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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십자가 주기도(3)-나라와 뜻_태승철

by 태승철 · 17-07-20 16:44 · 7,280
"나라가 임하시오며" 여기서 '나라'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드는 질문은 이겁니다. 이미 온 세상은, 자연세계뿐 아니라 모든 이방족속들까지 다 포함하여 하나님께서 섭리하고 계시지 않으십니까? 우리가 기도하여 임하기를 바랄 '나라'란 이미 주어지고 있는 섭리와 무엇이 다를까요? 그리고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진다는 것은 하늘의 뜻이 땅으로 성육신해야 한다는 것인데, 내게서 어떻게 하늘 뜻의 성육신 된 삶이 가능할까요?

십자가 주기도(3)-나라와 뜻

(마태복음 6:9~10)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 주기도(3)-나라와 뜻>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 주기도(3)-나라와 뜻

우리가 주기도로 기도할 때에 대부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말로 시작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시작한다면 주기도의 뜻을 더 정확하게 반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라는 말씀이 중요한 이유는 이 단어 앞에 나오는 내용들 때문에 주기도가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라는 단어 앞에는 위선적인 기도와 이방인의 기도의 두 예를 들어주셨습니다. 이 두 경우는 모두 하나님과 이 세상과 나와의 삼각관계에서 잘못된 방향을 선택한 것이었습니다. 마음의 공백은 온전히 만족하고 온전히 기뻐할 수 있을 때까지, 무엇인가를 흡입하여 채우려는 흡입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나님과 세상 중에 어느 쪽으로 가야하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러므로라고 하신 이유는 우리가 기도를 드릴 경우에 원죄의 체질화된 성향으로 대부분의 경우에 이미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재물과 건강이나 자녀에게 마음이 가서 그것들을 흡입하여 만족하고 기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마음이 세상에 붙은 상태에서 실제로 이루어지지 않는 일들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찾아서라도 이루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를 하고 하나님을 찾을 때에는 대부분 이렇게 삼각관계에서 마음을 세상에 붙인 상태이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첫 마디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이러한 주의 기도를 날마다 드리고 있습니다. 이 기도를 드리다보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하는 첫 번째 구절에서 시간이 제일 오래 걸립니다. 제가 이처럼 구절들의 의미를 말씀드리는 것은 이 의미를 기도에 적용시키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하는 이유는 지금 우리 마음이 땅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땅에 있는 것 자체가 죄악입니다. 땅에서 기쁨과 만족거리를 찾고 있는 것 자체가 죄악이기 때문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며 아버지께로 향하려는 것입니다. 즉 우리 마음이 땅을 떠나야 하고 땅에 대해서 죽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함이고,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고 기쁠 수 있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그러므로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뜻을 생각하며 십자가에서 죽으신 주님 앞에 먼저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이전에 설교에서 메타생각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마치 내 마음을 위에서 바라보고 진단하는 것입니다. 생각과 마음이 세상에 붙들려 있다면 주님께 도움을 구하고,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고백함으로서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자격도 생깁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주님을 기억하면서 나를 진단해보는 것입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구절에서 우리가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존재의 순서를 따라야만 합니다. 돈 문제 때문에 위급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돈 문제보다도 하나님이 먼저 계셨음을 알아야합니다. 가구를 조립할 때에도 순서대로 조립하지 않으면 다 뜯어야 하듯이, 돈 문제가 생겼을 때에 아무리 급하더라도 그보다 하나님이 먼저 계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존재의 순서를 따라 하나님께 먼저 가야 합니다. 자녀 건강 등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나 건강보다도 하나님이 먼저 계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먼저 가야만 합니다.

 

그 다음에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구절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거룩하다라는 것은 좋은 쪽으로 계속 구분되는 것입니다. 즉 거룩하심은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하심이든 하나님 자체의 거룩하심이든 더 좋을 수 없을 만큼 최고로 좋은 상태입니다. 내게는 돈, 건강, 자녀의 형통, 승진 등도 좋고 좋은 것이 얼마든지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은 나와의 관계에서 이 모든 좋은 것들이 무색할 정도로 더 좋은 분이라는 것입니다.

