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0,1)복음방송

십자가 주기도(2)-하늘과 이름_태승철

작성일
17-07-19 09:42
작성자
태승철
조회
7,012
"이렇게 기도하라" 하셨으니 다르게 기도하면 안 될 줄 압니다. 그런데 일성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조금 답답하고 이상하죠? 우리 아버지가 창조주이신데 왜 주님의 기도 속에서는 굳이 하늘에만 계신 분이셔야 할까요? '들에 핀 백합화나, 공중에 나는 새에게도 계신 우리 아버지'는 왜 안 될까요? 그리고 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라는 것일까요? 이름이 아니라 그냥 아버지 자신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십자가 주기도(2)-하늘과 이름

(마태복음 67~9)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 주기도(2)-하늘과 이름>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 주기도(2)-하늘과 이름

주기도문 강해를 들으신 분들이 많이 물으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9절의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신 부분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에게 있어서 기도는 직업과도 같은 것입니다. 일단 신앙인이 되는 순간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전하는 것이 직업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일이 아닌 집사님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기도할 것을 못 박으셨기 때문에 사실 다르게 기도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면서 그러므로라고 하십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세상과 라는 삼각관계 안에서 살게 됩니다. 우리 마음은 이 삼각관계 안에서 하나님께로 가야만 합니다. 하나님께로 갈 때에 하나님 사이즈로 만들어진 마음의 공백은 채워질 수 있고 만족과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될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장갑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우리들의 상태는 그렇지 못합니다. 하나님께로 먼저가야 될 마음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며 손에 만져지는 이유로 인해 육체로 만나는 세상의 대상들에게 향하게 됩니다. 그런 상태에서 기도를 할 때에 우리 마음은 십 중 십은 이 세상에 붙잡힌 상태에서의 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그러한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서 기도하게 되면 바리새인이나 종교지도자들처럼 하나님 팔이를 하는 위선의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고, 이방인과 같이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즉 마음이 세상에 붙어있는 상태에서 자신이 원하는 해결책을 위하여 하나님을 호출하는 기도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말을 하지만 어떤 말도 하나님께 쓸데 있는 말이 아니므로 중언부언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9절에서 그러므로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대부분 하나님과 세상과의 삼각관계에서 세상에 마음이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붙들린 상태에서 기도하면 외식하는 자의 위선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팔거나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점을 고려해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 첫마디가 바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말씀입니다. 본문 헬라어 순서대로 보자면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시지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말이 처음으로 나와야만 하는 이유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우리 마음이 하늘에 가있지 않고 세상에 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을 하늘로 보내기 위해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셨고 무소부재 하셔서 모든 피조물 가운데 계시며 지금도 일하고 계시는데 예수님께서는 왜 굳이 하나님을 하늘에 국한시켜서 찾으셨던 것일까요?

주님도 분명히 백합화를 아버지께서 입히시고 공중에 나는 새를 아버지께서 먹이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찾자면 백합화를 입히시는 우리 아버지여,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시는 우리 아버지여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또한 내가 돈 문제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라면 돈 문제를 주관하시는 우리 아버지여라고 부르고, 건강에 이상이 있다면 건강을 주관하시는 우리 아버지여라고 불러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돈 문제든 건강 문제든 주관하고 계신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렇게 할 때에 나의 처지에 딱 맞아 떨어지는 느낌이 들어서 좋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는 그러므로라고 말씀하시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부르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세상과의 삼각관계 안에서 하나님이 아닌 세상을 향해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지만 이 땅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찾는 한 내 마음은 이 땅에서 떠날 수가 없습니다. 삼각관계에서 세상으로 먼저 가버린 마음이 하나님께로 옮겨 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땅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찾고 있는 한 마음은 계속해서 이 땅에 붙들리고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방인과 똑같은 처지가 될 수밖에는 없습니다. 기껏 믿는 사람들끼리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가르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팔아먹는 위선적 행동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마음이 완전히 이 땅을 떠나야 하나님께로 갈 수 있습니다.

