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 주기도(5)-기도의 전부_태승철

작성일
17-07-22 10:58
작성자
태승철
조회
6,874
시험에 든 가장 전형적인 예를 들자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르비딤에서 물이 없어서 취한 태도일 것입니다.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 하나님 아버지의 살아계심, 나에게 관여하심, 사랑하심에 대한 확신이 마음에서 와르르 무너지는 상황입니다. 대부분 삶의 환경이 개선될 기미가 없이 열악한 상태로 지속될 때 나타나는 현상이지요. 이렇게 하여 우리는 악에 깊이깊이 빠져 들게 됩니다.

십자가 주기도(5)-기도의 전부

(마태복음 6:9~13)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 주기도(5)-기도의 전부>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 주기도(5)-기도의 전부

11절의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구절은 말씀드렸듯이 10절의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말씀의 내용이 실제로 이루어지기 위해 이 땅에서 어떤 상응하는 변화가 뒤따라야 하는가에 대한 말씀입니다. 또한 12절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내용 또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한 기도였습니다. 마찬가지로 13절의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는 구절도 같은 맥락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시험에 들면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가 없고 하나님 나라가 나를 통해서 임하실 수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시험에 든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요?

하나님 아버지가 정말 살아 계셔서 나의 머리털까지 세신바 되시며 속속들이 알고 계시고 사랑하시는가에 대한 의심이 생기는 것입니다. 삶의 환경적 상황이 좋지 않고 개선될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에 이러한 시험에 쉽게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어떻게 그 기미를 느낄 수가 없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전형적인 예로서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 백성을 보여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열 가지의 재앙을 통해서 기적을 보여주셨고 또한 홍해를 갈라지게 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르비딤에서 백성들이 목마른 상황에 처하자 견디지 못하고 모세와 다투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열 가지 재앙을 통해서 기적을 보았고 홍해를 건너며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뼛속 깊이 체험하였습니다. 뒤에서 쫓아오던 애굽 군대가 몰살당하는 것을 보며 전율을 느꼈을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자신들의 삶에 관여하심을 보았는데도, 출애굽기 177절을 보면 그들이 여호와를 시험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신가 안 계신가 하였음이더라라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자신들을 선민으로 택하셔서 사랑하신다면 어떻게 삼일씩이나 물을 주시지 않느냐고 불평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가서 하나님께서는 반석에서 물을 내어 마시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육체의 환경에 조금만 어려움이 지속되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펼쳐나가실 때에 세상 사람들의 기준에서 좋다고 할 만한 상황만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그 뜻이 이루어질 때에는 우리가 전혀 상상하거나 기대하지 못했던 일들이 일어납니다. 또한 지금의 상황이 변함없이 지속됨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뜻이 이루어져 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육체로 느끼는 환경적 변화가 없으면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의심을 갖게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고 기도하게 하십니다.

순교하는 사람들의 상황을 보면 이 세상에서 완전히 마음이 떠나지 않고서는 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기준으로 내 삶을 보려고 한다면 하나님의 걸림돌이 되어서 하나님이 마음껏 역사하실 수가 없습니다. 세상적인 기준으로 상황을 바라보면 자꾸만 불평하고 원망하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돈이 없는 상황에서 주기도문으로 기도를 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는데 1년이 지나도 똑같이 돈이 없을 때에 의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에 있는 젊은 집사님에게 집사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이 경제적 형편이 유지될 수도 있고 더 나빠질 수도 있다라는 이야기를 드린 적이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는 목사를 목사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라도 시험에 들지 않을 마음의 상태가 되어야 하나님께서 마음대로 쓰실 수 있습니다. 결국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놓치면 안 됩니다.

반면에 일이 잘 되어서 시험에 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이 잘 되면 입으로는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하지만 그 이면에는 세상으로 인해 기뻐하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돈이 잘 벌리고 건강이 회복되고 자녀들이 승진해서 기뻐함으로 인해 마음이 세상에 달라붙게 된다면 반드시 삼일이 못가서 시험에 들게 됩니다. 우리는 이 세상일이 잘 되든 못 되든 시험에 들기 때문에 항상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서 마음은 언제나 하늘에 머물게 해야 합니다. 에베소서의 말씀대로 하늘에 앉힌바 되어야만 이 세상에서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하나님의 뜻은 이 땅에서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는 구절은 어떤 의미일까요?

