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0,1)복음방송

상위가치와 하위가치 담당자 선정_태승철

작성일
17-04-22 10:06
작성자
태승철
조회
7,313
생명 보험금을 타려고 배우자를 살해한 경우 법원에서는 종신형 같은 무거운 형벌을 내립니다. 이렇게 무겁고 악한 죄질이 성립하는 이유는 가치전도 현상 때문입니다. 물질이라는 하위가치를 얻기 위해 생명이라는 상위가치를 침해한 것입니다. 산다는 것은 목숨을 사용함을 뜻합니다. 상위가치를 제쳐두고 하위가치를 위하여 목숨을 사용하는 죄는 이미 그 자체로 삶에 절대 불행이라는 형벌을 초래합니다. 그래서 상위가치와 하위가치의 담당자 선정이 중요합니다.

상위가치와 하위가치 담당자 선정

(에스더 2:19~23)

 

 

19. 처녀들을 다시 모을 때에는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더라

20. 에스더는 모르드개가 명령한 대로 그 종족과 민족을 말하지 아니하니 그가 모르드개의 명령을 양육 받을 때와 같이 따름이더라

21. 모르드개가 대궐 문에 앉았을 때에 문을 지키던 왕의 내시 빅단과 데레스 두 사람이 원한을 품고 아하수에로 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미는 것을

22. 모르드개가 알고 왕후 에스더에게 알리니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왕에게 아뢴지라

23. 조사하여 실증을 얻었으므로 두 사람을 나무에 달고 그 일을 왕 앞에서 궁중 일기에 기록하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상위가치와 하위가치 담당자 선정>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상위가치와 하위가치 담당자 선정

법원에서 범죄자로 의심되는 피고에 대해 내리는 모든 판결에 적용되는 절대적 기준이 있는데 바로 가치의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남편이 아내 몰래 생명보험을 들었습니다. 차를 타고 가다가 일부러 아내를 물속에 빠뜨려서 죽게 하고 남편은 헤엄쳐서 나왔습니다. 조사 끝에 아내 몰래 들었던 생명보험금을 타기 위함이 밝혀지고 종신형을 언도받게 됩니다. 실지로 있었던 일입니다. 이때에 종신형의 무거운 형벌이 선고되는 가장 핵심적 이유는 바로 가치의 전도행위를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보험금이 많더라도 그것은 물적 가치입니다. 그리고 아내의 목숨은 생명이라는 최상위가치입니다. 돈이라는 하위가치를 취득하기 위해서 아내의 생명이라는 최상위가치를 침해한 것입니다. 생명이라는 최상위가치에 아내라는 위치가 부가되어서 죄질이 더 악했습니다. 이 형벌의 핵심은 하위가치를 위해서 상위가치를 침해했다는 것입니다.

외국에서는 우리나라보다 아동학대가 더 중요하게 취급이 됩니다. 아동은 생명이라는 최상위가치를 스스로 지킬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지킬 수 없다고 해서 최상위가치로서의 생명이 훼손되거나 의미가 줄어드는 것은 아닙니다. 어른과 똑같은 생명의 가치를 가지고 있는데 스스로 방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아동의 생명이나 인권을 학대하고 유린하고 남용할 경우에는 그 죄가 훨씬 더 커집니다.

이것은 영적으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결국 죄는 가치전도의 행위를 하는 것인데 마음에서의 생각으로부터 나타납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625절에서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라고 하십니다. 가치의 위치를 염두에 두고서 하위가치보다 상위가치를 염려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사는 것은 목숨을 사용하는 것이기에 상위가치와 하위가치는 목숨을 기준으로 정해지게 됩니다. 목숨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에 목숨보다 하위가치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목숨의 상위가치를 그보다 못한 하위가치를 위해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할 때에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위가치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가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도 필요합니다. 목숨이라는 상위가치를 가지고 하위가치에 종사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나 목숨의 유지를 위해서는 하위가치들이 필요한데 이 하위가치들을 바로 하나님께서 전담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허락받은 목숨을 하위가치에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무엇을 먹고 마실까를 염려하고 어떻게 해야 돈을 많이 벌수 있을까를 염려하는 것은, 곧 보험금이라는 물적 가치를 위해서 생명인 상위가치를 침해하는 것과 똑같은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목숨을 사용하면서 살아갈 때에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걱정하고 남보다 더 잘 입고 잘 먹기 위해서 인간의 생명보다도 더 상위가치이신 하나님을 이용하려고까지 합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내 목숨보다도 하위개념인 것들을 얻기 위하여 하늘에 계신 최상위가치이신 하나님을 끌어내려서 투입하려고 하는데, 이것이 얼마나 큰 죄악이 되는지는 새삼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모르드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르드개는 에스더의 사촌오빠인데 나이 차이가 많았는지 부모가 딸을 키우듯이 에스더를 키웠다고 합니다. 페르시아 관리들이 왕후 간택을 위하여 인물이 뛰어난 소녀들을 모집할 때에 에스더도 뽑혔습니다. 그런데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종족과 민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도록 당부합니다. 이것은 어제 말씀드린 대로 도저히 에스더의 신분으로는 오를 수 없는 왕후 자리에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역사하셔서 세우심을 강조하기 위함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오늘 또 나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에스더가 왕후가 된 뒤의 모르드개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르드개는 대궐의 문지기로서의 벼슬을 얻게 됩니다. 이 대궐의 문지기는 왕의 생명을 지키는 것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신뢰가 돈독한 인물이 선택되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왕의 신뢰를 얻고 있던 문지기 내시 두 사람이 왕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미는 것을 모르드개가 우연히 엿듣게 됩니다.

