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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십자가 주기도(1)-기본자세 잡기_태승철

by 태승철 · 17-07-18 14:30 · 7,136
뜨거운 여름을 맞아 또 다시 '십자가로 드리는 주의 기도'를 반복합니다. 말하자면 업데이트된 최신판(!?)이라고나 할까요? 기도는 무조건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하면 됩니다. 건강문제가 생겼을 때도, 재정 문제가 생겼을 때도, 가족이나 지인과 인간관계가 문제일 때도, 나라가 문제일 때도 무조건 주의 기도를 드리면 됩니다. 단 십자가를 통해 기도하기만 염두에 두면 되지요. 십자가로 드리는 주기도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하여 기본자세부터 살펴봅니다.

십자가주기도(1)-기본자세 잡기

(마태복음 6:5~8)

 

5. 또 너희는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십자가 주기도(1)-기본자세 잡기>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십자가 주기도(1)-기본자세 잡기

주님께서는 기도의 기본자세를 잡아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기도를 가르쳐주셨어도 기본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주의 기도를 실행해 나갈 수 없으므로, 기도할 때의 자세가 올바른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올바른 자세가 없기 때문에 우리의 삶에서 주기도문 기도를 일상적으로 활용하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은 그 기본자세에 대해서 말씀하시는데, 시작하기에 앞서 기도가 갖고 있는 한 가지 의미에 대해서 말해봅니다. ‘기도는 호흡이고, 기도를 하지 않으면 은혜를 받을 수 없다라는 등의 많은 이야기들을 합니다. 사도행전 6장에서도 베드로가 교회 내의 구제 문제를 두고 집사를 뽑는 과정이 나옵니다. 사도들의 직책이 너무 중차대했기 때문에 구제와 봉사를 담당할 집사님들을 따로 뽑아 담당하게 하였습니다. 일곱 집사님이 뽑히게 되자 4절에서 베드로는 이들에게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오해했다고 해야 할지 우리의 이해가 부족했는지 모르겠는데 3절에서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라는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받는 사람이 되기 위한 길과 방법은 기도와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사도의 직무를 말씀 사역으로 규정했습니다만, 사실 교회 역사 속에서 첫 번째 순교를 당한 스데반 집사님은 성령 충만하여 말씀을 전하다가 돌아가셨습니다. 즉 사도들만 기도와 말씀에 전념한 것은 아닙니다.

시편 12절에서도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라고 했습니다. 즉 다윗의 왕 노릇은 곧 주야로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하는 것이었습니다. 기도하는 동시에 말씀에 전념한 것입니다. 말씀에 전념하는 자가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사도들 또한 말씀으로 기도하는 중에 성령 충만해질 때에야 말씀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집사님들의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기 위한 조건은 말씀과 기도에 힘쓰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직업은 생계에 필요한 돈을 얻기 위한 지속적인 활동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직업은 기도와 말씀입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올바른 모습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것은 곧 올바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고, 그렇게 될 때에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을 걱정할 필요도 없어집니다.

우리가 처음 세상에 태어나면 부모의 자녀라는 자격 외에는 그 어떠한 자격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직업 활동을 하지 않지만 먹을 것과 입을 것은 주어집니다. 세상에서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위해 돈을 버는 행동을 직업이라고 하지만,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생계문제도 아버지로부터 해결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곧 직업 아닌 직업인 것입니다. 이때에 우리가 해야 될 일은 기도와 말씀에 전념하는 것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도가 너무너무 중요하고 말씀이 없다면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중요한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다르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르게 기도하기 때문에 기도생활이 재미없고 신바람이 나지 않습니다. 주기도문을 반복하는 이유는 저도 주기도문만으로 기도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계속해서 주기도를 하는 동안 기도의 내용과 깨달음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그래서 주기도에 대한 말씀을 또 다시 업데이트하는 것입니다. 또한 내용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지라도 이것을 여러분께 상기시켜 드리는 일이 무척 중요하다고 믿습니다. 복음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주기도로 기도하는 모토를 일깨워 드리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는 주의 기도를 가르치실 때에 십자가를 향해 가시는 첫 단계에 계셨습니다.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하고 십자가를 쥐지 않으면 주의 기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주의 기도를 십자가로 드리기 위하여 반드시 깨닫고 있어야 될 기도의 기본자세가 무엇인가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두 가지로 가르쳐주셨습니다. 첫째는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외식하는 자의 기도와 이방인과 같은 기도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삶이 진행되어가는 가운데 기도를 합니다. 이때에 나의 삶과 기도의 판이 되어주는 무대의 형국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시편 1편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우리는 삼각관계의 구도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 있고 내가 있습니다. 나와 하나님과 세상이라는 삼각관계 안에서 삶은 진행되기에 기도 또한 이 삼각관계 안에서 진행됩니다.

