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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마음이 '붙어먹는' 몸만 불쌍하다_태승철

by 태승철 · 17-10-19 10:04 · 7,237
'붙어먹다'는 아시다시피 '남에게 의지해 얻어먹거나 이득을 본다'는 뜻입니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생각할 때, 견디기 어려운 고통을 가져다주는 질병들이 우리 몸에 생기는 근원적인 이유는 대체 뭘까요? 다름 아닌 '붙어먹기' 때문입니다. 즉 마음이 몸에 붙어먹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잘못은 붙어먹기를 하는 마음에 있는데 이 잘못을 마음이 깨우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우리 몸에 질병을 허락하십니다. 괜히 몸만 억울하고 불쌍한 거지요.

마음이 붙어먹는몸만 불쌍하다

(시편 38:1~22)

 

 

1. 여호와여 주의 노하심으로 나를 책망하지 마시고 주의 분노하심으로 나를 징계하지 마소서

2. 주의 화살이 나를 찌르고 주의 손이 나를 심히 누르시나이다

3. 주의 진노로 말미암아 내 살에 성한 곳이 없사오며 나의 죄로 말미암아 내 뼈에 평안함이 없나이다

4.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

5.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내가 우매한 까닭이로소이다

6. 내가 아프고 심히 구부러졌으며 종일토록 슬픔 중에 다니나이다

7. 내 허리에 열기가 가득하고 내 살에 성한 곳이 없나이다

8.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마음이 '붙어먹는' 몸만 불쌍하다>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마음이 '붙어먹는' 몸만 불쌍하다

붙어먹다.’라는 말은 남에게 의지해서 물질적인 이득이나 도움을 얻는다는 뜻입니다.

사전의 예를 들어보면 일본 총독부에 붙어먹었던 그는 광복이 되자 국외로 도망쳤다라고 하는 문장이 있습니다. 요즘 우리나라 사정에 비유하자면 중국에만 붙어먹던 북한이 러시아로 외교의 지평을 넓혀나간다라는 식으로도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나이 40이 되도록 노총각 신세를 면하지 못한 채 형네 집에서 붙어먹자니 형수 눈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라는 식으로도 사용됩니다. 한편 여류시인 김경선의 붙어먹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일부를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파도는 갯바위와 철썩철썩 붙어먹고

소라게는 빈 고동에 붙어먹고  

따개비는 갯바위 사타구니에 붙어먹고

개는 엉덩이끼리 찰싹 붙어먹고

악어새는 악어 이빨 붙어먹고

걸레는 방바닥과 붙어먹고

엉덩이는 변기와 붙어먹고

 

전화 한 통화로 흘러가 들러붙고 싶은 나는

꽂지 못한 플러그처럼 파팟! 전기 한번 통하지 못해

발가락 더듬더듬 붙어먹자 꾀어도

다가서면 움찔 비켜서는 소심한 남자

 

이 시는 외로운 여심을 그리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한 마디로 마음 붙일 남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이 여심만이 아니라 인간의 본성을 드러냅니다. 삶의 천성을 곧 붙어먹기라고 보는 것입니다. 생명의 가장 원초적인 현상을 붙어먹기에서 찾으며,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을 생명력의 출발점으로 봅니다. 내가 느끼는 외로움이 살아있는 모든 생각과 활동의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삶은 만남을 향하여 있다고 간절하게 노래합니다. 찰싹 붙듯이 만나서 서로를 먹고 가짐으로서 채움이 없다면 지탱될 수 없는 것이 삶임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다른 존재에 착 달라붙음은 살아가고자 하는 생명의 자기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말하는 믿음도 결국은 마음에 붙어먹기입니다.

마음에 붙어먹기 자체가 이미 믿음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마음은 하나님 크기로 지어졌습니다. 모든 마음의 움직임은 이 공백을 채우기 위한 간절한 몸부림이고 이것이 생명의 자기표현으로 나타납니다. 사람의 마음은 비어있는 채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 비어있음이 외로움 두려움 좌절 공포 등으로 나타납니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 곧 빈 마음으로 인한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몸부림입니다.

