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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세태(世胎)로부터의 유도분만_태승철

by 태승철 · 17-06-22 10:36 · 7,430
모태(母胎)에 태아가 잉태되는 이유는 분만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모태로부터 아기의 몸이 세상에 태어났음은, 인간 세상이라는 세태(世胎)에 '마음'이 다시금 잉태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번에는 세태(世胎)로부터 마음이 분만해야 합니다. 때가 되어도 분만의 기미가 없을 때 인위적으로 진통을 가하는 유도분만이 마음의 분만을 위해서도 평생 반복적으로 시행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진통의 의미를 모른 채 끝내 분만됨이 없이 죽어갑니다.

세태(世胎)로부터의 유도분만

(욥기 30:1~31)

 

 

1. 그러나 이제는 나보다 젊은 자들이 나를 비웃는구나 그들의 아비들은 내가 보기에 내 양 떼를 지키는 개 중에도 둘 만하지 못한 자들이니라

2. 그들의 기력이 쇠잔하였으니 그들의 손의 힘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으랴

3. 그들은 곧 궁핍과 기근으로 인하여 파리하며 캄캄하고 메마른 땅에서 마른 흙을 씹으며

4.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짠 나물을 꺾으며 대싸리 뿌리로 먹을 거리를 삼느니라

5. 무리가 그들에게 소리를 지름으로 도둑 같이 사람들 가운데에서 쫓겨나서

6. 침침한 골짜기와 흙 구덩이와 바위 굴에서 살며

7. 떨기나무 가운데에서 부르짖으며 가시나무 아래에 모여 있느니라

8. 그들은 본래 미련한 자의 자식이요 이름 없는 자들의 자식으로서 고토에서 쫓겨난 자들이니라

9. 이제는 그들이 나를 노래로 조롱하며 내가 그들의 놀림거리가 되었으며

10. 그들이 나를 미워하여 멀리 하고 서슴지 않고 내 얼굴에 침을 뱉는도다

 

 

오늘 말씀 중심으로 세태(世胎)로부터의 유도분만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세태(世胎)로부터의 유도분만

유도분만이란 분만 예정일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분만의 기미를 보이지 않을 때에 자궁수축을 일으키는 외부물질을 투약하여 인위적으로 분만 진통을 유발하는 과정입니다. 아픔이 있어야 힘이 주어지고 그 힘으로 아기가 밀려나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태로부터 분만한 아기의 몸은 인간세상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태어난 아기에게는 마음이 있지만 아직 어떠한 대상과도 연결되지 않은 상태이며 자아의식이 형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자아의식은 반드시 다른 이와의 관계로부터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자아는 생겨날 수 없습니다. 하다못해 바위나 나무를 보고서야 나를 느끼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아기를 인간세상으로 태어나게 하는 것은 자궁내의 수정체가 온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커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태어난 아기의 마음은 수정체와도 같은 상태입니다. 즉 아기가 태어나는 것은 인간세상이라는 또 하나의 자궁에 잉태되는 셈입니다. 이러한 자궁과 같은 인간세상의 모습을 모태(母胎)와 관련지어서 세태(世胎)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곧 창조의 원리입니다.

