온 몸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배가 조금 아팠을 때에 진작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움이 있었습니다. 결국 작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마태복음 1028절에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니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푼돈에 팔리는 참새를 보시면서 하늘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628절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라고 하십니다. 들에 핀 백합화도 하늘 아버지가 손수 입히시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라면 이 세상의 삼라만상은 하나님의 뜻의 그물망을 피해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한 집사님은 병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 맞습니까? 초기에 암을 발견했더라면 좀 더 오래 사실 수 있었을까요? 참새 한 마리의 운명까지도 결정하시는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집사님의 본래 수명은 병으로 인해서 줄어들게 된 것입니까?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는 2050년까지는 살게 하실 작정이었는데 건강을 등한히 함으로써 암을 늦게 발견하는 바람에 2016년에 돌아가시게 된 것일까요? 그렇다면 하나님이 정하신 수명에서 무려 35년이나 일찍 가신 셈인데 말입니다.

 

또 다른 질문을 드려봅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저에게 전해주신 이야기입니다. 목사님들끼리 모였는데 건강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답니다. 공기 좋은 곳에서 적당한 운동을 하며 건강식을 챙겨먹으면 오래 산다고 여기는 것이 세상적인 사고방식입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와 같은 삶을 살아간다면 수명에 변화가 생기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2020년으로 정해두신 수명이 2030년까지 늘어나기도 할까요? 목사님들까지도 건강에 신경을 씁니다. 사람들이 장수에 필요다고 믿는 것들을 같이 실천합니다. 그러한 목사님들의 생각 속에는 이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수명이상으로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일까요?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오지 않았다면 사람은 불사신(不死身)입니다. 절대 죽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공격이나 사고를 당하더라도 하나님이 정하신 수명의 때가 아니면 죽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아니라면 사람은 절대로 못 죽고 안 죽습니다.

질병 때문에 하나님의 정하신 수명 이전에 죽지 않습니다. 건강하다고 해서 하나님이 정하신 수명을 넘어서 더 오래 살 수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정하신 수명이 다하여 찾아오는 죽음을 이루시는 방식이 너무나도 다양할 뿐입니다. 반대로 정하신 수명대로 살게 하시기 위하여 죽을 고비를 넘기게 하시는 방법 또한 다양합니다.

그러므로 앞서 말씀드린 암에 걸리신 집사님은 암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수명의 끝을 암이라는 질병을 통해 이루신 것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죽음을 병으로 성취하신 것입니다. 심지어 사고나 살인 등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수명의 마지막을 이루시는 방법일 뿐입니다.

세상에는 살인미수가 존재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수명이 아닌 사람에 대한 살인 의도는 미수에 그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직 살려두시려는 사람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죽일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 죽음을 맞이하게 하시려고 할 때에 누구도 그 죽음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살인죄도 살인 행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살인죄를 저지른 가해자의 악함이 드러나는 것이고 피해자의 죽음은 하나님께서 이루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살인죄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피해자의 유가족들은 그 죽음에 대한 보복을 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서 살인자는 하나님이 정하신 죽음의 때를 이루기 위한 악역을 담당한 것일 뿐 그의 힘으로 죽인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었기 때문에 죽음이 온 것이고, 그 죽음을 성취하는 과정에서 살인자의 악함이 드러날 필요가 있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방법을 선택하신 것뿐입니다.

 

여기서 정말 중요한 것은 인간은 시한부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얼마나 오래 사느냐 언제까지 사느냐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굳이 의사에게 시한부 선고를 받지 않더라도 모든 인간은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한부의 삶이 아직까지 진행되는 이때에 우리가 꼭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육체로 사는 한시적인 삶의 한계를 뚫고서 영원하신 하나님을 우리의 마음에 모셔 들여야 합니다. 세상에 사는 동안에 세상 밖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소중한 것들을 주신 이유는 그것들을 사랑하라고 하심이 아닙니다. 그 소중한 것들보다도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심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번제단에 올린 사건을 떠올려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주신 이유는 이삭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크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은 마음에서 이삭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을 마음 가득히 모셔 들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육체로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의 삶의 의미는 하나님을 사랑할 기회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이것이 믿음이고 의미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을 직접 본다면 사랑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자발적인 사랑이 아니고 사로잡힘에 대한 반응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은 너무나 좋은 분이시기 때문에 내 마음이 황홀감에 빠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랑이 아닌 동물적 감각의 몰입이고 빨려드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인격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증명하는 방법입니다.

