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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0)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0)’ 갈6:14

의욕, 과잉보단 상실, 최선은 말살_태승철

by 태승철 · 17-04-21 09:39 · 8,417
이 세상을 향한 의욕은 과잉보다 상실이 낫고 최선은 말살입니다. 의욕이 행복호르몬이라고 불리는 세로토닌에 영향을 받는다고 하지만, 세로토닌 자체가 행복을 가져다줄 것이라 여겨지는 대상에 대한 믿음에 의해 좌우됩니다. 이 세상 가치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세로토닌을 분비하고 의욕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러나 이렇게 발생한 의욕이 우리를 영원한 후회로 이끌어갈 것입니다. 오직 내 의욕이 말살된 곳에서만 하나님의 의욕이 나타나기 때문이지요.

의욕, 과잉보단 상실, 최선은 말살

(에스더 2:5~18)

 

 

12. 처녀마다 차례대로 아하수에로 왕에게 나아가기 전에 여자에 대하여 정한 규례대로 열두 달 동안을 행하되 여섯 달은 몰약 기름을 쓰고 여섯 달은 향품과 여자에게 쓰는 다른 물품을 써서 몸을 정결하게 하는 기한을 마치며

13. 처녀가 왕에게 나아갈 때에는 그가 구하는 것을 다 주어 후궁에서 왕궁으로 가지고 가게 하고

14. 저녁이면 갔다가 아침에는 둘째 후궁으로 돌아와서 비빈을 주관하는 내시 사아스가스의 수하에 속하고 왕이 그를 기뻐하여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면 다시 왕에게 나아가지 못하더라

15. 모르드개의 삼촌 아비하일의 딸 곧 모르드개가 자기의 딸 같이 양육하는 에스더가 차례대로 왕에게 나아갈 때에 궁녀를 주관하는 내시 헤개가 정한 것 외에는 다른 것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모든 보는 자에게 사랑을 받더라

16. 아하수에로 왕의 제칠 년 시월 곧 데벳월에 에스더가 왕궁에 인도되어 들어가서 왕 앞에 나가니

17. 왕이 모든 여자보다 에스더를 더 사랑하므로 그가 모든 처녀보다 왕 앞에 더 은총을 얻은지라 왕이 그의 머리에 관을 씌우고 와스디를 대신하여 왕후로 삼은 후에

18. 왕이 크게 잔치를 베푸니 이는 에스더를 위한 잔치라 모든 지방관과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를 베풀고 또 각 지방의 세금을 면제하고 왕의 이름으로 큰 상을 주니라

 

오늘 말씀 중심으로 <의욕, 과잉보단 상실, 최선은 말살>이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 합니다.

 

의욕, 과잉보단 상실, 최선은 말살

이 세상을 향한 의욕은 과잉보다는 상실이 낫고, 의욕 상실보다는 의욕 말살이 최선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 의욕(意欲)이라는 단어를 사용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흔히 의욕은 행복 호르몬으로 불리는 세로토닌에 영향을 받는다고 합니다. 세로토닌 호르몬이 원활하게 분비되면 행복감을 느끼고 의욕이 충만하게 되고 집중력이 강화되며 숙면을 취할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반대로 이 세로토닌이 잘 분비되지 않으면 우울증이나 수면장애나 집중곤란 같은 부정적 정신 상태나 감정 상태가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세로토닌을 행복 호르몬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까지는 이 세로토닌 호르몬이 뇌에서만 분비되는 줄 알았는데, 최근의 조사 결과에 의하면 오히려 장에서 90%가 분비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장을 제2의 뇌로 부르게 되었답니다. 예를 들어 변비 증세가 있는 사람은 우울증을 겪기가 쉬운데 세로토닌 호르몬의 분비가 원활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생리학자들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이고, 믿음의 영역에서 보자면 세로토닌 호르몬 자체를 부인할 수 없는 사실로 볼 때에 세로토닌의 역할이 단순히 행복감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행복감이 세로토닌을 왕성하게 분비시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행복감은 믿음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곧 만족과 기쁨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지속 될 때에 행복감을 느끼고 행복하다고 여깁니다. 즉 나를 행복하게 할 것이라 믿어지는 대상들이 있고, 그 대상들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면 기대와 소망이 있을수록 세로토닌은 왕성하게 분비되고 그럴 때에 의욕도 왕성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 돈이 행복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은 그렇게 안 할지라도 본능적으로 그렇게 믿어서 돈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돈을 많이 벌어서 최고급 아파트에서 가족을 데리고 살겠다는 소망을 가지고 앞당겨진 행복감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바로 소망과 희망이라는 비전의 효과입니다.