그 사실을 에스더에게 알리고 에스더는 왕에게 모르드개의 이름으로 이 사실을 알리게 되고,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그들을 처형하게 됩니다.

그 사실을 궁중일기에 기록하게 하였는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모르드개의 공로에 대해 어떠한 상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나중에 유대인들이 말살 위기에 처했을 때에야 왕이 궁중일기를 읽게 되고 모르드개의 공로를 발견하게 되자 모르드개를 높은 자리에 세워서 대적자 하만을 죽음으로 몰고 가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만을 놓고 보자면 모르드개가 왕의 목숨을 구한 사건이 갖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말씀 드린 대로 에스더가 왕으로 간택된 것은 앞에서 나온 것처럼 선민들에 대한 메시지가 있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은 만백성이 바라보는 위치에 선 자였습니다. 어마어마한 부귀영화의 산더미에 오른 자였고, 대제국의 위용을 손에 쥔 자였습니다. 왕은 이러한 자신을 백성들에게 자랑하고 싶었고, 백성들 또한 왕이 가진 부귀영화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습니다. 그 부귀영화의 끝자락이라도 쥐어보고자 일평생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물결에 선민들 또한 휩쓸리며 선민 됨이 말살되는 위기에 처해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보이시기 위해 에스더를 단숨에 왕후에 자리에 앉히시며, 아하수에로 왕이 누리는 모든 부귀영화를 동시에 왕후 에스더의 것도 되게 하십니다. 이 사실을 통해서 선민들은 왕이 누리는 부귀영화의 끝자락을 붙잡으려고 살아가는 자들이 아님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에스더가 단숨에 부귀영화의 산더미에 오른 것은 곧 우리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추구해야 할 것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에스더의 사건이 부정적으로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목숨을 사용하지 말아야 될 것에 대해 깨우치는 것이었다면, 모르드개는 긍정적으로 해야 될 것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르드개의 사건을 통해 상위개념을 추출해서 선민들에게 제시하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왕을 바라볼 때에 마음을 보내는 부분은 왕이 누리는 부귀영화입니다. 이 세상의 가치들입니다. 그런데 모르드개는 아하수에로 왕의 목숨을 구합니다. 별의별 부귀영화가 있을지라도 왕의 목숨이 없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가복음 836~37절에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겠느냐라고 하십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가졌던 세상의 모든 가치들은 목숨이 있음으로 인해서 의미를 갖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왕이 가졌던 모든 가치들의 총합은 목숨이라는 하나의 가치보다도 하위가치일 수밖에 없는 것들입니다.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아무소용이 없듯이, 천하라는 하위가치의 총합은 내 목숨이라는 상위가치보다 높을 수가 없습니다.

아하수에로 왕이 누리는 세상의 가치들인 부귀영화는 어마어마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다 합쳐도 농사꾼인 내 목숨의 가치에도 미치질 못합니다. 그런데 그 목숨이라는 상위가치를 가지고 왕이 누리는 부귀영화의 티끌이라도 얻어 보려고 평생을 사용해버립니다. 이것은 마치 보험금이라는 물적 가치를 얻기 위하여 아내의 생명이라는 상위가치를 침해한 범죄와도 같습니다. 종신형을 언도받아 마땅한 죄악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르드개가 왕의 목숨을 구한 사건을 들어서 이러한 메시지를 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선민까지도 침 흘리며 좋아했던 왕의 부귀영화도 목숨보다 클 수가 없습니다. 왕의 부귀영화가 왕의 목숨 위에 얹혀있으면서 의미를 부여받습니다. 그런데 그 목숨을 선민이 구해냅니다. 상위가치에 관계하는 사람이 선민입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은 왕이 목숨 위에 얹어놓고 있는 부귀영화에 주목할 때에, 선민은 그보다 상위가치인 목숨에 주목하는 것이고, 그 목숨을 활용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 목숨을 잘 활용하기 위해서 에스더의 사건을 통해 부귀영화를 향해 달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셨습니다. 부귀영화 같은 것들은 우리가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입고 먹고 마실까에 대해서도 우리가 추구할 바가 아닙니다. 목숨을 활용해서 목숨보다 더 귀한 상위가치를 얻고자 나아가야만 합니다.