몸이 인간 세상에 태어나서 마음은 수정체처럼 성숙해지기 시작합니다. 이 마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수 있는 자녀의 모습으로 자라가야만 합니다. 모태에서 아기가 빠져나와야 하듯이 이렇게 자란 마음은 인간세상이라는 세태로부터 하나님이 계신 하늘로 빠져나가서 하늘로 태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인간 세상에 안주하려고 합니다. 하늘로 분만되기를 원치 않는데 이것이 원죄이자 유전죄입니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진통을 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인간 세상에서 겪는 고통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욥기서가 이제까지 말해온 것의 결론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욥과 같은 의인뿐만 아니라 악인들도 고통을 당하지만, 그 모든 고통의 참뜻은 바로 하나님께서 유도분만을 위한 의도적 진통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앞장과의 연관성 안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욥의 독백이 29~31장에 나누어서 진행되고 있는데 앞장에서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회고하였습니다. 인간세상에서 칭송받고 존경받던 자신의 모습을 회고함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재산을 많이 가지고 있었고 건강했으며 화목한 가족이 있었다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지도자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앞장과는 전혀 반대의 내용입니다. 고통을 이야기하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인간세상에서 사회적으로 어떤 취급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 중점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읽은 부분을 보면 인간세상에서 가장 미천하게 여기던 자들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욥을 모욕하고 조롱하고 있습니다. 앞장과 완전히 대비를 이루는 장면입니다. 앞에서는 칭송과 존경을 받는 지도자적 위치에서 살고 있었음을 말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에서 가능했음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미천하게 여기던 자들이 굴욕적으로 조롱하는 상황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서 사회적 칭송과 존경이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에서 이루어졌던 영광스러운 날들과 마찬가지로, 지금의 이러한 굴욕적인 상황의 배후에도 하나님께서 계심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욥은 하나님의 의도성에 의해서 인간사회에서 미천하게 여기던 자들의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인간 세상에는 칭찬과 존경으로 이루어진 가치평가 시스템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가치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 사람들이 존경합니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차원에서의 존경은 아니더라도 부러워합니다. 또한 그 사람처럼 되었으면 좋겠다는 동경을 불러일으킵니다. 욥은 이러한 가치평가 시스템 안에서 완전히 밀려나게 되었는데 욥은 아직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의 복된 상황으로 욥을 인도하고 계시지만 욥은 이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한편 이것을 깨달았던 대표적인 사람이 사도 바울입니다.

고린도전서 49절에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라고 말하고 이어서 11~13절을 보면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었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만물의 찌꺼기같이 되어서 모욕과 박해와 비방을 받았지만, 모욕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박해를 참고 비방을 받을 때에 권면했습니다. 만물의 찌꺼기같이 된 상태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나의 나 된 것이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세상은 바울의 상황을 보고 찌꺼기로 여기지만, 바울은 더 훌륭할 수 없을 만큼 훌륭한 상태에 있다고 여겼던 것입니다. 어떻게 이러한 상황과 자아의식이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인지 불가사의한 일처럼 여겨집니다.

내가 누가보다 잘났다고 비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총 덕분에 나는 나로서 될 수 있는 가장 훌륭한 모습이 되었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러한 모습을 찌꺼기로 여기며 모욕하고 비방하며 학대합니다. 바울은 그러한 모습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욥은 이전에 세상에서 칭송받고 존경받고 지도자적 위치에 있었던 시절을 회상합니다. 그러면서 지금의 인간세상의 가치평가 시스템에서 미천한 자들로 여겨졌던 자들이 조롱하고 있는 상태를, 완전히 인간세상으로부터 밀려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욥은 아직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허락받지 못했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상황 너머에 계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몰랐던 것입니다. 아직 하늘로 태어나지 못하고 진통을 겪고 있는 상태입니다. 세상에서 미천하게 여겨지는 자들에게조차 조롱거리가 되었다는 것은, 곧 인간세상이라는 자궁에서 밖으로 빠져나오게 된 계기가 됩니다. 이 재앙과 환란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행하시는 유도분만의 과정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돈 많이 벌고 싶으신데 돈이 안 벌리는 이유는, 그 일을 하나님께서 주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돈 못 벌도록 막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사기를 당했다고 해서 사기꾼을 미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능력을 탓할 필요가 없습니다. 남편이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하나님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사기꾼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셨기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참새가 땅에 떨어지는 것조차 하나님이 허락하셔야만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이렇게까지 돈을 못 벌게 하시고 병들게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유도분만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만큼 돈이나 건강을 주시고 자녀들의 형통을 주신다면 우리의 마음은 이 세상이라는 자궁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진통이 없는 안정된 삶이 계속될수록 우리의 마음은 이 세상이라는 자궁에 끝까지 머물고 싶어 할 뿐 세상이라는 자궁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은 하늘나라로 분만되고 해산되었습니다. 아기가 어머니의 몸에서 빠져나와서 인간세상으로 태어나듯이, 마음이 인간세상에서 빠져나와서 하늘나라로 태어난 것입니다. 마음이 하늘나라에서 태어나게 되자 사람들이 이 몸을 어떻게 평가하든지 전혀 문제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자들이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마음은 인간세상이라는 자궁으로부터 빠져나와 하늘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날마다 죽는다.’라는 말로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아기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어머니 뱃속에서는 없어지는 것입니다. 존재가 사라졌으니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이 세상으로부터 하늘나라로 태어나야만 합니다. 마음이 하늘나라에 태어난 상태에서 삶이 진행되어야만 합니다. 욥은 이것을 몰랐기 때문에 서글펐던 것입니다.