이러한 기대적인 행복감과 소망적인 행복감이 세로토닌을 분비하면서 의욕이 왕성해집니다. 그러나 돈을 벌 수 없는 절망적인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면 돈을 벌어서 행복하려 했던 믿음이 좌절되면서 세로토닌의 분비도 멈춰버립니다. 내가 과연 돈 벌어서 행복할 수 있겠느냐는 믿음이 불확실하게 되고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행복감이 믿음에서 생깁니다. 이 믿음은 우리에게 의욕을 가져다주고 성취하는 마음을 갖게 합니다. 그러나 복음 믿음에서 바라보면 세상을 향한 의욕은 과잉보다는 상실하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의욕상실을 걱정합니다. 의욕이 없으면 나태하고 무기력해지기 때문에 걱정하고 부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 신앙적 관점에서는 의욕을 상실시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세상에 대한 의욕을 말살시키는 것을 최고로 평가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그 의욕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에스더가 백이십칠 지방으로 되어 있는 대제국 페르시아의 왕후로 간택되는 경과를 보고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일까요? 신데렐라와 같은 이야기일까요?

10절에 보면 에스더가 자기의 민족과 종족을 말하지 아니하니 이는 모르드개가 명령하여 말하지 말라 하였음이라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좀 마음이 불편합니다. 왜냐하면 언제 어디에서나 하나님의 선민은 신분의식을 밝히 드러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와는 반대로 3장을 보면 모르드개는 아하수에로 왕명에 의한 하만 경배를 거부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임을 밝히면서, 2장에서의 에스더에게는 유대인임을 밝히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모르드개가 선민임을 숨기고 정치적 야심을 가지고 에스더를 발판으로 삼으려 함이 아닙니다. 에스더의 입장에서는 대제국 페르시아의 왕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확증적으로 알려 주시기 위하여 기록된 말씀입니다.

역사적으로 모르드개는 에스더에게 그렇게 말을 했지만 성령님께서 이 보고를 기록하시는 것은 어차피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1년 동안 에스더가 왕궁에서 왕의 부름을 받기까지 지냈던 이야기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썼느냐면 에스더의 출신성분과 집안 배경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왕후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에 의해서 왕후의 자리에 이르게 되었음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왜 불가능한 현실적 장애를 뛰어넘어서 창조주요 섭리주인 주권적 권리를 행사하시면서 억지대판으로 에스더를 왕후로 간택되게 하신 것일까요?

포로민의 가정에서 태어나서 살고 있던 에스더와 같이 미천한 신분의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신데렐라와 같은 꿈을 갖게 하시려고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신데렐라의 꿈을 접으라고 에스더를 왕후로 간택되게 주권적으로 역사하셨습니다.

이제 유대인들은 말살의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고 단순히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에스더를 왕후로 간택하셨다고 이해한다면 마치 하나님께서 병 주고 약 주시는 상황이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앞서 나갈 필요 없이 지금 본문 2장에서 그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의 상태를 생각해봅니다. BC 537년에 1차 포로귀환에 오만 명 가까운 이들이 떠나게 됩니다. 남아있는 사람들 중에는 다니엘과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선민 됨을 잃어버린 상태였습니다. 하만에 의해서 혈통적인 유대인이 말살될 위기에 처하기도 전에 영적 정신적 의미에서 선민 됨은 말살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이미 대제국인 페르시아에 자리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50~60년대의 우리나라와 미국을 비교하는 것과 같습니다.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그렇게 비교되는 삶을 살아야만 하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소극적 의미에서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페르시아는 당대 제1의 강대국이었습니다. 1장에서 벌어진 백팔십칠 일간의 잔치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나라가 부강했고 사치스럽고 호화스러웠습니다. 또한 와스디의 폐위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왕실은 모든 백성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서 소통이 이루어졌습니다. 백성들이 왕실을 보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아있는 유대인들의 상황이 어떠했을지는 자명합니다. 페르시아의 왕실 화려함에 모든 백성들이 자극받고 풍요로운 삶을 추구해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도 발전된 선진문명과 왕실의 사치스러움과 호화스러움을 바라보며 세상적인 비전을 향해 달려가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도저히 왕후의 자리에 오를 수 없는 신분을 가졌던 에스더를 그 왕국의 왕후자리에 세우십니다. 페르시아는 그 당시에 사람들이 침을 흘리면서 갖기를 원하는 모든 세상적인 가치가 흘러들어오는 나라였습니다. 특히 제국의 왕궁인 수산 궁은 세상가치의 집결지이고 부귀영화의 첨단 봉우리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자리에 신분적으로 불가능한 에스더를 앉히신 것입니다.

에스더가 한 일이 없습니다. 선택되어 왕궁에 들어갔을 뿐이고 1년 동안 관리인들이 시키는 대로 왕을 만날 준비를 했을 뿐입니다. 에스더가 어떤 지혜로운 말을 통해 왕을 감동시켰다거나 한 것이 아닙니다. 에스더는 한 일이 없었는데 왕의 눈에 들어서 왕후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페르시아의 왕실에서 누리고 있는 사치스러운 모든 세상가치에 집중된 상태를 백만분의 일이라도 가져보고자 일평생 숨을 헐떡거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영향을 받고 사는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의욕을 발동시키면서 평생을 가치의 꼭대기에 올라가기를 원하는 그 앞에서 에스더는 아무런 노력도 없이 왕후의 자리에 앉히십니다.