어떤 해석에서는 악이라는 단어가 중성명사도 될 수 있고 남성명사로서 판단하여 사탄을 가리킨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구체적이지 않습니다. 어떻게 되는 것이 악마에게서 구해진다는 것입니까? 그렇게 말은 하지만 나의 마음은 악마의 종이 되어 살고 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이 주기도문의 내용들이 내게서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사는 것이 곧 악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시작하셔서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까지 기도를 가르쳐주셨는데, 이 내용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 삶이 악에 빠진 삶입니다.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기도는 지금까지 드린 기도가 부디 삶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구입니다.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라는 기도는 주기도문 전체의 내용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삶을 살지 말게 해주시옵소서.’라는 내용과 같기 때문에 다시 한 번 전체 내용을 포괄적으로 살펴보면서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에 대해 말씀을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이라는 부분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아니라 이 기도를 기독교공동체에서 사용할 때에 기도문에 붙인 송영입니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라는 것은 곧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기쁨과 만족을 느낄만한 가치를 총 망라한 것입니다. 나라 안에 모든 것이 다 있고, 권세는 힘이며, 영광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가치의 총집결입니다. 이렇게 사람에게 기쁨과 만족을 주는 모든 것들이 결국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포괄적으로 주기도문을 살펴보자면 한 마디로 마음으로 십자가를 밝히 보는 사람이 드리는 기도라고 정의 내릴 수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주님은 십자가를 향해 가시면서 이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이 십자가사건을 사도 바울은 거듭해서 마음으로 밝히 보기를 요청하였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도 요한복음 314절에서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구리 뱀은 바라봄으로서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언제 어떻게 볼 것입니까? 늘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31절에서나는 날마다 죽노라라고 했고 고린도후서 410절에서는 심지어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라고 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마음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밝히 보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으로 밝히 보는 상태에서 드리는 기도가 주기도문입니다. 결국 주기도문은 주님의 십자가를 마음으로 밝히 보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단 한 마디의 의미도 알 수 없으며, 의미를 모르기에 따라서 기도를 드릴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주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주의 기도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밝히 보고 있지 않으면 주기도문의 어떤 말도 의미를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는 삼각관계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있고 마음이 향해갈 대상으로서 하나님이 계시고 세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므로라고 말씀하신 것은 인간의 마음은 공백을 채우기 위해서 화살처럼 날아갑니다. 그런데 절대적으로 올바른 진리의 과녁인 하나님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이라는 과녁을 향해 가있습니다. 기도할 때의 출발점은 세상에 마음이 붙어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 하지만 그것이 안 될 때에 걱정하고 근심하면서 기도하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의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이루신 업적 중에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십자가를 마음으로 먼저 붙잡아야만 합니다. 이렇게 마음으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를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부를지라도 우리 마음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실제로 닿을 수가 없습니다. 실제 닿을 수 없다면 단지 이름일 뿐입니다. 제가 아무리 문재인 대통령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할지라도 실제로 만나본 적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이 점을 놓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신앙이 헛바퀴가 도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십자가를 밝히 보는 중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면 십자가를 출발점으로 해서 주님께서 부활 승천의 길을 내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를 때에는 반드시 십자가를 밝히 보면서 부활 승천의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님을 실제로 만날 수가 없습니다. 실제로 만날 수 없는 하나님은 종교의 하나님일 뿐입니다. 세상에 마음이 붙은 상태에서는 이방인들과 같은 기도를 하거나 위선적인 기도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위선적인 기도는 세상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호출하는 것이며, 이방인과 같은 기도는 세상의 기쁨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좌지우지 고용하려는 기도입니다. 우리 마음이 실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가닿지 못한다면 이러한 기도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한 마디조차도 마음으로 십자가를 밝히 보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기도입니다. 기독교 역사상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하는 첫 구절이 얼마나 많이 헛되게 외쳐졌을까요? 마음으로 십자가를 밝히 보면서 부활과 승천으로 이어지는 길이 마음 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못한 채 불러대는 아버지의 이름은 모두 헛될 뿐입니다. 반드시 십자가를 먼저 붙잡고 밝히 보는 사람이 드리는 기도가 주기도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마음이 십자가를 통해 주님의 부활과 승천의 길을 따라 하늘로 올라 갈 수 있을까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내가 부르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아야 내 마음이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은 오직 내 마음이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만 반응하는 것입니다. ‘반응한다.’라는 것은 곧 살아있다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반응이 죽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반응이 없습니다.