나는 지금 돈 문제로 걱정하고 있는데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는 돈 문제에 대해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문제가 벌어지는 세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찾으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는 곧 네가 지금 이 세상 문제에 사로잡혀 있으므로라는 의미입니다. 사로잡혀 있는 것 자체가 문제라는 것입니다. 나는 돈 문제가 크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돈 문제에 사로잡혀 있는 그 상태를 문제로 보십니다. 나는 건강 문제에 사로잡혀서 그것을 가장 큰 일로 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건강 문제에 사로잡힌 그 상태를 문제로 보십니다. 목사님들은 부흥이 안 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인데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부흥이 안 되는 목회에 붙잡힌 그 마음을 문제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여라고 부르며 마음이 땅을 떠나 하늘로 보내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신앙인과 이방인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느냐의 차이입니다. 이 세상은 아버지 하나님의 일터이고 나는 아버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아버지가 회장으로 계시는 회사에 들어간 아들이 말단 사원으로부터 회사 일을 배우기 시작할 때에 아버지를 회장님으로 부릅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면 아버지로 부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이 세상에 묶여 있는 상태를 유지하면서 하나님을 찾고 아버지로 부를 때에는, 회사에서는 회장님으로 불러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업무를 위해서만 아버지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업무를 위한 문제로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에 회장님이 찾아오셔서 나중에 집에서 보자고 하십니다. 아버지로 부를 수 있는 집에서 만나자고 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건강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인의 상태에서 건강문제에 부딪혀 하나님을 찾는 것과, 마음이 하나님 아버지를 먼저 찾아서 창조주의 아들이 되어서 건강을 바라볼 때는 전혀 다릅니다. 이 세상에서 돈 문제에 허덕일 때에 진짜 문제는 이방인들과 똑같은 상태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단순한 종교의 신으로 전락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인이라면 돈 문제에 대해서 이방인의 입장을 버리고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의 입장에서 만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진짜 문제는 돈이나 건강이나 자녀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의 문제들 앞에서 하나님의 아들 됨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방인과 똑같은 상태에서 돈 문제의 해답을 하나님께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된 상태에서 돈 문제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문제의 성격이 전혀 다르게 됩니다. 어떤 문제가 주어지더라도 가장 큰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됨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이 세상에 묶인 상태에서 어떻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며 갈 수 있겠습니까? 십자가를 통해서 아버지를 불러야만 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십자가를 통해서 내가 이 세상에 대해서 죽은 자이오니 내 마음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아버지께로 갈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라고 해야 합니다. 이러한 기도의 내용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어야만 합니다. 지금 내 마음을 빼앗고 있는 세상 문제에 대해서 죽지 않는다면 우리 마음은 아버지께로 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아니면 회사에서 회장님이지만 집에서는 아버지를 아버지로 부를 방법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통해 세상 문제에 묶여있는 마음을 죽인 후에야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됨을 찾고 나서 이 세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서 올라감으로서, 주님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느끼시고, 하나님이 주님을 아들로 느끼시는 것처럼 그러한 관계가 우리에게서도 일어나야만 합니다. 많은 문제가 있지만 문제에 대해서 죽고 먼저 하늘로 올라가서 주님과 하나님 사이에 일어나는 이 교제가 고스란히 내 것이 될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를 해야 할 것입니다.

 

그 후에 주님께서는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를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는 것이 아니라 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셔야 하는 것일까요? 여기에도 앞서 말씀하신 그러므로가 연관됩니다. ‘그러므로는 주기도문 전체를 관통합니다. 우리 마음이 삼각관계에서 세상을 좇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름은 다른 것과 구별하기 위해서 존재나 사물을 지칭하는 표시이고 약속입니다. 마음과 이름의 관계에서는 마음의 움직임이 생각인데 이 생각은 언제나 이름들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생각하는 것은 곧 이름에서 이름으로 이어지는 작용입니다.