이것은 신데렐라와 같은 꿈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일이 다시는 없을 것이라는 불가능함을 느끼게 하는 뜻에서 종족과 민족을 말하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김빠지는 일입니다. 의욕으로 충만하던 마음에 구멍을 뚫리게 하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고아원에서 함께 지냈던 두 친구가 있습니다. 둘이 자취방을 얻어서 열심히 살아갑니다. 그런데 한 친구가 로또를 샀는데 100억에 당첨이 되었습니다. 로또에 당첨되는 것이 확률적으로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이러한 일이 일어났을 때에 당첨되지 못한 친구는 엄청난 상실감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자신과 똑같은 처지였던 친구가 한 순간에 부자가 되었는데, 자신은 여전히 일당 몇 만원을 받기 위해 일을 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몇 년을 해야 차를 사고 집을 사고 결혼을 할 수 있을까 친구의 로또 당첨으로 인해 오히려 삶에 대한 의욕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더의 왕후 간택사건을 통하여 페르시아에 남아있던 유대인들이 그러한 마음을 느끼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백성들이 일평생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손에 쥐기 원해서 달려가는 그 대상들은 추구할만한 것들이 아님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오히려 모든 가치가 집결된 꼭대기에 오르는 것은 아무런 자격이 없는 에스더를 단숨에 앉히십니다. 에스더를 밑바닥에서 왕후의 자리까지 올리시는 하나님께 선택받은 선민들이라면 에스더가 올라타고 깔고 앉아있는 세상의 부귀영화와 세상의 가치들을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추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님께서 원하시기만 한다면 아하수에로 왕이 누렸던 모든 부귀영화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다 주실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궁극적인 행복과 기쁨과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그 예를 아하수에로 왕을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3년 동안 왕위에서 왕권을 누리다보니 처음에는 무척 즐거웠을 것입니다. 제가 카투사에 배정받아 미군 식당에 가서 밥을 먹게 되었을 때에 미쳐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각종 주스가 투명한 유리통 안에서 돌아가고 과일 샌드위치 햄버거 통닭이 널려있고 없는 게 없었습니다. 제가 70년대 말에 군대를 가서 그런 광경을 처음 보았습니다. 겨우 군대를 가서 이렇게 놀랐는데 아하수에로는 왕이 되어서 얼마나 많은 권력을 누렸을까요? 그런데 카투사에 가서 6개월이 지나고 나니 김치에 라면 먹는 게 더 맛있게 느껴집니다. 2년이 지나면 특별히 맛도 모르고 그렇게 좋아했던 미군 식당에서 담담하게 식사를 할 뿐입니다. 그때에 한국에서는 미국이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아하수에로 왕도 3년간 특권을 누리다 보니 질려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만족을 위해 백팔십칠 일 간의 잔치를 열게 되고, 그것도 모라자서 왕후를 자랑하려고 했으나 거부당하자 왕후 와스디를 폐위시켰습니다. 이후로 전쟁에 지고서야 다시 왕후가 그리워졌고 그 자리에 에스더를 세웠던 것입니다. 에스더를 세웠다고 해서 마음에 만족에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아하수에로 왕을 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백성들이 그렇게 원하는 세상 가치가 집결된 아하수에로 왕의 자리에서도 결코 만족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마음은 오직 하나님으로만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을 말살되기 직전의 유대인들에게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아무런 이유도 조건도 까닭도 자격도 없었던 에스더를 단숨에 부귀영화의 꼭대기에 앉히심을 통하여, 그 부귀영화의 끝자락이라도 잡아보겠다고 평생을 살아가던 선민들의 그 의욕을 꺾으시기 위하여 일으키신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은 로마의 식민지하에 있으면서 이스라엘도 로마처럼 번영하게 되기를 바랐습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세워서 로마처럼 선진 국가를 만들고 그곳에서 한 자리씩 하겠다는 의욕과잉 상태였습니다. 그랬던 이들이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의욕이 말살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부활승천하신 주님을 바라보자 마음은 주님을 따라 하늘로 올라가게 됩니다.

오순절 날에 모여서 기도에 전념했다는 것은 오직 의욕이 하늘을 향하게 된 것입니다. 주님이 올라가신 그 자리에 마음이 따라 올라가 하나님만을 갖기를 소원하게 된 것입니다. 오순절의 성령강림 사건은 하나님의 의욕이 이 땅에 내려온 사건입니다.

십자가는 세상을 향한 내 의욕이 말살되는 지점입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의욕이 내려오실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의욕에 올라탄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그러한 삶을 위해서 우리에게는 의욕과잉보다 의욕상실이 낫고, 의욕상실보다 의욕말살이 낫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따지고 싶을 때, 비판하고 싶을 때, 이루고 싶고 소원하고 싶을 때, 나무라고 싶을 때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의욕 자체가 말살됨을 경험하시길 바랍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의욕이 내려오실 수 있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십자가 생활화를 통하여 이 세상을 향한 나의 의욕의 싹조차도 다 짓밟아 버리게 하셔서, 나의 육체 연관성의 삶의 경계 안에서 하나님의 의욕만이 판을 치시는 삶이 되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