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0,1)복음방송

백 투 더 투트랙(two-track) 퓨처_태승철

작성일
17-06-24 13:59
작성자
태승철
조회
8,029
[백 투 더 퓨처]는 세 번에 걸쳐 시리즈로 상영된 영화의 제목입니다. 제1편에서 무장 강도들에게 쫓기는 위급한 상황에서 주인공이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전으로 돌아갑니다. 이제는 30년 뒤 미래가 되어버린 본래의 지금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에서, 미래로 감에도 불구하고 'Back To' 가 들어간 것이지요. 십자가 복음 신앙인의 삶은 이런 의미에서 백 투 더 퓨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냥 백 투 더 퓨처가 아니라, ‘주심’과 ‘하심’의 투트랙 퓨처이지요.

백 투 더 투트랙 퓨처

(욥기 32:1~22)

 

 

1.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이 말을 그치니

2.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3. 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

4. 엘리후는 그들의 나이가 자기보다 여러 해 위이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5.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화를 내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백 투 더 투트랙(two-track) 퓨처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백 투 더 투트랙(two-track) 퓨처

백 투 더 퓨처(Back to the Future)”라는 유명한 영화가 세 번이나 시리즈로 상영이 되었습니다. 주인공 마티 맥플라이가 괴짜 박사 브라운과 함께 무장 강도들에게 쫓기게 되었습니다. 괴한들의 총에 박사는 쓰러지고 쫓기던 마티는 박사님이 스포츠카를 개조해 만든 타임머신을 탔는데 자기가 태어나기도 전 30년 과거로 돌아갔습니다. 마티의 현재는 본의 아니게 미래가 되어서 돌아가야만(Back to) 하는 곳이 됩니다. 미래로 간다면 ‘Go to the future’라고 하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미래에서 온 마티에게는 돌아가야 할 곳도 미래이기 때문에 돌아간다는 뜻에서 ‘Back to the Future’라고 한 것 같습니다.

한편 십자가복음 신앙도 백 투 더 퓨처와 마찬가지입니다. 아담 타락 전에는 천국에서 하나님과 함께 사는 상황이 본래의 지금이었습니다. 그러나 마귀에게 유혹을 받아서 도달한 곳이 본의 아니게 과거로 돌아온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는 것을 미래의 일로 생각하지만, 이 미래가 사실은 과거로부터 이미 존재했어야 할 본래의 지금입니다.

영화에서 마티는 30년 전 과거로 돌아가서 그곳에 삶의 현장이 따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서 안정적 기반을 구축하기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직업을 가지거나 무엇을 배우려 하지도 않고 연애를 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30년 뒤로 돌아간 주인공의 유일한 관심사이자 목숨을 건 목표는 지금은 미래가 되어버린 본래의 현재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고 있지만 본래의 지금을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고 하나님으로 배부르고 예수님과 성령님과 더불어 삼위일체 교통 안에 참여하는 본래의 지금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온 관심을 쏟아야만 합니다. 이 땅에서 안정된 삶을 구축하려 하거나 이 땅에서 기쁨을 찾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은 미래가 되어버린 본래의 지금을 되찾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가 본래의 지금으로부터 떨어져 나온 과거의 사건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시게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장 대표적인 일이 변화산 사건입니다. 베드로가 하늘나라 계실 때의 예수님의 모습으로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대화하시는 것을 보고 산 아래의 모든 일들을 망각한 채 그곳에 머물기를 원했습니다. 이 사건이 바로 백 투 더 퓨처의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베드로가 본 것은 앞으로 일어날 미래가 아니라 지금 본래 있어야 할 과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해야 할 일은 안정적 삶의 조건을 구축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지금인 하늘을 찾기 위해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을 하늘로 보내며 하루를 살 수도 있고 10년이나 20년을 더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마음은 하늘로 보내지만 땅에서 펼쳐지는 미래가 있기에 우리에게는 투트랙의 미래가 주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투트랙 미래를 어떻게 구분하며 살아야 할까요?