세상을 살아갈 때에 세상의 모든 이름과 모든 이미지가 내 마음에 들어와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 외에는 다른 모든 이름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거룩은 곧 구분되는 것이고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정도의 좋음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보아야 이 세상에서 기쁨거리와 만족거리로 여겨지는 모든 것들에 대해 죽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이름만이 거룩히 여김 받으시게 됩니다. 왜냐하면 주님의 부활은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게 만드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이름들에 대해 반응하던 우리의 마음을 죽게 하시고, 주님이 부활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만 반응하게 하시며, 그 이름이 가리키는 하늘로 주님을 따라 갈 수 있는 길을 만드신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첫 구절의 기도를 통해 우리 마음이 세상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하시듯이 우리도 주님 안에서 그 교제를 나의 교제로 삼을 수 있게 됩니다. 그로인해 내 마음이 온전히 기쁘고 행복할 때까지 이 첫 구절이 지속되어야 될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하고 마음이 평강이 찾아질 때에 다음 기도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는 이제 내가 죽은 이름에 대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내가 자녀에 대한 마음을 죽이고 하늘을 향할 때에, 자녀의 마음에 나라가 임하시오며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필요하시다면 이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나를 통해 나타내실 것입니다. 더 이상 내가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이 아니라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까지도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임하고 뜻이 이루어짐을 간구하는 기도도 십자가를 밝히 보아야만 드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는 단순히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서 나를 통하여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를 원해서 필요한 조건은 하나뿐입니다. 학벌 건강 외모 인맥 같은 것들은 상관이 없습니다. 잘났든지 못났든지 유식하든지 무식하든지 돈이 있든지 없든지 장애가 있든지 없든지 병이 들었든지 건강하든지 상관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병든 몸으로 로마를 뒤집는 복음의 사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몸 하나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내 몸을 통해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몸을 살게 해달라는 간구입니다.

여기에서도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몸이 살아있음으로 인해서 몸으로 만나는 것들로 기쁨과 만족을 얻으려고 내가 내 몸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이 세상에 대해 이루고 싶은 소원과 계획이 있기에 몸을 움직여서 추진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죄적성향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가 임하실 수 없고 뜻이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기도는 사람관계에서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뜻이 이루어지기 위한 많은 영역은 사람관계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원망 불평불만 미움이 생긴다면 그 사람과의 만남에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내게 손해를 끼쳤다는 피해의식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물질적 손해든지 정신적 손해든지 마찬가지입니다. 피해의식이 생기는 것은 곧 내 마음 안에서 이 세상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손해를 볼 수 없고, 손해를 입지 않았다면 용서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객관적으로는 손해를 입었을지라도 내 마음에서 피해의식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러한 피해의식이 생기는 이유는 마음에 하나님이 아닌 세상 가치를 들여놓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세상 가치를 다른 신으로 섬겨서 내 마음에 들여놓았을 때에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이 생깁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것은 곧 내 마음 안에서 세상 가치가 빠져나간 것이고,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도 내가 이제까지 세상 가치를 담고 살았음을 용서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나님만 내 안에 들어와 계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세상 가치들이 들어와 있다면, 내 마음에는 피해의식이 생겨나서 원망과 불평과 미움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직접적으로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일수도 있고 TV뉴스에서 보는 정치인이든지 간에 누가 자꾸 미워지면 내 마음에 세상의 소중한 것들을 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수 없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대할 때에도 십자가에서 이 세상 모든 가치에 대한 죽음이 계속해서 일어나야만 합니다. 십자가에서 세상에 대해 죽은 자로서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놓치는 순간 세상 가치가 들어올 것이고, 그 가치로 인해 손해를 볼 때면 원망과 미움이 생겨나게 됩니다. 십자가를 보고 있는 동안에 사람을 만나고, 십자가를 보고 있는 동안에 내 몸을 생각하면 나를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내 몸을 드리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라는 기도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중에 우리는 상황의 변화에 마음의 기쁨과 만족의 이유를 두지 않기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시험에 들지 않습니다.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의 기도는 상황을 바라볼 때에 십자가를 기억하게 되기를 간구하는 기도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앞서 용서에 대한 기도가 사람을 대할 때에 십자가를 밝히 보기를 간구함이었고, 마찬가지로 일용할 양식에 대한 기도는 내 몸을 사용하려고 할 때에 십자가를 먼저 밝히 보기를 간구하는 기도였습니다. 또 거슬러 올라가면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기도도, 내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바랄 때에 십자가를 먼저 밝히 봄으로서 내 뜻이 죽기를 간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이게 안 되고 내 뜻이 이루어지게 하려고 하는 것, 그리고 몸을 움직이는 것도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 뜻대로 움직이는 것, 사람을 만나도 내 이익을 위하는 것이 악에 빠지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면 우리가 세상의 가치들에 대한 이름을 대할 때에 십자가를 밝히 보기를 간구함으로서, 세상의 이름들에 대해 죽게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기도는 마음으로 십자가를 밝히 보는 사람이 드리는 기도이고, 십자가를 밝히 보는 사람만이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기도입니다. 십자가를 밝히 보는 사람만이 그 의미대로 약속된 모든 은혜를 실제로 받아 누릴 수 있는 기도입니다. 이 주기도는 우리가 죽을 때까지 드려질 모든 기도 생활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우리가 죽을 때까지 드려야 될 모든 기도의 전부가 주의 기도입니다. 이 주의 기도를 드리기 위하여 쉬지 않고 마음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밝히 바라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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