어차피 천하를 다 얻어도 목숨보다는 하위가치인데 목숨보다 더 귀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뿐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선민입니다. 죄악을 운명적으로 품고 태어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하위가치를 얻기 위하여 목숨이라는 상위가치들을 투입합니다. 보험금을 타기 위하여 생명을 죽이는 것과 같은 죄악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민은 목숨이라는 가치를 기준으로 두었을 때에 목숨보다 상위가치를 위하여 사용하는 자들입니다. 주님께서는 마태복음 633절에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하셨는데 바로 하나님만을 내 기쁨과 만족의 대상으로 삼는 것입니다. 목숨을 활용하여 하나님 벌기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돈 벌고 권력을 쟁취하고 나라의 영토를 확장하고 인기를 얻고 명예를 쌓는 이 세상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곧 목숨이라는 상위가치를 하위가치에 투입하는 무서운 죄악입니다. 모든 판결의 핵심부에 들어가 자리 잡고 있는 가치전도의 죄적 내용을 답습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양육할 때에도 자녀의 목숨은 대학입학이나 취직을 비롯한 그 어떤 것보다도 귀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목숨을 자꾸만 그것들에 투입하기를 강요합니다. 취직하려면 이렇게 해라, 결혼 잘 하려면 이렇게 하라고 하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자신의 목숨을 하위가치를 위해 사용하도록 양육해서는 안 됩니다. 자녀들의 목숨을 상위가치이신 하나님을 위해 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른 부모의 역할입니다.

 

십자가 생활화의 의미가 어디에 있을까요?

사람들은 세상의 하위가치들을 위하여 자신의 목숨을 사용하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하나님이라는 최상급의 최상위가치를 투입하려고 합니다. 세상의 하위가치를 획득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들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죄질의 악함은 보험금을 타려고 아내를 죽이려는 정도가 아니라 보험금을 타려고 하나님을 죽이려는 행위와도 같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를 알아야합니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기독교가 아니게 되고 예수님의 교회가 사라져가는 것입니다. 페르시아에 살던 유대인들의 선민 됨이 말살직전에 이르렀던 것처럼 이 땅에서 주님의 교회가 사라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꾸 가치전도 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를 생활화해야만 합니다. 타고난 원죄의 체질에 의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가치전도의 현상을 삶에서 만들어내려고 합니다. 이 가치전도의 현상으로부터 균형과 위상을 잡는 것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자꾸 이 세상의 하위가치로 향하려는 마음이 십자가에서 죽어야만 합니다.

내 목숨보다 상위가치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마실 것 먹을 것 입을 것이 필요합니다. 이 모든 것들이 목숨을 유지하기 위한 필요불가결한 조건들이고 인간관계는 목숨유지의 존재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하위가치의 것들은 하나님께서 다 책임지시겠다는 것입니다.

이제 삶에서는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목숨보다 상위가치인 하나님을 벌고 찾아야 하는 것이 내 몫이 되었습니다. 목숨보다 하위가치인 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신다는 책임자 선정의식이 하루를 살아도 분명하게 작동되고 유지되어야만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오늘도 십자가 생활화에 목숨을 걸게 해주셔서 하위가치가 상위가치 위로 올라오는 가치전도 현상이 없는 참 평강의 삶이 이루어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게시글을 twitter로 보내기 게시글을 facebook으로 보내기
전체2785개, 현재1/전체186페이지
게시물 검색
No. 제목 주제 작성자 조회
2785 (S) ‘마라나타!’ 말로만 아닌 실제 준비_태… 요한계시록 22장 16절~21절 태승철 69
2784 속히 오신다더니 말을 실수하셨나?_태승철 요한계시록 22장 6절~15절 태승철 62
2783 일상적인 의식 안에 새하늘 새땅 담기_태승철 요한계시록 22장 1절~5절 태승철 66
2782 (S) 땅에 살 동안 천국 속 내 구역 짓기_태승철 요한계시록 21장 18절~27절 태승철 80
2781 새 예루살렘 성, 크고 황홀한 어우러짐_태승… 요한계시록 21장 9절~17절 태승철 95
2780 새 하늘과 새 땅 전에 헌 하늘과 헌 땅_태승철 요한계시록 21장 1절~8절 태승철 88
2779 (S) 행위책과 생명책의 증거 재판주의_태승철 요한계시록 20장 11절~15절 태승철 109
2778 천년 왕국 살다 잠든 사이 벌어지는 일_태승… 요한계시록 20장 7절~10절 태승철 105
2777 천년 왕국의 왕이냐, 세상 나라 노예냐_태승… 요한계시록 20장 1절~6절 태승철 106
2776 (S) 세상 실감 뭉개고 하늘 실감 북돋자_태승… 요한계시록 19장 13절~21절 태승철 91
2775 음녀 죽고 어린 양과 결합, 그다음은?_태승철 요한계시록 19장 11절~13절 태승철 114
2774 어린 양과 완전한 결합이 목표였다_태승철 요한계시록 19장 1절~10절 태승철 159
2773 (S) 왕과 재벌이 보면 벌벌 떠는 자들_태승철 요한계시록 18장 1절~24절 태승철 154
2772 하나님 없는 박탈감과 열등감의 광기_태승철 요한계시록 17장 9절~18절 태승철 162
2771 바벨론 음녀, 성공과 번영의 다른 말_태승철 요한계시록 17장 1절~8절 태승철 202
 1  2  3  4  5  6  7  8  9  10  다음  맨끝
onair온라인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