우리의 마음은 하늘 미래로 가야만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그곳에서 만족과 기쁨을 얻기 위하여 본래의 지금인 천국으로 백 투 더 퓨처를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이 땅에서의 미래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미래가 됩니다.

제가 동영상 옆에 설교를 요약한 글에 하심의 미래와 주심의 미래라고 썼습니다. 내가 가져야 될 몫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해야 될 일은 하나님을 추구해서 가져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내 몫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는 나의 몸과 생각을 통해서 이루시려는 일들을 행하실 것입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앉은뱅이를 일으키셨어도, 내게 기적을 일으킬 힘을 주신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셨을 뿐입니다. 내게 주신 복이 아니라 나를 통해 이루어 가시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행하심의 미래입니다. 한편 주심의 미래는 하늘을 주십니다. 신앙은 이렇게 투트랙 퓨처를 향하여 갑니다.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우리에게 본래의 지금은 하나님의 계획하신 뜻이 이루어진 상태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본래의 지금에서 떨어져 나오게 된 것일까요?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살고 있고, 또한 그 뜻이 이루어질 수 없을 상황으로 자꾸 이끌려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제까지 욥과 세 친구들의 변론에 참여하지 않았던 엘리후가 드디어 입을 엽니다. 엘리후는 가장 젊었기 때문에 연장자들이 더 슬기롭고 지혜로울 것 같아서 대화에 함부로 끼지 못하고 겸손하게 올바른 결론이 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욥이 끝까지 자신의 의를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친구들이 결정적 비판을 날리지 못합니다. 결국은 욥의 승리로 끝날 것 같은 느낌을 받으면서, 19절에 보라 내 배는 봉한 포도주통 같고 터지게 된 새 가죽 부대 같구나라는 표현까지 합니다. 그러면서 엘리후는 욥과 세 친구들에게 동시에 분노합니다.

여기서 아직 구체적인 내용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엘리후는 자신의 말을 하나님의 지혜에 근거되었다며 앞으로 전개될 변론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둘 다 틀렸기 때문에 내가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면서 변론의 당위성에 대해서 이야기할 뿐입니다. 이는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전하시고자 하시는 내용이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보라는 뜻입니다.

이제까지 욥과 세 친구들의 변론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후는 욥과 세 친구들에게 모두 화를 내며 진정한 진리를 말하겠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대체 엘리후의 영적 관점은 어디에 있었기에 욥이 당하는 재앙을 해석함에 있어서 욥과 세 친구들의 의견을 모두 틀렸다고 했던 것일까요?

욥은 주어진 재앙에 대해 귀책사유가 없음을 꾸준히 주장하였습니다. 살아온 과거를 돌아볼 때에 인간의 삶의 현장에서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았고 인정해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자 되심과 일하고 계심을 우선적으로 인정하며 살아왔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주체성이 지배하시는 삶에서 책임질만한 일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지금 임한 재앙도 죄악 때문에 일어난 일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주체적인 주도하심을 최우선의 과제와 의무로 삼고 살아왔기에 사회적 차원이나 행위적인 차원에서도 악한 일을 할 수 없었고 의로울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에 반해서 친구들은 욥에게 임한 재앙은 재앙 이전에 저지른 숨겨진 죄악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주장을 해왔습니다. 재앙은 그 죄악에 대한 형벌로서 주어진 것이라고 끊임없이 욥을 설득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귀책사유가 없다고 믿는 욥으로서는 이들의 말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며 주체적으로 살아왔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욥은 하나님이 주셨으니 하나님이 가져가셨고, 복을 주셨으니 화도 주신다고 여겼을 뿐입니다. 이러한 욥의 삶을 하나님께서는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라고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엘리후는 왜 욥과 친구들을 동시에 틀렸다고 했던 것일까요?