그래서 마음은 비어있는 속을 채우기 위해 붙어먹기를 시도합니다. 붙어먹기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40살 넘은 노총각이 형네 집에서 붙어먹으면서 형수의 눈총을 받는 상황은 부정적이지만, 붙어먹기라는 말 자체는 마음의 근원적인 구조에 대해서 생각하자면 운명입니다. 빈속을 채우기 위해 무엇인가에 달라붙어서 필사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삶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목이 나온 이유도 이와 같습니다. 마음은 빈속을 채우기 위해서 몸에 달라붙을 때에는 믿음이 작용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달라붙으면 분명히 마음이 채워질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외로움이 극복되고 마음의 만족과 기쁨이 주어질 수 있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의 중간에 전화 한 통화로 흘러가 들러붙고 싶은 나는 / 꽂지 못한 플러그처럼 파팟! 전기 한번 통하지 못해라는 부분이 나옵니다. 한 번도 서로의 감정이 일치되지 않은 일방적 사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발가락 더듬더듬 붙어먹자 꾀어도 / 다가서면 움찔 비켜서는 소심한 남자라고 하는 부분도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서지만 남자는 그러한 기색을 느끼자 움찔 비켜섭니다. 이 여자는 그 남자에 대한 믿음이 있습니다. 그 남자에게 붙어서 내 마음의 빈속을 채우면 분명히 행복할 것이라고 믿는데, 아무리 조심스럽게 다가가도 남자는 자꾸만 비켜섭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복음적 믿음은 곧 예수님의 십자가에 붙어먹는 것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붙으면 내 마음이 채워질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께 붙어먹으려고 시도를 하면 예수님께서는 내 마음을 끌고 하늘로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아들의 자리에서 아버지로 채우는 모든 순간에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 마음도 아버지로 채워지게 됩니다. 믿음은 곧 십자가의 예수님께 붙어먹기입니다. 그런데 이 붙어먹기를 다른 대상을 향해 시도하는 모든 것이 죄입니다.

 

오늘 본문은 시편 전체에서 나온 일곱 개의 참회시 중의 하나입니다.

참회시 중에서 63251편이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야를 억울하게 죽인 사건에 대한 참회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특이한 점은 표제어가 히브리어 르하즈키르라고 하는데 기억케 하기 위하여라는 뜻입니다. 이 시편은 다윗의 참회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 의도는 무엇인가를 기억하게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은 육체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에 주의를 집중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질병으로 인한 고통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지은 이 참회시를 통해 후손들로 하여금 기억하게 하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로 합니다. 먼저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게 된 상황을 돌이켜 보면 그 답을 얻을 것 같습니다. 사무엘하 111절을 보면 그 해가 돌아와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이 요압과 그에게 있는 그의 부하들과 온 이스라엘 군대를 보내니 그들이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쌌고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더라라고 하였습니다.

왕들이 출전할 때가 되매 다윗 왕도 마땅히 전쟁에 나가야 했지만 다윗은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현재의 상황은 암몬 자손을 멸하고 랍바를 에워싼 상태에서 진격해 들어가기만 하면 승리가 확실시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전쟁은 하나님을 찾음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여호와를 찾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2~3절을 보면 저녁때에 다윗이 그의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옥상에서 거닐다가 그 곳에서 보니 한 여인이 목욕을 하는데 심히 아름다워 보이는지라 / 다윗이 사람을 보내 그 여인을 알아보게 하였더니라는 행동을 함으로서 패륜적이고 극악무도한 범죄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녁때에 침상에서 일어났다라는 말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고, 왕궁을 거닐었다는 것이 또한 의문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저녁때의 그 시간은 법궤를 모신 성막에서 저녁 상번제가 드려지는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평소 성군으로 일컬어지던 다윗의 모습은 이 시간에 맞추어서 기도를 하는 것이 일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 순간 하나님의 이름을 모신 법궤와 성막을 마음에서 완전히 잊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토록 입에 달고 살았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이 밧세바와 우리야 사건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이러한 과정 뒤에 견디기 어려운 질병으로 고생하며 오늘의 참회시를 짓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경험으로부터 얻은 교훈을 선민들과 후손들에게 기억하게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신앙적 측면에서 볼 때에 밧세바 사건의 핵심적인 문제를 기억시키고자 했습니다.