집에 있는 아내는 직장에 나간 남편이 실제로 무엇을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이름과 이미지를 통해서 생각을 합니다. 남편의 모습을 생각하면서 마음 안에서는 생각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존재 그 자체를 마음에 담을 수는 없기에, 존재를 가리키는 이름들을 통해서 마음으로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자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사건 사람 사물 등 이렇게 수많은 이름들이 우리 마음에서 생각이 될 때에 이미지를 가지고 생각하다보니 실제 살아가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찾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생각을 할 때와 내 남편의 이름을 생각할 때에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트럼프에 대한 생각은 마치 바람에 스쳐지나가듯이 지나갈 뿐입니다. 그러나 내 남편의 이름이 TV에 나온다면 그 이름은 훅하고 내 마음 속을 파고듭니다. 수많은 이름들이 생각 속에서 돌아가고 있는데 어떤 이름은 스쳐지나갈 뿐이고, 어떤 이름들은 마음을 파고듭니다.

어떤 대학원생에게 의사이신 작은 아버지가 모닝 소형차를 선물해주었습니다. 그 대학원생이 제게 하는 말이 페라리나 벤츠가 문제가 아니에요. 이 모닝이 저에게는 전부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대학원생에게는 모든 고급차의 이름이 얼음 위로 스쳐지나가듯이 지나가는데, 기아 모닝이라는 이름만은 마음을 파고든 것입니다. 이름들에서 차이가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중에 제일 먼저 제일 깊이 제일 많이 마음을 파고드는 이름이 곧 거룩히 여김을 받는 이름이 됩니다.

우리 마음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는 기도를 하며 십자가를 통해 아버지께로 올라갑니다. 그렇게 올라가면서 이 땅을 살아갈 때에 우리는 수없이 많은 이름을 듣게 됩니다. 그럴 때에 내 마음이 하나님을 붙들고 이 세상에서 접하는 다른 모든 이름들은 스쳐지나가는 것처럼 되기를 바라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는 기도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서도 하나님의 이름이 그렇게 여겨지기를 바라는 마음도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우선적으로는 내 마음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아야만 합니다.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갑순이가 있다면 그 이름이 마음을 파고들면 다른 여자의 이름은 스쳐지나갑니다. TV에서 아무리 예쁜 연예인을 보더라도, 직장에서 다른 여자가 유혹할지라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갑순이의 이름이 그 남자의 마음속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번제단에 올려놓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이미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보다 아들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고 있었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 이건 아닙니다.”라는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트럼프 시진핑 아베보다도 문재인 대통령의 이름이 마음에 더 들어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보다는 친정 식구들의 이름이 더 들어와 있을 것이고, 또한 친정 식구들보다는 남편의 이름이 더 들어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이가 먹어갈수록 남편의 이름보다는 자녀의 이름이 더 들어올 것입니다. 그러면 자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 것입니다.

마음이 하늘에 올라가서 아버지께 머물러 있기 위해서는, 이 땅에서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모든 것들의 이름들이 마음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아서는 안 됩니다. 모두 스쳐지나가는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모닝을 선물 받은 대학원생의 마음에는 페라리도 들어오지 못하게 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이름이 들어오신다면 돈 건강 성공 승진 등의 이름들은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삼각관계에서 세상을 향하고자 하는 나의 마음이 중단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의 이름 중의 하나가 내 마음에서 거룩히 여김을 받고나면 하나님의 이름은 스쳐 지나가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에 그러므로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우려가 내게서 재현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도 십자가를 통해 부르고, 세상의 이름들을 만날 때에도 십자가를 통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세상에 대해서 내 마음이 죽게 해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 내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세상을 향해서는 죽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돈에 대해서 마음이 죽기를 바라고, 자녀에 대해서 마음이 죽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배우자를 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도 사라도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다 털어내었던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어떤 이름도 내 마음에 훅하고 들어오지 않으려면, 십자가를 붙잡고 그 대상을 바라보아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그 대상의 이름이 내 마음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도 십자가를 붙잡고 세상에 대해서 죽어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주님을 따라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으면서 부르는 하나님의 이름은 위선자들과 이방인들의 부름과 똑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바라볼 때에도 언제나 십자가를 붙잡음으로서 그 이름에 대한 존재에 대해서 죽은 자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때에 이 세상에서의 삶은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서 다음 구절을 통해 답을 주십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를 때에도 세상의 이름을 만날 때에도 십자가를 기억하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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