이러한 하나님 사랑을 방해하는 가장 큰 요인은 바로 마음이 육체에 대해서 가지는 믿음입니다. 육체에 대한 믿음은 마음이 육체에 붙어서 의존하는 것입니다. 육체로 마음의 빈 공간을 채울 수 있으리라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 사랑하는 것을 가장 방해하는 요인입니다.

 

오늘 시의 주제는 인생의 덧없음을 이야기합니다.

5~6절과 11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7절을 보면 하나님만이 유일한 소망이 되심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시에는 다윗이 이 세상에서 수명이 허락되는 중에 영원성을 포착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영원하신 하나님만을 소망으로 여기는 것은 곧 하나님만이 내 마음을 채우실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음이 채워져야 진정한 만족과 기쁨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만으로 내 마음을 채울 수 있음을 깨닫는 영원성을 포착하는 상태가 질병을 앓고 있는 병상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질병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군으로 추앙받고 내 마음에 합한 자라는 하나님의 고백을 들은 다윗이 왜 질병으로 고생을 하는지 오늘 시편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질병 중에서 철저하게 육신을 의존해서 이룬 삶의 허망함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노래하여 후손들과 선민들을 깨우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의 의도가 다윗을 통해 나타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4~6절까지를 보면 몸을 통하여 만나는 것들에 의지해서 쌓아올린 모든 삶은 다 허망한 것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녀에게 공부를 최우선으로 강요하는 부모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녀가 죽을병에 걸리는 순간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바람은 의미를 잃고 사라져버리게 됩니다. 부모의 바람은 살아만 있어달라는 것으로 변합니다. 저는 부모가 자녀를 잃고 이민 생활 30년 끝에 얻은 멋진 뜰을 가진 집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절규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마찬가지로 다윗은 몸에 생긴 질병을 통해 몸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몸을 의지하며 몸을 통해 만나는 것들로 만족하려 했던 삶이 모두 허망함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질병을 통해서 깨달아야 할 것은 몸은 믿을 것이 못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를 위해 질병을 허락하십니다.

삶에서 하나님을 포착해야 될 기회로서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육체 자체가 아닙니다. 육체에 대한 내 마음의 믿음입니다. 육체가 있어야만 좋은 꼴을 본다고 믿기 때문에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속담이 나왔습니다. 육체에 대한 믿음이 얼마나 강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몸에 대한 순교적 신앙이기까지 합니다. 몸이 있어야만 기쁠 수 있고 만족을 얻을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는 것을 가장 억울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정말로 잘못 된 말입니다. 마음이 하늘을 포착하는 사람이라면 죽는 자를 부러워해야 합니다. 하늘로 가는 것이 확실하기만 하다면 죽는 것보다 부러운 일이 세상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질병이 주어질 때에 질병의 의미와 그것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를 알아야만 합니다.

질병은 하나님의 질투의 결과입니다. 내 마음과 몸 사이를 떨어뜨려 놓으시려고 하심입니다. 더 이상 몸을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몸을 믿음으로서 많은 재산을 쌓았을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신다면 그것은 누구의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 그림자와 같고 허상에 불과하기에 믿지 말라는 것입니다.

질병이 주어지는 이유는 마음이 몸을 믿었기 때문이고 마음이 몸에 달라붙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질병이 주어지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하소연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그렇게 하소연하지 않겠다는 것을 본문 1~3절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는데, 병에 걸렸다고 해서 하나님께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고 하소연 한다면 결코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신앙을 스스로 져버리는 일이기에 입에 재갈을 물리더라도 하나님께 잘못 된 말을 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이러한 결심 속에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왜 질병을 주셨는지 깨달았습니다. 마음이 몸을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몸에 붙어서 세상에서 온갖 것을 쌓아올리기 위해 애썼습니다. 그러나 이것들이 모두 그림자와 허상에 불과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은 몸에 대한 마음의 믿음을 깨뜨리시기 위해서 질병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깨달음을 얻고서야 다윗은 하나님께 치유를 구합니다. 이 때에 질병을 낫게 해달라는 간구는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7절의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라는 고백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질병을 주신 하나님께 맞추어진 대처법인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고백을 통해 몸에 대한 마음의 관심에 죽을 수만 있다면 쉽게 질병에 걸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보약을 먹으며 건강식을 챙기지만 사실 육체에 가장 이로운 보약은 주님의 살과 피인 것입니다. 내 몸에 대한 관심이 십자가에서 날마다 죽을 수만 있다면 내 몸에 질병이 생길 확률은 엄청나게 줄어들 것입니다.