소위 말해 이름만 들어도 심쿵하는 이름이 되시는 것입니다. 한창 열애중일 때에 제3자의 입에서 애인의 이름이 불쑥 튀어나오면 갑자기 맥박수가 빨라집니다. 그 만큼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꾸로 뒤집으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 대해서도 내 마음이 심쿵하지 않는 것이고 반응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이름에만 반응하고 그 좋으심을 가장 좋게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상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를 드리고 나면 이 세상에 있는 어떤 이름에 대해서도 반응하지 않고 죽기를 바라는 기도를 드릴 수 있습니다. 배우자나 자녀나 재물이나 건강 등의 앞에서도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만 반응하기를 바라게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십자가를 붙잡고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이름과 모든 이미지들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내 안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이름만을 가장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기도함으로서 이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그러면 당장 내가 반응하지 않고 있는 그 이름들이 가리키는 존재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예를 들어 배우자 이름에 대해서 반응하지 않는다면 부부의 삶이 어떻게 진행될 것이며, 부모나 자녀의 이름에 반응하지 않는다면 부모자식간의 관계가 어떻게 성립되어 삶이 진행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또한 사람뿐만 아니라 돈이나 직장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구절 다음에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가 따라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존재 자체를 마음 안에 들여놓을 수는 없기 때문에 언제나 이름과 이미지를 통해서만 관계를 갖습니다. 어떤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라는 속담처럼 내가 배우자의 이미지를 마음에 담고 이름에 대해 반응하면서 관계하고 있기 때문에 그 실제 존재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배우자에 대해서 마음이 죽었다면,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존재에 대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남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제까지는 실제 존재에 대해서는 모른 채로 내가 생각하는 이미지와 반응하며 관계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상대는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나 혼자 나쁘고 섭섭하게 받아들이는 일을 누구나 경험해보셨을 것입니다. 이제는 그 이름과 이미지에 대해서 죽었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죽은 그 이름의 실제 존재에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루 종일 이 기도를 하게 됩니다. 뉴스에서 김정은이 핵미사일 실험을 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마음이 불안해집니다. 온 세계가 좀 잠잠하고 평안하게 살자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데도 말을 듣지를 않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김정은이라는 이름에 반응하려고 할 때에 십자가를 먼저 바라보아야 합니다. 김정은보다 십자가를 먼저 보고 죽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김정은이라는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존재에는 하나님 나라가 임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바라는 것은 곧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임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베가 독도는 자기네 땅이라고 우깁니다. 이럴 때에 마음은 또 아베라는 이름에 마음이 반응하려 합니다. 이때에 아베라는 이름보다 하나님의 이름을 먼저 떠올리며 십자가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은 십자가에서 아베라는 이름에 대해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님의 하늘 길을 따라서 아버지께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무리를 잘 지어야만 합니다. 아베라는 이름에 대해서 죽을 때에 실제 도쿄에 사는 아베에게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임하시기를 기도해야만 합니다.

그 멀리 있는 김정은과 아베에 대해서도 그렇게 기도할 수 있기에, 가까이 있는 배우자에 대해서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내 몸이라는 이미지에 대해서도 십자가에서 죽고 하나님의 이름에만 반응하기를 기도합니다. 이어서 이 몸에도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임하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하루 종일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내 마음에 반응을 일으키려는 모든 이름들과 모든 이미지에 대해서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는 것과 하나님의 섭리에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우리가 나라가 임하시오며라고 기도하지 않더라도 이미 세상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피조의 세계 즉 인간 세상은 하늘과 단절이 된 곳입니다. 폐쇄되어 있는 가운데 모든 사람이 삼각관계 안에서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마음을 두지 못한 채 세상에 마음을 두고 세상으로부터 기쁨거리 만족거리를 찾는 악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자녀를 붙잡았다면 자녀에게서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자체가 악입니다.

이렇게 악이 발생했을 때에 에너지가 발산되면서 악의 움직임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럴 때에 이 악의 힘이 발산되는 과정을 하나님께서는 섭리하십니다. 돈만 있으면 기쁠 것이라고 믿는 것은 악입니다. 그러나 악으로부터 발생하는 소원을 따라서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싶어도 벌리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섭리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늘과 폐쇄된 인간 세상 안에서 발생하는 악의 힘을 하나님께서 통제하시고 조절하시는 것이 바로 섭리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오셔서 땅과 하늘을 잇는 하늘 길을 여셨습니다. 땅 중앙에 하늘로 이어지는 하늘 길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내가 그 길에 마음을 두면 내 마음은 이 세상에서 관계하고 눈으로 보는 모든 이름들에 대해서 죽게 됩니다. 그 때에 내 마음에서 죽은 것들에 대해 나는 기도의 책임을 가지게 됩니다. 내 마음이 죽어서 하늘로 가는 대신에, 내 마음이 반응하지 않은 이름이 가리키는 존재들에게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임해야만 합니다. 이때에 하늘에서 하나님의 계획이 내려오며 다스리시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려서 하나님의 섭리는 폐쇄된 세상에서 인간들의 악의 힘을 통제하시는 다스리심이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죽을 때에 하늘과 땅이 통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하늘의 계획을 내려 보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의 확장의 역사입니다. 이 길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인간에게서 발생하는 악함을 섭리로서 조정하셨다면, 하나님께 향하는 길에 선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내려오셔서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뜻을 확장해 가시는 다스리심을 나타내실 것입니다.