인간세상으로부터 칭송받는 지도자의 위치에서 살았다가, 이제는 가장 미천하다고 여겨지던 자들에게조차 조롱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나올 내용에서는 이렇게 인간세상에서 쫓겨나서 슬퍼하는 가운데 인간세상 바깥에 계시던 하나님을 깨닫고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날마다 죽는 것은 곧 날마다 마음이 세상의 자궁으로부터 빠져나와서 하늘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면서 받으셨던 조롱과 학대를 생각해보세요. 욥이 조롱과 학대를 받아 세상에서 빠져나왔고, 주님도 조롱과 학대를 받아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십자가는 세상 바깥으로 빠져나간 자리이고, 이 인간세상에서 존재할 필요가 없을 만큼 무가치한 자를 거는 곳입니다.

그 십자가의 주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마음을 인간세상이라는 자궁으로부터 빠져나간 자리를 내 자리로 선택하는 것이고 이 선택이 믿음인 것입니다. 십자가에 자리를 두면 부활과 승천의 길을 통해서 하늘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아기가 어머니의 뱃속으로부터 세상으로 나오는 길을 산도(産道)라고 합니다. 주님의 부활과 승천은 우리 마음을 하늘에서 태어나게 하는 산도입니다. 그 산도를 만들어 내시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조롱과 학대를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조롱과 학대의 의미는 우리가 욥처럼 재앙과 학대를 당하지 않더라도 십자가를 붙잡으면 그 고난이 다 치러진 것으로 인정받는 것입니다. 세상 바깥으로 빠져나온 예수님의 자리를 선택하고 붙잡아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었음을 고백할 때에 우리 마음은 하늘에서 태어날 수 있게 됩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면서 반드시 해야 될 일은 마음이 세상이라는 자궁을 빠져나가 하늘에 태어나서 하나님께서 움직이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제도 말씀드렸지만 사도 바울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주관자이시고 창조하신 조물주이시기 때문에 풍부에만 처하게 하실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사명에 목숨을 걸고 살아가는 사도 바울을 왜 비천에 처하도록 만드셨던 것일까요? 예수님을 제외한 모든 인간은 이 세상에서의 진통이 없는 한 세상에 안주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진통을 가하시는 유도분만을 줄이기 위해서는 십자가를 자발적으로 생활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에 내 마음은 세상을 빠져나가게 되고, 그렇게 될 때에 인간세상에서 주어지는 풍부함이나 비천함은 문제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풍부하면 어떻고 비천하면 어떠냐는 것을 오늘 욥기서 30장을 통해 뚜렷하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욥과 같은 고통이 실제로 임하지 않았을지라도 십자가를 붙잡고 욥이 세상 바깥으로 빠져나갔듯이 날마다 마음이 하늘에 태어난 상태에서 하나님에 의한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가 체질이 되어서 하나님의 유도분만의 과정과 빈도수가 점점 짧고 희박해질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