현재 질병으로 인해 육체적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는 굳이 이러한 고통을 밧세바 사건에 연관 지을 필요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미 그 사건에 대해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이 회개하고 용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자신에게 질병이 생기자, 다시금 밧세바 사건을 회상하며 그때의 핵심적인 불신앙의 문제를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이 핵심적인 문제는 무엇이고 질병의 상태에서 왜 그것을 상기시키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게 되었을까요?

그것이 바로 마음의 육체 붙어먹기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육체에 붙어먹으려 했던 잘못 때문에 오히려 육체에 병이 났다고 여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마음이 밧세바 사건과 같이 육체에 붙어먹으려 했던 잘못을 다시는 못하도록 질병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사실 몸은 아무런 잘못이 없습니다. 마음이 몸에 붙어먹으려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질병으로 치셨을 뿐입니다.

또한 본문을 계속 읽어나가다 보면 다윗이 가진 인간관계가 다 깨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원수들은 잡아먹지 못해서 안달하는데 가족들 친구들 친척들은 외면합니다. 마음이 몸에 붙어먹기 하는 것을 하나님은 원치 않으십니다. 그 바람에 애꿎은 몸에 질병이 생기고 몸으로 이루어진 모든 인간관계조차도 깨지게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관계는 부모로부터 시작하여 부부관계 친족관계 친구관계 등은 몸이 있어야만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몸에 붙어먹으려고 하다 보니 몸에 관련된 모든 일들이 파괴되어 버립니다.

그렇다면 다윗은 어떻게 했어야 하는 것일까요?

다윗은 전쟁에 나가지 않고 저녁때에 옥상을 거닐고 있었다는 것까지는 인정을 합시다. 그런데 목욕하는 한 여자를 보자 마음에 욕심이 생겼습니다. 이 시를 쓴 이유가 바로 이 순간을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이 순간은 마음이 비어있는 순간입니다. 전쟁에 나가지 않고 혼자 있다 보니 마음에 외로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럴 때 눈에 들어온 한 여인이 심히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실제 아름다움과는 별개로 마음을 무엇인가로 채우고자 하는 다윗에게는 아름답게 보였을 뿐입니다. 이 순간이 바로 마음이 몸에 붙은 순간이고, 몸에 의지해서 오감으로 포착하는 대상들을 삼키려는 순간입니다.

다윗의 평소대로의 모습이라면 마음이 몸에 붙는 순간에 돌이켰을 것입니다. 성막에서 상번제가 드려지고 어린양이 번제단에서 죽어가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목욕하는 여인을 갖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진 자신이 번제단 위의 어린양과 함께 죽어야 함을 기억했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기도하면서 다시 살리심을 받은 마음을 얻어야만 했습니다. 밧세바를 담았던 마음은 상번제에서 죽고, 새로워진 마음에는 법궤가 상징하는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 하나님으로 채웠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이 세상을 살 때에 금욕생활을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가운데 결혼도 하고 부부생활을 하며 자녀도 낳는 것은 정해 놓으신 뜻입니다. 단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육체에 붙어먹기를 하면서 육체로 만나는 배우자나 자녀 등의 대상들로 마음을 채우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앞서 보았던 시의 마지막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나를 빠져나간 머리카락은 먼지와 붙어먹고

벽과 붙어먹은 못은 휘도록 잘 살건만

상처와 붙어먹는 난 지금껏

부모님께 빈대처럼 잘도 붙어먹고 산다

하숫물 꺼억 트림하는 싱크대 앞에서

제대로 붙어먹지 못한 오늘이 흘러가고

잘 붙어먹고 사는 족속들이 그립다

 