복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로 먼저 마음을 보내는 자이고, 하나님께로 똑바른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복 있는 사람이 되지 못하고 이 세상으로 마음을 향하게 합니다. 나라와 민족과 가족과 직장과 사업 등의 세상으로 마음을 먼저 보낼 때에, 대표적으로 두 가지의 형태의 기도 아닌 기도를 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외식하는 자와 이방인과 같은 기도입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에 먼저 주님! 이제 제가 기도를 드리려 하는데 먼저 제 마음을 살펴보겠습니다.’라고 기도를 시작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주기도문의 효과가 극대화되기 위해서 내 마음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고 무엇에 사로 잡혀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세상에 사로잡힐 때에 외식하는 기도를 하게 되는데 외식은 곧 위선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마음으로 기쁨과 만족을 얻기 위해 선택한 대상은 세상일 때 나오는 기도가 외식하는 기도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전지전능하시고 창조주이시고 무소부재하신 분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사도신경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그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을 고백하는 이유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내 마음의 공백을 채우는 최우선 과제로 삼고 만족과 기쁨의 대상이 되셔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주 하나님이시며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며 사랑의 하나님이시며 동행하시는 하나님 등의 여러 속성이 있을 수 있습니다만, 나의 유일하신 만족과 기쁨의 근원이시라는 것이 가장 올바른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세상으로 가버린 사람들은 이 만족과 기쁨을 세상에서 얻으려고 합니다. 종교지도자일지라도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하는 것이고, 목사님들도 풍요로운 재정을 마음의 기쁨거리로 삼으면서 입으로는 하나님에 대해서 설교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헌금을 많이 내게 하는 쪽으로 말씀은 옮겨 갑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을 말하고 있지만 목사님의 마음에는 하나님이 기쁨이 아니라 교인들이 많이 늘어나는 것을 기쁨으로 여깁니다. 그럴 때에 한 영혼을 구하는 전도를 이야기하면서도 그 영혼이 하나님을 받아들임으로서 구원받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전도하라는 말로 교인들에게 강박관념을 심어주며 교인이 늘어나는 것으로 인해 기뻐합니다. 이것이 외식이고 위선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일하신 기쁨과 만족의 대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자라면 마음이 하나님으로만 기뻐해야만 합니다. 그렇기에 기쁨의 대상이 다른 경우에는 올바른 기도를 할 수 없습니다. 목사님들 중에서 40일 금식 기도를 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이유가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이고 재정적인 풍요로움을 위해서입니다. 그런 기도를 하면서도 입으로는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 재정이 필요하다는 말로 포장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업을 내가 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사업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내가 하나님만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옛날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이 이러한 위선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마태복음 616절에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것을 기쁨으로 여기며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는 모두 위선적인 기도입니다. 이런 위선적 기도를 통해서 바라는 대로의 결과를 얻었다면 이미 자기 상을 받은 것입니다.

자기 상을 받았다라는 것은 누가복음 16장의 거지 나사로와 부자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실 때에, 지옥에 간 부자에게 너는 살았을 때에 너의 상을 다 받았고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너의 기쁨거리 만족거리 위로거리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이 세상 것이 좋아서 마음을 세상으로 보내면서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팔이를 했습니다.