내 마음에 조금이라도 걸리는 이름들이 있다면 그 모든 이름들이 가리키는 실제 존재의 영역들은 다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의 대상들이 됩니다. 이 기도를 통해서 실제로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게 됩니다. 시진핑 중국 주석이 사드 문제로 인해 우리나라를 괴롭힌다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그러나 마음은 그 걱정거리에 빠져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먼저 생각하고 시진핑에 대해서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북경에 살고 있는 시진핑 주석의 삶에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임하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내 자녀나 배우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마음이 하늘과 땅을 잇는 하늘 길에 머물고 있을 때에, 내가 관계하는 이름이 가리키는 실제 존재들의 영역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될 것입니다. 옆집에 사시는 장로님께서 마음을 하늘 길로 보내면 장로님의 마음에 닿으려고 하는 이름들이 가리키는 실제 존재들의 영역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나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백 사람 천 사람들의 마음이 하늘 길인 예수님의 마음에 모일 때에, 그들로 인해 하나님의 나라가 더욱 크게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시작은 내 가족부터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로 만들어 가야할 것입니다. 내 마음에 이름이 걸릴 때마다 나라가 임하시오며의 기도를 통해야 합니다. 자녀가 공부를 너무 안 해서 걱정되고 마음의 반응이 일어나려고 할 때에 주님의 십자가를 먼저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보다도 먼저 계셨으며 그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먼저 보라보며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음을 깨닫고, 내 마음에서 떠난 자녀의 이름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나는 아무것도 안하고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만을 바라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래서 그 다음 구절에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가 이어지게 됩니다. 세상에는 내가 말해야 되고 내가 손대야 할 것이 있고 내 발로 가야할 곳이 있습니다. 그 때에도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이 성육신되신 분이십니다. 당신 자신의 주체성인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생각과 판단은 한 조각까지도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이셨습니다. 이럴 때에 입을 열어서 말씀하시면 하나님의 말씀이셨고, 손을 대서 일을 하시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되었습니다. 우리도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하늘 길에 마음을 두면 하늘 길로 올라가서 아버지라 부르는 그 하나님으로 마음이 만족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기도하기 전에는 자녀에게 마음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공부 못하는 자녀로 인해 걱정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생각하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내 마음이 가야 될 목표점을 설정합니다. 그래서 자녀의 이름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에만 반응하기를 기도합니다. 거룩함은 더 이상 좋을 수 없을 만큼 좋으신 상태를 뜻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장 좋은 하나님을 만난 변화산에서 베드로의 체험이 기도 중에 일어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기도의 첫 구절이 가장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좋음을 느끼고 나면 자녀가 공부를 못해서 대학을 가든 말든 자녀에게 바랄 것이 없어집니다. 사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때에 우리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라가 임하시오며라는 기도를 할 수 있습니다. 내 기쁨과 만족은 하늘나라로 채워졌기에 더는 바랄 것이 없지만, 그렇게 채워질 때에 하나님께서 내게 판단과 생각을 주십니다. 하늘로 만족하기 때문에 내 마음의 반응을 일으켰던 이름들에 대해서는 아무 반응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럴 때에 눈에 보이는 이름들 귀에 들리는 이름들에 대해서 판단이 생기고 생각이 주어지면 나보고 움직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게 바로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입니다. 내가 성육신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이고, 거듭남이 위로부터 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이 하늘로 완전하게 만족하고 있을 때에 판단이 주어지고 생각이 주어지고 말하게 되고 행동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장갑삼아서 움직이시는 것이고 내가 위에서부터 태어난 성육신의 상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나는 끊임없이 생각하고 판단하고 말을 하고 사는데 이게 하나님의 것인지 내 것인지 어떻게 구분을 합니까?

만약 지금 말하고 있는 대상과 생각하고 있는 대상이 사업이라면 망하든 흥하든 관계없이 기쁨거리 만족거리를 하나님으로 찾고 있는가를 보면 됩니다. 사업이 망해도 손해 볼 것이 없고 기쁨과 만족을 유지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고, 또한 그렇게 실지로 기쁘다면 사업에 대해서 떠오르는 생각과 판단은 하나님의 판단과 생각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입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이름만이 가장 좋고 거룩한 이름으로 마음의 반응을 일으키고, 그 이름에 대한 성령님과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서 내 마음에 가득 채워서 기쁘고 자녀에게서도 바랄 것이 없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자녀의 이름에 대해서 판단과 생각이 주어지고 행동하게 되면 내 생각과 판단이 아니고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이고 하나님의 활동이십니다. 백 번, 천 번 말할 때는 마이동풍으로 말이 들어가지 않았는데 한 마디 하면 아이가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이 그 말을 듣고 움직이고 깨닫습니다. 사업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시간을 자기계발서를 읽으면서 준비하고 수련할 필요 없이 주기도문 한 구절씩 그러므로의 의미를 살려서 내 마음이 하나님으로 채워져서 거룩한 이름을 가지고 그 이름이 가리키는 하나님으로 배부르면 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과 활동하심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준비를 하고 세상에 나가서 살아갈 때에 내 몸으로 움직이고 사람들을 만나고 상황을 만납니다. 이렇게 급변하는 대상들 앞에서 나는 지금까지의 기도의 내용을 어떻게 유지하며 움직여 나갈 수 있겠습니까? 다음 구절에서 답을 찾아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님께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라고 하신 마음의 의도를 기도할 때마다 잊지 않으므로 주의 기도가 온전히 이루어질 수 있게 해주시고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는 기도가 하루 종일 내 입에서 나올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