욥과 친구들은 재앙을 바라보는 관점이 과거 지향적이라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욥은 과거에 하나님의 주체성을 인정하며 살았기 때문에 지금의 재앙에 책임이 없다는 것이고, 세 친구들은 과거의 죄악 때문에 지금의 재앙이 온 것이라고 주장하였던 것입니다. 한편 엘리후는 여기에 미래적 관점을 끌어들입니다. 미래에 하나님께서 욥에게 바라시는 모습이 있기 때문에 지금을 연단과 시험으로 주시는 것이라는 기가 막히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지금의 재앙은 친구들의 말처럼 과거의 죄 때문에 의한 형벌이 아니며, 또한 욥이 생각하는 것처럼 무죄함과는 별개의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러한 일들로 인해 하나님께 의문을 품는 것 자체를 잘못된 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전지하시다고 하면서도 일어난 일들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 것은 모순된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엘리후는 하나님께서 욥에 대해 미래를 생각하며 꿈꾸고 계신 모습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기 위해 지금 시험과 연단이 주어진 것이라고 보았던 것입니다. 젊은 사람의 말이 대단합니다.

앞으로 몇 장에 걸쳐서 엘리후의 이야기가 진행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후에는 하나님께서 등장하셔서 욥을 향하여 말씀하실 때에 세 친구를 나무라십니다. 욥도 나무라시지만 상대적으로 세 친구를 더 나무라십니다. 그러나 엘리후에 대해서는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엘리후의 관점은 하나님이 나타나시기 전까지 필요한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욥은 본의 아니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재앙으로 인한 고통에 밀리고 쫓겨서 세상으로부터 마음이 빠져나왔습니다. 마치 모태(母胎)로부터 아이가 태어나듯 세태(世胎)로부터 마음이 빠져나왔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으로는 세상 쪽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세상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엘리후의 미래적 관점을 적용시켜보자면 하나님께서 욥에게 재앙을 주신 것은 과거의 잘못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귀로만 들었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게 되기를 바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듣기만 했다라는 것은 아직 하나님과 욥이 1:1의 관계가 성립되지 않았고 욥이 하나님을 가질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음을 뜻합니다. 반면에 눈으로 볼 수 있는 관계가 된다.’라는 것은 곧 하나님께서 욥을 1:1의 관계에 세우셔서 하나님을 갖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단계를 위해서 욥의 마음은 세상을 빠져나와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본의 아니게 빠져나왔지만 욥의 방향은 여전히 세상을 향해있었고, 주체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의문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엘리후의 관점이 적용되면 욥은 드디어 이 세상을 향해 등을 돌리고 귀로만 듣던 하나님에서 눈으로 보는 하나님을 찾기 위해 하늘을 향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도 미래의 관점을 염두에 두고 앞으로 전개되는 엘리후의 이야기의 옳고 그름을 판단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기독교인들에게 허락된 미래의 모습을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비전이라는 말을 참 많이 합니다. 비전은 이 땅에서 이루고 얻게 될 내 몫이자 기업을 뜻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전을 갖는 것은 신앙인의 미래가 아닙니다. 신앙인의 미래는 투트랙으로 옵니다.

첫 번째 트랙은 지금 위에 있는 하늘로부터 오는 미래입니다. 하나님과 내 마음이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으로 기뻐하게 되는 하늘미래입니다. 그렇게 하늘기쁨이 유지되는 사람에게서 이 땅에서 일어나는 두 번째 미래의 트랙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듯이 이 땅에서 일어나는 미래의 트랙은 내 것으로 삼으라고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나의 비전이 될 수 없습니다. 나를 통해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실 뿐입니다. 하나님이 행해서 내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내가 사업을 크게 하는 사람입니다. 첫 번째 미래의 트랙을 따른다면 나의 소망은 하늘로 올라가서 하나님으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소망은 미래에 일어날 일을 지금 기뻐하는 것이고, 이것이 바로 우리 마음이 백 투 더 퓨처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늘에서 기뻐하는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내 몸을 이용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그 이루어 가시는 과정에서 사업이 잘 되었다고 해서 사업을 내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루어 가실 뿐입니다. 반대로 사업이 망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망하도록 하심으로서 그 뜻을 이루어 가시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는 하나님께서 많은 일을 하시지만 그것이 내 것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하나님께서 내게 행하셔서 주시기를 바라며 이 땅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제시하시는 미래에는 주심의 미래하심의 미래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주심의 미래는 하늘을 주시는 것이고, 하심의 미래는 이 땅에서 내게 주시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미래입니다.