하나님팔이를 하는 목사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팔이를 해서 훌륭한 목사라는 소리를 듣고 교회도 부흥을 시켰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이 땅에 있는 것으로 기쁨거리를 삼는 것이 곧 불신앙이고 그것이 지옥에 갈 이유가 됩니다. 이 땅에서 마음이 세상에 가 있으면서 이미 자기 상을 받은 자들은 지옥으로 가는데 무서운 말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기도하며 살다가 지옥으로 갑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만족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은 하나님으로 기쁘고 만족하지 못할지라도 나는 하나님으로만 기쁘고 만족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이 십자가가 없다면 불가능합니다. 목사님들이 교회 재정이 쪼들리면 걱정하고 풍부해지면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뻐하는 것도 문제고 없어서 걱정하는 것도 문제입니다. 교회 재정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을 때에 비로소 기도에 대한 올바른 자세를 취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중언부언은 헬라어로 발타로게세테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의미가 없고 용례도 이곳에서만 쓰이고 다른 곳에서는 없습니다. 맥락상 의미를 추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의성어로 봅니다.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 자체가 잘못은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이나 예수님의 이름을 반복해서 부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중언부언하는 이방인과 같이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은 단순히 말을 반복하거나 구체적이지 못한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를 할 때에 하나님의 입장에서 들으실 때에 의미를 알 수 없는 기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자가 무엇을 기도하는지도 알지 못하고,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즉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하나님께 의미 있게 전달되는 말이 한 마디도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무슨 소리를 하고 있기는 한데 하나님께 한 마디도 의미 있게 전달되지 않는 기도가 바로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아주 똑똑하게 구체적으로 하는 기도라고 할지라도 중언부언하는 기도가 될 수 있습니다.

오래전 일이라서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만 한 젊은 부인의 기도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기도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하나님! 남편이 월급을 받아서 다 나에게 맡기게 해주세요. 그리고 남편이 부인에게 돈 맡기는 것을 아주 잘 하는 것이라는 확신을 넣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그분의 너무나도 구체적인 기도를 듣느라고 제 기도를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 기도는 구체적이고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지도 않지만 최상의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삼각관계에서 내 마음이 세상 쪽에 완전히 붙어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만족과 기쁨을 얻고 싶고 성취하고 싶은 것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내 힘으로 안 되니까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호출하는 것입니다.

시편 14절에서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악인은 이 세상에 있는 것들로 만족거리와 기쁨거리를 삼고 선택하는 자들입니다. 이들이 겨와 같다라는 것은 쓸모없는 것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이 자기 신에게 기도하는 이방인처럼 하나님을 호출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본문 8절에서 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나와 세상과의 관계는 본래 하나님의 계획안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삼각관계에서 나와 세상 사이에 필요한 일들을 아시고 계획하시고 이루시려고 움직이시고 섭리하십니다. 당연히 나와 돈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아시고 계획하신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계획과는 아무 상관없이 돈을 좋아해서 그에 대한 해결책을 요구하는 기도를 한다면 그 기도는 한 마디도 하나님께 의미를 가질 수 없습니다. 자녀 관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자녀에게 가서 형통을 기쁨거리로 생각하고 하나님을 호출하지만 이것은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앞서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는 하나님을 아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팔아서 세상에서 원하는 것을 취하려는 하나님 팔이였다면, 이방인과 같은 자들의 기도는 세상에서 좋아하는 것들이 있으면 하나님의 계획을 무시하고 스스로 판단하여 하나님을 호출하는 기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와 돈 문제 자녀문제에 대해서 분명한 계획이 있으신데, 내가 하는 기도는 하나님 마음에 단 한마디도 와 닿지 않는 쓰레기 같은 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만족하기를 직업으로 삼으면 이 세상에 대한 관계는 하나님께 알아서 하십니다. 그런데도 이 세상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계획에 있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도를 하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한 마디도 받아들이실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중언부언하는 기도입니다.

세상과의 삼각관계에서 걱정과 기쁨은 맥락이 같습니다. 있으면 기뻐하고 없으면 걱정하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이 세상 것일 경우에 내가 스스로 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실 것을 아시고 주기도를 가르쳐주셨던 것입니다. 삼각관계 안에서 외식하는 자처럼 기도하거나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기도하지 말고 기도하기 위한 기본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내 마음의 기쁨과 만족과 행복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주어진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는 것입니다. 내가 나에게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는 기본자세입니다. 이 삼각관계와 십자가가 지속되는 가운데 기도가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더운 여름에 기도로 나를 다시 일깨우고 내 삶을 하나님 손 위에 올려놓을 수 있는 멋진 기도의 사람들이 될 수 있기 위해서 다시 한 번 주기도의 과정을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주기도 하나로 생에 드려야 될 모든 기도를 마스터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푸시고 깨달음을 주시고 실천할 수 있게 붙잡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