앞서 마음을 붙이고 싶어 했던 남자는 거절하고 등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상처로 남았습니다. 마음은 어딘가에 붙어서 배부르고 만족을 얻고 싶어 하지만 상처만 남았습니다. 그러면서 육체는 부모님께 빈대처럼 잘도 붙어먹고 삽니다. 마음 따로 몸 따로 입니다. 싱크대 앞에서 설거지 하는 도중에도 채워지지 않은 마음에서는 마음을 붙인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마음의 붙어먹기가 안 되고 있는 그리움을 노래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붙어먹기 자체를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속이 빈 채로 만들어진 마음이기에 붙어먹기는 마음의 운명입니다. 그러나 무엇인가에 붙어서 채워져야만 합니다. 채워지지 않으면 외로움 두려움 근심 불안 등이 생깁니다.

이를 위해 주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붙어먹어야만 하는데 몸을 입고 사는 체질상 끊임없이 마음이 몸에 붙어먹기를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동안에는 하나님께 등을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중단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질병의 고난을 허락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7절에서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받은 계시로 인한 일이기 때문에 마음이 몸에 붙은 것은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교만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로부터 생기는 것인데, 다른 사람은 곧 몸으로 만나는 것입니다. 이 몸에 붙어먹으려 하는 원죄의 체질은 놀라운 계시를 받은 사도 바울에게도 여전히 살아있었습니다. 그것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오늘 다윗이 참회시를 통해 상기시키고자 하는 내용과도 같이 육체에 가시를 은혜로 해석했던 것입니다.

우리 마음은 육체의 오감을 통해서 포착하는 대상들로 마음을 채우려하는 육체의존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주제인 육체의 붙어먹기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는 이것을 벗어날 수만 있다면 작은 질병에 걸릴 일도 드물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조차도 이것에서 벗어나기를 힘들어했으니, 그 누가 이 원죄의 체질을 온전히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 7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몸이 대체 무엇을 잘못했기에 사망의 몸이라는 것일까요? 몸은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원죄의 체질이 자꾸만 몸에 붙어먹기 때문에 몸이 고생하는 것입니다. 내 몸이 나를 만난 덕에 평생 고생을 하는 셈입니다. 여기저기 아프고 시달리고 찢기고 수고합니다.

 

우리 마음이 십자가 붙어먹기를 올바로 할 수만 있다면 이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시에서 벽과 붙어먹은 못은 휘도록 잘 살건만이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 마음은 십자가에 딱 달라붙어야 합니다. 이것이 십자가 붙어먹기이고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우리 안에 하나님이 충만해지실 것입니다.

그런데 자꾸만 예수님의 십자가 붙어먹기가 중단되고 끊어집니다. 끊어지는 순간에는 반드시 내 마음은 육체에 붙어먹기 상태로 돌아갑니다. 육체의 오감을 통해 포착되는 대상들로 내 마음을 채우고자 하는 중입니다. 육체 붙어먹기를 시도하는 마음의 의존성을 끝내야만 하나님으로 채워질 수 있고, 그 방법이 바로 십자가 붙어먹기입니다.

그리고 기억할 것은 육체 붙어먹기를 하려는 내 마음을 포착해야 합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가짐으로서 마음을 채우려고 했던 순간을 포착하고 상번제로 가야했던 것처럼, 십자가를 기억하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육체 붙어먹기를 통해서 대상을 포착하고 행동에 옮기려는 그 순간이 자기부인의 포인트입니다. 이것을 반드시 기억하여 다윗은 자신의 과오를 재현시키지 말라는 의도에서 오늘의 시를 썼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원죄의 체질상 육체 붙어먹기를 끝없이 시도하는 우리의 마음이 십자가 붙어먹기를 통해 극복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럼으로써 하나님 크기의 마음이 본래의 의도대로 하나님으로 충만하여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이 몸을 도구로 삼으시는 복지의 삶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