사람에게 질병과 노화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죽을병에 걸리면 사람들은 하나님의 벌을 받았다고 합니다. 물론 이 병이 하나님의 징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의 징계이며 질투의 징계입니다. 하나님이 질투하시지 않는다면 오히려 한 번의 질병도 겪지 않고 살다가 죽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원죄의 체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마음은 몸에 의존하고 어제 말씀대로 붙어먹으려고 합니다. 이러한 원죄의 체질을 전제 삼을 때에 하나님이 내리시는 가장 큰 형벌은 오히려 건강함일 수 있습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원죄의 체질은 마음이 육체에 붙어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원죄의 체질을 염두에 둘 때에 하나님께서 질병을 허락하시지 않고 건강하기만 하다면, 오히려 그것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께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형벌일 수 있습니다. 마음이 몸에 붙은 상태에 대해서 어떠한 반성도 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고 죽음을 맞이한다면, 그야말로 마태복음 16장에서 말하듯이 음부의 대문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형벌은 없습니다. 질병과 노화는 오히려 하나님의 배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몸에 대한 마음의 믿음을 끊임없이 죽여 간다면 질병이 주는 고통에서 많은 부분 해방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십자가 생활화를 하지 않는데도 건강하다면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무서운 형벌을 겪는 중일수도 있음을 기억하셔야 할 것입니다. 건강이 무서운 이유는 건강할 때에 모든 악이 다 벌어지기 때문입니다. 아파서 병원의 침상에 누운 사람은 죄를 짓기 위해 돌아다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우리의 보약입니다. 진정으로 몸을 생각하고 싶다면 몸에 대한 마음의 관심을 죽이십시오.

여기에서 질문이 있습니다. 질병의 원인이 하나님께서 몸에 대한 믿음을 깨뜨리시려고 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병원에 가거나 의사를 만날 필요가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병원과 의사는 오히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입니다. 병이 생기면 병원에 가서 진찰과 합당한 치료를 받으십시오. 단 우리는 그 과정에 대해 마음을 쏟아서는 안 됩니다.

내 마음은 병으로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아니라면 열 가지 암이 겹쳐서 발생할지라도 결코 죽지 않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임한다면 완벽한 건강 상태를 유지하더라도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병과 건강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기뻐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병은 고통을 동반하기 때문에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으시되, 그러한 몸에 대한 관심은 끊임없이 죽어야 합니다.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 건강한 몸에 대한 마음의 관심을 끊임없이 죽여 나가야 할 것입니다. 몸을 담고 있고 건강한 몸을 담고 있고 늙지 않는 몸을 담고 있고 늙지 않는 얼굴을 담고 있는 마음을 끊임없이 죽여 나가는 것입니다. 노화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우리에게는 몸으로 접하는 세상 것을 탐하려는 원죄의 체질이 죽을 때까지 발동하므로 하나님께서는 노화를 주십니다. 옛날처럼 뛰어다닐 수 없고 화장을 해도 받질 않고 저처럼 머리가 다 빠질 수도 있고 무릎도 아프고 소화도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 몸에 대한 믿음을 거두어들이라는 하나님의 배려입니다. 마음이 몸에 붙어서 만족하고 기쁠 수 있다는 믿음을 깨뜨리려는 배려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질병이 주어졌으며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늙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랑하셔서 더 이상 세상에 두실 수 없고 끌어안고 싶으실 때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정해진 죽음의 날까지 죽기를 각오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매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육체로 살고 있는 동안에 내 몸을 포함한 이 세상에 대해 지속적으로 십자가에서 죽는 것입니다.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의 길을 따라서 우리의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기를 소원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늘로 올라간 우리의 마음은 주님께서 하나님으로 행복해하시듯이 주님 안에서 하나님으로 행복을 누릴 것입니다. 그것을 소망하며 살아갈 때에 질병의 횟수도 줄어들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원죄의 체질을 전제로 하여 생각할 때에, 오히려 질병이 전혀 없는 삶이야말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가장 무서운 형벌이고 하나님이 포기하시는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로 내 몸에 대한 마음의 관심이 죽게 해주셔서 몸에도 진정한 안식과 평강이 주어지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