 

이 미래의 투트랙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져지는 세상 것들에 대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십자가를 계속해서 마음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우리의 마음에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것들이 들어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들을 붙잡고 씨름하며 노력하고 계획하고 소원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계속해서 십자가를 바라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를 바라볼 때에 내 마음은 부활 승천의 길을 따라서 하늘과 만나게 될 것이며, 하늘을 갖게 되는 미래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내가 죽음으로 인해 욥이 그랬던 것처럼 이 땅에서 하나님의 주체되심을 보존해드림으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미래의 계획들로 내 삶을 채워나가시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마음으로 십자가를 계속해서 보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거래처 직원을 만나야 할 때에도 마음으로는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지금 거래처 직원 앞에서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었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 현장은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시는 현장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셔서 당신의 일을 이루어 나가시는 동안 내 마음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받음으로서 배부르고 만족하게 될 것입니다. 설령 거래가 실패할지라도 기쁜 마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오히려 나중에 보니 그 거래는 안 되는 편이 더 좋았다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습니다. 행여 그 거래로 인해서 내게 큰 손해가 임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의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생활화함으로서 이 투트랙 퓨처인 주심의 미래인 하늘 미래와, 하심의 미래인 땅의 미래가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이것을 염두에 두면서 엘리후의 변론의 내용을 이제부터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로 죽어서 누릴 영생을 마음이 하늘로 올라가 지금 누리게 하시며, 몸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비전으로 삼으신 꿈을 이루시는 도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전체2785개, 현재1/전체186페이지
게시물 검색
No. 제목 주제 작성자 조회
2785 (S) ‘마라나타!’ 말로만 아닌 실제 준비_태… 요한계시록 22장 16절~21절 태승철 69
2784 속히 오신다더니 말을 실수하셨나?_태승철 요한계시록 22장 6절~15절 태승철 62
2783 일상적인 의식 안에 새하늘 새땅 담기_태승철 요한계시록 22장 1절~5절 태승철 66
2782 (S) 땅에 살 동안 천국 속 내 구역 짓기_태승철 요한계시록 21장 18절~27절 태승철 80
2781 새 예루살렘 성, 크고 황홀한 어우러짐_태승… 요한계시록 21장 9절~17절 태승철 95
2780 새 하늘과 새 땅 전에 헌 하늘과 헌 땅_태승철 요한계시록 21장 1절~8절 태승철 88
2779 (S) 행위책과 생명책의 증거 재판주의_태승철 요한계시록 20장 11절~15절 태승철 107
2778 천년 왕국 살다 잠든 사이 벌어지는 일_태승… 요한계시록 20장 7절~10절 태승철 105
2777 천년 왕국의 왕이냐, 세상 나라 노예냐_태승… 요한계시록 20장 1절~6절 태승철 106
2776 (S) 세상 실감 뭉개고 하늘 실감 북돋자_태승… 요한계시록 19장 13절~21절 태승철 91
2775 음녀 죽고 어린 양과 결합, 그다음은?_태승철 요한계시록 19장 11절~13절 태승철 114
2774 어린 양과 완전한 결합이 목표였다_태승철 요한계시록 19장 1절~10절 태승철 157
2773 (S) 왕과 재벌이 보면 벌벌 떠는 자들_태승철 요한계시록 18장 1절~24절 태승철 154
2772 하나님 없는 박탈감과 열등감의 광기_태승철 요한계시록 17장 9절~18절 태승철 162
2771 바벨론 음녀, 성공과 번영의 다른 말_태승철 요한계시록 17장 1절~8절 태승철 202
 1  2  3  4  5  6  7  8  9  10  다음  맨끝
onair온라인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